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시편강해(시편20편)
시편 20편
[개 요]
주제-이 시는 왕이 띠를 띠고 전쟁에 출전하기 전에 부르는 데 적합한 노래로서, 마치 애국가와도 같은 노래이다. 다윗이 전쟁을 앞두고 초조해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시를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려면 먼저 자신이 시련을 당해 보아야 한다. 백성들은 사랑하는 왕을 위해서 여호와께 부르짖는다:"하나님이여, 우리 왕을 구원하소서." 회중이 함께 이 시를 노래로 불렀다는 것은 이 시의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머리말에 "다윗의 시"라고 기록된 것으로부터 다윗이 이 시를 지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가 이 시를 언제 작사하였는가를 정확히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시대에 늘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칼이 부러질 수는 있었겠지만, 결코 녹이 슬지는 않았다. 킴치(Kimchi)는 머리말에 나오는 "다윗의"를 "다윗에 대해" 또는 "다윗을 위해"라고 해석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이 시의 중심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시를 읽고서 잠시 동안만 묵상을 해도 이 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주께서 교회를 위해 큰 싸움을 하시는 동안 교회가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부르짖는 기도이다. 영적 전투를 벌이는 하나님의 백성들, 구원의 대장을 머리로 한 성도들은 이처럼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하실 것을 기도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를 따라서 짤막한 강해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는 여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4절왕의 성공을 위한 기도.
5-7절하나님과 그분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에 대한 확고한 신뢰.
8절원수의 패배를 선언함.
9절여호와께 간구함.[강 해]
1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1절.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그들의 왕을 위해 기도한다. 시온의 백성들이 평화의 왕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특히 전투가 있는 시기에는 두 배로 간구하며, 우리 주님께서 슬픔 가운데 있다면 교회가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 구세주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날들은 모두 고난의 날이요, 환난날들이었으며, 그분은 그 기간 동안 기도하며 지내셨다. 교회도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주님이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실 것을 또한 간구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하던 시간은 특별히 어두운 시간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경외하심을 보고서 그분의 간구를 들어 주셨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기도를 항상 들으신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토록 고민하던 시간에는 땅에 얼굴을 묻고 세 번 기도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주님은 기도하여 힘을 얻으셨고, 그 영적 전투에서 승리자로서 일어나셨다. 십자가에서 드리신 기도도 아버지께서 들으셨다. 시 22편에서 주님은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라고 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이 되셨다. 주님의 기도하는 삶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난 중에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비인가! 또한 아무것도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고난이 천둥처럼 울린다 해도 고난 중에 기도하는 성도들의 목소리는 폭풍을 뚫고 하나님께 상달하는 것이다. 오 예수여,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리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고, 두려움을 이길 수 있나이다.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너를 높은 곳에 두시고"라고 해석한다. "이름"이란 우리에게 알려진 그분의 성품을 말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써 노력해야 한다. "야곱의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과 성품을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내기를 기뻐하신다. 이 존엄한 이름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늘의 학자만이 이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뜻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우리 주 예수를 삶과 죽음의 싸움에서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모든 원수들 위에 높이 들어올리셨다. 지금도 그분의 싸움은 그분의 신비한 몸인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교회가 위험에 싸여 있기에 그분은 지금도 위험 가운데 둘러싸여 계신 것이다. 오직 우리 하나님의 영원하신 이름만이 언약을 지키시고 십자가의 군사를 보호하시며, 원수들 위에 높이 들어올리실 수 있다. 고난의 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구세주께서는 침묵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이 충성스러운 자를 지키신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야곱에게는 고난의 날들이 있었다. 그는 씨름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들으신 바 되었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시간에 그를 높여 주셨다.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도 씨름하는 야곱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1절은 고난을 앞둔 자녀, 친구, 사역자들을 축복하는 구절이 된다. 이 구절에서는 육적인, 그리고 영적인 보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하늘의 성전에서 천사가 와서 우리 주님께 힘을 주었다. 주님은 나무에 달리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고 새 힘을 얻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도움처럼 큰 힘을 주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오는 구원과 같은 구원도 없다. 이 성전은 우리 주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성전이다.
성도들이여, 고난에 처할 때마다 십자가로 나아가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소의 도움을 멸시한다. 그러나 세상의 물질적인 도움보다도 성소의 도움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안다. 그들은 군대의 도움과 재물의 도움을 구하며 사람들에게 아첨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향한다.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간구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멸시당하는 자, 고난에 처한 자를 도와주신다. 기도는 결코 헛되이 돌아오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온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다. 성도들이 모여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우리 주님의 신비한 몸인 교회에 선한 것을 부어 주신다. 세상에는 강력 접착제가 있고, 또 물건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성도들로 하나가 되게 하고, 힘을 주는 것은 없다.
