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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성경신학

바울서신강의1(김세윤교수)

by 금빛돌 2014. 11. 28.

 

<< 개혁신학교 19912학기 강의 녹취록 >>

 

김세윤 교수

 

 

바울서신 // 1

 

 

서론 / 바울의 세계

 

 

바울의 서신 마다의 가장 중요한 issue들이 있어요.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이... 가령 갈라디아서 같으면,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였졌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요. 갈라디아서를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문제요. 고린도 서신들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 복잡한 관계, 이것을 좀 알아야 우리가 본문을 해석할 수가 있어요. 로마서 같으면 가장 중요한 문제란,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 뭐냐? --로마서를 쓴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도 로마서 서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그걸 잘 알아야 로마서를 종합해서 해석할 수 있어요. 이처럼 그 각 서신의 정확한 해석을 위해 가장 중요한 issue들을 중심으로 서론을 공부하기로 합시다.

이 시간은 우선 바울의 세계, 바울의 세계를 좀 간단히 하나의 배경으로 간추려 보려고 그럽니다. , 그러니까, 바울의 세계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로마제국과 그의 유대교의 세계, 이 두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어요.

 

1. 로마제국

누가복음 215절 이하에서 보면,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메시야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로마의 초대 황제 아구스토가 로마 전체에 (세계적인 칙령) 인구조사를 하는 칙령과 연결시켜서 시작을 해요. 아구스토, 옥타비우스 아구스투스가 제국을 통일해서, 세금(인두세, 각 사람 머리당 내는 세금)을 받기 위해서 정확한 인구조사를 꾀했기 때문에, 자기의 통치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호적을 하라는 이런 칙령(勅令)을 내렸는데, 그 칙령과 관계해서 예수께서 탄생하셨다.” 그렇게 시작을 해요.

그래가지고 이제 이 사도행전 28장 끝에 가면, 누가는 예수와 예수 운동에 관한 자신의 두 권으로 된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두 권으로 된 책)을 뭐라고 결론을 짓느냐 하면, 예수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를 주시다.” 라고 로마에서 --곧 아구스토와 그의 후계자들의 수도인 로마에서-- 선포하는 것으로 이 두 권으로 된 그의 책을 종결지어요.

여기에서 보다시피, 이 초대교회의 세계는 로마 제국의 세계였는데, 초대교회의 메시지는 κυριοσ()라고 불리웠던 로마의 황제와 일면 대립 관계를 가지며 팽창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어요. 이 아구스토 시대에 절정을 이룬 로마 제국의 제국주의적 정치는 지중해를 둘러싼 엄청난 영토의 제국을 만들었어요. 동쪽으로 유프라테스강에서 부터 서쪽으로 대서양까지, 북쪽으로 라인강과 다뉴브강에서 북부 아프리카 사막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둘러싼 제국을 건설했는데, 그 대 제국을 헬라어로 οικονομια(오이코노미아) 또는 문명인들이 추구하는 세계 --Aryan(아리아)의 세계-- 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 속에서는 로마의 군대와 로마법 그리고 로마행정이 이루어 놓은 평화가 있는데, 이 상태를 pax-romana(로마의 평화)라 합니다.

로마인들은 그의 제국 내에서 군대의 빠른 이동을 위해서 직선 도로망을 구축했고 그 직선 도로망을 조약돌로 포장해서 결국 많은 도시들, 로마제국의 많은 도시들을 연결했는데, 이것은 결국 로마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과 그들의 문화의 상호 이동과 상호 혼합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로마 군대는 이 군사로()를 정비하고 또 바다에서의 항해를 안전하게 해서 당시 여행이 굉장히 편리하고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 안전한 여행의 보장은 로마제국의 동반부와 서반부를 정치적으로만 연합시킨게 아니고 문화적으로도 많은 융화를 시켰어요.

그래서 떠돌이 철학자들, 그들은 군대나 노예들이나 상인들과 더불어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옮겨 다니면서 자기들의 그 철학사상, 자기들의 종교, 자기들의 관습(慣習), 이런 것들을 전파함으로 당시는 syncretism(혼합주의) --종교적, 문화적 혼합주의-- 가 당시의 팽배한 시류였어요. 당시 이방 로마도시 사람들의 사회적 삶은 우상숭배와 성도덕의 타락으로 특징지워졌어요. 각 도시마다 그 도시가 섬기는 신들이 있었고, 신전들을 짓고 있었고, 그 신전들에서의 예배는 많은 경우 성창(聖娼)을 두고 있었습니다.

덧붙여서 당시 로마제국의 동반부에서는 로마황제들을 신으로 그리고 주(θεοσ, κυριοσ)로 신격화해서 섬기는 이른바 황제숭배 사상이 발달하기도 했어요. 그것은 동양사회에서 귀신들을 신격화해서 황제숭배를 정당화한 관습에 따라 Egypt나 바빌로니아 또 중국이나 우리 한국이나 일본이나 동양사의 어딜가든지 있죠. 우리 한국에서만도... 중국의 황제, 투천자나 일본의 국왕도 천황, 천조대신으로... 에집트의 파라오, 바로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바빌로니아에서도... 이런 사상에 깊이 물든 로마제국의 동반부의 종족들은 로마황제 아구스투스를 시초로 해서 로마황제를 신으로 섬기기 시작하는 이런 황제숭배가 발생하였어요.

고대 모든 제국들이 다 그랬지만 로마 제국도 노예제도에 근거해서 --노예제도를 근거해서-- 세워진 사회였고, 제국이었고, 바울 편지들의 여러곳에서 초대교회의 상당수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노예들이나 하층민에 속했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문화적으로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이루었던 Hellenim(헬레니즘)의 계승자였습니다. 이 헬레니즘이란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지금의 인도의 파키스탄, 그 인도의 서부 인더스강 이서(以西)까지 점령하고, 남쪽으로는 애굽과 에집트와 지중해 남부를 점령해서 이뤄놓은 광대한 제국에, 헬라문화와 헬라인들과 동양인들의 인종적 혼합을 도모하고 --헬라문화와 동양의 문화를 융합시켜서 이루려고 했던 문화를 우리는 보통 헬레니즘이라 그러는데-- 로마 제국은 문화적으로는 바로 (정치적으로도 우리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헬레니즘의 계승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헬레니즘 세계에서의 공통어는 헬라어였죠. 헬라어라 하는데 Koine(코이네) 헬라어가 공통어였고, 헬라의 사상적인 철학사상(헬라의 합리적인 사고)과 기술, 그리고 동양의 종교성들이 융합한 것이 헬레니즘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고린도전서 85절에 보면, 헬라인들은 많은 들과 많은 들을 섬긴다고 말을 하고 있어요. 신약시대의 이 헬라세계는 고전적 헬라 철학, 플라톤주의나 아리스토 텔레스의 古典的 헬라 哲學의 가르침이 무너지고, 그것들이 대중화 하면서 사람들은 더이상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윤리적 관심, 삶의 방식에 대한 관심에로 옮겨져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헬라의 철학 학파로 말한다면 아주 물질주의적인 에피큐리어니즘(Epicurianism) 즉 에피큐러스학파, 스토아(Stoicism), 즉 자연에 순응해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 스토아 학파, 또는 회의주의(Scepticism) 또는 냉소주의(Cynicism) 등등이 그 각자의 철학자들을 배출해서, 이런 철학들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면서 각자의 철학사상을 전파하는 그런 형국이었어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 당시 물질주의적인 사고, 회의주의적인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숙명주의적 사고, 숙명의 힘 앞에, 숙명에 순응해야 할 따름이지 숙명을 거스릴 수 없는 숙명주의적 사고, 그래서 절망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신들과 주들에게서 도움을 얻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자연히 발달한 것이 점성술, 점성술이 발달을 해요.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별들이 또는 그 별들에 존재한다고 보는 신들이 또는 영들이 인간의 운명을, 숙명을 좌우한다고 보고 그 별들 또는 별들에 존재한다고 본 신들을 기쁘게 하는데 그들의 노력을 경주했던 거예요.

그래서 당시에 이 숙명, ‘아낭케’(必然),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 숙명 또는 하이메르메네’(숙명)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중심 개념이었으며,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런 상태에서 자연히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무책임하게 되어서 타락하게 되는데, 이 도덕적인 타락이 또 당시의 큰 특성이었어요. 사람들은 별들에 존재하는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또는 그 신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점성술을 통해서 자기의 운명을 미리 알아보려고 했으며, 운명을, 가령 그 운명이 이제 나쁜 운명이면 --악운이면-- 그 운명을 좌우한다고 본 별, 또는 별들 또는 별들에 있는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magic을 사용했고, 신들에 제사하는 형태의 종교를 발전시켰어요.

이것들이 점차 발달해서 나중에는 神秘宗敎들을 낳았는데 이 신비종교들에서 신을 κυριοσ()라 불렀다는 말이예요. 또는 여신을 κυρια라 불렀고, 또 한편 이들은 이 지식, 비밀지식, Gnosticism(영지주의)적 비밀지식을 얻어서 이 물질적인 세계로 부터 자신들의 영혼을 해방시켜서 신적인 영역으로 진입시킬 수 있다고 본거예요. 그래서 이 영지주의가 발달하게 돼요. 한마디로 당시 이 헬레니즘의 영적, 도덕적 분위기는 회의주의와 숙명주의와 절망의 상태에서 구원자를 간절히 원하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이들은 점성술을 통해서 또 영지주의의 비밀지식을 통해서 신비종교들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어요. 도덕적으로 말하면 숙명주의와 물질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도덕적인 무책임성을 유발시켜서 심한 타락상을 보였고, 일부 신비종교는 성창(聖娼)을 통한 예배를 가르쳤기 때문에 특히 고린도 같은 데서는 아주 심하게 성도들에게 성적인 문란을 일으켰어요.

 

2. 유대교의 세계

그런데 유대교로 말한다면, 두번째로 이제 바울의 세계의 또 한쪽은 유대교의 세계 또는 유대민족의 세계인데, 제일 먼저 말해야 되는 것은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다 헬라 유대교(Hellenistic Judaism)입니다. BC 323년이니까, 알렉산더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이래,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과 그 속의 유대민족은 예수와 바울 당시까지 3세기반 이상을 근 4세기 동안을 헬라 통치자들 아래 있은 거예요. 하스모니아 왕가의 매카비 반란이 성공해서 잠깐 하스모니아 왕조의 통치를 받았으나, 하스모니아 왕조는 아주 헬라화된 왕조였기 때문에 --뭐 그것은 예외로 칠 수 있고-- 3세기 반내지 4세기 동안에 헬라인들의 통치 아래, 유대 민족은 헬레니즘의 세계에 편입되어서 헬라적, 그리고 동양적 이원론, 영과 물질을, 육을 나누고, 빛과 어두움(암흑)을 나누고, 시간과 영원을 나누는 헬라적 또는 동양적 이원론과 신비주의 또는 추상적 사고 이런 것들이 유대교에 침투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팔레스타인에서도 헬라말이 보편적으로 쓰였으며, 아람말과 더불어 헬라말이 보편적으로 쓰였으며, 이 쿰란 문서 같은데도 헬라 사상의 영향을 우리가 확인할 수가 있어요. 보통 우리는 이 신약시대의 유대교를, --여러분들 paper 쓴 것 보니까 영어로 Judaism을 꼭 유대주의라 그렇게 번역을 하는데 유대주의란 말이 아니지, 유대주의란 말이 어디가 있어. 유대교지 유대교. 무조건 주의라 해서 자꾸 유대주의, 유대주의 하는데, 난 유대주의란 말 절대 안써. 항상 유대교라고 하는 데도, 내 과목에 paper 쓰는 사람들 한결같이 유대주의라고 써. 유대주의가 아니고 유대교라 이거야. 유대교.-- 이 신약시대 유대교를 크게 팔레스티나 유대교(Palestinian Judaism)과 헬레니스틱 쥬다이즘으로 나누는데, Palestinian Judaism이란 말할 것도 없이 신약시대에 팔레스티나에 살았던 사람들(유대인들), 헬라어를 이해를 했으나 주로 아람어를 모어로 사용하면서 생각하고 종교문화를 쌓아갔던 사람들의 유대교를 팔레스티나 유대교라 하고, 팔레스티나 밖에 흩어진 이른바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간에 이들에게 헬라말을 모어로 사용하면서 헬라세계에서 이방인들과 이웃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서 성행됐던 유대교를 헬라 유대교라고 그러는데,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지 다 헬라의 철학적, 언어적, 종교적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다 헬라 유대교라, 헬라 유대교. 다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겠지만 팔레스티나 유대교에 헬라적 영향이 좀 적었고, 헬라 유대교에 헬라적 영향이 좀 더 많았겠죠. 그래서 정도의 차이로 이렇게 구분할 수 있으나 원칙적으로 말하면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다 헬라 유대교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팔레스티나 유대인들 간에 여러가지 학파가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하나는 사두개파, 하나는 에센파, 또 하나는 이제 이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유대에는 4개의 학파가 있다, 철학 학파가 있다 해서 유대교의 여러 다른 신학적 경향을 가졌던 이 그룹들을 헬라의 철학파에 견주어서 표현한 데서 지금까지 사람들은 유대교의 이러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데, 또 하나는 네번째 학파(요세푸스가 말하는 네번째 학파)는 열혈당파, 열혈당파가 있다. 그런데 이들의 헬라 문화에 대한 반응이 다 조금씩 달라요. 물론 열혈당파는 헬라의 영향을 될 수 있으면 거부하는 아주 극단의 쇼비니즘을 나타낸 사람들이죠. 에센파가 그 다음쯤 되나. 아까 이야기한대로 에센파의 문서인 쿰란 문서들에 벌써 헬라적인 사고의 영향이 많이 보여지고 있어요. 그 다음에 이제 헬라문화에 대해서 저항을 나타낸게 바리새파 였어요. 바리새파. 사두개파는 신학적으로는 가장 보수적인 파였어요. 모세 5경만을 권위있게 인정하고 그외에 새로 발달된 가르침을 거부하는 신학적으로 그런점에서 극보수, 복고주의적인 자들이었어요.

그러나 이들은 당시에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성전 제사장 통치 계층으로서, 귀족 계층으로서 삶의 양식에 있어서는 과격히 헬라화 되었어요. 헬라의 통치자들과 결탁해서 그들의 사회적 통치 지위를 지탱하고 삶에 있어서 과격히 스스로 헬라화 된 사람들이었어요. 바리새파는 그 율법을 연구하고 그 율법을 정확히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함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중산층 경건운동, 부흥운동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중산층이었어요. 사회계층적으로 말하면 부흥운동, 경건운동, 그래서 원래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제사장들을 위한) 이 정결의 법 또는 성결의 법, 이 레위기의 법들을 일반화하고 대중화 해 가지고 평신도들과 자기들에게 적용을 해서 이스라엘 제사장으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목욕하는게 중요했고, 손 씻는게 중요했고, 성전에서 제사하는 제사장들의 성전을 위한 모든 법칙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이 사람들이 이제 율법에 충실하다. 곧 언약에 충실하다.” 하므로 우상숭배와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자연히 헬라사상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예요. 이 사람들과 같은 경향인데, 다만 조금 더 지독하게 율법 연구와 율법 실천에 바리새파 보다 더 노력했던 사람들이 에센파, 이들은 아마 같은 뿌리에서 나왔죠? 다 같은 뿌리, 중간사 시대의 하시딤과 같은 뿌리인데, 이들은, 바리새파는 유대땅에 머물면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삶, 공동체 삶에 참여하면서 사두개파에 의해 장악되었던 성전의 예배에 같이 참여하면서 일상생활에서 경건운동을 폈지만, 에센파는 BC 165년쯤에 매카비 형제 요나단이 성전의 대제사장이 되어서 --그것도 대제사장 가문, 사독 가문 출신이 아니면서도 대제사장이 되어서, 그것도 시리아의 통치자 알렉산더 발라에 의해서 이방인에 의해서 대 제사장이 임명이 되어가지고-- 성전을 장악하므로 성전이 돌이킬 수 없이 타락했다고 보고 예루살렘 성전과 절교를 하고, 다시 말하면 사두개파와 절교를 하고, 이 쿰란같은, 사막에 동굴에 은거하면서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사람들이예요.

이런 사람들에 있어서 헬라사상은 물론 굉장히 배격이 되죠. 열혈당은 --이런 사람들의 신학적 뿌리에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독립과 다윗왕조 재건을 통한 이스라엘 위에 신정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정치적 행동파 사람들이 열혈당인데-- 이들은 또 헬라사상과 원수관계에 있기 때문에 전혀 타협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팔레스타인, 팔레스티나 유대인들간에 헬라사상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기도 하고 반감을 가지기도 했으나, 심지어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헬라사상을 많이 수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늘날 한국 사람들, 일본 사람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면에서 일본화 되어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사람들의 두 그룹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이제 율법 연구와 율법의 실천, 이게 중요했는데, 이들은 율법에 두 종류가 있다고 봤죠. 두 종류가 무슨 율법이냐면, 쓰여진 율법과 구전된 율법이 있다고 봤어요. 쓰여진 율법은 구약성경, 적게 말하면 모세오경을 말하고, 구전된 율법은 장로들의 전통이나 전승인데, 예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가 예수에게 시비걸죠? 그 장로들의 전통이라고도 불렀는데, 이것은 쓰여진 율법에 대한 해석과 적용의 전통, 전승을 쓰여진 율법이라 하고, 가령 죽은 자의 부활사상을 포함한 종말 사상은 대개 이 구전된 율법에 속했어요. 구약성경에 부활사상이 거의 안 나타난다고 아주 희미하게 나타나요. 다니엘서 12장 같은데 아주 희미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두개파는 쓰여진 율법만 존중했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두개파는 부활을 안 믿은 거지요. 그러나 이 바리새파, 에센파는 두 율법이 둘다 다 모두 모세에게서 주어졌고, 둘다 다 똑같이 권위있다고 봤어요. 둘다 똑같이 권위 있다. 둘다 똑같이 하나님 말씀이다. 실제적으로는 구전된 율법이 쓰여진 율법보다 더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되기도 했어요. 실제적으로...

