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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중심주제/성경공부 자료

구약에 나타난 기쁨 (기뻐하는 행위의 본질은 무엇인가?) 김회권

by 금빛돌 2015. 10. 16.

 대 체로 한글 성경에서 기뻐하다또는 즐거워하다라고 번역된 대표적인 히브리어 동사는 네 가지다. ‘싸마흐이며 그 명사형은 씨머하. 이 단어의 셈어 동등어는 형통하다’(앗수르어 샤마후), ‘자부심이 충만하다’, ‘기분이 아주 고조되다’(to be high, proud, 아랍어)를 의미한다(BDB, 970). 이 동사보다 더 격렬한 기쁨을 피력하는 동사는 이며 명사형도 동일하다(BDB, 162). 이 단어의 뜻은 돌아다니다’, ‘흥분하다’, ‘떨다의 의미로 샤마흐가 발전하면 수준의 희락을 가리키게 된다(9:1; 3:22; 65:13; 23:24; 3:18). 물론 이 두 동사가 동시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43:4). 그런데 보다 더 격앙된 기쁨을 표현하는 동사가 있다. 그것은 알라즈’/‘알라츠’(BDB, 759, 763)쑤쓰’/‘씨쓰(BDB, 965, 28:63; 119:14; 35:1; 65:18; 66:10). 이 두 동사는 모두 다소 격렬하게 기뻐하다’(exult)를 의미하는데 알라즈/알라츠’(96:12; 15:17; 3:14; 149:5; 삼상 2:1)동사가 같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며(3:18), ‘싸마흐와 같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3:14). ‘쑤쓰/씨쓰싸마흐’, ‘알라즈등과 혼용될 정도로 병렬적으로 사용된다.

