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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형성으로서의 설교

by 금빛돌 2011. 8. 5.



샐리 A. 브라운/펜실베니아 베들레헴 제일장로교회

역자 註: 본고에서 용어상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영성’(spirituality)과 형성’(formation)이란 말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본고에서 ‘영성’이란 성속(聖俗)의 구분 없이 삶 전 분야에 걸쳐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소위 개혁주의 영성)을 뜻하며, ‘형성’이란 그러한 가치 체계를 성도의 마음속에 세우는(또는 세워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말하는 영성 형성이란, ‘삶 전반에 걸친 신앙적 가치체계 수립’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아울러서 ‘형성적’(formative)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 그 안에 메시지를 갖고 있어서 가치체계를 전달하고 수립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말이다.

내 사무실 시계가 10시 30분을 가리켰다. 신학교 구내식당에서 오전중에 짧은 휴식을 갖는 시간으로, 나는 이것을 마치 예배시간이라도 되는 양 빠뜨리는 법이 거의 없다. 그 특별한 날에 구내식당에는 한 무리가 몰려 있었다. 학생과 교수와 교직원 및 공부하기 위해 캠퍼스를 방문한 목회자들이었다. 나는 목회학 박사 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학생들로 보이는 한 그룹과 그 곁에 있는 빈 의자 하나를 발견했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고 나니 내 짐작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설교와 예배에 관한 객원교수로 이 캠퍼스에 와 있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한 여자가 운을 뗐다. “저는 보다 나은 설교가 교회의 미래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저는 설교 세미나란 세미나에는 모조리 등록했죠. 하지만 제 경험으로 보건대, 영성 형성을 위한 보다 강력한 기초야말로 교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마침 내가 가르치고 있는 과정의 제목이 “설교와 영성 형성”이라고 말해주자 몇몇 사람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한 반응은 내가 익히 예견하고 있는 것이었다. 크리스천의 삶을 위한 형성적 영성 훈련에는 설교가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들이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것 같다(여기에서 ‘형성적’이라는 말은, 영성 훈련이 신앙적 가치를 전달하고 세워주는 성질의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이러한 억측이 널리 퍼져 있다면, 우린 거기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형성적 훈련은 항상 개인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확고하게 공동체적이었으며, 독자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협력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설교를 하거나 듣거나 간에, 말씀을 설교하는 데 참여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형성적 영성 훈련에 필수적이다.
지 난 20년간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고전적인 영성 형성 훈련에 대하여 연구와 실습을 하는 등 획기적인 관심의 증가를 보여주었다. 주류를 이루는 개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 퀘이커 교도, 그리고 재세례파 등의 전승자료들에 눈을 돌림으로써, 고대의 영성 훈련 관행을 재발견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침묵과 고독의 수련, 다양한 형태의 명상기도, 말씀묵상(lectio divina; sacred reading: 성경의 간결한 부분에 대한 단계적인 묵상), 영성일기 기록, 그리고 금식 등이 포함될 것이다. 이제는 개신교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가 가톨릭 영성 지도자를 방문하는 일이나, 목회 일선의 동료들이 이그나티우스처럼 30일간의 고독과 침묵을 경험하는 일 등이 더 이상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개인뿐 아니라 실로 기독교 공동체 전체가, 고대 관행을 이용한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 보다 깊이 있게 반응하려고 하는 것에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크리스천의 영성 형성을 경건한 소수를 위해 따로 떼어놓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든지, 혹은 만약 우리가 상대적으로 고립된 좁은 범위의 훈련에 몰두할 때라야 우리의 영성이 ‘형성’된다고 추측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크리스천 영성 형성에 대하여 극도로 궁색한 견해에 빠지게 되고, 또한 교회가 영성 형성 과정에 중요한 요소임을 간과하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 영성 형성: 그 교회적 배경
도 대체 크리스천 영성 형성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또 영성 형성이라고 할 때의 영성은 무슨 뜻인가? 수잔 존슨(Suzanne Johnson)은 인간의 영성을 “창조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구속 활동을 인식하고 또 그에 참여하는, 자아를 초월하는 우리의 능력”으로 본다. 이것과 구별하여 크리스천 영성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그러한 신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형성될 때, 우리는 독자적으로 그리고 협력적으로 신적 창조와 구속에 동참한다. 마조리에 톰슨(Marjorie Thompson)은 1995년에 널리 격찬 받은 자신의 책 「영혼의 축제」(Soul Feast)에서, 협력적인 실천과 독자적인 실천 모두를 크리스천의 삶의 형성적 훈련으로 규정하며, 크리스천의 영성 형성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재구성(reshaping)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다음과 같이 크리스천 형성에 대해 실무적으로 정의내릴 때, 윤리적 지평과 기독교 형성의 교회적 배경을 강조한다. 크리스천 영성 형성이란,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훈련과 우리의 상상력과 삶의 실천 등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에 반응한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변화,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표현된 지속적인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구속 행위(praxis)에 온전히 동참하고자 하는 변화를 뜻한다. 크리스천의 삶을 형성하는 실천 행위들에는 명상기도, 침묵 및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양심의 성찰 등의 개인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집 없는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 교회 일년 예산을 짜는 것, 애찬식을 거행하는 것,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고 듣는 것 등의 실로 다양한 공동체적 행동이 역시 포함된다.
