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YER OF THE #1L> Exhibition
글/사진_최정은 (Joung Eun Choi)
<A LAYER OF THE #1L> exhibition at THE INVISIBLE DOG ART CENTER (September 17 – November 6)
9월 17일 토요일 저녁, 브룩클린 Bergen 스트리트 한 건물 앞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THE INVISIBLE DOG ART CENTER (51 Bergen Street, Brooklyn, NY)에서 한 예술가의 전시 개막 쇼가 열렸기 때문이다. 전시 공간을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인파 속에서 누군가 한눈에 크게 확대되어 들어온다. 장발에 가까운 곱슬머리와 안경, 검은색 쟈켓에 진, 스니커즈를 매치한 이 사람, 60대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젊은 기운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바로 변종곤 (Chong gon Byun) 작가이다.
뉴욕에서 성공한 한인 예술가로 손꼽히는 변종곤 작가는 한국 대구 출신으로 30년 전 시대적 상황의 이유로 도미한 후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뉴욕현대미술계의 산 증인이다. 브룩클린에 위치한 변 작가의 스튜디오는 수많은 예술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독특한 작품과 공간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모은 각종 진기한 오브제들, 그것들을 결합시켜 새롭게 재탄생시킨 작품들이 잠시 그의 스튜디오를 떠나 <A LAYER OF THE #1L> (september 17 – november 6) 전시로 옮겨왔다. 마치 자식처럼 매일 닦아주고 말을 걸고 애정을 쏟아내는 덕분인지 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강력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작가의 지난 삶의 역사와 철학을 대변해 준다. 이 전시에서 변종곤 작가를 직접 만나 지난 30년간의 작품세계와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그의 향후 계획들을 들어보았다.
THIS MUST BE THE PLACE (film) produced and directed by Ben Wu and David Usui, of Lost & Found Films
억압당한 자유의지를 고스란히 표현한 시대의 반항아
1981년 9월에 미국에 왔어요. 의도한 건 아닌데 이 전시가 딱 30주년에 맞춰서 열렸네. 한국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죠. 대학을 다니던 당시 군부독재 시대에 억압된 자유와 부재했던 문화적 마인드 속에서 작가가 어떤 가치로서 존재를 발휘해야 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었어요. 당시 작가가 되려면 국전이 하나의 관문이었는데, 사실주의와 민족주의 작품들이 주를 이뤘죠. 세계미술흐름과는 완전히 역행하고 있었고. 당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참 힘들었지. 정부에서 두발과 옷차림의 자유를 제한했었고. 졸업 후 고향에 내려가 대건고 라는 카톨릭 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했는데, 다행히 나의 그런 성향들을 학교에서 많이 인정을 해줬어요.
당시 대구에 미군기지 비행장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참 관심이 가더라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있는 서구적인 것, 우리 땅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이상한 광경이었어요. 당시 혼혈아 문제도 심했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미군을 철수 시킨 후 그 스산하고 충격적인 풍경들을 몇 개의 사진기에 담으면서 이걸 그려야겠다고 결심했죠. 매우 사실적이고 솔직하게 그렸어요. 당시 추상이 유행이었는데, 나는 그게 본질에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조형 상의 유희처럼 보여서 별로 관심이 안 가더라고. 그렇게 그린 그림으로 1회 동아일보 공모전에서 대상을 탄 거예요. 국전에 대항하는 첫 민전 이었죠. 상금도 국전의 2배나 되었고. 심사위원들도 외국에서 온 평론가, 미술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었죠. 이 공모전에서 수상한 후 신문 1면에 나고 하니까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되었는데, 반미감정을 표현한 작품들이니 이북방송에서는 내 이름을 거론하며 영웅이라 칭하기도 하고, 젊은 작가들에게는 거의 우상이었다고 하더라고. 당시 언더우드 타자기를 크게 확대해서 그리면서 언론에 대한 비판 의식도 표현 했었어요. 하지만 정부 압력이 계속되었죠. 결국 동아일보 백지 사건 이후로 신문사가 존폐위기에 처하면서 더 이상 나의 보호막이 되어주기 힘들었어요. 주변의 권유로 물감이랑 옷가지, 암달러상에게서 빌린 달러 몇 푼 가지고 뉴욕으로 오게 된거죠.