다음, 이 바벨로니아의 정복이래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 밖으로 많이 노예로, 포로, 당시 전쟁포로는 다 노예라, 전쟁 포로들은 다 노예예요. 그래서 바벨로니아의 정복이래 유대인들이, 후에 이제 알렉산더의 제국이 되고 후에 로마 제국이 되는 그 방대한 지중해 세계 연안에 흩어지게 돼요. BC 586, 7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에 의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가 되었는데, 그러나 그중에 일부만 팔레스타인에 귀환을 해 가지고 다시 성전을 짓고 유대 민족공동체를 다시 이뤘지요. 그러나 다수는 바빌로니아에 남았어요. 그래서 예수 당시까지도 바빌로니아에 아주 중요한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고... 그래서 예수 당시, 예수 이후까지도 이 탈무드,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더 커요. 바빌로니아 유대인들 간에 성경연구를 모아놓은 것이 탈무드인데 바빌로니아 탈묻이 예루살렘 탈묻보다 더 커요. 더 방대해.

또 알렉산더에 의해서 정복되고 그의 후계자들, 에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본거지를 둔 왕조에 의해 정복되고, 나중에는 또 시리아, 안디옥에 근거를 두었던 셀루키드 왕조에 의해 정복되고 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포로, 곧 노예로 붙들려 감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굉장히 큰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알렉산드리아가 당시 로마 다음 제일 큰 --로마 제국에서 제일 큰-- 도시였는데, 다섯 구로 행정구로 나눠졌는데, 그중에 두 구가 완전히 유대구였다고 해요. 유대구...

유대인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돈버는데 재주가 있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재주가 있었어요. 그 당시에 많은 그, 그리고 또 당시나 지금이나 유대교의 특성상 이웃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의 아주 독특한 종교, 당시 고대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민족이었다고. ?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형상없이 신을 섬기는 것이예요. 그들에게는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굉장히 이상한 것이예요. 자기들끼리 또 할례, 할례가 또 당시 이방인들에 의해서 유대인에 많은 조롱거리가 됐다고. 그리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며 살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않고 식사도 같이 않고 스스로 담을 쌓고 --왜 다 불결한 것으로 봤으니까. 그래서 이 아주 배타적인 ghetto(공동체)를 이룸으로, 그런데다가 돈을 잘 벌고 재주는 많고 하니 반유대, 반유대주의 소위 anti-Semitim(반 셈족주의)이 당시 로마세계에서 아주 굉장했어요.

그래서 이 반유대주의는 헬라나 중세 기독교에 의해서만 처음 생긴게 아니고 로마시대 이전부터 아주 고대 때부터 있은거예요. 하여튼 이 알렉산드리아에 다섯 행정 구역의 두 구가 유대구일 정도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이말이예요. 아까 내가 바빌로니아에 커다란 유대 공동체가 있었다고 했어요. 알렉산드리아의 커다란 유대공동체, 오늘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한 300만 산다고 해요. 뉴욕에 유대인이 몇명이나 사는지 알아요? 여러분들? 그 언제 통계를 들었는데 잊어버렸네. 아마 미국에 사는 유대인 전체가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보다 훨씬 많을거야. 뉴욕 한 도시에 사는 유대인만 해도, 통계 다 잊어버렸는데, 하여간 상당히 많아요. 그와 같은 실정이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다고 그래요. 옛날 예수 당시도 그랬어요. 그래서 이 헬라세계의 큰 도시마다 유대인들이 굉장히 많이 살았어요. 고린도, 로마, 안디옥...

그곳에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유대인이 많이 있었어요. 알렉산드리아에 당시 유대인이 한 4만내지 6만정도 살았다고 보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전체 인구와 맞먹는 인구예요. 신약시대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한 5만으로 추정하는데, 알렉산드리아에 4만내지 6만 정도의 유대인이 살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25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AD 30, 오순절 잔치에 로마제국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의 목록이 나오죠. 목록이... 그걸 보면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만큼 흩어졌나 알 수 있어요. 이 로마제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본토 유대교와 아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특히 반세겔 성전세 --성인 남자는 다 내야 되는, 일년에 반세겔씩 내야 되는 성전세-- 를 통해서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그 가족들은 성전의 제사의 덕을 본다고 봤고, 유대교의 여러 순례 절기 때는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았으며, 예루살렘에서 가끔 순회 랍비를 파견해서 헬라세계 여러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일정기간 가르치게 하는 일 등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어요.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으로서 세상의 중심이었으며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곳이었기에,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젠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 거기서 살다가 예루살렘 거룩한 도성에서, 되도록이면 성전에 가까운 곳에서 살다가 죽고 거기에 묻히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어요.

당시 유대교회에 가면 세상을 10개의 동심원으로 나눠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중심으로 한 거룩의 도에 관한 10개의 동심원으로 나누어서 지성소에서 머리 갈수록 멀리 퍼질 수록 거룩의 도가 적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 사이에 사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개, 돼지에 불과한 이방인, 더러운 자들과 같이 산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돈을 많이 벌면 성전 가까이서 거룩한 성전 가까이 살다가 죽는 것을 큰 꿈으로 생각했어요.

이들에게는 바빌로니아 포로기 때부터 점차 발달하는 이 synagogue(회당)가 삶의 중심을 이루었어요.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좁은 의미의 종교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삶 전체, 이들의 삶 전체의 중심이였어요. 그래서 이 회당은 이들에게 예배의 처소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이기도 하고, 시민 회관 노릇도 하고, 여행하는 유대인들에게 여관 노릇도 하고 심지어 직업 알선소 노릇도 했어요. 이 회당에 안식일마다 모여서 예배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당시 이방인들에게는 아주 이상하고 새로운 것이었어요. ? 아까 이야기한대로 형상이 없어요. 예배한다는 신의 형상이 없어. 둘째로 제사를 하지 않아요. 반면에 유일신 사상, 그리고 높은 도덕적 수준이 당시 이방인들의 눈에 띄였어요. 그래서 진지한 이방인들이 자연히 유대인들의 이 회당에서의 예배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의 회당의 예배에 가끔씩 참여하는 자들이 늘게 되었어요.

이런 자들을 God feared라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고 했어요. 헬라말로 δεομενοι(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고 하는데, 사도행전에 가끔 이 말이 나와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그러니까 이들은 누구예요? 이방인들이라. 이방인들로서 유대교에 흥미를 느끼고 유대 회당에, 예배에 유대인들과 함께 참여하는 자들, 이들 중 일부는 이제 유대교에 더욱 심취해서 아예 할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개종자가 되기도 했어요.

개종자(προσηλυτοσ), 영어로는 ‘proselyte'라고 하는데, 이들은 개종자라. 이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이방인들로서 유대교에 심취해서 할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 된 사람, 개종자. 할례를 받은다는 것이 왜 유대인이 되는 거야? 할례가 뭐예요? 언약의 표징이지. 그래서 언약의 백성으로 언약의 백성에 들어감을 나타내는 할례를 받음으로써 개종자가 되는 자들도 더러 있었어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당시 유대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간에 많은 조롱감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에서 조롱받게 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할례라고 했어요. 어렸을때 할례를 받은 것은 괜찮은데, 성인이 되어 가지고 할례를 받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과정이었고 할례를 받다가 죽기도 했어요. 가끔씩. 오늘날같이 보건 위생이 철저하지 못한 사회에서.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할례를 받으면 그 이방인의 공동체에서 거의 고립돼요. 거의 따돌림을 받는다고. 그래서 정상적인 사회 생활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돼요.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항상 이 할례를 받은 이방인을 자기들 중의 하나로 항상 환영했느냐! 꼭 그런게 아니예요. 특히 AD 70년에 로마제국에서 여러 유대인들이 완전히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포로, 노예들로 잡혀가고, 팔려가고 이런 판에, 이방인들에 대해 아주 치를 떨고 이를 갈고 있어 가지고 이것이 신학적으로도 반영이 되어서 AD 70년 이후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절대로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할 정도였어요. 심지어 이 προσηλυτοσ(개종자), 할례받은 이방인도 구원 못 받는다. 기껏해야 유대인들 종노릇이나 한다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개종자들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거리낌 없이 환영받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물론 좀 더 자유주의적인 랍비의 가르침도 있죠. 가끔씩... 그래서 좀 넓은 마음 가진 유대인들에 있어서 이런 사람을 환영한 사람도 있었겠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종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어요. 그런데 개종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으므로,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냥 할례는 받지 않고 유대 회당에 참여해서 야훼를 예배하고,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을 준수하는 정도로 유대교에 실행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방인들 간에... 이런게 이제 바울의 선교에 다 중요하죠. 바울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목표로 선교하기 시작하고, 모여 있는 회당을 근거로 선교를 하게 되는 것이 이런게 다 되돌아보면 신약의 교회, 기독교의 선교 입장에서 보며는 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섭리의 산물인 것 같기도 해요.

학자들간에 논란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당시 로마제국에서 유대교가 이른바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이 됐느냐 안됐느냐, 얼마전까지만 해도 유대교가 당시 로마법에 의해서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했어요. 근데 요새 와서 학자들은 로마법이 유대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한 일은 없으나, 로마의 통치자들이 유대인들을 되도록이면 그들 종교를 간섭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그 지혜를 터득해서 유대인들에게 많은 특권을 그냥 허락했다. 특권을 누리도록 그냥 묵인했다는 정도로 이해를 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군대에 안가도 되었고, 황제 숭배에 참여 안해도 되었고, 유대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핍박받는게 없었고, 이런 많은 특권을 허락 받았다. 이것도 중요해요.

가령 바울이 AD 50, 51, 52, 51년 겨울에 고린도에 갔다구. 거기서 누구 앞에 끌려가요? 갈리오 앞에 끌려가요. 로마의 총독 갈리오 앞에 끌려가요. 죄목은 로마법에 위배된 종교를 퍼뜨렸다. 갈리오가 재판을 한 결과 바울은 유대교의 일종을 전파한거다. 그래서 무죄석방이 돼요. 그래서 바울의 복음이 유대교의 일부로 인정이 되어서, 로마법을 저촉한 것이 아닌 것으로 해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게 되어요. 그러나 70년 이후는 상황이 달라져요. 그래서 이제 기독교가 더이상 유대교의 일부가 아니라 해서 로마 관리들에 의해서 정식으로 핍박을 받게 돼요.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나 디아포라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회당은 두 개의 기둥이었어요. 당시 유대교의 두 개의 기둥. 성전이 유대의 종교와 삶의 중심이기는 하였으나, 바빌로니아 포로기 때부터 발달하는 회당이 유대 삶에 점점 더 중요성을 띠게 되었어요. 그래서 회당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을 배우는 처소로, 예배 처소로, 그리고 학교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어요. 신약시대의 유대교는 성전의 제사와 율법 연구와 실천을, 두 개의 중심을 가진 이런 타원형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신약시대 유대교는... 그런데 이제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됨으로 자연히 유대교는 율법만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는 종교로 탈바꿈을 해요. 그런데 이 율법을 어디서 공부하고 어디서 실천하느냐? 회당에서. 그래서 율법 중심의 종교, 곧 회당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을 해요. 그런데 이 회당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공부하는 이 전통이 점차 랍비, 학교의 발달을 가져오는데, 후기 랍비 전통은 Talmud, 탈무드의 전통은, 예수와 바울 당시 곧 신약시대의 랍비 학교를 두 학파로 간추려서 표현을 해요.

그중에 하나의 학파는 샤마이 학파였고, 또 하나는 힐렐 학파로 간추려서 표현을 해요. 그래서 여러 후기 랍비들의 계보를 샤마이 학파와 예수 당시의 신약시대, 샤마이 학파와 힐렐학파로 소급해서 따지는데 원래 이 힐렐은 샤마이의 제자였어요. 샤마이 학파는 아주 보수적인 학파요, 이방인들과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이방인들을 환영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보수적인 학파였고, 힐렐학파는 자유주의적인, 인간성이 풍부한...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있는 학파였다. 힐렐 자신도 원래 바빌로니아에서 온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배우려고 샤마이 학교의 샤마이 집의 돌담에 걸쳐서 서당개 풍월 배우듯이 율법을 배웠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는 이 두 학파가 보수, 자유, 진보적으로 아주 적대 관계에 있게 되는데, 그래서 나중에 탈무드를 만든 랍비들은 이쪽 계열에서 나와요. 이쪽 계열(힐렐학파), 그래서 탈무드에 보며는 샤마이 학파를 많이 욕을 한다고, 욕을. 이쪽 계열이 결국 승리하는 --주도적인 랍비학파가 되어서 이쪽의 가르침이 많이 남아있어요.

그중에 하나 이런게 있다고. 한 이방인이 샤마이한테 와 가지고 내가 유대교로 개종하고 싶소, 당신이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을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내가 유대교로 개종하겠소.” 그랬다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율법이 너무 복잡해 이방인들에게는. 그러니까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다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요약해 달라 이말이예요. 여러분들, 한 발로 몇시간이나 서있겠어요. 그러니 샤마이가 몹쓸놈이라고 몽둥이를 들고 쫓아버렸다 이거야. 이 사람이 힐렐 앞에 왔어. 힐렐 보고 똑같이 말을 했어. 힐렐이 , 그거 간단하다.” 율법은, 예수께서 가르치는 황금률 있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쳤죠? 힐렐은 그것의 부정적인 표현 남으로 부터 당하기 싫은 대로 남에게 하지 말라 그게 율법의 전부라, 그것을 알면 네가 율법 다 안거다.” 라고 가르쳤다는 거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어요.

힐렐은 그 같은 가르침을,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는 가르침을 부정적으로 표현했어요. 아주 유대교적인 발상이지. “남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남에게 따귀맞고 싶지 않으면 너도 남 따귀 때리지 말라.” 그 소리예요.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가르쳤어? 적극적으로 가르쳤다고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우리도 남한테 사랑받고 싶지? 그런대로 우리가 남을 사랑하라.”고 했어요.

또 하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힐렐은 이렇게 인간성이 풍부하고 특히 이방인들에게도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 말이 바벨론의 탈무드라는 곳에 전승이 된다고 해요. 그런데 하여간 두 학파, 그러나 예수 당시에 단순히 두 학파만 있었던게 아니고 여러 학파가 있은 거지. 여러 학파가 나중에 탈무드에서 예수 당시의 토라 연구와 그 학파의 경향을 두 가지로 간추려서 표현을 한다. 그런데 이제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 예루살렘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되므로 자연히 유대교는 이 원래 유대교 --구약의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유대교였어요. 성전에서 제사하고 그 제사를 통해서 용서를 얻고 성전 중심으로-- 대신에 바벨로니아 유대교가 이렇게 발달하지요. 바벨로니아에서는 성전이 없으므로 회당에서 예배하고 율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고. 그러나 이제 팔레스타인에 돌아와서 다시 성전을 재건해서 성전의 제사가 중심이 되면서 동시에 율법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이 운동, 경건운동이 있었죠. 그것은 이런 모티브였는데 성전이 다시 파괴됨으로 이제 완전히 율법의, 율법(경전) 중심의 종교가 돼요.

그래서 AD 100년쯤에 쟘니아, 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의 쟘니아? 또는 예브네라고 그래요. 예브네라는 항구도시에서 요하난 벤파카이(?) 위대한 랍비의 영도 아래 랍비들이 모여가지고 당시 그전까지의 유대 랍비들의 율법의 가르침을 모아 가지고 일단, 구약의 정경, 구약의 캐논(canon)을 확정하고 당시 랍비들의 율법의 가르침을 항목별로 법제화한 것이 Mishnah를 확정했고, 미쉬나에 대한 학자들의 토론의 전통, 그것을 Talmud라고 하는데, Talmud를 발전시키게 돼요. 이렇게 됨으로써 AD 70년의 성전 파괴로 말미암아 점차 율법 중심의 종교가 되는데, AD 100년쯤에는 완전히 구약의 정경, 구약의 정경과 구약의 가르침을 항목별로 율법 책에, 구약에 기술한 율법들을 항목별로 법제화한 미쉬나로 완전히 이제 율법 종교로, 율법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하게 돼요.

