1장 노년의 의미 (1/2)
나이 드는 기술에 대해 쓰기 전에 우선 노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이 든 사람이 노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앙심 가득한 마음으로 젊은 사람들을 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젊은이의 젊음과 그들 앞에 펼쳐진 미래, 그들이 세워 놓은
계획과 앞날에 대한 희망을 부러워하면서 그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고 싶어
할 것이다.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거부하고 옛것이라면 무조건 찬양하는
태도가 벌써 노년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Guardini 91)
늙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외적으로 부닥쳐 하는 현상만은 아니다. 그보다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의미를 깨달을 때만 우리는 늙음을 좋은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융은 인생을 태양이 뜨고
지는 것에 비유한다.
오전의 의미는 개인의 성숙과 발전, 외부 세계에 개인이 설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자식을 낳는 일, 후손을 돌보는 일임이 분명하다.(Jung, Werke 456)
그러나 인생의 오후를 그저 오전에 딸린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태양이 자신을
비추기 위해 광선을 끌어 모으듯, 나이 든 사람도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내면의
보화를 발견해야 한다.
여러 민족에게 노인은 “신비와 율법의 수호자”(.(Jung, Werke 456)다. 노인들은 민족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자기 삶을 의식하며 산 사람, 삶의 그릇을 넘치도록 채운 사람만이 훌륭하게 늙을 수 있다.
젊어서 치열하게 살지 않은 사람은 늙어서도 참삶을 살지 못한다. 살아 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채우어지지 않은 많은 욕구를 지닌 채 노년의 문턱에 이른다.
이런 불만족스러운 마음은 노인의 눈길을 과거로 이끈다.(.(Jung, Werke 457)
이런 사람의 생각과 말은 늘 과거만 맴돈다. 인색하고 과민하며 불평만 일삼고 젊음을 시샘한다.
심지어 영원히 젊음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는 참자아를 깨닫기를 거부하는
보잘 것 없는 대용물에 불과하다. 인생의 후반부도 전반부에서와 같은 원칙
들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망상에 빠진 사람은 이런 잘못된 결과에 부닥친
다.(Jung, Werke 455)
융에 따르면 노년의 의미는 육체와 정신의 힘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면에
초점을 두는 데 있다. 인간의 풍요로움은 영혼에 있다. 노년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소중한 기억과 내적 보화를 발견하라고 우리를 일깨운다. 이 보화는 많은 상징과 경험으로 표현된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융의 심리치료법을 작품에 많이 반영했다. 헤세도 노년이 지닌 특별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한다.
늙는다는 것이 쇠퇴와 소멸만 뜻하지는 않는다. 노년은 인생의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가치와 매력, 지혜와 슬픔이 있다. 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에
사람들은 노인을 존경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젊은이들이 이런 존경을 받겠다
고 나선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을 괘씸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노년
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은 곧이 듣지 않겠다.(Hesse 54)
노년의 가치와 의미를 실생활에서 실현하려면, 헤세의 말대로 늙음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받아
들이고 수긍해야 한다.
수긍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요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늙든 젊든 상관
없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삶을 속이게 된다.(Hesse 69)
가톨릭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도 노년에 대해 깊게 성찰한 후 노년의 두 가지 의미를 받아들였다.
첫째, 노인은 인생의 맥락을 꿰뚫어 본다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인생에는 다양한 성향, 업적, 승리와 패배, 기쁨과 고통이 복잡하게
얽혀 ‘인생’이라 부르는 놀라운 짜임새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Guardini 95)
노년에 삶의 신비를 꿰뚫어 보고 삶 전체에 비추어 자기 인생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워진다.
그러므로 노년의 첫째 의미이자 첫째 과제는 지혜롭게 되는 일이다.
독일어 ‘지혜로운’(weise)은 ‘알다’(wissen)에서 왔다. ‘알다’는 ‘보다’(schauen)와 관계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깊이 볼 줄 안다. 우리 삶을 붙들어 주는 근원을 깊숙한 곳까지 볼 줄 안다. 삶의 모순들을 한 맥락
에서 바라보는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 가운데 표현되어 있다. “다 이루어졌다(완성
되었다/온전하게 되었다)” (요한 19,30)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 부서진 파편 더미 앞에 서 있게 될까 봐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깨져 버린 실존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아 내셨던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다. 그의 죽음은 파멸이 아니다. 그를 형성한 모든 것의 총체다. 그의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다. 그렇다. 사랑이 결국 깨지기 쉬운 우리의 실존을 이어 주고 미완의 삶을 완성시킨다.
노년의 둘째 의미는, 노인은 영원과 특별하게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영원에 비추어 볼 때, 다시 말해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에 비추어 볼 때 모든 현세적인 것은 하찮아진다.