우리는 크리스천 영성 형성이 분리할 수 없는 교회적 과정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크리스천들의 영적 형성은 대개, 모인 무리라는 성격을 지닌 교회(the gathered church)의 실천이라는 사실이 수단이 되고 또한 배경이 되어서 이루어진다. 근래에 나는 가톨릭 신학교 근처에서 교사로 있는 한 장로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로마 가톨릭 영성 지도자에 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교회에서 그처럼 오래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나는 조 신부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영성 훈련에 관해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라고 그는 감탄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두 가지 관점에서 다소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주류 개신교 회중 가운데서 기도와 묵상훈련을 배우지 못했다고 말한 것과 같으며, 또한 주일 아침예배와 수요일 저녁의 빈민을 위한 식사 대접 등을 포함하여 매주 진행되는 크리스천 회중의 실천들이 그가 영적으로 형성되고 또 그것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배워 본 적도 없고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수잔 존슨은 지나칠 정도로, 혹은 배타적으로 개인주의적인 크리스천 영성 실천의 양상을 우려한다. 만약 영성 훈련의 수련이 개인적인 자아 개발의 도구로 비춰지거나, 교회에 참여할 의무가 우리의 진정한 ‘내적 생명’을 수련하는 데 방해가 되는 성가신 것으로 여겨진다면, 우리는 온전한 크리스천 영성을 논할 자격이 없다. 존슨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라는 형태 안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존재(새로운 언약)를 부여받는다…만약 우리가 영성을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직(oikonomia)에 동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그렇다면 자아의 은밀한 골방에서 수련된 그런 종류의 영성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형성적 영성 훈련으로서의 설교
만약 주일 아침 성소에 모여든 회중이 본질적으로 크리스천 영성 형성의 본질적인 배경이라면, 의심할 나위 없이 설교는 그 공동체의 영성 형성을 위한 가장 고전적이고 기본적인 실천의 하나이다. 설교자가 설교라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회중을 위해서도 형성적 영성 훈련이라는 통찰력을 회복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설교자들은 말씀묵상(lectio divina)이라는 고대의 실천, 다시 말해서 성경을 묵상하며 읽는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 설교 본문에 접근함으로써, 설교 준비 과정을 개인적인 기도, 묵상, 그리고 일지 작성이라는 방식의 네 단계를 지닌 과정으로 통합할 수 있다. 첫 단계인 읽기(lectio)는 본문을 천천히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이같은 읽기는 설교자인 우리들에게, 성경이 먼저 무엇보다도 들려지기 위한 본문이라는 사실에 주의하게 만든다. 또한 성경 본문이 우리의 귀와 마음과 지성에 소리로 다가오게 해준다. 어떤 목회자들은 본문을 읽은 것을 녹음해서 다시 들어봄으로써, 그들이 읽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완전히 듣기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입으로 소리내어 읽는 최초의 단계 다음 순서는 묵상(meditatio)이다. 이것은 그 본문에서 특별한 인상을 주는 각각의 단어, 구절, 혹은 이미지에 의도적으로 머무르는 것이다. 묵상의 목적은 본문에서 설교하기에 적절한 ‘금맥’을 캐내는 것도 아니고, (이 단계에서) 회중을 위한 본문의 메시지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 본문이 설교자의 삶과 의식 속에서 메아리쳐 울리게 하는 것이다. 사실상 임무 지향적인 접근법은 묵상을 돕기보다는 방해할 가능성이 많다.