이 구절은 주일 아침에 사람들을 축복하는 구절로 적합하다. 목사가 성도들에게, 또 성도들이 사역자에게 하는 인사로 적절하다. 성도들은 아들 안에 계신 하나님께, 그리고 택하신 교회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은 이 하나님을 바라며 약속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절.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전쟁을 시작하기 전, 왕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다. 하나님이 이 제물을 받으시면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믿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육체를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 이 제물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고, 그분은 지옥의 군대를 격파하셨다. 지금도 그분의 희생 제물이 하늘 성소에 향기를 발한다. 성도들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바치는 제물을 아들의 희생 제물과 봉헌처럼 받으신다. 우리가 영적 전투를 할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드리신 희생 제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의 제단에서 피 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기 전에는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셀라." 우리는 선한 일을 하느라고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는 중에도 잠시 쉬는 것이 더욱 빨리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성도들이여, 잠깐 멈추어라.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다. 잠시 쉬어라. 주님께서 바치신 번제물을 묵상하라. 그리고 당신이 해야 할 일에 전력을 다하라.
4절.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기를 소원하셨고, 이 일을 도모하셨다. 초대 교회는 주께서 도모하시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했고, 오늘날 현대 교회는 그 도모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은 이 구절을 약속으로 보아도 좋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워 실행한다면 우리는 꼭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뜻을 품어야 한다. 우리 주님도 늘 이렇게 하셨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겠는가? 그분도 이렇게 기도해야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겠는가!
5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7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5절.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다. 이 구원은 주님의 구원이며, 그래서 "너의 승리"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을 자는 우리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그 구원을 즐거워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구원을 받고자 결심을 해야 하며, 주님의 구원하시는 팔 안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이 시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왕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이미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개가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온전히 승리를 거두신 것을 이미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더 즐거워해야 하겠는가! 믿음이 없는 자들은 죽음이 이르기도 전에 장례식을 생각하며 흐느낀다. 왜 우리는 승리의 춤을 추기 전에 믿음으로 노래하지 못하는가? 꽃봉오리는 그대로 아름다운 것이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도 귀한 것이다. 꽃봉오리는 꽃이 필 것이고, 약속은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즐거워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게 될 것이다. 신하들이 즐거워하고 행복을 누린다면, 이것은 군주에게 명예가 된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원수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면 우리는 저항을 하고, 대적이 넘어지면 우리는 승리의 깃발을 흔든다. 어떤 사람들은 이 왕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저 왕의 이름으로 싸움을 벌이나, 충성스러운 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간다.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악한 세대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의 교회에서 통치하시는 한, 우리는 두려움으로 기를 거둘 필요가 없으며 거룩한 용기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예수의 놀라운 이름은
모든 원수들을 물러가게 하네
온유하신 예수, 진노하신 어린양은
사자와 싸움을 벌이시네.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마음의 소원을 이 짧은 구절에 담을 수 있다:"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우리 주님께서 드리신 기도 중에서 이 기도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요 17:24).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 부음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배운다. 그리고 우리가 배운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한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상실한다. 이런 사람은 "이제 내가 아노니"라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기만에 빠져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이제 더 이상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자신의 무지함을 아는 영혼들은 여호와의 가르치심을 받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자는 종종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교회는 주 예수께서 큰 싸움에서 승리하실 것을 위해서 기도했고, 이제 믿음으로 전능하신 분의 팔로 그분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이 표현은 독특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분은 모든 세상 앞에서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을 받으셨으며, 여호와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서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부여받으셨다. 여호와 바로 그분께서 예수께 기름을 부으시고 왕과 구세주로 삼으셨으며,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이 우리의 방패가 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된다.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구세주께서 싸움을 하시는 동안 그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이 역사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 이 두 가지 특성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도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늘까지 도달한다. 하늘은 거룩한 곳이지만 예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늘까지 상달하게 한다. 우리는 극한 어려움에 처해 있으나, 하나님의 팔은 강하며 그 능력은 구원하시는 능력이다. 그 힘은 오른손에 있기에 하나님이 언제든지 구원하실 수 있다. 간구하는 성도들에게 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진실된 것과 거짓 된 것이 대조되어 있을 때에 진실은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는 세상적인 것들과 성도들이 의지하는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과 왕 되신 임마누엘을 대조시킨다. 세상 사람들은 병거와 말을 의지한다. 호화스런 옷을 입은 무사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요란스러운 바퀴 소리를 내며 달리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며, 세상의 헛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한 모습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분별하는 안목을 가진 자들은 이러한 모든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다윗의 시대에 전쟁하는 최신 무기는 큰 낫으로 무장된 병거였으며, 이 병거가 달리면서 사람들을 풀을 베듯 잘라 내었다.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은 이런 것들을 자랑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이런 무기들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특히 원수들의 기병대를 두려워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노래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군대와 비교하면서 애굽의 군대를 경멸하는 것은 큰 믿음의 표현이다.