그런데 바로 이 100년쯤이 언제냐 하면, AD 70년이후 이와 같은 유대교의 발전은 동시에 같은 구약, 같은 구약에 뿌리를 둔 기독교가 전혀 새로운 종교로 인식되게 되는 그런 과정이예요. 원래 아까 내가 이야기한대로 바울 선교 때만 해도 바울도 그렇게 주장했고, 다른 모든 신약의 저자들도 이 자기들이 선포한 복음이 무슨 새로운 종교로 시작한다고 본게 아니예요. 구약과 유대교의 완성으로 본 거죠. 구약과 유대교의 완성으로... 더구나 유대교가 이렇게 탈바꿈하는 이 기간에 유대교가 점차 --기독교는 그전부터, 바울 당시부터 기독교를 이단으로 취급하고, 유대교 일부로 보지 않고 배척하는데-- 이때쯤 오면 기독교 자체 내에서, 교회 자체 내에서도 더 이상 우리는 유대교가 아닌 진정한 구약의 완성이나 더 이상 유대교가 아닌 별개의 종교로서의 自己 이해를 갖게 돼요. 그래서 이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에서 율법중심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독특한 Identity, 별개의 Identity를 가진 별개의 종교로 발전하는 기간이 같아요. 이런 기간에 발전하게 돼요.

 

3. 종합

대충 이런 상황이 바울과 바울의 세계였는데, 이런 세계가 지금 우리가 설명한, 우리가 살펴 본 몇가지의 로마 헬라 세계와 유대교의 세계가 바울의 선교, 신약시대의 선교, 특히 바울의 선교에 결정적으로 공헌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44절 그 첫반부에 있는 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을 지금 이야기 하는데, 그 하나님의 구속의 사건이 언제 일어났다고? “때가 차매”... 그 말이 원래 헬라어로는 πληρωμα때의 충만함이 이르매, 충만함이 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때의 충만함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거해서 그가 그의 선조들을 통해 약속한 구원을 이루기로 한 그 때,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한 모든 여건이 성숙되었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의해서 내다 본 그 구원이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 되었을 때 라는 그런 말이겠죠. 그러나 꼭 그것이 인간 역사 속에서, 그렇다면 어떤 흔적들을 나타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해서 당시 헬라 세계와 유대 세계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여건들이 혹 이때의 πληρωμα와 관련 있지 않겠나 생각해서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요건들을 생각해 본다고.

첫째로 아까 이야기한 Pax-Romana, 통일된 로마 제국과 하나의 정치적인 unity, 평화, 그 다음에 비교적 공정한 로마의 재판관, 행정관이 없었으면 선교 못했다고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나 그 지역의 이방인들에게, 두들겨 맞아 죽었다고요. 비교적 공정한 로마 관리가 없었으면 빌립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요. 거기서 두들겨 맞아 죽거나 그래서 Pax-Romana, Pax-Romana를 지탱했던 직선도로와 포장된 도로, 그리고 안전한 도로, 그리고 안전한 항해로, 항로. 로마인들은 선교사들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이용되었느냐 이말이예요. 지금도 유럽에 가면 로마 도로가 있어요. 직선도로, 조약돌로 포장해 놓은 도로들이 있죠.

그 다음에 도시들의 발달, 사상과 종교적 신념들의 자유로운 교류, 아까 이야기 했죠? 헬레니즘, 알렉산더가 이룩한 헬레니즘의 전통은 각 민족들의 사상과 종교들에 자유로운 교환, Koine 헬라어, 제국의 언어로서의 공통 언어, 이 헬라어가 없었으면 어떻게 선교했겠어요. 여러분들 지금 선교사 간 사람들 말 배우느라 고생들 하죠. 여러분들이 이 헬라어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어디가서나 헬라어로 선포한거요. Koine 헬라어. 알렉산더가 이룩한 헬레니즘의 세계에서 공용어가 된 헬라어.

둘째로, 그 다음에 중요한게 유대인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바울의 선교의 거점 노릇을 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들의 회당, 바울이 어느 도시에나 가면 어디에 먼저 가요? 유대 회당에 먼저 간다고. 아까 회당이 무슨 노릇 했다고? 여행하는 유대인들에게 여관, 여관방 노릇을 해서 거기서 잠을 자고 안식일 되면 다 회당에 예배하러 모이지. 여기 제일 뒤에 누가 앉아 있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앉아 있다고, 이방인이. 회당에는 당시에 목사가 없었어요. full time 목사가 없었다고. 회당장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마 예배를 인도했었던 모양이야. 어떻게 인도하냐 하면, 나중에 이제 신약 당시에 이 ‘lectionary’라는 것. 152 안식일 날, 각 안식일에 읽어야 할 토라, 모세 오경 한 본문, 선지서 한 본문... 이렇게 읽도록 정해놓은 본문 listlectionary라고 하는데, 이게 유대교에서 발달한다고. 교회가 나중에 이걸 이어 받아요. 그런데 예수 당시에 벌써 있었다고, 바울 당시에 벌써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하여간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회당장이 그 안식일에 읽도록 지정해진 구약의 본문 한 구절을 읽어요. 읽고는 우리 중에 혹 이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위로나 권면을 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라, 나와 봐라.” 그런다고. 그러면 바울이 여기 이렇게 앉아 있다가 옳다, 됐다.’ 하고 나간다고. 나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여러분들이 읽은, 여러분들이 들은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성취되었노라.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약속한 그 구원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노라하고 복음을 선포한다고. 복음을 선포해요. 그러면 이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마음이 좀 넓은 사람들이라 정말 일리가 있는데, 그 좀 더 들어보자.” 그러기도 하지만, 대부분 유대인들은 저 이단자 나왔다. 이단자, 못된 놈 나왔다.”고 쫓아냈다고. 이 이방인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들어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죽음을 통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가릴 것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단 말이야. 자기들은 여기 회당에 100년 아니라 죽을 때까지 참여해도 구원이 있는 둥 마는 둥 잘 모른다고. 그런데, 바울이 그러는데 구약 이사야의 말의 성취인데, 자기들에게도 똑같은 구원이 있다고 하니 바울, 당신 우리 집에 좀 잠깐 갑시다. 다시 한번 좀 이야기해 봅시다.” 이렇게 해서 바로 회당 옆에 교회를 세운다고. 누구를 중심으로? 이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린도 교회도 이랬다고. 고린도 교회도 이렇게 세운거예요.

이렇게 바울이 회당을 거점으로 바울이... 아까 회당에서 뭐라고 했죠? 직업알선소 노릇한다고 했죠? 직업알선소. 그래서 바울이 나 천막 만드는, 가죽 다루는 사람인데 혹시 그 어디좀 알선하쇼.” 하면 여기서 , 우리 동네 유대인 하나 있는데 로마에서 막 올라온 브리스길라 그 사람들의 천막 회사라고 있는데 거기가서 한번 취직해 보라.”고 그랬죠. 바울이 거기가서 취직을 해가지고 돈을 벌면서, 자기 생계를 벌면서 회당에서 복음 전파해 가지고 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한 거예요. 이게 바울의 선교 패턴이라고. 그러니까 이 유대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들의 희망, 그들 가운데 있었던, 이미 구약을 잘 배워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귀를 가진 이방인들, 이들이 없었다면 생판 여호와가 누군지 아무 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파한다는 것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어렵겠는가? 이들은 아주 이미 잘 마련된, 유대 회당에서 율법, 구약성서를 공부, 잘 마련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바울 선교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어요. ?

셋째로, 또하나 당시 아까 이야기한 헬라세계의 숙명과 절망의 분위기, 영적 분위기, 그래서 구원을 갈급하는 분위기, 또 유대인들로 말한다면 수백년동안 이방인들의 짓밟힘을 당한 가운데에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상황, 이런 것들이 신약과 바울 선교에 큰 역할을 한 세개의 일반적인 조건들이었어요.

이런 모든 조건들이 다 신약의 선교. 특히 바울의 선교에 성공, 성공에 기여한 요건들이었다. 이말이예요.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바울이 갈라디아서 44절에서 시간의 충만함이 왔을 때에, 그것은 혹시 당시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이런 여건들을 갖춘 상황을 혹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정한 그 때이겠지만, 그것은 일반 역사에서는 그런 요건들로 특징을 갖춘 때가 아닌지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이말이예요.

자 그러면 바울의 선교의 세계를 간단히 그것으로 마치고 이 다음 시간에는 바울 서신으로 들어가죠.

 

 

 

 

 

 

 

 

 

 

 

바울서신 // 2

 

 

갈라디아서 1

 

 

 

 

1. 수신자에 대해서

첫째로 갈라디아서가 어디에 보내졌느냐? 이른바 바울의 제1차 선교 여행중에 세운 로마의 행정 지역으로서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그러니까 사도행전 13-14장에 보고되어 있는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중 바울이 세운 교회들 곧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의 교회들)에게 보낸 것이냐, 아니면 갈라디아 인종의 영토에 있는 교회에 보내어진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갈라디아 인종, 종족들의 영토는 지금의 터어키 북부인데 지도를 가지고서 처음에 이야기한 갈라디아와 두번째 이야기한 갈라디아를 한번 찾아 보십시오. 처음에 이야기한 설을 남부 갈라디아설이라 하고(, 바울이 로마의 행정지역으로 있는 갈라디아 교회에 이 갈라디아서를 보냈다는 것), 두번째설은 바울이 갈라디아 종족들의 영토에 있는 갈라디아 종족들에게 보낸 것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은 북부 갈라디아설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갈라디아인이라는 소리가 로마의 행정적 지칭이냐 아니면 종족적 지칭이냐 하면 잘 모른단 말입니다. 그래서 행정적 지칭설 이라고도 하고 종족의 영토설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편리하게 남부 갈라디아설, 북부 갈라디아설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서의 서론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따라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여졌는가가 일부 결정이 됩니다. 또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여졌는가가 중요한 이유는 바울의 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재 구성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데 증거가 양쪽으로 아주 균형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것을 다 하기로 한다면 시간이 너무 가니까 여러분들이 ? 이나 ? 그런 책들을 읽어보고, 최근에 이 문제를 제일 포괄적으로 다시 다룬 것은 F.F. 부루스의 갈라디아서 주석인데 아주 자세히 다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읽어 보십시요. 양쪽을 지지하는 논증들이 팽팽히 맞서 있어서 어느 하나가 상대편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우세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할 수 없이 선택을 해야 되는데, 어느설이 과이 더 그럴듯하다고 해야 되는데 그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F.F. 부루스가 강력히 주장하는대로 남부 갈라디아설이 저울추가 좀더 기울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더구나 사도행전에 보면 남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대한 언급은 많으나 이른바 북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바울 시대를 두고 말한다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바울이 여행한 것도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거기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더더구나 알지 못하고 이런 이유들로 잠정적으로 남부 갈라디아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2.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정황

, 그러면, 이제 이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여졌느냐 하면,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정황을 살펴보면,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침투해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거짓 복음으로 설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16-9절까지에서 그리고 510-12절까지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거짓 선생들이었고 그들의 복음이(바울이 거짓 복음이라고 하는데) 무엇이었느냐 하면, 외적 증거(사도행전이나 초대교회의 역사 같은)가 전혀 없으므로 우리들은 이 문제들을 갈라디아서로 재 구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들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에서 재 구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갈라디아서, 곧 바울의 답변에서 재 구성할 수 있는 이들의 특징은, 첫째로 갈라디아서 2:16, 3:2, 4:21, 5:4절은 이들이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 율법과 유대 예식을 지키도록 설득한 것을 시사합니다. 5:2, 6:12-13절은 그들이 갈라디아에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할례를 요구한 것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특히 갈라디아서 1-2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이 인간으로 부터가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으로 부터만 유래한 것을 강력히 변증하고 특히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독립적인 것을 강력히 변증하는 것은, 이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복음과 다른 복음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복음을 공격하고 바울의 사도직을 무효라고 공격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을 공격했다는 것이 두번째이고 세번째로 갈라디아서 48-10절까지는 갈라디아인들에게 한 στοιχεια라는 말을 초등학문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것을 초등 학문이라고 해석을 해야하는지 아니면 이 세상의 원초적인 신들 이라고 해석을 해야 하는지 학자들(주석가들)간에 논란이 많습니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원초적인 영적인 신들이라고 해석을 해야 하는지 주석가들간에 논란이 많습니다. 아니면 초등학문 이라고 해석을 해야하는지... 왜 그러느냐하면, 분명히 영적인 신들로 바울은 지칭을 하는데, 바울은 율법도 στοιχεια일부로 친다고 갈라디아서 4:8-10, 여기 στοιχεια가 초등학문이라고 번역된 것에 이어서 그것에 예속된, 노예된 그러니까 사람들을 노예로 사로잡는 신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어서 날, , 절기 이런 것을 말합니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생각했던 하늘의 별들에 존재한다고 보았던 악령들을 포함한 우주의 이 원초적 신들, 인간들에게 적대적이고 인간들을 죄와 고난과 죽음에 굴종시키는 그런 신들, 그러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런 신들을 어떻게 잘 달래서 자기들의 고난을 면하게 해주는 그런 신들이라고 해석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초등학문 아주 기초적인 도리로서 바울의 자유의 복음과는 반대되는 율법을 지켜서 의를 얻으려고 하는 그런 기초적인 도리를 말하는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니면 둘 다를 말하는지...

그래서 영어 번역을 보면 elemental thing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간 갈라디아인들이 이런 στοιχεια에 되돌아 가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513-26절까지는 바울은 그들의 자유를 육신을 위한 신으로 주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육신의 열매들에 대조적인 성령의 열매들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세 가지 경우의 데이타을 관찰했는데, 이 세 가지 경우의 데이타에서 전통적으로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은 유대주의자들(Judaizers)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취급하는 문제는 이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설득하는 문제를 대항해서 다투는 것이다 라고 본 것이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데이타를 염두에 두고 어떤 학자들은 가령 독일의 Lüte, 금세기 초에 하바드에서 가르쳤던 로옵스같은 사람들은, 이 갈라디아서의 유대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자유주의자들도 (방종 주의자들이라 할까, libertines)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성령의 체험이 그들의 물질 또는 육신의 영역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자유 방종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헬라의 영과 육의 이원론에 의해서 이들이 성령을 체험하고는, “아하 이것은 벌써 우리가 영의 영역에 도달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미 영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지식, 헬라 사람들이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지식을 우리가 획득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 더이상 육신은 우리를 제어하지 못한다. 또는 육신의 영역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구원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육신의 영역에서 아주 방종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양 전선에서 싸운 것이다. 한 전선에서는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고, 반대편 전선에서는 방종주의적 성령파와 싸운 것이다고 이렇게 양 전선론을 폈습니다.

그러나 또 일단의 학자들은 바울이 양 전선에서 싸운다고 하는 이론에 만족할 수 없다고 보고, 세번째 데이타를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 이 갈라디아의 거짓 선생들은 혼합주의적 유대인들로서 유대 율법과 할례를 지킬 뿐만 아니라 점성학에서 말하는 별들의 신들을 숭배하고 점성학의 월력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까 제일 첫번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전통적인 견해는 갈라디아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었다는 견해, 두번째는 유대주의자들도 있었고 방종주의자도 있었다는 견해, 세번째는 유대주의와 방종주의가 따로 따로 있었던게 아니고 혼합 주의적 유대인들로서 이들은 유대의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사상과 헬라 세계의 점성술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높은 지식을 얻는다는 사상을 전한 자들이었다는 것인데, 이 세번째 견해를 가진 학자가 발터 슈미타스 입니다. 볼트만의 제자로서 신약의 거의 모든, 특히 바울 서신의 거의 모든 것을 영지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발터 슈미타스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이 투쟁하는 거짓 선지자는 영지주의적 유대인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상 세 가지 갈라디아서에서 확보할 수 있는 데이타를 세 가지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을 지금 설명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제일 타당할 것인가? 갈라디아서 41-10절까지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이 유대 율법을 지키는 것을 στοιχεια에 대한 노예들이라고 지칭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10절까지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복음(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στοιχεια’(초등학문?)에서 해방이 되었는데 다시 στοιχεια노예들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두고 구체적으로 στοιχεια의 노예들로 되돌아 가려고 한다고 하느냐 하면, 그들이 유대의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행위, 그러기 때문에 410절에 나오는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도 헬라 세계의 점성학적 월력이 아니라, 유대 월력(유대 특별 절기를 나타내는)을 지칭하는 것 같다는 것, 나아가서 513-26절까지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곳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이 자유 방종주의를 주장한다기 보다는, 바울이 그 편지 전체(5장 앞부분까지)를 통해서 율법의 얽매임으로 부터의 그리스도의 자유를 강력히 천명하고는 자기의 이와같은 가르침이 자유 방종주의로 해석 될까봐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로마서 61절 이하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갈라디아서 5:13-26절까지에서 바울이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삼지 말라, 육신의 욕구대로 허락하면 너희들이 이따위 열매를 맺는데 그러면 안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들과 요런 사람들은 다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이 자유 방종을 주장했구나 해서 바울이 그것을 막고 있구나 이렇게 유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에서 줄곧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주의에 대항해서, 그리스도 복음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나 편지 끝에쯤 와 가지고 바울이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이 자유 방임주의적으로 갈라디아인들에(원래는 헬라인이었던 그들) 의해서 왜곡 해석 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끝머리에 가서, 의인된 사람은 곧 성령받은 사람인데, 성령받은 사람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야 된다고 경고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번쩨 데이타는 거기 침투한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도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을 설명하다가, 아 그러면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있겠구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이 된다면 죄를 더 저지르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 클 것이 아니냐?” 그것에 대해서 바울이 답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 그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기 보다는, 자기 복음의 전개 과정 중에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변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보다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경고를 해야 할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의 적대자들이 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복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한다고 공격했을 것이므로 이렇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논쟁을 벌이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러한 경고를 첨가할 필요성을 더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은 유대주의자들이고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루는 문제는 그들이 갈라디아에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고 유대 율법을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옳은 것 같다는 말입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교리 곧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어야(할례가 무엇이냐 하면 언약의 표징입니다) 언약의 백성으로 편입이 되어야 언약의 성취로 하나님께서 보낸 메시아 예수의 구원의 덕을 볼 수 있다고 유대주의자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원래 순서인데, 이 못된 친구 바울이 제가 다메섹에서, 사도였다고, 예수를 봤다고 주장하면서 이방 땅 온갖 곳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 하니 이거 큰 문제가 났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바울의 선교지를 뒤따라 성급히 돌아다니면서, “지금 순서가 다 뒤틀렸는데 지금이라도 더 늦기전에 빨리 할례를 받고 우리들이 가르치는 대로 예수를 믿어야 언약의 백성에게만 효력이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게 되는거다.” 이렇게 갈라디아 사람들을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들대로 논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Issue가 뭐가 되요? 그리스도의 사건이 새 언약의 제사로서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냐? 아니면 옛 언약의 성취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냐? 말하자면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기독론적, 구원론적 논쟁이 담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에서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은 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면서 불가피하게 바울의 복음과 바울의 사도직이 무효라고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승 받아가지고는 그 복음에서 할례와 율법의 의무를 제거하고서 인간들에게 믿기 쉬운 복음으로 즉 인간적인 복음으로 탈바꿈 시켰다, 변질 시켰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복음은 헛된, 변질된 복음이고, 바울이 거짓 복음을 선포하는 한 그의 사도직은 헛된 것이다.” 이렇게 주장을 한 것 같습니다.