THE INVISIBLE DOG ART CENTER (left)
전시 오프닝 날 한 컬렉터가 한꺼번에 모두 구매하기를 원했다는 벽면의 작품들 (right)
거칠고 외로운 미국생활에 행복을 가져다 준 오브제들
한국에서 반미감정을 드러내는 작품들을 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오게 된 이유는, 파리나 유럽은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작가로서 뭔가를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가 않은 것 같더라고. 당시 미국은 팝이 유행하고 있었고, 경쟁과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가 내 체질상 잘 맞는 것 같았죠. 한국 문화의 전달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에서, 특히 예술가로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죠. 할렘에서 집수리를 해주고 공간을 얻었어요. 아무도 살려고 하지 않는 동네에서 이웃이 되기 위해 나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해야만 했죠. 군복 집에서 산 2차 대전 군복과 24시간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니까 흑인들이 호기심에 먼저 다가오고, 친구가 되고, 그렇게 적응해 나갔죠. 하지만 외로움이 문제였어요. 너무 가난했었고.
드라이버 하나 손에 들고 길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물건들, 기계들을 뜯어 부품들을 집으로 가져왔어요. 인간이 만든 지라 인간을 닮았더라고. 그것들을 서로 붙여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죠. 외로우니까 얘네들과 이야기하고. 얘들도 인간의 손때와 사랑을 받다가 버려졌으니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어. 이 잡동사니들로 인해 행복해 졌어요. 버려진 오브제들을 만져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니 오히려 나에게 많은 것을 주더라고.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 조화를 이루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믹스미디어 작업을 30년을 하게 된 거죠. 모두 내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예요. 산업혁명이 인간의 편리를 가져다 줬지만 그로 인해 무기를 대량생산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 세계 1차, 2차 대전이죠. 다다이즘의 뒤샹이 레디메이드 작업을 했듯, 나 같은 경우 당시 후진국에서 살아서 그런지 미국이 마치 신세계 같았어요. 특히 기계들. 이것들이 계속 나오는 이상 인간과 물질문명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절대 끝날 수 없기에 내가 평생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날카로운 유머가 깃든 각종 오브제 작품들 (left / right)
Art makes me nuts (center)
변종곤이 말하는 ‘예술가’라는 직업
어제 대통령 만찬에 갔어요. 오늘 입은 것처럼 스니커즈에 셔츠 차림으로 갔는데, 정장을 안 입었으니 사람들이 당황하더라고. 하지만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예술가로서의 본분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팔리면 여행가고 그렇게 전세계를 돌아다녔어요. 안 가본 곳이 없지. 좋은 작품을 만들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고, 언젠가 그 경험들이 내 작품에 나타나기를 바라며 여행에 투자해요. 물건들도 많이 구매하고. 책 또한 많이 사요. 아무리 비싼 책이라 하더라도. 거기서 배우는 것은 그 값의 수십 배 역할을 하니까 전혀 아깝지 않아요. 나는 술도, 담배도 안 해요.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다 보면 문제도 생기고 화도 나게 되고. 작가라면 이런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스란히 작품과 나 자신에 시간을 투자해야죠. 격일로 운동을 다니고 3개월에 한번씩 의사를 만나는데, 30대 체력을 갖고 있다고 하네요.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면, 그 에너지가 작품으로 가게 되는 거죠.