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비열하게도 세상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는가! 그들은 마치 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예수여, 당신은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우리의 단순한 믿음을 결코 더럽히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는 또한 그분을 택했다. 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시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계시고, 홀로 행하시며, 변함이 없으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 아름다운 이름을 경배하자. 세상을 의지하고 그분을 불신하며 그분의 이름에 수치를 돌리는 일을 그만두자. 독자들이여, 이것을 깨달으라.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사 당신의 영혼으로 이것을 깨닫도록 계시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8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8절. "굽어 엎드러지고······일어나 바로 서도다." 세상을 의지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그 결과가 이처럼 다르다. 하나님의 원수들은 처음에는 바로 서지만, 그들은 곧 스스로 몰락하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엎드러진다. 그들의 기초는 썩었고,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곧 무너지는 것이다. 그들이 자랑하던 병거가 불에 타고 그들의 말이 질병으로 죽으면, 그들이 자랑하던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들은 이들과 다르다. 그들은 처음에는 자주 넘어지나 전능하신 분의 손이 그들을 일으켜 세우면 그들은 즐겁게 일어나 바로 선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분의 백성들이 받는 유업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나 사망이나 사탄이나 죄, 이 모든 것들을 발로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의지하던 자들은 영원히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9절. "여호와여 구원하소서······왕은 응락하소서." 이 구절은 이 시의 요약과 같다. 시편 기자는 두 가지 소원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예수를 구원해 주실 것과 예수께서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첫번째 간구를 들으셨다. 그리고 두번째 간구도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분명히 들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를 마치면서 "여호와께서 우리 왕을 구원하셨다"라고 외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왕이신 예수를 구원하셨다. 그분이 곧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실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20편 전체.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에 계시던 때에, 또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성도들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았다면, 성도들은 바로 이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메시아께서는 그분의 세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고 하셨다. 그분은 고통하던 시기에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받고자 했던 위로를 바로 이 시에서 발견하셨을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메시아의 고난과 그 후에 얻을 영광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아름답고 즐거운 시이다. -앤드류 보나.
시 20편 전체. 시편에 있는 많은 시들이 공적 예배를 드리는 데 사용되었다는 흔적이 많이 있다. 시 22편에는 대제사장이신 메시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는 위대한 행동이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께서 속죄일에 백성들을 위해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이 위대한 행동을 기념하기 원했다. 이 주제는 엄숙하고 장엄하고 백성들의 애정을 자아내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준비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적당한 상황에 이를 때, 이에 적합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위대한 사건을 연출하기에 합당한 무대를 조성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건한 믿음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했다.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그분의 귀한 성품들을 생각하며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을 느리게 암송한다. 유대 교회에서 공적 예배를 드릴 때에 시 20-24편이 함께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실제로 이런 상황이 있었음직하다-스펄전.) -라일랜드(R. H. Ryland, M.A., The Psalms Restored to Messiah, 1853).
시 20편 전체. 선한 소망은 좋은 것이며, 이것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이것을 가르친다. 자비와 긍휼을 보이는 것은 성도들의 의무에 속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친절한 행사를 보일 수 있다. -윌리엄 플러머.
1절.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그리스도의 생애는 고난의 생애였다. 그분은 고난을 받기 위해 오셨으며, 슬픔과 질고를 아신다······그러나 다른 어느 때보다도 겟세마네 동산에 계시던 날은 환난의 날이었다. 그분의 마음은 무거웠고 놀라셨으며, 흘리는 땀방울은 마치 피가 땅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분의 영혼이 슬픔에 겨워 죽게 되기까지 이르렀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이 고통은 극에 달했다······십자가에서 그분은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아버지의 진노를 견디셨으며,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셨다. 그분이 동산에 계시던 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은 고난의 날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기도하셨던 것처럼 이 고난의 날에도 기도하셨다. 이 시에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기도한다. -존 힐(John Hill).