당면한 삶의 사물들과 사건들은 그 긴박성을 잃는다. 사고의 폭과 마음의
감각 능력을 빼앗는 난폭함은 사라진다. 중요하게 여기던 일들이 사소해지
고, 그전에 사소하게 여기던 일들이 이제 진지해지면서 빛을 더해 간다.(Guardini 97)
과르디니가 이해한 영원과의 친밀함은 죽음과 친해지는 것일 뿐 아니라 변하지 않고 모든 변화를 견뎌 내는
영원을 향해 삶을 열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과르디니는 훌륭하게 늙는 것이 개인에게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개인이 늙음을 받아들이고 늙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사회의 역할과 사회의 시각도 중요하다. 사회는 노인들을 고려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걱정과 비난에 찬 어조로만 고령화 사회를 이야기 한다면 노인은 자신의 늙어 감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잘 늙을 수 있느냐는, 늙어 가는 사람이 전체 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회
적⦁문화적 관계에서 충분히 이해받는지 여부에 크게 달려 있다.(Guardini 99)
과르디니는 젊은이의 삶만 가치 있다고 여기는 유아적 사고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이런 사고 안에서 노인은
폐물 취급을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는 노인의 지혜가 자랄 수 없다. 의학의 힘을 빌려 생명을 연장해 주는 일만
노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도 노년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그래야 노인
들이 우리 사회를 위한 축복이 된다.
오늘날 대중매체에서 벌어지는 토론을 보면 노인 인구 증가로 인해 사회가 짊어져양 할 재정적⦁심리적 부담만
언급될 뿐 늙음이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늙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긍정적 자세로
토론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의 삶이, 나중에 늙어 버린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제대로 성취될 수
있는지 보여 줄 것이다.
성경은 노년과 노년의 지혜가 지닌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루카 복음서는 노년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여 준다.
루카는 복음서 초반에 네 노인을 묘사한다. 이 네 인물에게서 노년의 의미가 빛을 발하고 있다. 이들은 거룩함과
특별히 가까웠다. 그들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역사를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진정
으로 우리를 도와주고 구원하는지도 가르쳐 준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달으며 그의 첫 증인이 된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삶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우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나온다. 즈카르야는 자신이 늙었고 아내도 나이가 많다고 말한다. 그런데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자식을 얻게 될 것을 약속하면서 즈카르야와 아내 엘리사벳의 삶이 열매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열매 맺기 위해서는 위기를 통과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처음에 즈카르야는 천사의 예언을 믿지
않아서 벙어리가 된다. 노년에 어떤 새로운 것이 터져 나오려면 말 못하고 지내야 하는 시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 하느님은 노인에게 역사하시며 그의 삶을 변화시키신다. 노인은 침묵하면서 하느님이 자신의 노년에
거두리라 약속하신 열매를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친구와 친척들 앞에서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증거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찼다. 그는 자신의 노년에 선사된 열매를 해석할 뿐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고 구원하실 것을 예언한다. 늙은 즈카르야는 아름다운 노래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리스도교는 이 노래를 아침기도에 반영했다. 즈카르야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이 볼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부부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느님이 역사하심을 알아차렸다. 하느님의 이 역사는 즈카르야뿐 아니라 백성
전체에게 해당된다. 즈카르야는 하느님을 찬양한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신다.” (루카 1,68)
늙은 즈카르야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이 이 아기를 통해 인간을 위해 행하실 일을 본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장 노년의 의미 (2/2)
루카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다른 두 노인,
시메온과 한나에 대한 이야기로 마감한다. 루카는 이 둘을 통해 노인의 뛰어난 특성인 지혜를 묘사
한다. 시메온과 한나는 구약성경이 말한 지혜로운 노인을 보여 준다. “백발에 지혜가 있고 장수에
슬기가 깃든다.” (욥 12,12) 이 지혜로운 두 노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깨닫는다. 그들은 깊이
볼 줄 알며 자기들이 본 것을 백성 앞에서 고백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맨 처음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다. 목자들에게는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했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의 부모에게
천사가 아기에 대해 한 말을 전했다. 그러고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갔다. 그들과 달리 시메온과
한나에게는 백성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그분 본질의 신비를 증거 할 과제가 주어졌다.
우선 나이가 아주 많은 시메온에 대해 살펴보자. 루카는 시메온에 대해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25)라고 쓴다.
그는 빼어난 성품 네 가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본질에 맞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롭게 처신하는 사람이었다. 둘째, 그는 독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느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의 존 존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며 산 사람이었다. 셋째,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카는 ‘구원’을 그리스어로 ‘위로’라고 표현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다.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두려움 없이
늙어 갈 수 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았다. 늙고 지혜로운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았을 때 예수님에게서 인간을 밝히는 빛과 예수님을 통해 백성에게 다가올 구원을 보았다. 넷째, 성령이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다. 그는 지혜로울 뿐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령이 그로 하여금 아기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신 빛임을, 백성을 자유롭게 할 구원자임을
알아보도록 해 주셨다.