구약성경에서 기쁨을 표현하는 주체는 다양하다. 하나님, 천군 천사, 피조물, 이스라엘 백성, 믿음의 영웅들,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을 맛본 개인들이 모두 기뻐하는존재이며, 이들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기쁨을 피력하는 주체들이다. 이들 외에도 부정적인 의미에서 기뻐하는 존재들도 나타나는데 바로 의인들의 곤경이나 몰락을 보면서 환호작약하는 악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시편에서는 악인들이 의인들의 몰락과 곤경을 보면서 개가를 부르고 기뻐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난다(7:8; 14:8; 1:12; 35:19, 24; 38:17; 25:6; 31:29; 35:15; 24:17; 9:1; 삼하 1:20; 22:19). ‘싸마흐동사의 셈어 어근에서 유추되듯이 기뻐하는 행동은 인격적인 존재가 자기가 기대하거나 소원하던 일이 일어나거나 성취될 때 자연스럽게 발출되는 행위다. 기쁨은 기뻐하는 자의 마음속 기대가 충족되어 자기 존엄을 확증해 줄 때 일어나는 인격적 반응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창조가 이뤄졌을 때 피력되었다. 기쁨의 감정은 자기 성찰적이고 자기 평가적인 하나님의 인격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쁨은 기획하고 사유하며 의지를 발동함으로 자신의 뜻을 구체화시켜 가는 인격적인 존재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반대를 피력함으로써 당신의 진노와 신적 불쾌감을 피력하신다.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9:17). 피조물의 기쁨은 정상적인 경우에는 이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파생적이고 응답적인 행위인 셈이다. 피조물의 불쾌 감정도 본디 하나님의 신적 불쾌감을 반영하는 행동인 셈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적 면모를 탐색해 본 뒤, 인간의 파생적인 기쁨 피력과 그것의 다양한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뻐하는 행위는 인격적인 존재의 특권이자 하나님의 인격성의 증거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인격성, 곧 하나님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장 손쉽게 발견하는 맥락은 하나님의 자기만족적 자기 평가다. 하나님은 하루 단위로 이뤄지는 창조 사역을 단계적으로 추진해 갈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자기 평가를 피력하시다가 사람이 창조된 여섯 째 날에는 심히 좋았다는 점층적인 희락 감정을 발출하신다. 이 최고조의 기쁨 표현은 인격적이면서도 영적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가장 잘 예시한다. 하나님의 인격성 중 가장 안심이 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자기만족적 자존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기뻐하시고 만족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인간 창조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만족감의 충일이 창조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장 전체에는 모두 일곱 번의 신적 자기만족, 자기 긍정의 후렴구가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사역에 자부심을 표현하시고 극한 만족을 피력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대해 기뻐하신다. 인간의 기쁨은 이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기쁨일 때 가장 순결한 기쁨이 된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생명과 질서를 창조하실 때, 압제의 혼돈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할 거룩한 백성을 건져 내실 때 기뻐하신다. 창조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만족적인 기쁨 피력을 시편 104:31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고 산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신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과 회복의 사역을 수행하실 때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신다.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임박한 예루살렘 복귀와 현존을 인해 기뻐하라고 외친다.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2:10). 스바냐 3:14~17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교회적인 기쁨 분출 상황을 묘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총이 만든 현실이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3:14).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3:17). 하나님은 불결하게 된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신 후에 그 가운데 거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겸손이 두려울 뿐이다. 실로 이 신비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징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계약적 투신이 이스라엘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충일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 신실한 자들의 행보를 주목하시며 의인을 기뻐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사역이나 당신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천사들이나 의인들을 기뻐하신다. 런 하나님의 기쁨 피력이 모든 피조물에게 확산되어 천군 천사들과 인간 및 만물도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동참하도록 초청받은 것이다. 구원과 예배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현장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피조물 중 영적인 피조물인 하나님의 천사들(하나님의 아들들)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고 기뻐한다. 욥기 38:7에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천사들이 등장한다.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많은 시편에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을 향한 이스라엘의 기쁨과 감사의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이방인들과 섬들과 땅끝의 백성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기뻐한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지탱 사역을 보고 온 피조물들도 기뻐한다. 이것은 기뻐하는 행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 공적 예배 행위의 일부임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기뻐하는 공동체와 개인은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응답하는 예배자의 일원이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대한, 즉 하나님 나라의 발동에 대한 응답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압제와 질병으로부터의 구원, 압도적인 원수로부터의 구원, 불의하고 왜곡된 사회 질서를 바로잡으시는 정의로운 재판 행위 등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것은 역사 속에 나타난 공공연한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대한 예배적인 응답이었고,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활동이었다. 아무리 시편 기자가 개인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의를 노래하고 신적인 자비를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는 항상 예배 공동체의 일원으로 기뻐하고 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개인과 공동체는 하나님의 혼돈에 대한 승리와 제압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과 승리를 미리 맛보는 축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구약성경에서 기뻐하다라는 동사의 가장 많고 빈번한 주체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다. 시편과 예언서 등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여 심판을 받아 굴욕에 처한 죄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통해 소생과 갱생을 경험하는 존재다. 그들은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구원이 끊어진 것 같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신앙 비밀을 체득함으로써 허무와 심판의 파도를 타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혼돈의 물결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신 하나님의 원초적인 뿌리 구원 경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무한 신뢰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심화시킬 수 있게 했다. 이스라엘은 참으로 다양한 맥락에서 기뻐했다. 이스라엘의 다양한 기쁨 피력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교회의 하나님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앎을 회복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스라엘의 기쁨 분출의 다양한 맥락

 