1절. "이름."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란 바로 하나님 그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서 그분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통해서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야곱과 자비로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후손들과 자비로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말한다. 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고난의 시기에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즉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와 진리와 능력과 지혜와 공의로우심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의심치 않기 때문에 더욱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관용과 동정을 베푼다는 선한 이름을 가졌다면, 가난한 자들이 궁핍할 때에 이렇게 말하면서 그에게 나아갈 것이다:"나는 그 사람에게 나아가겠다. 그는 선한 이름을 가졌고, 가난한 사람에게 선과 자비를 베풀며, 모든 사람들이 그가 후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선한 이름이 가난한 사람들로 담대하게, 그리고 자주 그에게 나아오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이름으로 알게 되면, 그분께 담대히 기도로 나아갈 수 있다······만일 사람들이 그분이 자비롭고 선하시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의 아름다운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나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거나, 그분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면, 그분이 비록 자비와 진실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 해도 고난의 때에 그분께 나아가 기도하며 도움을 구할 마음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잘 아는 자들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은 기도하지 않는다. -니콜라스 본드(Nicholas Bownd, 1604).
1절.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이 말은 족장 야곱의 생애를 아름답게 언급하는 표현이다.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 -존 모리슨.
1절.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히브리 원어의 뜻은 "너를 높은 곳에 두시며"이다. 여호와의 이러한 행동은 그분의 이름을 나타낸다:"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야곱도 이와 같은 곤란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창 32:6, 7). 둘째, 야곱도 같은 목적, 즉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목적으로 기도했다(창 35:3). 셋째, 그는 왕으로서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와 말씀하셨다(호 12:4). 넷째, "야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며, 이런 이름으로 부르며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근거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 트랩.
1절.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당신이 수천 수만의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이름에는 당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키며 당신이 끝까지 견디고 승리하도록 지키실 것에 대한 보증이 들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한번 시험해 보라. 나는 여러 차례 시험해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아는 것을 말하고 내가 본 것을 증거한다. 야곱의 하나님이 당신을 지키실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정말 어리석은 아일랜드의 천주교인을 만났다. 그는 무지하고 고집스런 사람이었는데, 신부가 성스러운 물을 한 방울만 그에게 떨어뜨려 준다면 야수가 득실거리는 곳을 돌아다녀도 그것들이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내게도 한번 시험해 보라고 했다. 나는 이 시골 사람의 가증한 장난에 염증을 느끼고 나와 버렸다. 그러나 이 가련한 사람이 신부와 한 방울의 물을 이처럼 신뢰하는데, 나는 왜 어리석게도 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서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 이름을 시험해 볼 때마다 나는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오 형제들이여, 언약의 피, 언약의 은혜, 언약의 약속을 누리라. 그리하면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리라." -조셉 아이언스(Joseph Irons).
1절.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슬픔에 잠긴 어린이에게 이보다 더 감미로운 소망과 위로를 주는 기도는 없다. 사람들 중에 고난의 날을 겪어 보지 않은 자가 어디 있으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는 동안 구름이 태양을 가리워 어두움의 길을 걸어 보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어떤 노인은 "사람은 고난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다.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고난의 날을 맞이한다. 이러한 때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라는 말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이 기도는 한 사람이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며, 또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바르통 부시에(Barton Bouchier).
1, 2절. 믿음의 눈으로 이 구절을 살펴보라. 메시아는 환난날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쏟아 놓는다. 메시아의 신부는 그분의 탄식과 신음 소리를 듣고, 함께 마음 아파하며 동정한다. 그녀는 그분과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붙드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한다······이제 그분은 고난에서 벗어난 듯하다. 그분은 높이 들림을 받고, 우리의 동정어린 기도가 필요치 않으신 듯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그분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이는 곧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편 72:15이 이루어졌다:"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그분의 고난받는 지체들을 위해) 종일 찬송하리로다(영광을 얻으신 그분께)." -해밀턴 버쇼일(Hamilton Verschoyle, 1843).
