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인들이 사도바울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울에게는 고난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반대로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인 증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고난을 매일 일상의 삶 가운데 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십자가의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사도바울에게 부활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후4장 10절과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부활의) 생명(능력)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고난의 가시가 있는 만큼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안에 있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으로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부활의 능력으로 박해를 받아서 쫓기는 삶을 살아도 하나님께 버림받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부활의 능력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바울이 매일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의 삶을 삶으로 고린도교인들은 사도바울 때문에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지 않고 서로 영광만을 구하는 삶을 살면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주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사도바울처럼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고, 한 알의 죽어지는 밀이 되는 삶을 살면 우리 때문에 많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여기서 기록한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고 하는 것은 시편 116편 10절 말씀 “내가 크게 (사망의)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건지실 것을) 믿었도다”을 인용한 것입니다.
왜 여기서 사도바울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사망의 고통에서 건지실 것을 믿고, 또 사망의 고통에서 건지실 것을 믿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까?
우리는 항상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하면 그러다가 내가 손해를 보면 어떻게 하는가? 무엇보다 내가 매일 죽어지는 삶을 살면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서 건져주실까? 일으켜 주실까? 라고 하는 의심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매일 십자가의 삶을 살아도 시편기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절대 그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일으켜주시고, 건져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다가 나중에 정말 순교하여서 죽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에 대해서 14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4.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종말에) 그(하나님 앞에서)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현재의 부활과 미래의 부활을 모두 믿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부활이란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 싸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낮아진 만큼 높여주시고, 희생한 만큼 현재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는 삶이 현재의 부활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현재가운데 그를 순교의 재물이 되게 하신다 할지라도 장차 미래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사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이 풀무풀에 던져도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 세상과 사탄이 절대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죽으면 살리라는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살리라”
순교의 신앙과 부활의 신앙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여기서 “그러므로”란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삶을 살아도 사도바울에게는 보배와 같으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므로” 라는 말입니다.
또 매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도 사도바울에게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그 안에 “있으므로” 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많은 고난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그 안에 계시므로 사도바울은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겉 사람 즉 육신의 사람이 낡아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겉 사람 육신의 사람이 낡아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는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겉 사람은 자연적으로 가만히 있어도 낡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육신의 겉 사람이 낡아지는 이유는 자연적인 현상도 있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인 이유나 또 고난 때문이거나 우리 육신의 겉 사람은 낡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의 겉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낡아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을 삼을 때 우리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후3장 5절에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겉 사람만 낡아지면 되는데, 왜 속사람조차도 같이 낡아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눈에 보이는 다른 것들로서 만족을 채워보려 할 때 우리의 속사람은 낡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충분한 만족자가 되시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때 우리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날마다 내 속에 영혼의 빛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질 때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고후4장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영혼)에 비추셨느니라”
여기서 보면 천지창조를 할 때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셔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우리 영혼에 빛은 누가 비추어주시겠습니까?
바로 우리 영혼의 빛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찬송가 60장을 계속 불렀습니다.
1절을 다 같이 불러 보겠습니다.
1. 영혼의 햇빛 예수님 가까이 비춰주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셋째는, 우리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연약한 질그릇들을 바라보지 말고, 질그릇 속에 계신 보배로우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합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연약한 질그릇인 우리 자신만을 보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 안에 계신 영광스러우시고 보배와 같으신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육신의 겉 사람은 낡아지고 결국 없어지지만,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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