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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고린도후서

새언약의 일꾼(고후2:14-3:6)목회와 신학

by 금빛돌 2015. 3. 26.

새 언약의 일꾼

- 2005년 8월호

고린도전서가 이방세계의 주변 환경 속에서 신생교회인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 기록된 서신이라면,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이미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비난을 전제하고,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강하게 변증하는 서신이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바울의 적대자들이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복음과 생활방식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성공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과 적대자들의 대결, 그리고 그들로 인한 바울과 고린도교회 간의 갈등상황이 고린도후서 전체의 역사적 배경과 내용적인 틀을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주된 관심은 적대자들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이나,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대응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바울의 일차적 목표는 적대자들에 의해 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과연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사도직 문제에 몰두하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그의 사도직은 늘 그의 복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도직의 정당성이 무너지면, 그가 전한 복음도 위태로워질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린도후서는 논쟁적이라기보다는 목회적인 특성을 지닌다. 적대자들과의 대결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그들의 믿음을 강화하고자 하는 바울의 목회자적 마음과 동기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룰 본문(2:14~4:6)은 서신의 서두와 지난날의 회고(1:1~2:13) 후에, 바울이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해 자신의 사도직을 본격적으로 변증하는 2장 14절~7장 4절의 보다 큰 맥락에 포함되어 있다1. 여기에서 바울은 사도직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누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그리스도의 참사도이며, 새 언약의 사도직을 수행하는데 적합한가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판단할 수 있도록 전개해 나간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규정하고(3:6), 전체적으로 새 언약의 일꾼의 근거(2:14~3:3),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3:3~3:18), 새 언약의 일꾼의 임무(4:1~6)를 밝히고 있다.

새 언약의 일꾼의 근거(2:14~3:6)
1. 본문 주해
바울은 이 단락을 자신의 선교사역을 요약하는 감사의 형식으로 시작한다. 감사의 내용은 하나님이 항상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케 하시며, 어디에서나 사도들(“우리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다는 사실이다(14).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할지라도 바울은 변호의 맥락에서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선교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항상”과 “어디에서나”라는 두 개의 부사가 이 점을 강조해준다. 이것은 바울의 복음 선포 속에 하나님이 현재해 계시다는 반증이다. 복음의 선포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사도의 선포는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15).2 그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생명에 이르게 하고, 선포를 거절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16, 고전 1:18~25). 이처럼 사도의 직분은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는 막중한 일이기에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15~16). 오직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다(17, 3:5~6).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17)3, 즉 사람의 손으로 쓰여 진 추천장을 가지고 다니며, 참 사도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추천장이 없는 바울에 대해서 공격을 서슴지 않는 그의 적대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3:1). 이들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자체를 자신의 추천장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피력한다(3:2~6). 그들의 추천장이 “돌판에”, “먹”으로 쓴 편지인 반면에, 바울의 추천장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으로 쓴 추천서이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참된 사도직은 자신의 재능이나, 사람이 써 준 추천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위임을 통해 비롯된다는 점이다(갈 1:1 참조).