묵상 다음에는 ‘본문을 기도로 삼는’ 말하기(oratio)로 옮겨간다. 이러한 기도는 본문의 이미지나 구절을 사용하여 서두름 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도하는 곳은 종합(contemplatio)이다. 이 단계에서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지금 자신이 대신해서 설교 본문을 ‘듣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본문의 메시지를 수납하는 단계이다.
감리교 설교자인 클레이 오글레스비(Clay Oglesbee)는 말씀묵상의 이러한 전통적인 네 단계에 두 가지를 추가할 수 있다고 한다. 설교자는 실제적인 읽기(lection)가 시작되기 전에 기도 집중훈련인 침묵(silencio)과, 맨 마지막에 설교의 실제 작성 단계로서 구성(compassio)이라는 두 단계를 추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성에 있어서, 설교를 작성하고 수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봉사훈련이 된다.
설교 준비 자체가 협력적인 영성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설교자는 드물다. 하지만 설교에 관한 서적들은, 설교 행위를 영성 훈련의 방향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목회자들이 성서 일과에 따라 설교하는 동료 설교자들의 모임에서 준비 과정을 나누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설교학적 사고에 의하면, 잠재적인 청중들을 (설교자의 서재에) 모셔놓고 그들과 함께 나누고 대화하는 식의 설교 준비 방법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콜롬비아신학교의 고(故) 루시 로즈(Lucy Rose) 박사는, 설교 개발 방법으로서, 설교자와 그 설교를 듣게 될 사람들이 설교본문을 둘러싸고 토론할 것을 학생들에게 장려했다. 일부 학생들은 본문에 대한 이와 같은 설교 이전의 대화가 설교될 메시지의 능력을 약화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임을 알고 놀라워했다. 비록 청중들이 이미 그 본문과 씨름하며 상당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신선하게 그 설교를 들었으며, 더욱이 그 공동체의 삶의 질문들에 대해 적절히 답해주는 설교로 들었던 것이다.
함께 모인 교회가 실천하는 일들이 영성 형성 사건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그 일들을 이해와 의지를 갖고 경험해야 한다. 우리가 개혁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설교에 대해 높은 존경을 표하는 것에 비해, 이상하게도 우리는 말씀 선포에 청중들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도와주는 일은 등한시해왔다. 우리는 학습 받은 자들이 세례와 성찬, 그리고 합심 기도를 잘 이해하고 동참하도록 도와주는 데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설교를 잘 듣도록 가르친 적이 최근에 있는가?
데이비드 쉴라퍼(David Schlafer)는, 「설교에서 살아남기: 설교를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위한 설교 가이드」(Surviving Sermons: A Guide to Preaching for Those Who Have to Listen)라는 다소 비꼬는 듯한 제목의 책에서, 청중들로 하여금 성서 해석과 설교의 구성에 관한 사항들을 조목조목 맛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청중들로 하여금 설교자가 본문에서 설교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보게 해준다. 손에 지도를 든 청중들은 서로 다른 성경의 장르들이 설교 준비에 끼치는 차이점들을 인식하며, 설교의 전반적인 형식과 수사적 전략들을 구별하며, 설교를 다차원적으로 들을 수 있는 귀를 갖추게 된다. 훈련받고 분별력 있는 청중들은 말씀의 선포를 영성 형성적 사건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아진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간직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설교
우리가 설교자로서 명심해야 할 사실은,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채’(unformed)로 (즉, 아무런 사고 체계도 갖추어지지 않은 채로) 우리에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성소 바깥의 강력한 형성 틀(즉, 이 세상의 가치 체계)에 의해 주조되어 있다. 실제로 기독교 교육가인 마이클 워렌(Michael Warren)은 이렇게 적고 있다. “형성은…모든 인생에 있어서 중심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다.” 문화적, 사회적 세력이 형성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에 의해 얼마나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가를 정확히 이해할 때라야 비로소 크리스천 영성 형성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온전히 이해하기 시작한다.