1. 구원의 기쁨

이스라엘은 야웨의 구원을 경험하고 야웨 앞에서 기뻐했다(21:2, 6; 2:23). 이사야 9:1~4는 이스라엘이 기뻐하는 가장 대표적이고 빈번한 계기를 말한다. 야웨께서 한때 고통당하던 자들과 흑암에 앉아 있던 자들을 찾아오셔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 앗수르 제국에게 병탄당하여 멸시와 압제를 당해 오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사람들과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운명의 대반전을 일으키신 것이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는 방식의 구원은 세계 만민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사야 9:3~4는 하나님의 구원이 감격적으로 송축되고 있는 이유를 말해 준다. 미디안의 압제 막대를 꺾어 주셨기에 가능한 구원을 이스라엘이 맛보았기 때문이다. 미디안은 사사기 6~8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숙적으로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약탈하던 세력이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300명 용사로 미디안 최정예 강군을 패퇴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허락하셨고 약탈당하기만 하던 이스라엘은 이제 전리품을 나누는 승전 군대가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승전으로 발생한 구원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압도적 열세 속에서 맛본 구원이다. 신적인 우발성이 개입된, 지극히 거룩한 승전의 기쁨이었다. 이런 기쁨은 미디안의 압제 막대기와 채찍질에 압박을 당해 본 연약한 자들을 위해 유보된 기쁨이다.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이 주는 기쁨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처럼 미디안의 채찍질과 압제의 막대기질을 일삼는 지상의 강력한 자들에게는 전혀 낯선 기쁨이다.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는 기쁨은 이미 압제자 노릇을 하는 지상의 패권자들에게는 도저히 알려질 수 없는 기쁨인 것이다.

 

2. 예배와 찬양의 기쁨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자가 누리는 기쁨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레위기 23:33~40은 초막절을 기리는 이스라엘의 기쁨을 말한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715일부터 22일까지 축성되는 초막절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초막에 살면서 압제의 땅 애굽을 탈출하던 시절을 추체험하는 절기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자발적인 불편 감수를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초막은 영구적인 주택이 아니라 유목민적인 순례자의 임시 거처다. 초막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해 부단히 순례하는 사람들의 거처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살던 편안한 주택을 잠시 떠나, 빈부귀천의 사회적 차등을 떠나, 지파와 신분, 노소와 성차를 떠나 하나님의 땅을 향해 공동체적인 행진 중임을 선포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내내 기뻐하도록 명령받는 이 초막절의 절기가 어떤 점에서 기쁨의 절기가 되었을까?

첫째, 이스라엘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계기가 되었기에 즐거워할 이유를 가졌을 것이다. 사회적 결속감을 증진시키는 축제적 여흥과 하나님의 영혼 소성용 메시지가 선포되는 장엄한 긴장은 이스라엘에게 일상을 초탈할 수 있는 기쁨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둘째, 노동의 피곤함과 독성에서 해방되어 기뻤을 것이다. 36절에 따르면 이레 동안에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어떤 영리 추구 활동도 배척된 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피조물성을 고백하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의 유기체를 구성하는 한 구성원임을 자각하면서 그저 하나님만 믿고 기뻐하였을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유유하게 쉬면서 노동을 그치는 것은 안식이 노동보다 더 존귀한 생산성을 창조한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노동의 독성, 생산성에 대한 광적 집착, 속도와 성취에 대한 열망 등은 일주일 동안 쉴 때에 거룩하게 이완되고 해체될 것이다. 이때 막혔던 하나님 찬양의 샘이 터져 나올 것이다. 셋째,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주는 즐거움 때문에 집단적인 환희를 경험했을 것이다.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거룩한 빈 시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지와 감정은 거룩하게 순화되고 언약적인 의에 의해 단련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자기를 도륙하고 빻아 스스로 가루나 제물이 된 이스라엘은 마침내 하나님께 바쳐지는 화제(火祭)가 되어 향기를 발할 것이다. 번제, 소제, 희생 제물, 전제 등은 이스라엘 백성 구성원이 원초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해 느끼는 계약적 결속감의 공적인 표시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이 되어 거룩하게 불태워지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은 제사의 영적 효과에 대한 적절한 일깨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계약적 요구를 준행할 의무를 공공연히 피력하는 행위로서의 집단적 제사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공동체적인 결속감의 피력을 넘어 백성 상호간에 사랑과 우의를 두텁게 했을 것이며 이것은 기쁨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23:40)는 명령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나 예배는 사회 복지적 시혜 활동이었기에 공동체 구성원 중 연약한 자들에게 희락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신명기 12:12~19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준행해야 할 제사 원칙을 천명한다.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11~12, 18~19). 이스라엘의 제사가 빈부 격차, 사회적 신분 계층을 총망라하는 축제 절기임을 보여 준다. 자녀와 노예, 그리고 레위인들(이스라엘의 헌금으로 살아가는 하위 제사장)과 함께 먹고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기쁨은 사회 경제적 평준화의 원리를 촉진시키는 공공연한 사회 복지적인 활동에서 분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드리는 제사는 사회적으로 가장 불우한 계층 사람들(“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마저도 하나님의 자애로운 다스림의 수혜자로 만들어 준 것이다(34:22; 16:11; 23:15~21).

