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시편강해(시편14편)
시편 14편
[개 요]
주제-이 아름다운 시에는 단순히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머리말이 붙어 있다. 시편에서 모두 53편의 시에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것은 이 시편들이 성도들의 개인적인 묵상을 위해서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회중으로 모인 곳에서 찬양대가 노래로 불렀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 준다. “영장”은 찬양대의 책임자를 말한다. 에인즈워스는 이 사람을 “음악의 대가”라고 불렀다. 이러한 시편들 중에는 찬양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고, 여호와께 직접적으로 노래하지 않는 것도 있으나 공적 예배를 드릴 때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 어거스틴은 찬양 이외의 다른 내용은 예배시에 불러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후에 찬송가를 편집하는 자들이 이와 같은 주장을 다시 펼쳤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주장이 아니다. 초대 교회는 영적 노래를 부르는 도중에 교리를 노래하며 기도를 드렸다. 또한 탄식하는 시도 이스라엘의 노래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노래했던 것이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여호와를 높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대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교훈하고 권면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해야 한다.
이 시에는 특별한 머리말이 붙어 있지 않으므로, 이 시를 암송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실제적 무신론에 대하여”라고 제목을 붙여 보았다. 이 시가 기록된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이것들은 모두 근거가 없는 것들이며, 이것들을 열거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인류가 타락한 증거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근거하여 이런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다윗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시 14편에서 모든 육적인 사람들이 싫어할 결론을 동일하게 내린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절 세상의 잘못된 사상.
1-3절 잘못된 사상이 불러오는 부패한 도덕.
4절 사람을 핍박하는 죄인들의 성향.
5절 죄인들의 놀람.
6절 경건한 자를 조롱함.
7절 백성들의 즐거움을 위해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것을 기도함.
[강 해]
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1절. "어리석은 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는 세계적인 바보들이다. 그가 천성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던들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부인했으니, 그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죄는 항상 어리석은 것이다. 죄가 극에 이르면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공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오만한 일이다. 모든 인류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죄인이 자신이 신봉하는 무신론을 주창함으로써 그가 미워하는 하나님을 파괴할 수 있다면, 비록 그가 사악하다 할지라도 그런 대로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도 불 가운데 있는 사람이 타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해도 온 세상의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명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멸하시는 것을 막지 못한다. 무신론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악이며, 이것을 맹신하는 어리석은 바보들은 무서운 진노를 자초할 것이다. 옛 현자는 "어리석은 자의 혀는 자신의 목을 자르느니라"고 말했다. 하물며 무신론자들은 자신의 몸과 영혼을 영원히 죽이는 것이다. 이 무식한 자들의 악행이 하나님께만 향한다면 그래도 나으련만. 아! 어리석은 바보 한 사람이 수백 명의 바보를 만들어 낸다. 요란스럽게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은 거짓 된 교리를 펼치는데, 이것은 마치 문둥병자들이 병을 전염시키는 것과도 같다.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나발"(lbn)이라고 한다. 에인즈워스는 이 단어가 나뭇잎이나 꽃이 시들어 가고 떨어지고 색이 바래고 죽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단어는 어리석은 자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지혜와 이성, 정직함과 경건함의 수액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 것을 말한다. 트랩은 정곡을 찌르며 이 어리석은 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이 사람들은 진액이 다 빠져 버린 자들이고, 걸어다니는 시체들이다. 그들은 올바른 이성이나 종교가 시들어서 소멸된 자이며, 다 말라비틀어지고 썩어 버린 자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배교자"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천박한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는 극히 조심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과 능력과 사랑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런 불신은 근본적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 누가 이 구절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들과 한 부류가 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사람이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와 반대로 될 수 있는가? 사람이 불신자가 되는 것은 그의 머리가 아니라 먼저 마음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그가 무신론자처럼 이야기할 때면, 이것은 어리석은 마음이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사람이 진실과 의를 사랑한다면, 신성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것과 옳은 것을 싫어한다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하고자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통치자이시며, 정의의 수호자이시며, 악에 대한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신론이 판을 치는 것을 보고서 놀라서는 안 된다.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딕슨은 "누구나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하고 새롭게 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미친 사람이 헛소리를 한다고 해서 놀랄 일이 있겠는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이런 어리석은 자들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자들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이들은 자라나고, 이 세상 어느 곳에나 흩어져 있다. 지적 대각성이 일어난다 해도 이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어리석음과 위대한 학식이 종종 공존하는 것을 본다. 