1-5절. 이 부분은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다. 다윗이 백성들에게 바라는 대로 그들은 다윗을 위해 기도했다. 다윗은 백성들이 기도하기를 바랐고, 이것은 그들의 의무였으며, 그들도 이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의무를 수행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는 그들의 큰 잘못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나 자매 된 자가 우리에게 기도해 주기를 바라면, 우리는 이 의무를 다 수행해야 한다. 이 의무를 다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헤어질 때에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인사하며 헤어지는데, 이것을 그저 인사말로만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부탁할 때는 진정 기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진실된 마음으로 부탁해야 하며, 이 부탁을 받은 자들은 기도로 그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특별히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며 도움을 청할 때는 신실하게 기도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다윗도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제 전쟁에 나가서 원수들을 맞아 싸울 것이며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는 다윗에게 있어서 "환난날"이었던 것이다······이처럼 기도 부탁을 하는 사람에게 기도로 돕겠다는 약속을 한 사람은 이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약속이란 우리에게 손해가 되어도 지켜야 한다. 하물며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그를 위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부탁해 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는 우리가 약속한 대로 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이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속이는 것이 되며, 그의 기대하는 바를 좌절시키고 만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그를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려 주기를 바랐다고 하자. 우리가 그 약속을 들어 주기로 했다면 그는 큰 안심을 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가 게을러서 기도하지 않고 그를 속인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큰 잘못이다. 그가 이것을 알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 손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부탁을 받지 않았어도 예수께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처럼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특히 우리에게 기도해 주기를 바라는 자들에게는 더욱 이름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 특별히 부모들은 기도 중에 자녀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녀들은 매일 부모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도의 지원을 바라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어떻게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그들도 또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느 교회에 한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제 잠들어 하늘 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분의 기도를 받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도 부탁을 할 때면, 그는 언제나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게. 내가 기도할 때에 그대를 기억하도록 말일세"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도의 도움을 받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니콜라스 본드.
1, 5절. 1절에서 시편 기자는 "환난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라고 노래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그는 이 두 절에서 같은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1절의 기도는 "환난날"에 드린 기도이며, 메시아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던 때에 드린 기도이다. 5절의 기도도 역시 메시아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던 때를 위한 기도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구세주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분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들을 이 세상의 악에서 보호하시고,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들도 함께 있을 것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분은 또한 자신을 죽일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 그분은 하늘에 오르신 후,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간구하신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시편 기자가 5절에서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은 메시아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던웰(F. H. Dunwell).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진실된 믿음을 가진 자는 이 땅에서 도와줄 자가 아무도 없을 때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기도한다. 이것이 믿음과 불신의 차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세상에서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보일 때에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하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잡히는 것만을 느낄 수 있는 소경과도 같다.
그러나 믿음은 먼 곳을 바라보고, 하늘까지도 바라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본다. 이 하나님은 어떤 방법이든지 다 활용하실 수 있고, 아무것도 없이도 일을 하실 수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 데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믿음의 순교자 스데반은 원수들이 분노하고 그를 향해 이를 갈 때에도 하늘을 쳐다보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그를 변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말씀의 약속에 대해 믿음을 가진 자들은, 땅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때에 하늘에서 준비된 도움을 바라본다. -니콜라스 본드.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소"를 바라보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성소의 속죄소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소 안, 속죄소에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도우심과 힘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기도한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2절.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들으시고 도움의 손길을 주신다. -존 트랩.
3절. "네 모든 소제······네 번제." 아들이 아버지께 드린 "모든 소제"는 무엇인가?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그 겸손, 여인의 자궁에 거하신 그 인내, 비천한 출생, 딱딱한 구유에서 나시고, 소나 나귀와 같은 동물의 환영을 받으시고, 애굽으로 피신하시고, 나사렛에서 가난하게 사시고, 모든 선한 일을 하시고 악한 일을 참으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설교하며 가르치시고, 음식과 술을 탐하는 자라는 비방을 받으시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 불리우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여도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행한 것이라고 비난을 받으셨다.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 번제물이란 제물의 모든 부분을 불에 태우는 것이다. 남기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온전히 고난을 받으셨다. 머리에 쓰신 가시 면류관, 손과 발에 박힌 못, 그분의 귀를 울리는 조롱, 죽어 가는 순간에도 그 앞에서 즐거워하던 군중들, 식초와 쓴 담즙, 사망과 죽음의 언덕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 밭을 가는 자들이 밭에 이랑을 파듯, 군인들은 그분의 등에 긴 홈을 팠고,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지극히 존귀하신 분의 뺨을 치고,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쳤다. 그분의 포도원을 위해서 이보다 더 받아야 할 고초가 무엇이 더 있겠는가?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사 5:4). 포도나무 되신 아들께서 받으셨던 이 모든 고초 외에 더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 아버지여, 잊지 마소서. 우리 죄인들, 비참한 죄인들을 위해 바치신 이 "모든 소제"를 "기억"하소서. 죄를 지은 우리에게 영원한 심판을 내리지 마시고, 아무런 죄도 없으시고 입에는 궤사가 없으시던 그분의 "번제"를 받아 주소서! -닐(디오니시우스<Dionysius>와 게르호후스<Gerhohus>의 말을 인용함).