 

3. 역사 속에 실현된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기쁨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공의 선포와 실현을 인한 기쁨의 분출 장면이 많다. 이런 기쁨은 한국 교회가 잊고 있는 기쁨이다. 사무엘상 2:1이 말하는 기쁨을 한국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맛본 적이 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런 하나님의 정의 실현을 예기하거나 경험한 공동체의 기쁨 발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극히 낯설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늘 열세에 놓인 연약한 자들의 뿔이 높아지는 반전의 기쁨은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가 역사 속에 드러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맛보는 기쁨이다. 이사야 14장에는 이런 기쁨이 있다. 세계를 제패한 바벨론 왕의 몰락을 보고 열국이 내지르는 환호성이다. 시편 96~97편도 이런 기쁨을 노래한다. 먼저 시편 96:11~13을 보자.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하 나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지상에 임하실 때, 진심으로 열국 백성들을 심판하실 때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밭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이 기뻐한다. 숲의 모든 나무들도 야웨 앞에 즐겁게 노래한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은 기쁨을 터뜨리게 만든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임재를 보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며 기쁨을 터뜨리는 것이다.

시편 97편은 이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하나님의 통치가 초래한 정의의 회복, 형평하게 하시는 사역, 우상 숭배의 허탄함을 폭로하는 진리의 조명 사역으로 인해 땅은 즐거워하고 허다한 섬들도 기뻐하게 된다(1). 의와 공평으로 지탱되던 하나님의 보좌를 구름과 흑암이 둘렀으며 거룩한 불꽃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와 사방 대적들을 불사른다(2~3). 야웨 하나님의 번갯불은 온 세계를 훤히 비추며 떨게 만든다(4).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자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놀라며 떤다(6). 그 결과 하나님을 대신해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던 우상의 장악력이나 지배력은 파탄을 당하며 허무한 것, 즉 우상 숭배를 통해 이익을 얻어 세력을 떨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이사야 2:11~22가 묘사하듯이 하나님을 향해 높아진 모든 것들을 낮추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현존으로 만물이 자복하듯이 하나님을 대신해 높아져서 세력을 떨치는 자들이 쇠락한다. 시온이 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한다(8).

9~12절은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와 심판이 끼친 교육 효과를 말한다. 첫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임을 확신하게 된다(9). 둘째, 악을 심판하시고 죄인을 굴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본받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악을 미워하도록 격려를 받는다. 하나님이 필시 악인의 손에서 성도의 영혼을 보전해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된다. 셋째,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신다. 즉 하나님의 역동적인 현존이 보이지 않는 때에도 기회주의자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며 살도록 격려를 받는다. 아무리 낙심천만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의인들을 위해 조명과 계시의 빛을 뿌리시고(역사적 현상 너머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허락), 악의 위세에 기가 눌리지 않도록 기쁨을 뿌리신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 총독, 악한 종교 지도자들, 불의한 정치 지도자들, 대다수의 타락한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아버지가 뿌려 주신 초월적인 기쁨이 있으셨다. 거룩한 명랑성과 영혼을 북돋우는 자아 설복적인 말씀의 리듬으로 잔혹한 절망의 시대를 이겨 내며 믿음을 유지하셨다. 그래서 시편 97편은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라고 권면한다. 역사적 현실이 주는 압도적인 절망과 어둠을 돌파하는 신적 명랑성에 응답하는 선제적인 기쁨 표현이 중요하다.

시편 48:10~11도 동일한 기쁨을 말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참고 욜 2:21,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 126: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 도래에 대한 피조물의 기쁨 분출을 묘사한다(대상 16:28~33).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리 할 때에 숲 속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로다(대상 16:31~33).