2. 설교 포인트
이 단락을 토대로 설교하고자 하는 설교자는 6b절의 질문(“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유익하리라 본다. 과연 생명과 죽음을 결정짓는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의 인정과 개인적인 재능에 의지하는 거짓 사도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참된 사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1) 참된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늘 자각하는 사람이다. 14절에 보면, 바울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 트리암뷰오(qriambeuvw원문에는 분사형으로 표현)는 본래 “개선행렬에 참가시키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로마 장군들이 승리를 거둔 후, 로마로 입성하는 개선행렬을 배경으로 한다.4 즉 바울은 어둠의 세력에 대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승리를 생각하며, 자신을 그 복음의 개선 행렬의 전령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러한 승리의 행진에 참여하게 된 것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과거에 그는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다른 방향으로 쏟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박해자를 다메섹에서 쳐 이기시고, 그를 복음의 승리의 행진 속에 참여시키셨다. 그 이후로 “은혜”(카리스)는 그의 모든 삶을 지배하는 삶의 원칙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도로서의 소명뿐만이 아니라(갈 1:15; 2:9, 2:21; 고전 3:10; 롬 1:5, 15:15~16), 그의 모든 선교적인 존재 및 활동 역시 단지 은혜로서만 간주한다(고전15:9~10). 3장 5~6절은 2장 6b절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표준새번역)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의 사도의 직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혜의 현실에는 “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복음의 행진의 주체는 오직 주님이시고, 사도는 단지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어디에도 인간적인 업적이나 자기 자랑은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므로 참된 사도는 자기를 내세우며, 추천장 같이 인간들에 의해 인정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찬양하는 자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분명한 소명의식으로부터만 가능한 것이다.
2) 사도직의 근거가 오직 은혜임을 아는 사도는 사도직을 부여하신 그 분의 뜻대로 사역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적대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17)이라고 혹평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카페류오(kaphleuvw)는 본래 물건을 팔거나, 이익을 위해 포도주 원액에 물을 타는 행위를 말한다. 즉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을 의미한다.5 이들과 달리 바울은 자신이 순전함으로(신실하게),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서) 말씀을 전하다고 말한다(17). 사도직의 본질이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막중한 사명임을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얻으려거나,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도의 본분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된 사도의 초점은 자신의 업적이나, 자랑이 아니라, 교인들의 변화된 위상에 놓여져 있다. 사도 자신이 얼마나 재능이 있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돌보는 교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바울이 자신의 추천장을 일개 종이쪽지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바로 나의 편지(추천서)다”(2~3) 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참된 사도직을 가름하는 시금석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영적 수준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3:7~18)
1. 본문 주해
앞 단락에서 사도직의 근거를 설명한 후, 바울은 이제 사도직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를 통해 설명한다. 이것은 아직도 모세가 지닌 옛 언약의 영광에 호소하는 적대자들의 도전을 전제하고 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대조는 바울이 6절에서 자신을 죽이는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살리는 영으로 된 새 언약의 일꾼(렘 31:33)으로 소개함으로서 이미 암시된 것이다. 이 때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반영하여 광채가 났기 때문에,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다는(출 34:29~35) 옛 언약의 논증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바울은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의 결론”을 이끄는 랍비의 논증법(a minori ad maius)을 통해 율법으로 대표되는 옛 언약의 선포자인 모세의 직분 보다 복음으로 대표되는 새 언약의 선포자인 바울의 직분이 더 영광스럽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문자에도 선포할 때 영광이 있었고(7), 정죄를 선포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고(8),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도(11) 영광이 있었는데, 하물며 사람을 살리는 영의 직분(8), 의의 직분(9), 영원히 남을(11) 직분에는 얼마나 그 영광이 크고 빛나겠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도직의 영광을 알고, 소망하기 때문에, 언제나 (고난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12). 이러한 바울의 담대함의 근거는 자신이 수건을 가린 모세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3). 담대함으로 번역된 파레시아(parrhsiva)는 본래 자유시민의 권리, 즉 대중 앞에서 연설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의 자유에 기초한 개방성(담대함)은 모세의 수건에 의한 가리움의 속박과 대조를 이룬다. 이 때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이 앞에서 언급한 출애굽기 34장의 본문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 본문에 의하면, 광채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어서 모세가 수건을 쓴 것으로 되어있지만(출 34:30), 바울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건을 썼다고 해석한다(14). 이것은 옛 언약인 율법의 유효성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종결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아직도 유대인들은 옛 언약이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도 회당에서 구약을 읽을 때, 수건이 가려져 있어서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14).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겨질 것이다(15). 유대인들도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 수건이 벗겨질 것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발견할 수 있다(16). 따라서 바울은 새 언약의 특징이 자유임을 선언한다(17). 이 자유는 율법과 그에 속한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며, 이 자유는 주의 영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다(18).