3절. "받으시기를."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불이 나와서 '재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증거이다. -매튜 풀.
3절. "네 번제." 여기서 우리는 "번제"를 영적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사랑의 불로 자신을 온전히 드리셨다. 또한 "네 번제"를 "네 모든 번제"라고 하는 것이 좋다. 번제란 번제물의 모든 부분을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그 모든 고난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겠다. 성령께서는 의인들에게 이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탄식하시며 가르치신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3절. "셀라."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말하는 "아멘"이란 뜻도 포함하고, 경탄하는 사람이 특별한 것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기도 하며, 이미 말한 것을 확증하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또한 이미 말한 것을 주의해서 생각하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음악 용어로서 쉼표를 나타낸다. -에드워드 마베리.
4절.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는 구세주께서 그분이 하실 일을 이루고자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 그분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의식으로 남겨서, 사람들이 이 의식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또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강건하게 하기를 원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기뻐하시는 아들의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윌슨.
4절.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맺은 언약에서 아들이 받을 영광과 백성들이 얻을 구원에 대해 무엇을 약속하셨든지,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존 길(John Gill).
4절.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응답하시기를 원하노라"로 해석했다. 네 뜻하는 바대로 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모하는 것도 이루어 주신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그 방법들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말이다. -존 트랩.
5절.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는, 그들이 얻는 구원의 기쁨에도 동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라는 표현이 나온다. -데이비드 딕슨.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외침은 사사 시대에 기드온을 따르던 자들이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던 것과 같은 외침이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자 하는 백성들이 이렇게 외치자 성이 무너졌다:"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수 6:20). 유다의 아비야 왕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을 때에도 백성들이 외치고서 이스라엘 군대 오십만을 죽였다(대하 13:13-17). 지금도 군인들이 그들의 장군의 이름과 영광을 자랑하는데, 이는 원수를 대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다. 시편의 이 구절도 영적인 면에서 이와 같은 것을 나타내고 있다. -마르틴 루터.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고대에는 "기"가 군대의 장비에 속했는데, 이 기를 사용하여 전쟁 중에 사람들을 집합시키고, 인도하고, 구분하고,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 이 외에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위로연을 베풀 때나 화려한 행진을 할 때, 특히 왕이 방문할 때에는 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순전히 상징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한다면, 당시 군대에서 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를 세우고, 그분의 영광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풍습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풍습이 유다로 전달되어 들어왔을 것이다. 터너(Turner)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수바(Soobah) 사람들의 풍습에 대해 들었다. 그들은 매월 언덕에 하얀 깃발을 꽂아 두고서 산으로 올라가 거기서 종교 행사를 가졌다. 그 땅의 신을 듀타(Dewta)라고 했는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 그의 환심을 얻고 축복을 받고자 했다. 그들은 듀타 신이 산의 정상에 머무르며 그가 원하는 대로 축복과 저주를 나누어 준다고 믿었다." -사무엘 버더(Oriental Customs, 1812).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종교적 행사나 군인들의 행진에서 사람들은 기를 들고 다닌다. 그러므로 거룩한 가마의 꼭대기나, 신전의 둥근 천장 위나 성문에, 또는 새 집의 지붕에는 그 종족의 기가 바람에 휘날리곤 했다. 인도의 시바 신은 하늘에 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조셉 로버츠(Joseph Roberts, Oriental Illustrations).
5절.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1)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우리 싸움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입에서 조언을 구하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분을 모시고 다닐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행위를 본받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할 것이며, 그분을 의지하고, 모든 일에 그분의 판단을 구할 것이다.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대항했다(삼상 17:45). (2)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승리를 자축할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여 "우리 기"를 세울 때에는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할 것이며, 우리의 승리에 대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것이고,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지 못할 것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5절. "우리 기를 세우리니." 우리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고백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로 삼는 것과 같다. 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런 고백을 더 분명하고, 더 순수하게, 더 열정적으로 한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더욱 하나가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더욱 용감하게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일에 더욱 성공적이 될 것이다. 기를 가진 군대는 무적의 군대가 될 수 있다(아 6:4). -윌슨.