 

3. 바울의 반증

그러니까 바울이 갈라디아서 1-2장에서 뭐라고 논증하나요? 갈라디아서 1-2장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이 주장하는 바의 전제부터 틀렸다.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 부터 복음을 받고 사도직을 받았는데, 그리고는 그 복음을 변질 시켰다고 그러는데, 이방인들에게 믿기 쉽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할례와 모세 율법을 변질 시켰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전제부터 틀렸다. 내가 사람들부터 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을 통해서 받은 것도 아니다.” 라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갈라디아서 11절을 읽어봅시다. 다음에 111-12절을 또 한번 읽어 봅시다. 이 양쪽에서 바울은 무엇을 주장합니까? 자기의 사도직과 복음이 사람으로부터도 아니고 사람으로 기인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매개체로 중보자로 사람을 통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음을 곧 신적 기원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이 거짓 선생들 그러니까 유대주의자들 자신들은 아마 예루살렘 교회의 과격파를 대표하는자 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요구하지 않는 이방 선교를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던 예루살렘 교회의 과격파를 대표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말하면 24절에 나오는 거짓 형제들, 바울이 아예 크리스찬이라고, 형제라고도 인정하지 않는 예루살렘 교회 내의 거짓 형제들, 이방선교를 반대하고 나섰던 예루살렘 교회의 극소수 주의자들을 대표했던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자신들이 불리움 받았다고 주장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특히 시카고에서 가르치는 로버트 조이스라는 신학자가 주장한 바인데, 이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 교회들에 다니면서 할례를 요구하고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것이 혹 AD 40년대 말부터 일어났던 열혈당 운동의 압력과 관계했지 않느냐? 시기적으로 갈라디아서가 48-9년쯤에 써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때가 어느때냐 하면 팔레스틴에서 열혈당 운동(아주 국수주의적인 유대 운동)이 폭발을 향해서 가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들의 압력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극보수화 되고 이방인들에 대해서 아주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이방인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일파가 바울의 교회에 다니면서 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열혈당의 압력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바울은 이 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키고 있는 문제가 자기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개인적 도전으로만 본 것이 아니고 복음의 진리에 대한 공격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 복음의 진리를 방어함에 있어서 또는 변증함에 있어서 첫째로 그의 복음과 사도직이 하나님으로부터만 유래함을 강력히 주장했고, 둘째로 자기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독립적임, 곧 그의 복음과 사도직을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부터 받지 아니하고 직접 하나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을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복음에 대한 공격의 전제부터 틀렸다. 내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복음과 사도직을 받은 일이 없다. 내 복음과 사도직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니까 1장과 2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사도직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으므로 진리인데, 그것은 예루살렘 사도들도 인정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세 가지중에 첫번째와 세번째를 갈라디아서 1-2장에서 논증을 합니다. 즉 앞에 이야기한 세 가지, 그의 복음과 사도직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독립적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사도들이 그의 복음과 사도직을 인정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1-2장에서 논증을 합니다. 1-2장에서는 바울이 사도직과 복음의 참 됨에 대한 형식적인 논증을 합니다. 그리고 3-5장까지에서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 그래서 예루살렘의 기둥 사도들도 인정한 이 복음의 내용, 그 내용의 참 됨을 설파했습니다. 1-2장에서 자기 사도직과 복음의 참됨에 대한 형식적인 논증 3-5장까지는 자기 복음의 내용의 참 됨을 신학적으로 논증합니다.

 

4. 기록된 연대

이상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정황이고 이제 그러면 갈라디아서가 언제 쓰였느냐 하는 연대가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연대를 잡는 것은, 바울 신학과 초대 교회의 역사의 전개 과정을 재 구성하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가령 바울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의인됨의 도리가 바울의 선교 초기부터 그의 복음의 진수를 이룬 것이었느냐, 아니면 단지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의 과정에서 비로소 발달한 도리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 하면 종교 개혁자들이 말했던 대로 은혜로, 믿음으로 의인됨이냐 아니면 다른 것이냐? 이것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금방 말한 것이 중요한 문제로 작용합니다. 지금 이 문제는 갈라디아서의 연대를 어떻게 잡느냐에 일부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의 연대 잡는 것이 중요한데, 문제는 이 갈라디아서의 연대를 잡는 것이 아주 불확실하다 이말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연대는 다음 네가지 요인들과 연계해서 잡습니다.

첫째, 갈라디아서 내에 있는 바울의 두 언명들과 관계해서, 하나는 413절 누가 한번 읽어 봐요. 바울이 갈라디아에 가서 처음에 복음을 선포하는 정황이 어떠하느냐 하면 육신의 무슨 병 때문에 자기가 갈라디아에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에라고 번역한 말 προτερον이것이 어떻게 해석 되어야 하느냐? ‘처음에라고 번역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원래라는 뜻이냐? ‘처음에라고 번역한다면, 바울이 갈라디아를 한번 이상 방문했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를 두 세 번 방문했는데, 그 두 세 번 방문중 첫 방문 때에... 갈라디아에 왜 가게 되었습니까? 몸이 아파서 갔습니다. 그렇다면은 갈라디아서를 쓴 시점은 적어도 바울이 갈라디아를 두 번 방문한 후에 썼습니다.

두번째, 16절도 한번 읽어봅시다. 여기서  ουτωσ ταχεωσ이렇게 빨리그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렇게 빨리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너희들을 부르신이로 부터 이렇게 빨리 되돌아서다니, ‘이렇게 빨리이 말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인된 직후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름을 받은지가 엊그제인데 그 은혜로 부름을 받은 뒤 이렇게 빨리 너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다니, 떠나다니. 16절의 말은 갈라디아서가 굉장히 빨리 쓰여진 것으로, 갈라디아 선교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 그렇다면 앞의 413절에서도 처음에라는 말이 두 번, 세 번 방문을 전제하는 첫 방문 때 그런 뜻이 아니고 원래그런 뜻이 아닌가 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연대를 잡는데 있어서 네 가지 패턴, 네 가지 요인들과 관계해서 잡는데, 하나는 갈라디아서 내에 있는 바울의 언명들과 관계해서 잡습니다. 이런 것을 가르치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무엇을 그렇게 복잡하게 합니까? 그냥 선생님이 갈라디아서가 언제 써졌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냥 믿고 나갈텐데 무엇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느냐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신학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학문이 사고하는, 사유하는, 논증하는 방법을 일깨워주려고 하는 것이지, 남이 다 내 놓은 결론만 암송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전혀 발전이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비판하고 논증하는 능력을 기르는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훈련을 다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패턴은 무엇이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북부 갈라디아에 보냈느냐, 남부 갈라디아에 보냈느냐, 어디로 보냈느냐는 것인데, 갈라디아서의 수신인들이 북부 갈라디아인들이면 이들은 누구? 갈라디아 종족들, 북부 갈라디아인들이면 이 편지는 사도행전 166절에서 요약된 바울의 여행. 166절에 무엇이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여행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여행했다는 말이냐 아니면 한 지역을 부루기아와 갈라디아라로 말하느냐, 하여튼, 그 여행 후 이 편지가 쓰여졌습니다. 북부 갈라디아에 보냈다면 사도행전 166절에서 요약하는 바울의 여행, 바울이 부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여행했다고 그 여행뒤에 쓰였다 이렇게 되면 아까 413절에 προτερον원래로 번역을 해야 되고, 이 편지는 그러니까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마게도니아 선교 사이에 쓰여졌다고 그러면 한 50년경에 쓰여졌다고 봐야 합니다.

아니면 북부 갈라디아에 보냈다는 전제에서 두번째로 이 편지는 사도행전 1823절에 요약된 바울의 여행 뒤에 거기에 무엇이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과 부루기아 지역을 여행했다고 되어 있다고 그렇다면 앞의 413절의 προτερον166절에 요약된 첫 방문 다음에 1823절에 요약된 두번째 방문, 이 두 방문중 첫 방문이라고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머문 18개월 끝에서 에베소로 이주해 와서 한 삼년 살게 된 그 기간중에 쓰여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18개월정도 있다가 에베소로 와서 한 3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의 거주기간 끝과 에베소 거주기간의 처음 그 사이에 쓰여졌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에 머무르기 시작한 그 무렵에, 그렇다면 악 52-55년경에 쓰여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에베소에 52-55년 사이에 머물렀으니까 한 52년쯤 쓰여졌다고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수신인들이 남부 갈라디아의 로마 지방의 사람들이라면(이것을 남부 갈라디아설로 보았다면 아까 두가지의 가능성은 북부 갈라디아설을 전제로 한것입니다) 바울의 갈라디아에 대한 첫 방문은 사도행전 1314절 이하에 기록된 것이고, 그의 두번째 방문은 사도행전 1421-23절에 기록된 바울이 자기의 첫 선교지 더베에서 시작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까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의 두번째 방문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사도행전 1616절에 요약된 그러니까 이것은 바울의 제 2차 선교 여행중(아까 부루기아와 갈라디아를 방문했다고 했었습니다)의 방문이거나, 만약에 사도행전 161-6절까지가 바울의 갈라디아에 대한 두번째 방문이라면,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후에 쓰여진 것일 것이며, 만약에 바울의 갈라디아의 두번째 방문이 사도행전 1421-23절에 나오는 1차 선교 여행중 자기의 위치를 거슬러 되돌아오는 과정중의 것이라면, 갈라디아서는 사도회의 전에 쓰여진 것일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의 갈라디아에 대한 두번째 방문이 사도행전 161-6절까지에 요약된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기간중에 일어난 것이었으면 갈라디아서는 그 후에 쓰였으니까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 그 후에 쓰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에 대한 두번째 방문이 사도행전 1421-23절에 요약된 바울의 여행기간중 (1차 선교 여행중) 더베까지 갔다가 더베에서 다시 자기가 온 길을 되돌아옵니다. 그것이 두번째 방문이라면 갈라디아서는 사도회의 이전에 쓰여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둘중에서 남부 갈라디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사도행전 1616절에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이라는 말이나 1823절에 갈라디아 지역과 부루기아라는 말이나 둘 다 남부 갈라디아를 지칭한다고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갈라디아서는 16절과(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너희를 부르신 이로부터 그렇게 속히 등을 돌리고 떠나다니, 그러니까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직후입니다) 어디로 보냈느냐는 두 factor를 결합해서 볼 때는, 남부 갈라디아설이 옳은 것 같고, 그중에서도 제 1차 선교 여행 직후 그러니까 예루살렘 사도회의 전에 이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가 터집니다.

바울이 1차 선교 여행중에 갈라디아를 두번 방문한 셈이지요. 한번은 안디옥에서 루스드라 더베까지 갔다가 더베에서 다시 그 길을 돌아오면서 두번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자 마자 문제가 생기는데 16절에서 그렇게 빨리 등을 돌릴 수가 있다는 말이냐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두 주장들을 살펴보면 남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냈는데 그것도 바울의 1차 선교여행 직후에 보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사도회의 전에 쓴 것입니다.

세번째 요인은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의 관계 속에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의 연대를 잡음은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간에 회합의 연대 잡음과 안디옥에서의 바울과 베드로의 다툼 사건의 연대 잡음에도 달려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에서 바울이 보고하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와 갈라디아서 2211-22절까지에서 바울이 보고하는 안디옥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에서의 회합과 안디옥에서의 사건의 연대 잡음은 바울이 예루살렘을 몇번 방문했느냐에 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갈라디아서 12절과 사도행전과 잘 맞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2절에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까지의 자기의 예루살렘 방문을 보고합니다. 무엇이라고 보고를 하느냐 하면 예루살렘 첫 방문이 언제 있었느냐 하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 3년후에(118-20) --고대에는 한 해의 조각도 한 해로 쳤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3년이란 만 2년쯤 되는 거라고 보는게 더 현실적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32년에서 34, 이 동안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그러는데 여기다가 3년 곧 만 2년쯤 덧붙이면 한 32년 그쯤에 예루살렘에 첫 방문을 한 것입니다.

두번째 방문을 14년후 21-10절에 14년후(이것도 한 13년쯤 되겠지요) 다시 내가 예루살렘에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는데(2:1) 디도를 동반하고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그뒤 첫 방문후 14년이라는 뜻이냐 아니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름받은 후 14년이라는 뜻이냐? 아마 첫 방문후 14년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쯤 되느냐 하면 49년쯤 됩니다. 48-9년쯤에 예루살렘에 두번째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926-30절에 첫 방문이거나 바울이 다베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뒤, 그러니까 다베섹 사건 뒤(9:26-30) 두번째는 사도행전 1127-30절까지의 예루살렘과 유다의 기근 구호를 위해 안디옥에서 구호물자를 가지고 갑니다.

세번째는 사도행전 151-30절까지의 사도회의 이때의 이슈는 할례와 모세 율법을 이방인들이 지켜야 되느냐 아니면 그것을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 받느냐? 자 지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 문제는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 기록된 것인데, 여기서 바울이 예루살렘의 기둥 사도들과 회의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바울의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지 않는 복음이 인정되고 바울의 이방인들에 대한 사도직이 인정이 되어서 거기서 무엇이 일어나느냐 하면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을 위임받은 것 같이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을 위임받은 것 같이 되고 그래서 상호 복음을 인정하기로 하고 선교지를 분할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선교하기로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들에 선교하기로 해서 서로 교제속에 한 교회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바울이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 보고하는 두번째 방문입니다. 자 여기서 문제는 갈 2:1-10절까지에서 보고된 바울의 두번째 방문이 사도행전의 기근 구호 방문과 같은 방문이냐 아니면 사도행전 15장과 같은 방문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갈 2:1-10절까지의 방문이 사도회의 후의 방문과 같은 것이면 갈라디아서는 언제 쓰였겠습니까? 사도회의 후에 쓰였겠지지요. 그러나 만일 기근 그호의 방문이면 갈라디아서는 언제 쓰였겠어요? 사도회의 전에 쓰였겠지요.

갈라디아서가 사도회의 전에 쓰였느냐 후에 쓰였느냐에 따라 바울의 복음이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율법의 행위 없이 구원 받는 복음이 원래부터 바울의 복음이냐, 그래서 그 복음이 사도회의를 유발시켰느냐? 아니면 사도회의에서 다 인정이 되었는데도 예루살렘의 극 보수주의자들이 바울의 교회에 돌아다니면서 계속해서 바울의 복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주장한거냐? 이렇게 바울 신학의 전개와 초대 교회의 역사를 재 구성하는데 이 갈라디아서의 연대잡음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자 그럼 증거들을 봅시다.

첫째로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과 사도행전 11장의 기근 구호 방문이 같은거라는 견해에서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이방 선교를 해야 할 필요성과 그것을 위해서 선교지를 나누는데 합의했는데 이것은 바울의 이방 세계에 대한 체계적인 선교여행 전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른바 바울의 체계적인 1차 이방 선교 여행이 사도행전 131절 이하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체계적으로 바울이 이방 선교를 한 뒤에야 예루살렘에 가서 이제 선교지를 나눕시다 하면 말이 안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선교지를 나누는데 합의한 후에 체계적인 선교 여행이 있었을 것입니다. 체계적인 선교 여행이 사도행전 13장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지를 나누는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언제 일어났겠습니까? 사도행전 13장의 체계적인 선교 여행전에 일어났다면 언제냐하면 11장에, 둘째로 갈 2:10절을 읽어 봅시다. 그 회의 끝에, 그들이 바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다만 무엇만 부탁했다고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계속 생각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나요?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바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방문에 적합한 말이냐? 기근 구호 방문에 적절한 말이지.