은혜가 이들의 마음에 들어가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무신론자들의 트집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지혜로운 자가 7년에 걸쳐서도 다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어리석은 자들은 불과 1시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지혜로운 자들이 넘어지도록 장애물을 놓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기도 하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리며 그들의 마음을 향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리하면 여러 가지 논쟁을 벌이며 그들을 설득하려 하는 100명의 변사들보다 하나님의 은혜로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이 없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괴상한 주장이기 때문에 이 사람도 감히 공개적으로 주장하지는 못하지만, 거의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칼빈은 이런 주장에는 논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어리석은 자들이 교리적 선언을 하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더 박사는 이것이 그들의 교리라고 분명히 말했다. 이것은 단순히 죄인의 타락한 속성이 희망하는 것은 아니며, 그의 반역적인 마음이 소망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논리적 사고를 거쳐서 그 주장을 단언하게 하고, 그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입술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이들은 엄숙하게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통치자이시며, 인간에게 법을 주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런 하나님을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쏘아 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악의는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 우리가 살아 활동하는 것이나 우리의 존재가 모두 그분으로 말미암았고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데도, 그분을 대적하고 그분을 향해 분노하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는데, 그분을 향해 "하나님이 없다!"라고 외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광기어린 행동인가! 모든 인류가 이처럼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소망한다면, 이것은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저희는 부패하고." 이것은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령께서 이것을 증거하신다. 로마서 3장을 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마음은 부패하고 타락한 마음이다. 어느 유명한 비평 학자는 이 구절을 능동형으로 표현하여 "저희는 부패하게 행동했다"고 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의 속성이 어떠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죄는 우리의 기질 속에 악의 근원으로서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불길을 향해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며 우리 자신을 부패하게 하여, 이미 흑암처럼 검은 마음을 더욱 검게 만든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쇠사슬로 묶는 것이다.
"소행이 가증하여." 사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하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주인의 눈이 닫혀 있다면, 종들이 하지 못할 일들이 무엇이 있겠는가? 대홍수가 있기 전에 세상이 어떠했는지 보고, 그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라:"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창 6:12).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고 싶은 자들은 로마서 1장을 읽어 보라. 여기에는 하나님 없는 인류의 비참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어느 학식 있는 힌두교도는 이 표현이 오늘날 힌두 사회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성을 제어하지 않았더라면, 영국 사회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 이러한 표현은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하는 행동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혐오스러운 일들이 어떤 사람들의 입맛에는 감미로운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죄가 창궐한 곳에서는 선을 행하지 않는 죄도 넘치는 것이다.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해야 할 일들은 하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은혜가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면, 선을 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범죄하고 타락한 인류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별이 없는 밤이요, 보석이 없는 똥더미요, 밑이 없는 지옥이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2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이 구절에는 여호와께서 파수대나 다른 높은 장소에서 사람을 주의깊게 바라보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분은 맹목적으로 벌을 주시거나, 반역의 소문을 듣고서 무분별하게 대량 학살을 명하는 전제 군주도 아니시다. 사람을 굽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우리는 편견이 없는 정의와 가련한 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죄를 먼저 달아 보시고, 의인이 죄인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의인을 찾으시는데, 이것은 소돔에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전지하신 분의 눈이 이 지구를 구석 구석 살피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모든 백성과 나라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를 들추어 내시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을 살피시는 그분은 누가 선한 사람인지 다 아시고, 그들을 찾고서 기뻐하시며, 그들을 속히 구분해 내신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열매도 거두지 못한다. 아담의 후예로서 거듭나지 않은 영혼들은 선하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부자나 위대한 사람이나 학식 있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요구를 다 만족시킬 수가 없다. 그분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탁월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의무를 가졌으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인가를 아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그분의 눈은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고 또 찾는 자에게 머무르신다. 세상에서 특별한 사람만이 이렇게 하나님을 추구하며 찾는 것은 아니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라도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아!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보시는 그분도 사람들 가운데서 선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기를 기뻐하면서, 그들을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등을 돌린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불신의 여행을 계속하는데, 그들이 걷는 땅은 불신과 격리의 땅이요, 흑암의 땅이다. 그곳은 사망의 그림자가 횡행하는 땅이요, 빛도 흑암처럼 어두운 곳이다.