 

4. 말씀을 깨달으며 영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기쁨

구약성경에서는 성장과 성숙을 인한 기쁨의 피력이 있다. 시편 51:8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은 야곱의 환도뼈 위골 사건과 그로 인한 야곱의 성숙을 암시하는 구절처럼 읽힌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면서부터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며 성화되기 시작했다. 뼈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자아, 자신감, 의지 등을 상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뼈를 꺾으심으로 우리를 성화시키고 구원하실 때가 많다. 다윗 왕은 밧세바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왕의 권위와 위엄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는 자신의 이전 삶에서 누리던 모든 자존감과 자긍심이 산산조각 나는 상황에서, 즉 뼈가 꺾이는 상황에서 자신의 영적 정화와 성숙을 희구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인간의 성숙과 성화에는 우리의 고집과 자부심의 뼈가 꺾이는 사태가 내포된다는 사실이 두렵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느헤미야 8:1~12는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도 언약 공동체를 보양하고 유지하는 데 나태했던 귀환 포로 공동체의 영적 각성과 성숙을 다룬다.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한 귀환 포로 공동체는 율법 학자 에스라의 주도로 낮 시간 동안 내내 사경회에 참여하게 된다(1~2). 에스라는 초막절(715~22)을 앞두고 일곱째 달 초하루에 모든 사람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사경회를 실시한다.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모든 사람 앞에서 성경을 읽어 주자 모든 참석자들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다(3). 에스라가 큰소리로 읽고 해설해 주면 열세 명의 성경 교사들과 레위인들이 줄과 줄 사이를 오가며 다시 읽고 해석해 주었다(4, 7~8).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자 모든 백성이 일어서서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냈다(5). 에스라가 먼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이라고 응답했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다(6). 레위인들과 열세 명의 성경 교사들은 에스라가 읽어 준 하나님의 율법 책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들이 다 깨닫도록 도와주었다(8). 이 공동체적인 성경 공부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9). 말씀으로 뜨겁게 된 모든 백성이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했다(12). 12절은 이 아름다운 공동체의 탄생, 즉 나눔과 베풂, 사귐과 사랑의 결속감으로 재창조된 귀환 포로 공동체의 환희에 찬 영적 갱생이 그들이 읽어 들려준 말을 밝히 깨달았기 때문임을 밝힌다.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열리던 산정현교회의 그 열기 이래로 이런 사경회의 열기를 잃어버린 한국 교회가 귀환 포로 공동체의 수문 앞 광장 하루 종일 사경회를 회복하여 말씀으로 촉발된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지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평안의 줄이 작동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될 때에만 한국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고, 함께 마시고 나누는 성만찬적인 친교 공동체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역대하 15장은 아사 왕의 개혁으로 인한 유다의 기쁨 회복을 보도한다. 하나님의 영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여 유다 왕 아사에게 즉각 회개할 것을 명령하고 아사는 종교 개혁에 돌입한다(1~7).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참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오래되었다”(3). 따라서 유다 땅에는 가증한 물건들이 많았다. 반면에 야웨의 제단은 파괴되어 있다(8). 아사는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도 없애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했다(8). 분열되어 간 북이스라엘 지파들에게까지 영적 영향력을 미쳐 야웨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다(9). 아사 왕은 재위 십오 년 셋째 달에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회집하게 해 노략해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 마리와 양 칠천 마리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했다(10~12). 심지어 극단적인 포고령까지 발포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막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은 큰소리로 외치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했다(14). 온 유다 백성(예루살렘 총회에 오지 못한 지방민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뤄진 이 맹세를 기뻐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다. 그 결과 야웨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다(15).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필요조건인 영적 정화의 맹세를 유다 백성이 다 기뻐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는 간절함이 회개와 영적 정화를 초래했다. 기쁨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자발적으로 전향하면 하나님은 친히 회개하고 전향한 백성들을 만나 주신다. 부흥사가 아니라 회개가 부흥을 주도한다. 참된 회개만이, 개혁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한국 교회를 영접하게 하실 것이다.