문화적 기대치와 규범, 시각적 대중매체의 이미지와 메시지, 그리고 비즈니스와 패션과 연예, 오락 세계로부터의 축적된 ‘줄거리’(즉, 가치관)는 우리의 포부와 자부심을 강력하게 형성한다. 부가적인 기대치 및 그것을 다시 강화하는 행동양식은 가족이나 직장 환경을 통해 우리의 삶에 압력을 가한다. 게다가, 우리의 가계에 뿌리를 박은 감정적 유산들, 이를테면 편견, 두려움, 권위 혹은 무능력의 유산, 지지나 무관심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관계 등은 우리에게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워렌은 이처럼 강력한 사회-문화적 형성에 대항하여, 크리스천 영성 형성은 사실상 반형성(counterformation)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설교자가 회중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는 그런 종류의 사회 문화적 형성을 친숙하게 알고 있다면, 그의 설교는 반형성적 강화(講話)로서의 잠재력을 성취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회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뚜렷한 집합적 혹은 직업적 문화들은 무엇인가? 이 청중들은 어떤 형태의 자아상, 포부, 편견, 그리고 두려움을 예배 경험의 현장으로 끌고 들어오는가? 교회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가 이 청중들의 심상 가운데 깃들어 있는가? 예를 들면, 만약 회중들의 모임과 휴식 시간에 오가는 대화들이 마을 북쪽의 신생 저개발 지역으로부터 출석하고 있는 새로운 교인들에 대하여 방어적인 “우리 대 저들”의 사고방식을 언뜻언뜻 내비친다면, 교회 공동체적인 환대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회중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심상을 열어줄 길을 모색하는 설교를 해야 할 시점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설교가 기독교적 형성이 요구하는, 심상과 생활 방식의 급격한 재구성을 이루어내기에는 미약한 도구로 보일지도 모른다. 종교 교육가인 크레익 딕스트라(Craig Dykstra)가 주목하듯, “현대 사회의 삶은 너무나 유동적이고 다원적이며, 그러한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작용하고 있는 사회화 및 문화화 세력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신앙 공동체의, 특별히 회중의, 형성적 힘은 상대적으로 다소 미약한 것처럼 보인다.” 설교만으로 회중의 심상과 생활방식을 변화시킬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설교는 다만 형성적 성격을 지닌 기독교적 실천행위 가운데 하나로서 기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천의 비전과 습관과 생활 방식을 함께 형성하기 위한 기능을 하는 거미줄처럼 짜여진 협력적이고도 개인적인 실천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교자들이 설교가 지닌 형성적 잠재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될 것이다. 설교 준비 자체는 설교자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있어서 강력한 영성 실천이 될 수 있다. 설교는 인간적인 것과, 성공한다는 것과, 권력의 본질에 관해 득세하고 있는 거짓된 이미지에 도전장을 던질 수 있다. 설교자는 회중 앞에 성경의 전통으로부터 나온 생생한 대안을 차려놓을 수 있다. 설교 단상은 성경 읽기, 기도, 접대, 정의 그리고 봉사 등 삶을 형성하는 실천들을 권장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교 회 내의 목회자와 그 밖의 사람들이 크리스천 영성 형성이라는 고대의 전통을 포용하는 것은 교회 전반으로 보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설교를 보다 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될 필요는 없으며, 또 결단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아마도 설교자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처럼 효과적인 영적 인도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설교 외에는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크리스천 형성의 생태 환경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교회의 필수적인 형성적 실천의 하나로서의 설교에 대한 이해를 견지한다면, 설교 사역은 뛰어난 형성적 능력과 잠재력을 갖추고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설교는 말씀을 선포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있어서 영성 훈련이다. 설교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구체화하며, 만물의 구속을 위해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간직한 공동체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필수적인 도구로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샐리 브라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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