바울과 바나바가 구호 물자를 가지고 왔습니다. 온김에 이방 선교에 대하여 논의하고 , 그러면 당신은 선고지를 나누어서 이방선교하고 우리는 유대선교합시다. 다만 이방 땅으로 멀리 가더라도 예루살렘 유대 땅의 가난한 자들(예루살렘 성도들)을 계속 좀 기억해 주시오.” 하니까 , 그거야 내가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바 아니요. 그래서 지금 구호물자 가지고 온 것 아니요.” 이것을 보면 바울의 두번째 방문이 기근 방문같다는 말입니다.

세번째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계시에 의거해서 올라갔다고 그러는데 이 말은 사도행전 1128절에 있는 선지자 아가보의 말에 대한 언급이 아닌가? 선지자 아가보가 무엇이라고 해요. 지금 예루살렘에 기근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므로 이 구호물자를 모아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갈 2:2절에 계시에 의해서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그러는데 그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의 아가보의 예언.

네번째로 갈라디아서 2장의 두번째 방문을 사도행전 11장의 기근 방문과 일치된 방문이라고 본다면, 그럼 갈라디아에서의 방문 일정과 사도행전의 방문이 맞아들어갑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두번째 방문이 사도행전 15장의 세번째 방문과 일치한다면 순서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하나의 방문을 빼어 먹어 버렸든가 아니면 누가가 나중에 기록하면서 역사를 잘못 기록한다든가, 그래서 원래는 11장 방문과 사도의 방문이 한 방문이었는데 누가가 두가지 전승을 따로 따로 받아서 혼돈해가지고 마치 두번 일어난 것으로 적고 있는가 하는 설들이 다 제기된 설들입니다.

자 오늘은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이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기근 방문과 일치하는 의견을 뒷받침하는 증거들만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의견을 반대하는 증거들이 또 있는데 이런 것을 다 따져봐야 합니다.

 

 

 

바울서신 // 3

 

 

갈라디아서 2

 

 

 

 

 

1.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의 관계

지난 시간에 갈라디아서의 연대 잡음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중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이 각각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의 첫 방문을 118-24절 까지에서 3년 뒤라, 그러니까 약 만 2년뒤, 다음에 두번째 방문을 21-10절까지에서 보고하는데 그후 14년 뒤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사도행전은 첫 방문을 바울의 소명 뒤 926-30절까지 이고, 두번째 방문은 기근 구호 방문으로서 1127-30절까지 이고, 세번째 방문은 예루살렘 사도회의 방문으로 151-30절까지에서 이야기 되는데, 문제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두번째 방문이 이 방문하고 같으냐, 이 방문하고 같으냐에 따라 갈라디아서의 연대가 좌우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둘째 방문이 그 방문과 같다는 설을 지지하는 자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 1. 두번째 방문이 기근 구호 방문과 같다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

그러나 이 설에 반대되는 논증들이 있습니다. 곧 둘째 방문이 기근 구호 방문과 같다는 설을 반대하는 증거들, 사도행전 1127-30절과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이 다르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기근 구호 방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갈라디아서에서는 바울이 사도들과 회합한 것을 중요 사항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번째 방문은 세번째의 사도회의 방문과 일치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21-10절까지 보면 사도들과 복음과 선교지에 대해서 회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7-30절은 예루살렘에 기근을 구호하러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반대 의견에 대한 또 반대 의견, 갈라디아서 210절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의 둘째 방문이 실제로는 기근 구호 방문이었으나 그 기회를 이용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사도들과 이방 선교에 대해서 상의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기근 방문의 목적을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에서 강조하지 않고 이방 선교에 대한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회합과 의견 일치만 강조하느냐 하면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210절을 한번 읽어 보아요.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복음이나 뭐나 일체 덧붙인바 없고 무엇만 요구했어요? 가난한 자들을 계속 염두에 두어달라 했고 그랬을 때 바울은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힘써 행하는 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 210절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의 예루살렘 두번째 방문에 대한 어떠한 이해를 가능케 하느냐 하면, 이 둘째 방문이 원래 기근 구호 방문이었는데 그 기회를 이용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사도들과 이방 선교에 대해서 상의하고 합의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기근때문에 갔다는 말을 강조하지 않고 부차적인 의제였던 이방 선교에 합의 본것을 강조하느냐?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이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 시비를 하므로 바울은 이때에 자기의 복음과 사도직에 대해서 예루살렘 사도들도 동의했음을 자연히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기근 방문이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 방문의 부차적인 목적이었으나 갈라디아의 현안 문제 때문에 그점을 바울이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2. 또 다른 견해

그러나 두번째 방문이 기근 구호 방문이었다는 견해에 대한 두번째 반대 의견은 지금 우리가 첫번째 반대 의견을 댓고 그것에 대한 반대 이유를 들었고 두번째 반대 이유는 만약 갈라디아서의 둘째 방문과 사도행전 11장의 기근 방문을 동일한 방문으로 보면은, 갈라디아서가 남부 갈라디아에 보내졌다는 이른바 남부 갈라디아을 취해야 되고 갈라디아서를 바울의 현존하는 편지 글 중 가장 오래된 편지라고 보아야 하며 바울의 첫 선교여행과 사도회의 그 사이에 써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갈라디아서가 이렇게 일찍 쓰여졌다고 보는 것은 나중에 보겠지만 갈라디아서가 로마서와 고린도 서신들과 유사점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렇게 갈라디아서를 일찍 연대 잡을 수 밖에 없다고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답으로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논란이 오고 갑니다.

 

* 3. 두번째 방문이 기근 구호 방문과 같다는 견해

그 다음에 이제 이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이 사도회의와 같은 방문(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이라는 설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제시됩니다. 지금까지 무엇을 했죠?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과 기근 구호 방문이 같은 방문이라는 설을 지지하는 자료들과 반대하는 자료들 그리고 반대하는 자료들에 대한 반대를 또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갈라디아서의 둘째 방문과 사도행전 15장의 사도회의 방문과 같다는 설을 지지하는 자료들, 첫째로 갈라디아서 210절까지와 사도행전 151-30절까지에 공통 되는 이슈는 한편 바울과 바나바 다른 한편 예루살렘 사도들의 할례와 율법을 이방들에게 요구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주제가 같다 이말입니다. 이 자료는 아까 둘째 방문과 기근 구호 방문을 일치 시키는데 있어서 반대 자료로 사용된 것입니다.

 

1. 첫째 견해

그러면 둘째 방문과 사도회의 방문이 같은 방문이라는 설을 지지하는 자료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답해야 되느냐? 갈라디아서 21-10절 까지에서 할례와 율법의 문제가 그 방문기간에 제기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서 21절 한번 읽어보세요)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것이 무슨 연고인지 이방인들에 대한 할례와 율법때문에 올라갔는지 안 올라갔는지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다만 디도를 데리고 갔는데 디도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할례와 모세의 율법 지키는 것이 능동적으로 요청된다고 했으면 디도를 캣취 프레이스로 삼아서 요구했을 것이다 이말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제기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 제기되지 않았나요? 4절에 어떤 거짓 형제들이 안디옥 교회에 침투해서 할례를 강요한 때까지 이 문제가 제기 되지 않았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침투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거짓 형제들에게 전혀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양보를 하면 자기 복음의 진리가 훼손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견해를 안디옥에서 그 문제가 있었을때 취했는데 지금 갈라디아에서 비슷하게 유대주의자들이 일으키는 위기 곧 갈라디아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할례를 요구하는데 똑같이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를 보면 이 할례 문제와 율법 문제가 제기 되었다는 증거가 분명치 않습니다. 지금 이것을 이렇게 보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갈 2:1-10절 까지에서 바울이 자기의 복음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제기했고 예루살렘 사도들이 그 복음을 인정했다는데서 어떻게 도약을 해요? , 그것은 할례와 율법을 문제 삼아서 토론한 뒤 바울 당신은 이방인들에(거기에는 무할례자들이고 표현이 되어 있는) 대한 복음을 선포하는 자이므로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방문은 이방인들에 대한 할례와 모세 율법 준수가 주 토론의 내용이었다고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에서부터 읽어보면 진짜 할례 문제가 제기 되었다는 증거가 불 분명하고 다만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기근 구호때 예루살렘에 가서, 간 김에 서로의 복음을 비교하고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해서 그들의 동의를 얻고자 우리 서로 협동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하자. 당신과 바나바는 이방인 선교를 하고 우리들은 주로 유대인 선교를 하지.” 이렇게 합의를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이말입니다. 할례 문제와 율법 문제에 관한 깊은 논란이 없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주제가 똑같다 하는데에 문제가 있다 이말입니다.

 

2. 둘째 견해

두번째는 이 방문과 사도회의가 같다는 주장이 무엇이냐 하면 갈라디아서 26절에서 9절까지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공식적인 회합을 위한 방문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고 바울이 여기서 사도회의의 회의록을 인용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말입니다. 6-9절까지를 읽어보아요. 여기 보면 두 가지점에서 가령 E. Dinkler 같은 사람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점에 유의한다고. 첫째로 베드로를 항상 게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만 유독 베드로라는 이름을 불러요. 그의 교회로서의 의미있는 이름인 베드로라는, 그러니까 거의 시몬의, 게바의 공식 칭호인 베드로라는 이름을 바울은 이 편지의 두 곳에서만 씁니다. 그 외에는 항상 게바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후에 다시 게바라고 불러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 11절에 가서도 게바, 14절에서도 게바, 이렇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시몬을 게바라고 부르는데, 7-8절에서만 공식 칭호였던 베드로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 하나. 둘째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무엇이라고 지칭해요? 7절에...... (무할례의 복음) 베드로는 할례의 복음을 위임 받았듯이 자신은 무할례의 복음을 위임 받았다 할 때에 이 할례의 복음과 무할례의 복음은 당당히 공식적인 칭호의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이 두 점에 이어 세번째로는 선교지의 분리에 합의를 하고 양 선교 운동의 대표들, 바울과 바나바(무할례의 복음을 맡은) 그리고 유대 선교를 맡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할례의 복음을 가진 자로서 상호 인정하기로 하나의 조약을 맺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들을 관찰해서 E. Dinkler는 바울이 여기에서 사도회의 때의 회의록을 지금 여기 인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보통 게바라고 부르는데 그 회의록에 공식 명칭으로 베드로라고 부르기 때문에 여기서 베드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에서 바울은 둘째번 예루살렘 방문때의 회의가 선교지를 나누는데 있어서 거의 조약을 체결하고 회의록을 남길 정도로 공식적인 회의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15장의 사도회의 때의 분위기와 맞는 것이지 기근 구호때 가서 비 공식적으로 복음과 선교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두번째 방문은 사도행전의 사도회의 때의 방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22절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들과의 회합이 사적이었던 것이라고 바울이 아주 못을 박고 있습니다. 22절을 읽어 보세요. 거기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나요? 예루살렘에서 아주 인정 받는 권위자들에게 복음을 자기가 제시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그들에게 사적으로 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회합이 공식적인 사도회의가 아니었음을 아예 바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번역이 아주 형편없이 되어 있습니다. 문장이 끊어질 때 끊어져야 하는데 하여간 이상하게 해 놓아서 읽을 수가 없게 해 놓았습니다. 큰일입니다. 빨리 개역 성경에서 해방이 되어야지 하나님이 개역성경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한국의 보수라는 사람들은 머리가 좀 깨어야지 개역 성경 번역이 형편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성경이라고 자꾸 주장을 합니다. 사실 새 번역이 훨씬 나은 번역입니다. 지금 성서 공회에서 새로 번역한다는데 상당히 힘들여서 애써서 번역하는 모양이니까 아무래도 좀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나마나 그 성경 나오면 또 틀렸다고 난리 날 것입니다. 모든 번역이 다 틀립니다. 문제는 더 많이 틀리고 더 작게 틀리고에 있습니다. 하여간 문제가 많아요.

 

3. 셋쩨 견해

, 그 다음 위의 두 방문이 같은 방문이라는 세번째 이유,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을 사도행전 15장에서의 사도회의 방문과 같은 방문이라고 하면 우리는 북부 갈라디아설을 유지할 수 있고 갈라디아서는 사도회의 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AD 49년 이후에 쓰여진 편지로서 고린도서들과 로마서와 가깝게 연대 잡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서들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상당히 내용적으로 비슷한 점이 있는데 이렇게 연대 잡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이 사도회의 방문과 같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한 답은 또 갈라디아서를 사도회의 후에 씌어진 편지로 보면, 금방 우리가 보겠지만, 상당해 문제가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를 고린도서들과 로마서와 가깝게 연대 잡는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번째 주장도 그렇게 잘한 주장이 아닙니다.

 

* 4. 위 견해에 대한 반대 논증

, 그러면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과 사도행전 15장의 방문이 같은 방문이라는데에 대한 반대 논증, 첫째로 이 견해는 갈라디아서가 사도회의 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가 사도회의 후에 쓰여졌다는 결론을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갈라디아서 2장이나 또는 그 편지 전체에서 바울이 사도회의의 명령 결정사항 --사도행전 1519-21절까지에 있는 사도회의의 결의 사항-- 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입니다. 사도회의의 결의 사항이 무엇입니까? 1519-21절까지 읽어보시오. 결의 사항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할례와 율법은 요구하지 말 것, 할례와 율법의 요구로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지 말 것, 율법의 가장 최소한의 요구만 요구하자. 예를 들면 우상 숭배, 음행, 목매어 죽인 짐승 먹지 말고..... 이 서 너 가지만 지키도록 하자 한 것이 사도회의의 결의입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둘째 방문의 사도회의 방문과 같은 해이어서 갈라디아서가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에 쓰여진 편지라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이 이 사도회의의 결의를 인용을 했겠죠? ? 인용하면 지금의 갈라디아서의 문제에 아주 효과적이잖아요? 갈라디아에서 이미 그점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한 바 있다. 할례와 율법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너희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너희들이 예루살렘에서 왔다고 주장을 하는 모양인데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그들의 권위를 호소하는 모양인데, 예루살렘 사도들이 우리와 그점에 있어서 완전히 합의해서 이런 결의를 했고 이것을 편지로 온 세상 교회에 보내기로까지 했는데 이제와서 무슨 소리냐?” 이런말을 했겠죠.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든지 아니면 다른 부분에서 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게 일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가 사도회의 이전에 쓰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소리냐?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방문은 이 방문의 이전의 방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의 두번째 방문이 사도회의 이전의 방문, 기근 구호의 방문과 일치하는 방문이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피할 수가 있습니다. ? 할례와 율법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사도들과의 개인적인 사사로운 복음의 비교와 토론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11절을 읽어보면, 이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게바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거리낌없이 식사를 잘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오자 게바가 식사 교제를 중단하니까 바나바도 그렇고 그들과 더불어 모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갑자기 이방인들과 식사 교제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게바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의 둘째 방문이 사도회의와 같은 방문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사도회의의 결의에 근거해서 바울이 지금 베드로를 공박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사도회의 결의에 근거해서 베드로가 안디옥의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잘 했습니다. ? 할례도 요구할 필요없고 율법도 요구할 필요없고 해서 밥을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아주 극보수주의자들이 와서 식사 교제를 중단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렇게까지 결의를 해 놓고서 당신이 이방인들과 상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진짜 똑같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이 아니냐?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같이 식사하겠다고 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당신 지금 예루살렘의 사도회의 결의를 파기한 것 아니냐?” 이렇게 예루살렘 결의에 근거해서 바울이 게바를 나무라고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능성 있는 해석은 그러면 바울이 분명히 말했기 때문에 왜? 갈라디아서에서 문제가 뭐예요? 할례가 문제인데 할례는 요구하지 않기로 썼다고 사도회의에서 결의를 했다고 말했을거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211절도 이렇게 해석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가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처음에는 거리낌없이 교제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야고보의 사람들이 왔을 때에 이 교제를 그만 둔 것은 아직 교회 전체로서 이방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하자는 원칙이 서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선교사로서 처음에는 그들도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sign을 보이니까 스스럼 없이 교제를 하다가 율법의 관점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자들이 오므로 , 이건 주의해야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평화를 해치겠구나.” 해서 철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1절에서 바울이 베드로에게 대고 한 연설이 죽 나옵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은 자들인데 당신이 그럴 수 있느냐 하고 게바를 면박을 줍니다. 그래서 안디옥에서 바울과의 이와 같은 논쟁끝에 베드로는 스스로 바울의 복음의 원칙에 설득이 되어서 그 뒤에 사도회의가 열렸을때 베드로가 바울의 입장을 지지했을 가능성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처음에는 이런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우왕좌왕 하다가 바울의 논리적인 신학적인 논증에 설득이 되어서 나중에 열린 사도회의에서 베드로가 바울을 지지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째 방문은 사도회의 이전의 방문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 둘째 방문과 사도회의 방문을 동일시하는데 있어서 반대되는 두번째 이유는 만약에 이 갈라디아서의 둘째 방문이 사도회의 방문과 같은 방문이었다면 바울이 그의 자서전적인 진술에서 기근 구호 방문을 생략했거나 아니면 누가가 실제로 두번밖에 안 일어난 방문을 세번 일어난 것으로 잘못 적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를 삭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의 방문과 사도행전 15장의 방문이 같은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합니다. 첫째로 사도회의 방문(사도행전15장의), 사실은 기근 구호 방문과 같은 방문이었는데 누가가 이 방문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전승들을 받아가지고 이것이 같은 방문인줄 모르고 앞뒤로 일어난 것 같이 적었다고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둘째로 사도행전 1127-30절까지의 기근 방문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누가가 만들어냈다고 하거나, 아니면 세번째로 사도행전 15장의 사도회의 방문은 바울의 두 선교 여행 사이에 일어난 첫 방문과 그때 이제 할례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입니다(2:1-10절에서 말하는). 그 두번째 방문, 이때는 베드로와 바울간의 논쟁이 벌어졌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같이 식사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었는데-- 이 두 방문을 하나의 방문으로 혼합해서 누가가 잘못 만들어 냈다고 주장을 합니다.