2. 설교 포인트
1) 새 언약의 일꾼은 결국 새 언약의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움 받았다(6).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이 세워야할 공동체는 더 이상 옛 언약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은 그 종말을 고하였다는 것이다(롬 10:4). 물론 모세의 율법도 영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하고, 신령하다(롬 7:12). 그러나 연약한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세력 때문에, 생명으로 인도할 계명이 도리어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다(롬 7:10).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옛 언약의 유효성은 지나갔다. 율법의 종결로 인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는 모든 차별도 폐지된다. 새 언약의 공동체는 보편성을 가진다.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여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영을 받을 때 비로소 자유함을 얻게 되며, 그리스도의 승리의 행진에 참여하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
2) 따라서 이 새 언약의 공동체는 율법이라는 문자가 아니라,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18). 주께로 인도하는 분도 성령이요, 믿는 자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성령이다. 따라서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이란 모든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방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이 주시는 자유함의 결과는 또한 주님의 형상으로 닮아가게 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주는 자유함이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의 형상으로의 변화(성화)를 위한 해방도 의미한다(갈5:13).

새 언약의 일꾼의 임무(4:1~6)
1. 본문 주해
이 단락에서 바울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한다.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긍휼(은혜)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4:1). 하나님이 사도직의 근거가 되시고, 성령이 사역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는 낙심하여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거나, 게을리 할 수 없다(1). 오히려 바울은 순수하고 결백하다. 그는 적대자들이 비난하는 것처럼, 간교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추천장의 문제로 돌아간다(3:1). 바울은 인간의 추천장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이 드러내는 진리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을 내세울 수 있다(2). 적대자들의 추천장과 바울의 추천장의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에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의 교인들도 바울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결국 복음이 거부되는 것은 불신앙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이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져 있다고 완곡하게 표현한다(3). 그 원인은 이 세상의 신, 즉 이 세상을 통치하는 사단의 계략 때문이다. 또한 사단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4). 이 사단의 함정(불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올바른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길 뿐이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무엇을 전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적대자들과 자신과의 결정적인 차이를 밝힌다(5~6).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들을 전하고 있다(5). 인간적인 추천과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만이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참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주님이시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교회를 섬기는 종이 되었다는 사실이다(5). 이러한 복음의 선포야말로 사람들을 구원의 새창조로 이끌 수 있는데, 바울은 이미 이것을 다메섹에서 체험한 바 있다(6). 어두움과 혼돈의 세계로부터 빛을 창조하시되 말씀 하나로 이루신 하나님께서(창 1:3) 사도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주었다는 것이다(6).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하여,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설교 포인트
이 단락에서 얻을 수 있는 설교의 포인트는 참된 사도의 역할 및 임무와 연관된다. 참된 사도의 시금석은 그 선포를 통해 누가 전해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해지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이 전해지느냐라는 것이다. 바울은 5절에서 자신의 임무를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롬 10:9, 14:8~9). 즉 예수의 주되심이 그의 선포의 핵심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하게 하시어 전 우주의 주가 되게 하셨다(빌 2:6~11). 바울의 선교는 결국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온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을 주님으로 알리는 행위이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 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예수가 온전히 주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전하는 자의 인간적인 권위나, 특권은 포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연약한 질그릇(4:7)에 비유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고백의 의미이다(12:9~10).

맺는 말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증한다. 그러나 적대자들과의 대결 그 자체보다도 고린도 교인들을 회복하기 위한 바울의 목회자적 관심에 유의해야 한다. 바울이 그저 자신을 변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도직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자신의 사도직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지도자들은 인간적인 것을 내세우게 되고, 자기 자신이 자랑의 근거가 된다. 심지어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고, 주님이 아니라 자신을 선포하게 된다(4:5).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율법의 문자에 매여 교인들을 정죄하고, 속박하는 행위를 지양하고, 복음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유와 생명을 전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해야 할 복음의 핵심이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임을 확신하였기에, 자신이 예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참된 목회자는 교회라는 현장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의 목회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신뢰하면서 묵묵히 교회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겠다.[object TEXTAREA][object TEXTAREA][object TEXTAREA]

 

:: 필자 정보 - 이승호●영남신학대학교신약학교수
이승호 _ 중앙대학교를 나와 장로회신학대학원(M.Div., Th.M.)과 독일 에어랑겐대학교에서 공부했다(D. theol.). 지금은 영남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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