몇 년 전 미술시장이 폭락한적 있죠. 당시 한국에 있는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는데, 작품 가격을 3배로 올려버렸거든. 나는 내가 그만큼 성장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여건 때문에 작품 가격을 내려버릴 이유도 없었고, 작가의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에 내 작품을 구매한 컬렉터들의 작품가격을 보호해줄 수가 없거든. 화랑과 실갱이하며 전시를 취소하겠다고 하려다가 결국 하게 되었는데 1점 팔았죠. 예술가가 무엇인가요? 저는 시대적 양심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도자나 종교인처럼. 작업과정 자체가 정신노동이잖아. 정신세계를 향유하는 건데 가난한 것이 당연하지. 이번 전시 오프닝 때 한 관람객이 한쪽 벽면에 있는 작품 모두 구매하고 싶다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그렇게는 작품을 팔고 싶지 않았거든. 디렉터의 권유로 오늘 다시 만나보기로는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
샤넬 회장이 구입하고 싶어 했다는 작품, ‘Good Morning America’ (left bottom)
백남준 작가에 대한 오마주 작품, ‘TV보는 부처’ (right)
뉴욕생활 30주년과 이 전시를 전후로 맞이한 인생의 변화들
작품들을 보면 종교적인 오브제들이 많이 있죠? 어릴 적에 할머니가 저를 키우셨는데, 교회도 가시고, 절도 가시고, 길을 지나다니다 큰 나무나 돌이 있으면 절하시고, 다 제가 잘되게 해달라고. 근데 그때는 그게 공포였어요. 교회에 가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있고, 절에는 사천왕이나 지옥도를 보면서 악몽에 시달렸죠. 종교에 대한 의문들이 많이 있었어요. 종교가 세계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폭력 앞에서 침묵하고 서로 편가르기 하는 모습에 종교의 위선을 느꼈고 그걸 비판했었어요. 그러다 지금 와이프를 만나고, 존재자의 힘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교회를 나가게 되었어요. 어떻게 보면 이런 과정들이 개인적으로는 작품세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 같아요.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좀 더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앞으로 세계 기아 아동들을 결연하여 후원하거나 봉사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하려고 해요.
와이프가 저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데,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줬죠. 젊은 세대의 작품들을 소개시켜주고, 그들과 직접 교류하고 있는 것을 느껴요. 얼마 전에 와이프가 이야기해줬는데, 뉴욕타임즈에 지난 30년간 14번 기사가 났다고 하네요.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가 되었겠죠?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작업 성향은 아마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번 전시 오프닝 날 아침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어요. 지금까지 영주권으로 있었는데, 다행히 한국에 국위선양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이중국적 취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제가 평생의 반을 살아온 뉴욕이라는 이 도시는 미국도 아니고 다른 제 3세계예요. 매우 특수한 세계죠.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 너무나 많은 것을 준 곳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받은 것들을 되돌려주고 봉사하려는 계획들을 가지고 있어요.
2011년 9.11 테러 이후 제작한 작품 (left) / 우디 앨런과 코끼리 (center)
부처와 인체해부상 / 마릴린 먼로와 선풍기 / 무너지는 문화 중심지 파리와 런던, 바이올린을 함께 표현한 작품 (right)
뉴요커들이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익히 알려진 작가의 유명세와 인상에서 풍겨져 나오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변종곤 작가를 직접 만나기 전에는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일까를 궁금해하며 머리 속에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 그와의 인터뷰를 하는 시간은 마치 한 예술가의 작가론 강의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가 가진 예술가로서의 재능, 치열하고 고단했던 뉴욕에서의 경험들, 여행, 책, 오브제들, 수많은 예술인들과의 교류들이 모두 혼합되어 시대를 바라보는 깊은 혜안과 작가로서의 견고한 철학을 완성했으리라. 그의 작품들은 혀를 내두를 만큼 번뜩이는 유머와 그 속에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들이 함께 녹아 그야말로 통쾌한 한방을 이끌어낸다. 유머와 비판적 시각을 함께 즐기는 뉴요커들이 어찌 그의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1981년 9월 뉴욕에 첫 발을 내딛은 이래, 20주년에 일어났던 2001년 9.11 테러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굉장히 큰 아픔을 느꼈으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도 있다. 위 사진참조), 30주년에 취득한 미국 시민권과 이번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9월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달일 것이다. 이번 전시를 전후로 새로운 인생의 변화들을 맞이한 변종곤 작가에게 또 어떤 큰 기회들이 몰려올까? 아마 40주년, 혹은 50주년에는 그의 작품들로 가득 찬 변종곤 뮤지엄이 뉴욕에 설립되지는 않을까? 뉴욕에서 성공한 작가의 교본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열정과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한인 후배 작가들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는 변종곤 작가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표하며, 그의 귀추를 주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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