또 바울 스스로가 기근 구호 방문을 생략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 120절에 의해서 제외된 가능성입니다. 거기 무엇이라고 써있나요? 갈라디아서 120절에 바울이 거기서 맹세를 하고 자기가 지금부터 자기가 하고 있는 자서전적 진술은 거짓말이 아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 하나를 생략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 5. 종합

이제 결론을 내겠습니다. 첫째, 갈라디아서 21-10절까지의 기록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 1127절에서 30절까지의 방문과 같은 방문입니다. 둘째, 갈라디아서는 구호 방문뒤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회의 전 그 사이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사도회의는 AD 49년쯤인데 갈라디아서는 그전에 쓰여진 편지입니다. 이렇게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2. 갈라디아서와 다른 서신들과의 관계

그리고 이제 갈라디아서의 연대 잡음에 있어서 또 하나의 요인이 무엇이냐 하면 갈라디아서와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의 관계 속에서 갈라디아서와 다른 편지들과 비교하여서 연대를 잡는 것입니다.

 

* 로마서와의 관계

첫째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보면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한번 헤아려봐요. 공통점들이 뭐예요? “믿음으로 율법의 행위없이 의인됨이것이 두 편지들의 주제입니다. 아주 뚜렷한 주제들입니다. ?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은 방종을 낳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육신과 영의 대조,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이 아주 비슷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는 갈라디아서 46, 로마서 815, ? 자세한 것을 생각해봐요. 둘다 하박국 24절의 해석을 바울의 논지로 삼고 있다고 하박국 24, 갈라디아서 311, 로마서 117절에 하박국 24절을 바울의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논지를 담고 있습니다. ? 아브라함의 예를 은혜로, 믿음으로 의인됨의 아주 결정적, 성경적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창세기 156절의 아브라함의 예가 갈라디아서 36, 로마서 43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 이방 선교에서 성취됨.” ,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통해서 만민을 축복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바울의 이방 선교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또 창세기 123, 1818절이 갈라디아서 38절에 인용이 되어 있고, 창세기 175절이 로마서 417절에 인용이 되어 있고, 또하나 덧붙인다면 율법을 요약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갈라디아서 514, 로마서 139절에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아주 비슷한 전체적인 주제, 복음의 해석과 그것에 따른 소 주제들이 아주 비슷합니다.

둘째로, 그러면 차이는 무엇입니까? 차이점, 기록의 목적. ? 물론 대상도 다릅니다. 그런데 공통점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차이가 나옵니다. 어조에도 차이가 있는데 로마서는 아주 침착하게 논리 정연하게 논증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갈라디아서는 화가 잔뜩나서 성미급한 바울이 원수들과의 큰 갈등속에서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들은 자연히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로마서는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있은 얼마후, 그러니까 얼마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룬 이 복음의 해석을 좀더 묵상하고 좀더 차분한 분위기에서 쓴 편지이냐? 그래서 바울의 율법에 대한 태도도,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일방적이고 부정적으로만 깍아내렸는데 로마서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인정하느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yes라고 답한다면, 갈라디아서는 로마서 직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와 아주 연대적으로 가깝게 --로마서보다 조금 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 2. 고린도후서와의 관계

두번째로,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와의 관계 속에서는 여기는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둘다 다 문제가 왜 일어났나요? 외부에서 침투한 바울의 적대자들이 무슨 시비를 걸었습니까?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이 틀렸다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13장까지는 바울이 아주 흥분해 가지고 화가 잔뜩 나있습니다. 바울이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싸움을 잘하고, 바울을 자꾸 성인화 해가지고 성인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성인은 모두가 다 개성도 없이 똑같이 앗시시의 프란치스꼬가 되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뒤집어 씌워서 바울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원터 보르캄의 아주 중요하고 널리 읽히는 바울이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세요. 한국말로도 번역이 되어서 허혁 교수가 책을 냈는데, 원래 이책은 바울신학의 토론들의 결과를 아주 평이한 말로 잘 쓴 책이어서 전문가들도 많이 읽는 책이지만 평신도들도 참 많이 읽어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처음 출판이 되었을때 수십만부가 나갔고 영어로 번역이 되어서도 아주 많이 읽힙니다. 이 책의 또하나의 특징은 바울의 신학만 토론한게 아니고 바울의 신학을 바울의 생애와 연결시켜서 토론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personality에 대해서도 지적을 합니다. 하여간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지금 자기의 복음이 무효로 되고, 사도직이 무효로 되고, 자기의 지금까지의 선교적 노력이 다 허사가 될 그런 위기 속에서 엄청난 불안과 긴장속에서 화가 잔뜩 나가지고 적대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이 공통점들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문제는 갈라디아에 침투한 적대자들이 고린도에 침투한 적대자들과 같은 적대자들이냐 아니면 다른 적대자들이냐? 옛날에는 그냥 다 이들이 유대주의자들이고 같은 적대자들일 것이다 아니면 영지주의자들로 같은 적대자들일 것이다 이렇게 보았는데 자세히 보면 같은 적대자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 갈라디아서에서는 주로 바울의 복음을 시비해요? 바울의 복음을 깍아내리기 위해서 그의 사도직을 깍아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반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을 깍아내린 것입니다. 사도직을 깍아내리면 자연히 그의 복음에 대해서도 비난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주로 그의 사도직의 시비,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그의 복음의 시비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와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적대자들이 둘 다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의 색깔이 좀다르고 그들의 신학적인 주장이 좀 다르고 바울에 대한 시비가 좀 달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를 꼭 비슷한 시기에 연대잡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적대자들이 같은 자들이었으면 그들이 갈라디아에서 난리 피우고 고린도에 가서 난리를 피웠을 것이므로, 바울이 갈라디아의 문제를 평정한 후에 고린도에 가서 또 그들과 싸웠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의 시기를 상당히 비슷하게 잡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적대자들이 전혀 다른 자들이었으면 갈라디아서를 연대 잡음에 있어서 고린도후서와 관계없이 잡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신학적인 토론에 있어서 고린도후서 19절과 로마서 사이에 갈라디아서를 연대잡으면 바울의 신학이 어떻게 이렇게 진화했는가를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은 너무 주관적인 설이어서 이를테면 캠멜도 신약 개론에서 반대하고 F.F 부르스도 반대합니다.

 

* 3. 고린도 전후서, 빌립보서와의 관계

자 세번째로 갈라디아서와 고린도 전후서 그리고 빌립보서와의 관계를 봅시다. T.W. Manson은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한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은 바울의 에베소의 목회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한 3년 목회 했죠? 그 기간에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이 기간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되고, 그렇다면 고린도 전후서와 빌립보서도 같은 기간 동안에 쓰여진 편지이니까 고린도 전후서와 갈라디아서의 유사점과 빌리보서의 유사점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F.F 부르스는 고린도 서신에 나오는 유대주의자들의 공격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공격과 성질이 좀 다른 것으로서, 예컨대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할례를 요구한 흔적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할례가 이슈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우리가 사도행전의 기록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본다면 갈라디아에 침투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사도회의 전에 침투한 유대인으로 보아야 하고,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은 사도회의 후에 침투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사도회의에서 무엇이 결의되었나 하면 할례를 요구하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도회의 결의가 있기 전에 갈라디아에 문제가 터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확실한 결의가 있은 후에는 누구도 할례 문제를 이방 교회에 와서 제기한 적이 없으니까 고린도 교회에서는 할례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시기적으로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밴슨이 이야기하는 대로 바울의 에베소 목회기간 동안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시기적으로 완전히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는 사도회의 전에, 고린도 문제는 사도회의 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부루스의 제자인 John Drane 같은 사람은 이제 그 뒤를 이어서 괴팅겐 교수 Hans 같은 사람은 바울의 율법 신학이 이렇게 발달했다고 봅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에 아주 율법주의자가 많아서 여기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을 강요하므로 바울이 거기에서는 율법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말입니다(antithesis).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며, 적자가 아닌 하갈과 같은 것이며, 하는 식으로 아주 율법을 깍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고린도에서 무슨 현상이 나왔느냐 하면 아주 방종주의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안되겠다 해서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인의 한계를 정하고 율법을 다시 세웁니다. 로마서는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서의 정반합, 즉 반 율법주의과 율법의 긍정적인 면의 강조의---- 로마서에서 율법에 대한 아주 균형있는게 다루는 synthesis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율법 신학이 갈라디아와 고린도의 다른 문제들에 의해서 이런 식으로 변증법적으로 발달을 했다고 John Drane 이나 Hans ...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고린도전서와 로마서 전에 쓰여진 편지이지만 훨씬 전에 쓰여진 편지가 아니고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와 로마서와 연계시켜서 연대를 잡아야 합니다.

 

* 4. 데살로니가 전후서와의 관계

네번쩨로,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 전후서와의 관계, 여기서는 두 가지가 문제입니다. 하나는 구원론인데 데살로니가 전후서에는 구원론이 전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구원론이 함축된 몇마디가 있으나 그것이 전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 원시적입니다. 둘째로, 종말론인데,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의 종말론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예수 재림과 그에 따른 구원의 완성에 대한 것에 아주 열병걸린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이장림파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199210월에 예수께서 다시 오시므로 일하고 장가가고 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냥 산속에 가서 기도만 하고 앉아 있겠지).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이 옳바른 종말론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이제 학자들의 견해로는 초대 교회, 아주 원시적인 교회는 이와같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간절한 기대로 그들의 신앙의 내용이 꽉 차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는 구원론이 어땠습니까? 완전히 전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구원론이나 종말론에 있어서 아주 원시 교회의 신앙 상태를 잘 보여준다면서, --갈라디아서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수그러들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첫 열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강조되는데--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구원의 현재적 체험을 강조하면서 임박한 종말에만 구원을 기대했던 신앙이 교정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데살로니가 전후서보다 훨씬 후에 쓰여졌다고 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대개 한 49년쯤에 쓰여졌다고 보는데, 그러면 그때의 바울의 구원론의 발달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교회의 종말론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찼었는데 갈라디아서에는 이런 것이 안보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이보다 훨씬 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쯤이 아마 고린도 서신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과 후서 5, 여기를 분수령으로 해서 이런 식으로 발달을 했을 것이라고 이렇게 본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는 데살로니가 사람들만 종말이 임박한 것이 아니고 바울도 자기 생애 전에 주께서 재림할 것으로 봅니다. 그러한 바울의 묵시적 종말에 대한 견해가 언제까지 지속이 되느냐 하면 고린도 전서 15장까지 지속이 됩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50절 부터 읽어봐요. 여기서 우리, 즉 말하는 자기와 이 편지 받는 고린도인들이 어떻다고요? 살아서 주를 맞이하므로 자기들이 변화를 입을 거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이때까지는 살아서 주의 재림을 체험할 것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에 가면 바울이 주의 재림전에 죽을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주안에서 죽는 자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를 논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는 전혀 불안해 할 것이 아니고 살아서 주를 맞이하는 자보다 손해 보는게 아니고 주에게 더 가까이 감을 의미한다고 여기서 논합니다.

그래서 ? 바더 같은 사람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고린도 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5장이 바울의 종말론의 발전의 분수령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는 바울이 자기 생전의 주의 재림을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직후 바울은 주의 재림전에 자기의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하고 그리스도 재림전에 죽는 자들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8-10절 까지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말로다 할 수 없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고난을 받고 어땠나요? 삶을 포기했습니다. 이렇게 죽음에 직면하는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고난이었을까? 어떤 사람은 바울이 에베소의 맹수와 싸웠다느니 하는 별 소리가 다 있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죽음을 직면하는 엄청난 고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T.H. 바드는 바울이 그리스도 재림전에 죽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주 안에서 죽은 자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게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빌립보서 1장에 오면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하는 --사형선고를 기대하면서 죽는 것을 기대하는-- 개인적 종말론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는 --묵시적 종말론으로 바울이 시작을 했는데, 어디에서요?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그게 어디까지 있어요? 고린도전서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과 후서 5장을 분수령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이 구원의 완성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앞에서의 구원을 더 체험한 (바울은 그것을 잠자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 주께서 오셔야만 우리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에 주께서 빨리 오셔야 되겠다는 묵시적 종말론에 대한 열망이 식어졌습니다. 모든 구원의 소망이 재림에 달린 것이 아니고 벌써 우리가 ? 주안에서 죽으면 ? 그러기 때문에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된다면 자연히 재림에 대해서 너무 열병을 앓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재림에 대한 열병이 갈라디아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면 갈라디아서는 고린도 전후서 이후에 쓰여진 것입니다. 로마서나 빌립보서에 가까이 쓰여졌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인데 다음주에 여기서 부터 하겠습니다. 다음에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구원론과 관계해서 갈라디아서 연대 잡음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는 종말론에서, 하나는 구원론에서 바울 신학이 발전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특히 구원론에서 바울의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구원론이 고린도서까지는 없었는데, 갈라디아서에서 비로소 발생을 한 것이냐,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후기 작품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믿음으로 의인됨의 교리 자체는 바울의 복음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고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에 응해서 발달시킨 나중 교리라고 알버트 슈바이쩌 같은 경우는 그렇게 봅니다. 그게 사실인가?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토론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은 바울의 종말론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룹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라 하는 것이 가끔 시험에 나옵니다.

 

 

 

바울서신 // 4

 

 

 

갈라디아서 3

 

 

 

 

1. 갈라디아서와 다른 서신들과의 관계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어요? 갈라디아서와 살전, 살후의 전제에 까지 했다! !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와 살전과의 관계속에서 갈라디아서는 데살로니가전서와 비교해 볼때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종말론이고 살전, 살후는 종말이 임박한 것으로 바울이 가르쳤기 때문에,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예수의 재림이 내일, 모레인줄 알고 그렇다면 뭐 일할 것도 없고 지금의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다만 예수가 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한단 말이야. 그것들을 이제 바울이 교정을 해요. ! 그런데 그런 context에서 이제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사람들이 인용하는 말도 나오는 거라구. 종말이 내일, 모레 이라면 일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냥 가만히 있는 거지. 그래서 그런 임박한 종말의 열기로 가득찬 교회에 종말론을 조정한다.

그런데 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그런 열기를, 임박한 종말론의 열기를 가지게 되었느냐? 바울이 선교 초기에 데살로니가에서 종말의 임박성을 가르쳤지 않겠느냐? 그런데 바울의 편지 자체에서 보면은 고전 15장과 고후 5장을 분수령으로 해서 이때까지는 바울이 자신의 생전에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것으로 풀이 하는데, 이때부터는 바울이 예수의 재림전에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는 고전 15장이라든지 빌립보서라든지 있는데, 그렇다면은 갈라디아서에서의 종말론을 보자.

갈라디아서에는 임박한 파루시아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단 말이야. 종말론에 대한 강조가 별로 없어요. 그러면은 분명히 갈라디아서는 요런 종말론적인 구조에서 이후 아니겠느냐! 이후에 연대를 잡아야 할 게 아니겠느냐? 이런 식의 논리예요.

그래서 이때 여러분에게 문제는 두 가지지. 처음에 초대교회에서는 종말론, 임박한 종말론의 열기로 가득찼다가 그 재림이 늦어지므로 점차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식어가고 점차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일반적인 초대교회의 神學의 전개과정, 종말론의 전개 과정이 항상 옳은거냐? 대개 다수 의견은 그렇게 전개되었다고 보는데, 꼭 그게 옳은게 아닐 수도 있다 그말이야.