3절. "다 치우쳤으며."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그들을 지으신 여호와와 그분의 율법을 버렸다. 고집 센 암소처럼 그들은 어떤 멍에도 메기를 거부했고, 목자를 떠나 다른 길을 걷기 좋아하는 양처럼 그들은 목자가 예비한 초장을 떠나 버렸다. 히브리 원어에는 모든 인류를 집합적으로 표현했다(원어에는 "하콜 사르"<rs lkh>라고 하여 모든 사람을 하나의 집합체로 보고서 동사도 단수 어미를 붙여서 표현했다. 또한 다음 구절에 나오는 "함께"라고 번역된 "예하두"<wdjy>는 '그들이 하나가 되다'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다 여호와를 버렸고,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역자 주). 모든 인류의 마음이 타락하고 삶이 오염되어 버렸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그들은 모두가 썩은 누룩처럼 변질되었으며, 어떤 사람들의 표현처럼 썩어서 악취가 나게 되었다. 이처럼 악한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여기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곳에서 매일 일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는 것과도 같다. 방앗간 주인이 그의 방앗간에서 나는 소리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파멸과 타락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지만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는 없을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단 말인가? 시편 기자는 이 질문에 어떤 오해도 없도록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 단어들을 반복해서 사용한다:"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히브리어 원문은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강조해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아시는 여호와께서 내리는 선고에는 어떤 오류나 과장도 없다. 새롭게 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선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생각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부정했다:"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이 나면서부터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은 여기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이런 주장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가? 우리는 나면서부터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며, 은혜가 우리를 주장하고 다스리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가?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하나님에 대한 증오와 타락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는 동기가 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악을 행하게 되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고 착취하는 데서 쾌감을 누리게 된다. "죄악을 행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사슬에 얽매는 것이다. 군함에서 노를 젓는 노예가 된다거나, 시베리아 광산에서 일하는 것이 이보다 덜 비참한 일이다. 노역은 죽지 않을 만큼 하면서 그 보상으로서 무서운 심판을 자초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이런 노예가 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은 자들은 이처럼 노예가 된 상태에서 구원받을 것을 간구한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그들로 악의 노예가 되게 했던 바로 그 무지가 그들로 자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떡 먹듯이" 하나님의 자녀를 먹어 치우려 한다. 그들은 매일 매일 일상적으로 식사를 하듯이, 하나님의 성도들을 일상적으로 압제하며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것이다. 사나운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들을 삼키듯이, 독수리가 작은 새들을 먹이로 삼듯이, 늑대가 목장의 양들을 찢듯이, 죄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당연한 것처럼 핍박하고 욕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도들을 희생물로 삼으면서도 결코 기도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보인다. 그들의 손은 무죄한 자의 피로 가득한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5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박해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멸망당할 시기가 있다.
"저희가"-입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 강철같이 강한 손으로 압제하던 자들, 마음이 교만한 니므롯과 헤롯과 오만한 죄인들.
"거기서"-하나님을 부인하고, 그의 백성을 압제하던 곳에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공포가 이들을 사로잡으므로 이들은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한다. 히브리어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두려움을 두려워한다." 형체를 알 수 없는 두렵고 괴이한 공포가 그들 내면에 파고드는 것이다. 마음이 강퍅한 자들은 그들의 양심 때문에 공포의 땀을 흘리는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비겁한 자가 잔인한 것처럼, 모든 잔인한 자들은 마음으로부터 겁쟁이들이다. 과거에 범했던 죄악이 유령처럼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이 큰 소리치며 교만하게 굴어도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그들을 항상 괴롭게 할 뿐이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이 의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악인은 알기 때문에 그들은 의인들을 싫어한다. 그들이 눈을 닫아 버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백성들에게서 풍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느낄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는 것이다. 하만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모르드개와 같은 자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며 떠는 것이다. 성도들이 비천한 처지에 있다 해도, 박해자들이 즐거워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성문에서 탄식한다 해도, 죄인들은 성도들이 진실로 고귀하다는 것을 느끼고 기가 죽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는 자들은 우리 주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가까이하신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그들 중에 거하심을 말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악인들이 실제로는 비겁하다고 해도, 그들은 사자의 가면을 쓰고서 여호와의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려 한다. 진정 어리석은 자는 그들인데도, 그들은 지혜로운 자에게 잘못이 있는 듯 그들을 조롱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야수의 마음을 가진 자가 어떻게 선한 것을 알겠으며, 올빼미의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조롱하는 핵심은 여호와에 대한 의인의 신뢰일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너희들을 위해 무엇을 하신단 말이냐? 우리 손에서 너희를 구원할 신이 누구란 말이냐? 너희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부르짖는 보상이 무엇이란 말이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면전에 이런 조롱기 섞인 힐문을 하며 그들의 피난처에 대해 수치심을 품게 하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우리가 품은 신뢰에 대해 그들이 조롱하는 것에 영향을 받지 말자. 그들의 비웃음을 비웃고, 그들의 조롱을 물리치자. 이제 잠시만 지나면 그분은 택하신 자들을 위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을 가볍게 여기던 그 모든 대적들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7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이 시편을 이처럼 기도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적합하다. 무신론자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알리고, 박해하는 자들을 넘어뜨리며, 죄를 억제하고, 의인을 보호하는 데 이스라엘의 구원을 나타내 보이는 것보다 더 적합한 것이 있겠는가?