 

5. 종말론적 기쁨

이미 맛본 기쁨에 대해 말한 앞의 본문들과는 달리 구약성경에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일을 미리 기뻐하는 상황도 있다. 하박국 3:12~18은 종말론적인 기쁨을 말한다. 종말론적인 기쁨은 현재는 기뻐할 상황이 아닌데 먼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사역을 인해 미리 기뻐하는 기쁨이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조국 유다는 하나님이 보내실 강한 적군에게 유린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분출되어 열국을 덮었고(12), 유다도 예외는 아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침략군의 육박 소리를 듣고 창자가 흔들렸고 그들의 목소리로 말미암아 입술이 떨렸다(16). 무리가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기다리다가 뼈가 썩는 것 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그의 몸 중 떨리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16). 그는 이제 농사도 망하고 목축업도 몰락의 길을 걷는 현실을 대면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7). 그가 대면한 현실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이었다. 보통의 경우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들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는 상황에서 하박국 예언자가 자기를 격려하는 길은 단 한가지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 이 경지는 참으로 깊고 신비하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적 심오의 경지다. 이 아무것도 없게 된 상황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지만, 풍요 속에 하나님을 망각하고 홀연히 멸망당하는 길에 비해서는 이 박탈과 굴욕적인 심판의 와중에서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임을, 우리 인생과 조국의 운명을 주재하는 왕임을 발견하는 길은 얼마나 다행인가? 하박국은 참으로 자신과 조국을 구원하시기에 심판의 골짜기로 집어던지시는 하나님의 거친 손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선취하고 예기하는 본문은 이사야 35장이다. ‘쑤쓰/씨쓰동사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본문이다. 1절의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은 기뻐할 일이 전혀 없는 땅이다. 그런데 예언자는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이 기뻐하는 날이 올 것을 통고한다. 1절은 그런 천지개벽적 변화라는 주제를 도입한다. 이 구절은 처음부터 사막에서 피는 봄꽃인 백합화향기 이미지로 독자(청중)들을 매혹시킨다. 2절에서는 광야와 메마른 땅이 꽃처럼 피어나는데, 울창한 숲으로 대표되는 레바논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가장 비옥한 초장 지대와 농업 지역인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정도로 변형된다. 레바논, 갈멜, 사론은 비옥한 땅의 상징이다.

3~4절에는 광야 행진 중인(2의 출애굽 중인) 귀환 포로들을 도와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오신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해 주도록명령하신다(3). 예언자는 광야 여정을 거쳐 이스라엘 본토로 돌아가는 길에 두려움을 느끼며 겁내는 자에게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고 선포하도록 부름 받는다(4). 5~6절은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와 신원이 시작되는 그 시점에 동시적으로 발생할 사건들을 나열한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다리를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할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행진하는 광야는 어느 새 원천이 되고 못이 되어 그들의 이스라엘 고토 귀환은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7). 샘물이 솟아나는 광야, 시냇물이 흘러넘치는 사막 한가운데 하나님 백성들의 귀환을 촉진하고 격려하는 큰길이 열릴 것이다(8). 그 대로가 안전한 길이다(9). 야웨 하나님께 속량함을 얻은 하나님 백성들은 비록 먼 여정을 답파하여 고토로 돌아오겠지만 일단 시온에 당도하기만 하면 그들의 미래는 찬란하게 밝을 것이다(10). 시온 귀환민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게 될 것이며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이다. 이 환희는 먼 미래에 맛보게 될 것이지만 현재 이 메시지를 읽은 사람의 마음에 이미 위력을 드러내는 환희다. 그런 점에서 종말론적인 기쁨은 종말에 완성될 기쁨이지만 미리 지금부터 그 위력을 선취할 수 있는 기쁨이다. 구약이 말하는 많은 기쁨은 아직도 이런 의미의 종말론적 기쁨이다. 이사야 35장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미 위력을 드러낸 기쁨인 것이다.

김회권 | 20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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