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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정지원)

by 금빛돌 2015. 10. 6.

정지원(1970~  )

 한 번일지라도
목숨과 바꿀 사랑을 배운 사람은
노래가 내밀던 손수건 한 장의
온기를 잊지 못하리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도
거기에서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리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길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가는지를

누가 뭐래도 믿고 기다려주며
마지막까지 남아
다순 화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찾으리
무수한 가락이 흐르며 만든
노래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뜻을

 

늘 젊은 노래가 있다.

나이가 들어도 삼촌이나 아저씨가 되지 않고 늘 오빠인 사람이 있듯이.

1998년에 나와 20년이 다 되어가는 노래가 아직 듣거나 부를 때마다 울컥 이게 한다는 것은 이 노래에 마음의 현을 긁는 비장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연애 시처럼 민중시를 쓰는 정지원 시인의 점층적으로 정서를 키워가는 힘 있는 시가 있었다. 무당의 주술처럼 북돋워가며 감정의 불꽃을 넘실거리게 곡을 붙이고 힘 있는 ‘록’ 풍으로 색깔을 입힌 우리 시대의 가객 안치환이 있었다. 사실 이 노래는 1996년 민중 노래패 ‘꽃다지’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석방 촉구 공연을 보고 그 느낌을 시로 옮긴 것이었다. 처음 ‘꽃다지’가 노래로 만들어 불렀을 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안치환이 편곡하여 부르면서 민중가요로서보다는 호소력 짙고 역동적인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인생의 양면처럼 이 노래에도 이면의 그늘이 있는 듯하다. 시대를 아우르는 시말을 맛깔 나는 곡과 목소리로 버무려준 공로로 이 노래는 안치환의 대표곡이 되었지만, 그의 유명세에 비해 원본인 시를 쓴 시인이 다소 빛을 잃은 감이 있다. 정지원 시인은 ‘오월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잡지 《노둣돌》 등에서 활동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을 비롯하여 이 시기의 활동작품을 묶어 2003년에 시집 《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라는 시집을 상재하였으나 이 노래의 유명세를 뛰어넘진 못하였다. 어쨌든 이 노래처럼 독자의 수용미학이 크게 작용한 노래도 드물 것이다. 정지원 시인이 처음 시를 지을 때의 의도와 독자 혹은 청자가 읽어낸 의미의 스펙트럼이 바뀌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이 노래의 의미는 늘 변화되거나 넓어졌다. 막 사랑에 빠질 때, 사랑의 잎새를 그늘 짙게 키워갈 때, 사랑의 소슬한 기운에 휘청거릴 때, 사랑을 떠나보내고 몸을 떨며 울 때 이 노래는 늘 내 곁에 있었고 그때마다 다른 색깔로 내 마음을 울렸다.

“밤이 길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에서 느껴지는 생명력과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에서 감지되는 뜨거운 사랑의 선동성에 감염되지 않은 자가 정상이겠는가?

아마도 이 노래는 더 오랫동안 우리 곁에 “짙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강물같이” 휘돌거나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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