우리 가운데서 빛나고 있는 빛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일, 이것이 바로 노인들이 이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다. 노인들은 깊이 본다. 그들은 근원적인 것을 본다. 빛이 감춰져 있을 때도 빛을 볼 줄 안다.
시메온은 작은 아이에게서 빛을 보았다. 그는 이 아이 안에서 하느님이 역사하심을 보았다. 지혜로운
노인들은 삶을 이해한다. 그들은 관계 전체를 꿰뚫어 본다. 그들은 우리 삶의 깨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흠 없고 온전한 것을 볼 줄 안다.
시메온 옆에 한나가 있다. 한나는 여든네 살의 과부다. 루카에게 숫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넷’은 4원소(불, 물, 공기, 흙)를 상징한다. 한나는 4원소를 자기 안에 합일시킨 여자였으며, 땅 위에
굳건히 서서 현세적인 것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다. ‘여덟’은 초월성을 상징한다.
한나는 자기 안에서 하늘과 땅을 결합시킨다.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을 보는 사람이다. 그녀는 일곱
해를 남편과 살았다. ‘일곱’은 변화를 상징한다. 남편에 대한 한나의 사랑은 그녀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사랑 자체였으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이 사랑을 드러냈다. 한나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이 그리스도 공동체에게 제시한 과부의
이상형을 충족시킨 여자였다.
무의탁 과부 곧 의지할 데 없이 홀로 된 여자는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1티모 5,5)
과부는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대신하여, 특히 기도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한나는 온전히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었다. 이런 태도 덕분에 한나는 아기 예수님의 신비를
해석하는 합당한 말을 찾을 수 있었다. 한나는 예언자였다. 그녀는 그녀만이 주제로 삼아 언급할 수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표현했다. 한나는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강박과 속박
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삶이 성취될 수 있는지 말했다.
지혜로운 이 두 노인은 예수님의 신비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이 역사하심을 간파했다. 두 노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들의 삶을 뒤돌아본다. 늙은 시메온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선사했다.
교회는 이 노래로 저녁기도를 끝맺는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이제 시메온은 자기 삶에 만족한다. 죽을 준비가 되었다. 자신의 깨진 조각과 함께 그의 삶을 완성하는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있던 이교도적인 부분, 낯설고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밝혀 주며,
자기 머리 위에 있는 하느님의 광채를 빛나게 해 주는 빛을 보았다. 이제 그는 삶에서 물러설 수 있다.
사람들을 밝혀 주는 빛을 자기 삶으로 증거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과제를 이행했다.
삶의 흔적을 이 세상 안에 깊이 새겨 넣었다. 이 흔적은 궁극적으로 빛과 사랑의 흔적이다.
그러나 시메온이 그저 자신과 평화롭게 지냈기 때문에 삶에서 기꺼이 물러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미래를 바라보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예수님이 반대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고
예견한다. 마리아에게 닥칠 일도 알고 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루카 2,35)
시메온은 ‘구원된 세상’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저 다가올 일을 본다. 기회뿐 아니라 위기도 오고
있음을 본다. 그는 삶이 저절로 성취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삶을 택하겠다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일과 운명 때문에 우리 인생길은 늘 어긋나곤 한다.
그러면 고통스럽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구원이 일어난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구원되고 온전해진다.
루카는 시메온과 한나를 통해 사람들에게 축복이 된 지혜로운 두 노인을 묘사한다. 그들은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이 둘은 사람들에게 구원과 빛으로 난 길을 알려 준다. 사람들의 모범이 되며
어떻게 하면 삶을 성취할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시메온이 예수님의 부모와 아기 예수님을 축복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는 일에 노년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혜로운 노인들
에게서는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 흘러나온다. 그들의 현존은 우리 삶을 축복하시며 다양한 형태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시는 하느님에게로 우리 눈길을 향하게 한다.
문제는 노년에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 되게 하는 이 지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혜로운 노인들뿐 아니라 불평과 한탄을 일삼는 노인도 많이 본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횡포 부리는 일을 유일한 존재 이유로 삼는다.
지혜롭고 평화로워져서 다른 이들에게 축복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혜로운’(sapiens)을
뜻하는 라틴어는 ‘맛을 아는’(sapere)이라는 단어에서 왔다. 자신을 음미하기 좋아하는 사람, 그리하여
자기가 만난 사람에게 좋은 맛을 남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자신과 화합하여 산다. 이런 사람에게서는 평화와 자유, 평정심과 즐거움의 ‘맛’이 흘러나온다.
이제 이런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서술하고자 한다. 자주 성경 말씀을 언급할 것이다.
나이 드는 기술을 익히면서 끝까지 견뎌야 할 어려운 부분들도 지적할 것이다. 나이 듦의 궁극 목표인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죽음에 대해서도 서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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