5절. "우리 기." 우리 기를 세운 장대, 기의 색깔, 그리고 기의 장식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장대는 그분의 십자가, 색깔은 피와 물, 그리고 펄럭이는 장식은 복음이요 세상에 이 복음을 외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군대에서 기를 다는 막대는 십자가와 같은 모양이었다. 기를 다는 맨 끝은 십자가처럼 생겨서 그 끝에 기를 걸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상 나라들의 많은 군대들이 언젠가는 '십자가의 기' 아래 모일 것을 예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군인들이 십자가의 기 아래로 모이는 날이 올 것이다. -마크 프랭크(Mark Frank, 1613-1664).
5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 계셔서 그분이 받은 옆구리의 상처, 손과 발의 흔적을 보이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아이작 윌리엄스(Isaac Williams, 디오니시우스의 말을 인용함).
6절. "이제 내가 아노니."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가 "나"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여러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마치 한 사람이 드리는 것처럼 표현하여 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강조했다. "기름 부음받은 자." 이 말은 여호와께서 그분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말한다(참조. 시 2:2; 18:50). 어떤 사람은 "그 거룩한 하늘에서"라는 말을 "그분의 거룩하심이 있는 하늘에서"라고 해석했다. -토머스 윌콕스(Thomas Wilcocks).
6절.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성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한다면 나는 매우 기쁠 것이다. 아! 아침이나 저녁으로 기도하는 성도들이 내 이름을 잊지 않고 기도한다면 나는 얼마나 기쁠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그분의 기도는 천상의 기도이며, 영광스러운 기도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이다.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 1592-1674).
6절. "기름 부음받은 자." 유대인들은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우리 구세주께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선지자로서 온유한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파하셨으며, 대제사장으로서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셨고, 왕으로서 포로 된 자들을 구원하셨다. 누구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그를 어떤 직임에 임명하는 것이므로, 주께 기름을 부어 중보자가 되게 하신 것은 적합한 일이다. 그분에 대해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히 1:9)라고 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와 도우심을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에 한정된 것이며, 그분의 신성은 온전하신 분이기에 그분의 신성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신 그분 안에 인성이 있으므로, 그분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것을 강조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요일 5:1).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요일 2:22). 우리 구세주의 원수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수들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하도록 했다:"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요 9:22). 그리스도는 그분의 임무를 다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수행하셨다. 사도들이나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을 어느 정도 받았으나, 그분은 무한히 받으셨다. 그분은 다른 인생보다 아름다운 분이시다(시 45:2). 그분의 영광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다. 그리고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충만한 데서 받으셨다. 아론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다. 아론이 받은 기름 부음은 그 옷깃까지 내렸다고 했다(시 133:2).
우리 구세주께서는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그래서 교회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그분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 -존 후리온(John Hurrion, 1675-1731).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9월 말경에 난 무척 궁핍했다. 날씨도 좋아서 난 밖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 안에 믿음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내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의지할 자도 없지만 하늘과 땅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분은 우리가 궁핍한 중에도 평안한 마음을 주시지 않는가!" 그날 난 돈이 필요했지만, 난 믿음이 있었기에 기뻤고 또 용기도 있었다. 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는데, 집에서는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서 돈을 받아 임금을 치르고자 이렇게 물었다:"돈이 도착했어요?" "아니오. 하지만 난 하나님을 믿어요."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마자 곧 어느 학생이 다가와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내게 전해 주라고 했다며 30달러를 내놓았다. 난 곧 방으로 들어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임금이 얼마나 필요하지요?" 감독은 "삼십 달러요"라고 했다. "여기 삼십 달러가 있어요. 더 필요하세요?" "아니오." 우리는 이 일로 믿음이 무척 강해졌다. 우리가 돈이 필요했던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은 돈을 보내 주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을 우리는 보았던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헤르만 프랑케(Augustus Hermann Franke, 1663-1727).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악한 것을 의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사람들이 전쟁을 할 때면 병거나 말이나 함대나 군대의 수나 훈련 등을 의지한다. 그러나 강한 자가 전투에서 꼭 이기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강한 군대가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사람들이 재물이나 친구나 무역이나 농장을 의지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람을 돕거나 구원하지 못한다. 자랑하려는 자는 하나님으로 자랑하라. -윌리엄 플러머.