가령 C.H. Dodd 같은 사람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 예수의 종말론은 원래 실현된 종말론에 강조점이 있었는데, 그 파루시아가 금방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점차 初代敎會에서 기독교 kerygma를 소위 유대 묵시 문학화 해 가지고 가령 요한계시록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요한계시록 같이 기독교 종말론을 완전히 유대 묵시문학한 그런게 일어난다. 이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좀 늦은 문서란 말이야. 그렇다면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처음에는 예수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찼다가 점점 이게 희미해 졌다는 그런 전개의 구조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하나 보는 것은 이런 이른바 후기 편지서들 로마서나 이런 편지들에도 다 예수의 재림에 대한, 그런데 그 재림의 임박함에 대한 기대가 다 있어요. 로마서 13, 12-13장 같은데에, 빌립보서에도 있고 고후 13장에도 Maranata, 주여 오소서, 하는 기도가 있고, 그래서 이런 이른바 후기 문서들에도 예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게 아니라 그래서 바울 편지 전체에 이 벌써아직aleady, but not yet의 아주 신약적인 종말론적 틀이 다 있다. “aleady-but not yet.” 모든 편지에 다 있다. 그러나 그때 그때 편지 상황에 따라 어느 것이 더 강조되느냐에 차이뿐이지 종말론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론과 갈라디아 교회의, 갈라디아서의 종말론을 가지고 이 편지를 갈라디아서의 연대 잡는 것은 옳지 않다는 그런 주장이지.

또 하나의 issue는 무엇이냐 하면 이 칭의론(Justification)story가 대조가 되요. 살전, 살후에서는 이 story가 별로 강조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 그리고 살전, 살후, 그리고 고전, 고후에는 이 가르침이 분명히 전개되어 있지 않아요. 그렇다면은 어떤 가설을 가능케 하느냐 하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서에 유대 주의자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이 교리를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렇다면은 일단 연대 잡는데 있어서 갈라디아서는 살전, 살후, 고전, 고후보다 뒤에 쓰여진 걸로 봐야 될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issueA. Schweitzer가 주장했던 대로 宗敎改革者들이 바울 神學의 중심으로 봤던, Protestant 神學에서 바울 神學에 중심으로 봤던 이 칭의론의 구원론은 바울의 복음의 本質에 속한게 아니고, 이 유대주의 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개발시킨 하나의 論爭수단(kampflehre), 이 싸우기 교리, 싸우기 위한 교리 논쟁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A. Schweitzer는 그의 유명한 책 바울의 神秘主義“The mestery the Paul" 이라는 책에서 바울의 엣날 19C宗敎史學파들 부터 관찰했던 문제, 곧 바울의 구원론에 두 가지 체계가 있다.

두 가지 전혀 서로 통합될 수 없는 체계가 있다.

하나는 神秘主義적 체계라 하기도 하고, 또는 聖禮主義적 체계라고도 해요. Secramentalistic System이라고도 해. 이게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다는 의미,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그와 함께 죽고, 옛 사람에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음( ) 그리하여,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해서 옛 죄인이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구원을 얻는 자는 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시사, 그런데 어떻게 체험하느냐? 洗禮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聖晩餐을 통해서 지탱이 된다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섬긴다는 이런 구원론의 체계와 또 하나는 이 法的체계(juridical system) 곧 칭의 사상,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無罪선언됨(Justification). 義人이라 선언됨이 바울의 구원론의 두 체계가 있는데 이게 서로 통합될 수 없다고 19C 宗敎史學파들이 계속 관찰해 왔어요.

그래서 종교사학파들은 바울의 이 神秘주의적, 聖禮주의적 구원론의 체계는 아마 헬라 思想에서 왔을 것이다. 헬라의 神秘宗敎의 영향으로 거기서 얻은 Category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게 해서 바울이 발달시켰을 거다. 이 법적 체계는 유대교적 영향으로 바울이 발달시켰을 거다. 이런 식으로 종교사학적으로 하나는 헬라 宗敎의 영향, 하나는 유대敎 精神의 영향으로 바울 일은 전혀 별개의 서로 통합되지 않은 구원론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봤다구. 그런데 Schweitzer 주장은 이 두 체계가 있는데 이 체계도 헬라 사상에서 온게 아니고 유대 묵시 사상에서 왔다는 것이 첫째 Schweitzer의 나보다 먼저 앞서간 종교 사학파들과 다른 관점으로,

둘째로 Schweitzer의 관점은 이제 이런건 W. Wrede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Wrede의 영향을 받아서 이게 바울의 중심 구원론 체계도 여기 요것은 바울의 부차적인 구원론의 체계로서 갈라디아서의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에 응해서 그들과 하나의 논쟁 수단으로 비로소 발달한 거다(법적 체계). 그래서 무엇이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신비주의적 체계는 바울의 구원론의 주 분화구이고, 화산이 폭발할 때 분화구, 바울의 구원론을 표현하는 분화구이고, 법적 체계는 그때에 같이 곁산도 폭발하는 이 부차적 분화구에 불과하다 라고 독일말로 Nebenkrater라고 주장 했어요.

그 이유가 몇가지 있다구.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이유가, 그중에 하나가 이런 그 관찰이라구, 바울의 편지 중에 칭의론, 법적 체계의 구원론은 사실 갈라디아서, 로마서 밖에 안 나온다구. 빌립보서 3장에 조금 있고 살전, 살후, 고전, 고후 어디에 있느냐? 이게 하나의 중요한 issue, 이유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는 바울의 윤리가 성립될 수 없단 말이야. 요 체계, 법적 구원론 체계위에는, 바울의 윤리가 성립될 수 없다. 바울의 윤리는 신비주의적 체계에 성립이 된단 말이야. 그래서 가령 로마서를 보란 말이야. 바울이 그의 福音을 이런 식으로 전개를 한다구. 5장까지, 그러니까 요 복음에 도전이 왔을때(법적 체계) 6:1에 뭐라 그래? “우리가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으면 죄를 더 짓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클 거아니냐!” 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義人된다면 죄를 더 짓자 말이야? 그래서 윤리와 상충된, 그래서 이 바울이 칭의론적이 구원론에 대한 윤리적 관점에서 도전이 있을때 바울이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 금방 신비주의적 체계로 대답을 한다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를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에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거짓으로 불 순종 할 수 있느냐. 금방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에 있음으로 대답을 한다구.

그것을 Schwietzer는 뭐라고 그러느냐면, 신비주의적 체계, 구원론 체계는 바울 신학에 다양한 면을 다 통합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법적체계는 통합을 못한단 말이야. 윤리를 통합 못해. 그래서 이 사람의 주장은 이게(신비주의적) 원래 바울의 신학의 체계이고, 주 분화구고, 법적체계는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논쟁이 있었단 말이야. , 시간적으로 후에 속하는 것으로서, 바울 구원론에 본질적인 체계가 못되고 구원론의 본질적인 체계가 못되고 부차적인 체계에 불과하다. 이렇게 주장을 한 거예요. 그 뒤에 이 자체는 큰 문제라. 이 자체는 신학적인 큰 문제예요. 계속해서 그 뒤에 이 문제가 계속 토론이 돼요. 지금까지 토론을 해요. 지금까지 종교사학파나 주관서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요.

최근에 바울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쟁을 불러 일으킨 E.P.Sanders같은 사람도 사실 이런 부류지. 이런 걸 어떤 영국책에서는 Participation 구원론이라 그래. Participation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함. 참여해서 구원을 얻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 세례라 그러지. 지금까지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있어.

그러나 사실은 내가 내 책에서도 보여줄려고 그랬지만, 이 체계가 서로 통합될 수 없는 별개의 체계가 아니고 같은 하나라, 하나. 한 동전의 양면에 불과해요. 그것은 믿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를 얻는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두 체계는 사실은 하나의 체계라. 그러나 이것은 神學적인 서론에서 더 증명을 해야 되지. 그래서 지금 살전, 살후와 고전, 고후에 이 칭의론이 안 나오고, 그런데 바울의 이 구원론이 두 체계가 있는데, 두 체계가 있는 것을 전제하고 그 다음에 이제 살전, 살후, 고전, 고후에 칭의론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갈라디아는 어떻게 연대를 잡는다구? 이보다 후에 비로소 갈라디아 문제가 터진걸로 보고 갈라디아 문제에 응하기 위해서 칭의론을 발달시킨 것으로 본단 말이야. 그렇다면 갈라디아가 뭐 보다 중요해? 로마서 직전에 쓰여진 걸로 봐야 된다 이말이예요. 알겠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한 답이, 그러나 이 논리에 대한 이러한 논리에 대한 답이 두가지로 나오지 두 세 가지, 네 가지까지도 나온다구. 첫째는 이 갈라디아 1-2에서 바울은 칭의론적 복음의 정의가 갈라디아에서 자기가 갈라디아 문제가 커지기 전에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에 유대주의자들이 침투해서 비로소 거기에 응해서 이 교리를 발달시킨 것이 아니고, 자기가 어쨌다는 거야? 자기가 갈라디아에 처음 가지고 그때 이미 선포했다 이 말이야.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유대주의 자들이 시비를 걸어서 그곳 갈라디아 문제가 발생한 거라구. 더 나아가서 그 칭의론적 복음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그래서 처음부터 자기 사도직에 시발점부터 견지했던 복음이라는 것을 바울이 강조한다구. 갈라디아서 1-2.

둘째로 이 문제는 아까 문제와 연결이 되는데 바울의 이 주장이 옳아야만 갈라디아 교회에서의 유대주의의 문제가 발생했음을 이해 할 수 있어. 바울이 이런 은헤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에 구원론을 펴지 않았다면 아예 갈라디아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라구. 유대 주의자들이 거기와서 시끄럽게 않는 것이라구.

세째로 이 교리는 이른바 살전 1:9-10, 바울이 농축된 상태로 하나의 formula, 하나의 formula와 같이 그것을 길게 설명은 하지 않지만 하나의 formula로 가령 또는 고전 1:30, 고후 5:21, 이 세 곳이 대표적인 곳이지. 살전 1:9-10, 고전 1:30, 고후 5:21, 더 나아가서 고전 2:5, 15:14-17, 고후 1:24 등도 참조하고 또는 고전 1:21, 3:5, 14:22, 15:7, 11 등도 참조하라. 하여간 우선 살전 1:9,10을 읽어봐요.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구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 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게 지금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선포한 복음의 요약인데 10절 후반부 우리가 누구를 기다려 하늘로 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데 그가 우리를 어떻게 한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한다. 이게 바로 칭의론이라. 하나님의 심판에서 무죄 석방을 받아 구원받음. 그런데 지금 우리가 믿으면 최후 심판때에 무죄 선언이 벌써 여기에서 이루어지며 여기에서 벌써 이루어지는 무죄선언, 의인됨이 최후의 심판때 확인이 되는거라 알겠어요?

그래서 살전 1:9,10. 데살로니가 교회에 선포한 바울의 복음의, 이걸 바울은 길게 설명하지 않아요. 왜 설명하지 않아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이게 지금 문제가 된게 아니야. 뭐가 문제가 돼? 종말론이 문제가 돼, 재림이 언제냐가 문제가 돼! 그러니까 바울은 그 문제만 다루는 거야. 그러나 요 유대인과 관계해서 자기가 선포한 복음을 상기시킴에 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의인으로 판정받아 구원 받음을 아주 농축적인 관계로 말하고 있어 고전 1:30을 누가 한번 읽어 봐요. “너희는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의라 그 category, 그 다음에 고후 5:21 아주 중요한 절 읽어봐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mula야 말로 바울의 칭의론을 가장 효과있게 함축해서 표현하는 문장이라. 고전의 교리로 따른다면 말이야. 앞에까지 말이야. 그가 했던 말이 성립이 안돼요. 더 나아가서 요새 와서 사는 사람들이 강조하다시피 고전, 후에서의 큰 문제가 뭐냐면 이 지혜를 얻어 구원 얻으려는 태도... 인간들은 어느 종교에서나 종교를 떠나서 어떠한 人間의 이념이나 사고에서 두개의 구원의 길을 항상 설정한다구. 하나는 지혜이고 하나는 행위(선행), 그렇지 않아요? 모든 종교가 지혜와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깨달아서 각종 불교나 모든 종교에서 깨달음, 지혜를 터득해서 우주의 이치를 터득했어. 또 이 선행을 통해서 업적을 쌓았어.

이것이 세속화된 형태도 마찬가지, 세속화된 형태도 과학 문명을 발달시켜서 人間의 삶을 풍요롭게 함으로 부족함이 없이 하려는 모든 人本 주의와 모든 문명 낙관 주의가 人間의 지혜를 개발해서 인간에게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만들려고 했어. 또 이 선행, 人間을 잘 교육시켜서 이웃을 사랑하고 또 자기 것을 나누어 먹게 하고 이런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그래서 종교에서 또는 계속 비 종교적인 신념이나 사상에서 항상 지혜와 선행이 구원의 두 방침들로 설정이 돼요. 그런데 헬라 사람들 이걸 강조했다구(지혜), 그래서 이 선행을 강조한 종교에서는 자연히 공로 사상으로 발달한다구. 공로 사상으로 --율법을 잘 지켜서 공로를 쌓아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 반대 것으로 의인으로 인정이 되고 구원을 얻음이게 유대교에서 강조점이라. 유대교도 둘다 다 있다구. 그러나 이것 선행이 그래도 강조점이라면, 헬라 종교에서는 이것이 강조점이라. Platon 체계나 일반화된 헬라 종교나 신비 종교나 영지주의나 모두 지혜를 강조한다구.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 전형적인 헬라 사람들로 지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보았고, 이제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헬라 철학의 일파 정도로, 그래서 다른 헬라 철학이나 종교들이 가져다 주는 지혜와 비교할 만큼 또 하나의 지혜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봐서 그 지혜를 따라서 구원 얻는다고... 그들에게 바울이 무엇을 가르친 거예요? 人間의 지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게 아니고 무엇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어리석은 것이고 약한 것이란 말이야. 지혜와 정 반대 되는 것이다. 人間은 그 지혜를 쌓아서 구원 얻는게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그 가르침을 고전, 후에서 강력히 전개해요. 고전1-4까지. 그러나 고후에서 나중에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도전도 이런 지혜 사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 헬라적인 사상,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는 선행으로 구원을 받음. 율법을 따라서 선행을 따라서, 공로를 따라서 구원을 받는다에 대해서 이 sola gratia(은혜로만), solus christos(그리스도로만) 그 소리는 무슨 소리인고니,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리스도를 내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만(sola fide) 받아들인 거예요.

이게 이제 바울의 칭의 사상인데, 이 사상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었다구. 라는 catrgory로 표현이 되었다면, 주로 표현이 되었다면 고전, 후에서는 어떻게? 지혜라는 catrgory로 표현이 되었다구.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지혜란 거예요. 그래서 이 바울의 복음이 그리스도로만 곧 은혜로만, 믿음으로만의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주의자들 문제에 직면해서 비로소 라는 categary로 처음 개발된게 아니고, 바울이 갈라디아서 1-2장에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의해서 처음 부터 도입했던 것으로 그때 그때 그 청중들의 주 관심. 그들이 무엇으로 구원을 얻으려 나의 주 관심에 따라 바르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의 공로사상에 율법주의와 공로 사상에 대항해서 어떤 category라는, 고린도 교회에서는 어떤 category로 지혜를 얻어서 인간의 지혜를 개발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것에 대항했어요.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아까 이야기 한대로 고전 1:30이라든지, 고후 5:21이라든지 아주 농축된 상태로 라는 category로 선행을, 인간이 선행을 쌓아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서 다 내안에 이거든 그리스도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교리를 가르칠 수가 있음을 보여준다구.

그러나 그 교회에서 주된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의를 얻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지혜를 얻어서 지혜로 구원 받느냐에 대해 있으나, 자연히 지혜라는 category를 써서 이 복음을 전제할 수 밖에 없는거라. 그런 차이만 있는 것이지 이 Schweitzer를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상관시켜서 갈라디아를 연대 맺음에 있어서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상관 시켜서 연대 맺으면 갈라디아가 자꾸 어떻게 되는거야? 지금 이 로마서와 가까이 뒤에 써진 편지로 연대를 잡는다구. 그렇다면 아주 늦어져서 52년내지 55년 이쯤에 쓰였다고 봐야 한다구. 그러나 우리가 아까 전에 갈라디아 내에서의 증거와 사도행전과의 관계에서 남부 갈라디아설에 증거한다면 48-49년쯤에 쓰였다고 봐야된다.

그래서 이 두개가(52-55년대, 48-49년대) 옳은 견해로 있는데 둘 중에 하나가 맞을 거다. 이 갈라디아서, 로마서의 신학적인 유사성과 종말론, 그리고 칭의론의 관점에서 갈라디아서를 고전, 후서와 살전, 후보다 늦게 연대잡는 사람들은 자연히 52-55년대 설을 받아서 주장해요.

그렇다면은 무슨 소리냐 하면 50년대 중반쯤에 바울의 신학에 종말론과 구원론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는 이야기야. 그런데 그게 가능했겠느냐? 또 갈라디아서 1-2장이 그런 가능성을 제시하느냐. 그렇지 않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자연히 우리는 이 처음설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AD 48-49년 쯤에는 바울은 벌써 한 50세쯤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다메섹도상에서 사도직과 복음을 받은 이후 벌써 한 16년쯤 복음 선포 활동을 하였다고 봐야해요. ? 바울이 32-34년 이어간에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이 시점은 어느 시점이야? 그의 복음과 사도직을 받은 후 한 16년쯤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이라구. 그리고 나이로 말할까 하면 50세쯤 된 사람이라. 이런 사람이 갑자기 종말론과 구원론에서 지금 이성이 드는 근본적인 변화를(전환을) 가졌겠느냐?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좀 어렵단 말이야.

더 나아가서 바울은 자기의 칭의론을 중심으로 한 복음을 --갈라디아 교회에서 지금 문제거리인 이 복음을--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된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구. 그러면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후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떻게 설명하느냐면, 이때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도전을 받고 비로소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뒤돌아 봤을 때에,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 함축된 것을 이 때 비로소 펼치기 시작했다는 거야. 갈라디아서의 도전 때문에, 그러면 바울은 어떤 사람이예요? 이 기간동안 이 때는 어느때예요? 벌써 한 30-20년 동안을 바울이 통 자기의 다메섹 도상의 계시의 함축 의미를 모르고 있다가, 갈라디아에서 몇놈들이 와서 시끄럽게 하니까, 그때사 비로소 아차! 일이 이렇구나 하고 깨달았단 말이야. 우리가 바울 서신을 통해서 안다는 신학자 --주로 구약에 대해 해석함으로 자기 신학을 펴는 아주 활발한 마음을 가진 신학자-- 바울이 그런식의 사람이었겠느냐? 2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전혀 묵상도 안해보고 잘 모르고 있다가, 단지 교회를 좀 시끄럽게 한다고 비로소 그때야 깨달았다? 이런 것은 맞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 전기설(48-49AD)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또 이 문제가 있다구. 전기설에 관심을 갖는, 그러니까 갈라디아서가 48-49년 이 어간에 쓰였다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와 사이에 적어도 8, 9년의 간격이 있다는 말이야. 로마서는 한 57년쯤에 쓰였을 거라구. 그러면 어떤 사람들, 후기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로마서와 같이 갈라디아서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가깝게 연대 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제일 가깝기 때문에-- 8, 9년 간격은 너무 길다. 로마서 직전에 쓰였다고 봐야 된다. 그런 한 50-40대의 사람이 8, 9년이라는 8, 9년은 엊그제 같다고 엊그제... 8, 9년동안에 사상적인 특별히 뭐 엄청난 진전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변화가 있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 바울의 신학이 --칭의론을 포함한 바울의 신학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1-2장에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의 체험에서 유래하면서 갈라디아서가 쓰이기 전에 주된 특징들이 이미 형성이 된 후, 왜 갈라디아서에 있어서 쓰일때가 벌써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후 한 15-6년이라구. 그러니까 그 전에 이미 바울의 신학에 주된 특징들이 형성이 된거라. 그 뒤에 계속 이 큰 변화없이 지탱이 됐다고 봐야 된다 말이예요. 다만 그 편지의 수신인들의 상황에 따라 한때는 이러한 특징을, 다른 때는 저러한 특징을 강조했을 따름이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울의 편지들이란게 다 이 무슨 조직신학 논문이 아니지. 그 교회의 문제에 응용하는 단편적인 바울의 복음 전개에 전체의 면을 보여주는게 아니고, 단편적인 문헌으로 그 교회에 가장 중요한 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때문에, 바울의 신학에는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유래하면서 갈라디아서를 쓰기전에 이미 다 형성이 되었단 말이야. 그 후에 계속 이제 그런 상태로 지탱이된다. 다만 그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들에 따라 한 때는 이 면을 어떤 때는 저면을 강조했을 따름이지, 그 바울의 신학이 편지 쓸때마다 살전에는 이렇고 갈라디아서를 쓸때는 저렇고 고전, 후를 쓸때는 또 이렇고 뭐 이런거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총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를 후기에 연대 잡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갈라디아서는 아마 AD 48년경 예루살렘 사도회의 직전에 쓰였다고 봐야 된다. 안디옥과 그 주위의 교회들에서 유대주의 자들이 침투했던 바울의 교회들을 교란 시킨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당도하자(다시합시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직전에 쓰였다고 봐야된다. 그 시점을 좀 더 정확히 말해 --그 상황을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안디옥(시리아)과 그 주변의 교회들에 유대주의 자들이 침투해서 바울의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를 하고, 남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까지 이들의 교란 활동을 확대하게 되자,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열어야 할 상황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 우선 바울이 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써서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유대주의 자들의 그 선전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에 막 떠나면서, 일단 이 편지를 써서 거기에서 사고를 막으려고 한거다.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가서 이제 이들이 안디옥의 갈라디아에서 일으킨 문제, 할례 문제, 율법 문제를 정식으로 토론해서 사도회의 결의를 보게 된거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 알겠어요? ! 그렇다면은 이제 자연히 거꾸로 아까 Schweitzer의 이론도 따진다구. Schweitzer가 뭐라고? 칭의론은 바울의 구원론의 별 중요하지 않는 것이다는게 이유들 중에 하나가 무어라고? 바울의 일부 편지들에만 나온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온다구. 그런데 이것들은 다 후기 편지들이다. 이게 살전, , 고전, 후에 안나온다. 이런게 하나의 이유였는데, 갈라디아서가 이렇게 전기 편지이면 --아주 최초의 편지이면-- Schweitzer의 이론이 그만큼 약화되는 거야. 그래서 한 48년 사도회의 직전에 쓰였다고 본단 말이야. 그렇다면 갈라디아서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울의 편지들 중에 제일 먼저 쓰여진 편지라.

그렇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주장하는 것과 맞아들아 간단 말이야. 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인된다는 복음이 어디서 받았다고 주장해?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다고 주장해. 그것과 맞아들어 간다구. 도중에 발달한게 하니고, 자 그 다음 그러면은 두번째로 살전, 후에 대한 서론, 여러분들 사도행전 17:1-10까지와 이 편지들을...

그리고 이 두 편지들을 자세히 꼭 읽고 한번 문단의 제목들을 달아와요. 그 다음의 이 F.F 부르스의 바울 신학책 있지 ?거기의 데살로니가 1-2에 대한 것을 보라구(영문단 p223-234)인데 여러분들 한번 한국어 번역되어 있으니까 그걸 읽고, Guthrie의 신약개론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읽어봐요. 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이 제목이 두가지야. 영국판은 Paul the apostle love in heart set three. 좀 복잡하게 되어있고, 미국쪽은 Paul the apostle love three scripture.되어 있다.

 

2. 데살로니가 전후서

살전은 49-50년 쯤에 고린도에서 쓰여졌어요. 이것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다구. 이견이 없는건 토론할 필요가 없어요. 살후는 그 직후에 쓰였다고 보는데 이게 issue중에 하나가, 살후가 진짜 바울의 편지냐 아니냐 둘 중에 하나예요. 이게 진짜 바울의 편지라면 이 시기의 살전 직후에 쓰였다고 그래. 보수주의 자들은 살후를 바울의 편지라고 보고, 비판주의자들은 살후를 바울의 편지로 안보고, 비판주의자들은 이른바 바울서신 7개만 바울서신으로 본다구. 뭐냐하면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와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이렇게 7개만 바울의 진짜 편지로 보고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목회서신들(pastralc), 이런 것들은 바울의 진짜 편지가 아니고 바울의 제자들이 쓴 편지라고 본다구. 바울의 제자들이 바울의 이름으로 쓴 편지라구.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가 바울의 진짜 편지냐 아니냐가 issue들 중에 하나라. , 하여간 우리는 데살로니가후서가 바울의 진짜 편지로 보니까 그 문제를 깊이 다루지 않겠는데, 여러분들 Guthrie책을 자세히 보면 이 토론이 되어 있다구. 데살로니가후서의 진의성에 대한, 거기 읽어봐요. 그 외의 중요한 issue, 이 두개의 공통 문제들에서 나오는 중요한 issue들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내의 상황에 관계되는데, 첫째로 거기의 일부가 아마 유대인들이 꽤 있었는데 바울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고 비겁하다고 바울에게 욕을 한거야.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1-2:12까지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서 방어를 해요. 그 다음 이제 외부에서의 핍박이 좀 있었던 것 같애. 2:14에서는 인내를 하도록 바울이 권면을 하고, 세째로는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의 과거 이방인 생활의 영향이 지속이 안되도록 그들의 이방인 환경, 이방 환경이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 숭배라든지 음행이라든지의 영향을 주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고(데살로니가전서 4:3-18).

그러나 이제 주된 이슈는 주의 재림에 관한 오해라. 근데, 이 주의 재림에 관한 오해는 왜 났느냐? 옳지 않은 종말론적인 열기에서 나타난다구.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보고 그 재림을 열망했으나, 그 재림이 지체되어서 지금 큰 신앙의 혼란에 빠져서 있는거라. 특히 지금 자기들 중에 죽는 사람들이 발생한단 말이야. 재림을 다보고 구원을 얻어야 겠는데, 재림전에 임박했다고 하는데 재림이 일어나지 않고... , 그전에 노인들이 죽어간다 말이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주의 재림전에 곧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죽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거냐? 주의 재림 때에 그들은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불 이익을 당한거다, 손해를 본 거다, 이런 문제들로 여러분들이 들떠 있으면서 혼동 상태에 있었다구. 거기에 대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4:13-18에서 대답을 해요.

첫째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 장차 있을 것임을 확신 시킨다구.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부활할 것임을 확신시켜. 그러기 때문에 그의 재림때까지 생존하는 사람들이나 그전에 죽은 사람들이나 다 같이 주의 재림때에 주와 연합될 것이며, 그러니까 죽은 사람들은 부활하여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는 상태로... 뭐 누가 더 손해보고 누가 더 이익보고 하는 것 없음을 확신시킨다구. 그러나 재림전에 죽어도 괜찮다. 걱정하지 말라.”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서 말한다. 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열기 속에서 자기 주제의 능력을 잃고 생업을 다 포기하고 게으름을 부렸는데,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두 오심 사이에서 사는 자들임을 상기시키고 벌써와 아직(aleady-but not yet)의 긴장, 종말론적인 긴장속에서 살아야 함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책임있고 규율있고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권면하고 있어요.(5:2-10)

이장림파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않겠네! 9210월까지 2년 남았는데 90년으로 보자면 그렇지 1년 더 할 일 있나? 그 사람들 뭐하나 터미날에 가서 뭔가를 나눠주고, 사람들 많은데 가서 나눠주고 그냥 생업도 않고 있고 그거 아무것도 아니여! 이장림 섬기면서 뭐 저 책만 읽고 하지. 그럴꺼 아녀? 데살로니가 사람들 같이, 데살로니가 전서 후에 아마 (직후에 아마) 이 거짓 선생들이 일부 나타나서 스스로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며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 날이 이미 왔다고 가르쳤던 것 같애요. 이 거짓 가르침으로 부터 또 다시 종말론적인 열기와 혼돈이 발생했는데, 그래서 이들은 더 생업을 다 포기해 버리고 혼돈에 빠져서(살후 3:1-13),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라는 편지를 또 써서 이 주의 재림전에 일어나야 할 일들, 묵시적 시나리오를 살피고(살후 2:3-10), 다시 한번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모범을 따라 바울 자신의 모범을 책임있는 말들하고, 생업을 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이렇게 권고하고 있었어요(살후 3:6-12), 그래서 이 데살로니가전, 후서가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된 것 같다 이말이예요.

지금 곧 보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의 종말론과, 데살로니가 사람은 무엇때문에 문제가 돼? 가장 큰 문제가? 임박한 종말에 대해서 --그들의 신앙의 전체가 임박한 종말에 대해서-- 그래서 현재를 포기해 버리는 거야. 이따 보겠지만 고린도인들의 문제는 이미 자기들이 현재, 벌써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미래를 포기하고 망각해 버린거야. 데살로니가인들과 고린도인들이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정 반대예요. 이 사람들은 아주 그래서 고린도인, 세속적인,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구. 이 사람들은 아주 현상과 관계없는 생업을 다 포기해 버리고, 현재를 다 포기해 버리고, 지금 여기서를 다 포기해 버리고 했단 말이야.

근데 이 잘못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이 항상 이 양극단에서 왔다 갔다 한다구.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장림파가 데살로니가에 속한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방종인데, 둘 다 옳지 않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은 alredy-but not yet의 긴장속에서 살아야 된다구. 종말의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벌써 왔다. 그러나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 우리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벌써 누리는 자로서 종말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지금 우리는 이 신앙의 매임을 강조하는 말인데 이 안도함이 있어야 돼. 안도함. Gelassenheit. 한국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워요. Gelassenheit. 영어로도 번역하기가 힘들어요. 신앙에 좀더 안도함.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그냥 아무 걱정 없는 상태, 이게 Gelassenheit.

그래서 이 종말의 구원에 대해서 그냥 안달하고 불안해 하고... 이것은 신앙이 아니란 말이야. 이 데살로니가인들의 신앙이 옳지 않단 말이야. 우리 개혁 신학 전통에서는 원래 이 예정론이 우리의 신앙에 Gelassenheit를 주기 위해서 전개되는 교리인데, 교리를 왜곡해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예정 받았나? 그래서 내가 종말에 구원 받을 것인가, 안 받을 것인가?” 해서 안절 부절 안달을 한다구. 그건 예정론이 전혀 잘못 이해되서 그래, 그건 옳지 않단 말이야. 그런 신앙이 어디있어?. 반면에 신앙이 ... Gelassenheit 돼 있어.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기 때문에, 성령이 내주하는 성령의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오든, 내일 오든, 아니면 천년후에 오든, 십만년 후에 오든, 우리 구원이 확실하다는 Gelassenheit가 있어야 돼.

그러나 우리가 받은 것은 기껏해야 첫 열매에 불과하고 우리 구원의 완성이 종말에 있어야 된다는 이 기대, 이 소망이 또 있어야 된다. 이 소망은 무엇을 하는거야? 이 종말론적인 완성에 대한 소망은 현재를 상대화 한거야. 현재를 상대화. 그러니까 지금이 전체가 전부가 아니야 . 지금 여기서 가치를 절대화해서는 안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추구하는대로 주로 어떻게 살아야 해 ‘as if not’으로 살아야 돼. 결혼한 자는 마치 결혼하지 않은 것 같이, 부자는 부자 아닌 것 같이, 우는 자는 울지 않는 것 같이, 우리 삶이 현재를 종말의 완성의 기점으로 현재를 상대화 하며 현재 가치들 때문에 울고, 불고, 현 부자도 마치 구원을 다 받은양 방자해서도 안되고 좀 가난하고 출세하지 못했다고 출세라는게 뭐야? 세상에 나오는게 출세지. 그것 좀 못했다고 그냥 울고 불고 그냥 막 때려 엎어 버려야 한다고 믿는 이상한 사람들. 그것이 아니다 이말이예요. as if not 바로 그거란 말이야.

이 두 가지가 신앙의 Gelassenheit라 이거야. 안도함. 내가 설움 받는다고 좀 이 세상이 핍박이 심해지고 이 세상이 악해지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한다는 것을... 반면에 그 안도함이 어떻게 돼 버리면 요렇게 되 버리면 안된단 말이야. 고린도인같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첫 열매에 불과하고 종말에서 완성된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이건 같은 짓거리야. 상대적인 것이지. 이것은 미래의 종말에 구원의 완성이 되어서 현재를 더 많은 것 같이. 이런 그 소망과 책임있는 윤리의 삶. 이런걸 두렵고 떨림의 삶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안도와 떨림의 그 긴장 이 속에서 잘 어울린단 말이야. 이것이 신약적인, 그리고 올바른 그리스도인적인 종말론이고, 우리 그 종말론적인 시점이어요. 그런데 이른바 정동 교회에서도 이 두 극단에 오락가락해... 여러분 저 산속에서 외치는 사람들 한테 가면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야. 그러나 이 시장에서 저기 그 교회는 주일날만 나오고 부동산 투기하고 뇌물 받아가지고 교회가면 십일조하는 나리 나부랭이들 이야기 들으면 고린도인들과 같고 우리 교회도 그래. 그렇죠? 여러분들 신앙은 어쩐지... 하여간 지금 데살로니가 사람들 같이 되어서는 안된단 말이야. 고린도인들과 같이 되어서도 안되고.... 자 그러면 시간 얼마 남았어요. 다 됐어?

이 다음시간에 고린도 전후서를 하겠는데 고린도 전후서의 서론은 이미 내가 어디다 써놨다구. 지금 여러분들 1학년들이지. 지금 2학년들이 지난학기에 내 고린도 전후서, 고린도전서 강해를 복사해 가지고 교재로 썼다구. 거기 첫 부분에 고린도 전후서에 대한 서론이 있어요. 고린도 전후서에 가장 큰 문제는, 서론의 문제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 또 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그 복잡한 관계를 지적하면 고린도 전후서가 어떤 정황에 쓰였으며 고린도 후서가 하나의 책이냐, 두개의 책이냐, 아니면 두개의 편지의 다른 한 조각, 3의 편지가 삽입된 거냐. 고린도 후서에 소위 그 통일점 이런것 까지 다 다루게 되고, 고린도 교회란게 어떤 고린도의 숭배지의 교회에 신들이 들어서 있었어요. 바울이 그걸 어떻게 막는가 이런 것을 정확하게 다 다루는 거라구. 이게 고린도 전후서의 서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야. 여러분들 그걸 구해가지고 오든가 아니면, 구해오면 진도가 좀 빨리 나갈거야. 추석에 영향 안 받겠죠.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전후서 하고 고린도 전후서랑 다음주 그 다음주까지 다 읽고 각 문단마다 번호를, 제목을 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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