7절.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면 그분의 여러 가지 특성이나 성품을 말한다. 이런 특성이나 성품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고 했다. 시편 기자는 그가 어떤 일을 하든지, 또는 어떤 환경에 처했든지 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과 힘을 얻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의지했다:"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그러나 시편 기자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항상 만족하며 성공을 누렸다. 이 구절을 묵상하면 중요한 교훈과 진리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한 가지 특성이나 성품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것들이 모두 합쳐진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억한다는 말은 그저 지나가는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상고하고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묵상한다면, 그 결과 우리는 즐거움과 확신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헨리 멜빌(Henry Melvill).
7절.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천주교도들에게 신부들이나 성자들, 그리고 성당에 걸려 있는 그림이나 우상들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윌리엄 아놋(William Arnot, 1858).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사람은 연약하기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 속한 것들을 신뢰하고 추구한다. 어떤 사람은 병거를,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한다. 성도들은 이런 것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이런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데이비드 딕슨.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자는 폭군처럼 다스리는 케사르를 왕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군대'는 폭군처럼 당신을 다스리지 않고 당신의 필요를 채워 줄 것이다. -아이작 윌리엄스.
7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여호사밧은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확립했다. 이전에 이미 여러 성읍에 군대를 두었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하는 그때에야 주위의 이방 나라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전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찰스 브래드버리.
7절. "혹은 병거, 혹은 말······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어떤 사람들은 전쟁하는 말을 뽐내고
다른 사람들은 수많은 병거를 정렬시키네
그러나 우리가 자랑하는 것을 선포하리니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하네.
-리처드 맨트.
8절.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그들은 자신들이 신뢰하던 병거와 말에서 떨어져 땅에 엎드러질 것이다. 히브리 표현을 직역하면 "엎드려 경배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땅에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인의 손에 죽은 시스라의 죽음을 보라:"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삿 5:27).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정복자처럼, 우리는 두 발로 굳건히 서서 우리 땅을 지킨다. -매튜 풀.
[설교힌트]
이 시는 왕의 대관식이나 감사절의 설교에서 많이 사용된 본문이며, 이 중에는 왕에게 아부하는 엉터리 설교도 많이 있었다. 그 왕들 중에는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를 따르고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설교를 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폭군을 성군이라고 부르며, 폭군 앞에서 쩔쩔맸던 것이다. -C. H. S.
시 20편 전체. 우리의 왕이신 예수를 위한 노래와 기도.
1절. 큰 환난 중에 얻을 두 가지 큰 자비-보좌에서 들으시고, 보좌에서 보호하심.
1, 2절. (1)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특징과 목표. (2) 주님께서 고난 중에 어떻게 하셨는가? (3) 예수의 고난을 수수방관하는 구경꾼이 되지 말자. -해밀턴 버쇼일.
1-3절. 친구를 위한 축복의 모델. (1) 경건한 삶을 축복한다. 축복을 받는 사람은 기도하고, 성소에 나아가며, 번제를 드리는 자이다. 우리 친구들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어야겠다. (2) 위를 바라본다. 여기에 나오는 축복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들이다. (3)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4) 이 축복들은 영적인 축복들이다.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의 용납, 하나님의 도우심 등.
2절. 성소에서 주시는 도움.
3절.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드리신 희생을 잊지 않으신다.
3, 4절. 사랑하는 자를 향한 4중 도움.
5절. 우리가 누릴 구원의 기쁨.
5절. "우리 기를 세우리니." 하나님과의 동맹, 전쟁의 선포, 인내, 소유권 주장, 승리의 표.
5절 하반절. 주님이 드리는 기도의 능력, 그분을 통해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
6절. 그분의 기름 부음받은 자. 우리 주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언제? 어떻게? 무슨 사명을 위해서? 등.
6절.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는 주님.
6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그분의 오른손에 있는 능력.
6절 상반절. "이제 내가 아노니." 언제? 주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영혼을 비출 때, 우리가 확신을 받을 때, 진리를 알 때 등.
7절. 피조물에 대한 신뢰는 외적으로 강하고, 효과적이고, 멋있고, 시끄럽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조용하고, 영적이고, 사람이 알 수 없다.
7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 참되신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특성과 성품을 묵상함.
8절.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난 일.
9절.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성경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박력 있는 기도.
9절 하반절. (1) 우리는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왕에게. (2) 그분께 간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분을 부른다. (3)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가? 우리의 부름을 듣고 응락하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