모든 시대의 의인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했다. 그분은 모든 악을 깨끗게 하기 위해 이미 속죄 제물로 오셨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속죄 제물이 필요 없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두번째 오실 것을 고대한다. 아! 이런 지루한 날들이 어서 끝나고 그날이 빨리 오기를! 그분은 왜 이리도 지체하시는가? 그분은 이 세상에 죄가 관영하고 그분의 백성이 짓밟힘을 받고 있는 것을 이미 아신다. 왜 지금 바로 구원하러 오시지 않는가?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그분이 영광스럽게 오시는 날, 그분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힌 것에서 구출해 내시고, 그들이 당하는 영적 슬픔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씨름하던 야곱도, 다윗의 왕국을 세우며 부강함을 누렸던 이스라엘도, 그분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나타나시는 날 모두 즐거워할 것이다. 아! 그분이 어서 오셨으면! 그때에는 행복하며 거룩한 날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더디게 온다고 생각하지 말자! 보라, 그분이 속히 오신다! 그분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주해와 설명들]
시 14편 전체. 이 시는 두 가지 면에서 특이하다. 첫째, 이 시는 시편에 두 번 나타난다. 시 14편과 53편은 한두 가지 표현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동일하다. 둘째, 사도 바울은 이 시를 많이 인용했다(참조. 롬 3:10-12).
이 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통탄할 만한 상태가 나타나 있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의견, 그들의 삶의 원리나 인간의 모든 면이 전반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통탄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첫째, 이 시가 기록된 시기는 무신론주의가 세상에 들어오고,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이 사상에 사로잡힌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이 이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고,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가치관을 따라 살았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말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자"가 그렇게 했다. 어리석은 자들을 "부패하고"(1절), "다 치우쳤으며"(3절)라고 표현했다. "어리석은 자"란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도 여기에 포함될 수가 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점에서는 모두 같다. 이들은 '실제적 무신론자들'이다.
둘째, 그들은 무신론주의에 적합한 욕정을 가졌다.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이 좋아하고 신봉하는 사상을 따르며 살듯이, 이들은 그들의 무신론주의를 따르는 데 적합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주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기대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왜 시편 기자는 이들을 "부패"(1절)한 자들이라고 말했겠는가? 왜 그는 이 말을 반복하여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3절)라고 말했겠는가? 그들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부패하다'라는 말은 원어에 음식이 '상하다'란 뜻이 있다. 이전에는 그런 대로 마실 수 있는 음료였으나 이제는 김이 다 빠지고, 맛이 변질되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라고 했다. 그들은 썩어 냄새 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타락한 애정을 가졌기에 아무런 생명력도, 맛도 없게 되었다. 오직 냄새 나는 썩은 욕정을 추구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들은 썩고 타락한 욕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셋째, 그들의 행동은 어떠한가? 그들이 무신론주의를 따르고, 이에 적합한 욕정을 가졌다면, 그들의 행동은 이보다 더 나은가? 그들의 행동을 살펴보라. 두 가지 행동을 살펴보자:(1) 세상 안에서의 행동, (2)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행동.
(1) 그들은 세상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들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를 생략해 버리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이 수행하는 악한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선한 일을 하는가? 그들은 선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절). 많은 사람 중에 단지 몇 사람이라도 선을 행하지는 않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단호히 부정한다:"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3절). 세상 사람들 중에서 정말 선하고 유익한 일을 하는 사람이 단지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무신론주의를 신봉하고, 타락한 욕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선한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다.
악한 일에 관해서는 무엇을 했는가? "소행이 가증하여"(1절)라는 구절에서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일이 무슨 일인지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모든 선한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이다. 시편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냄새 나도록 부패하고 더러운 일'을 한다. 이처럼 시편 기자는 이 시를 기록하면서 사울이 통치하던 시대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2)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이 이렇게 타락했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 또 다른 죄를 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곧 어긋나고 만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했다:"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절). 그는 "그들은 이런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지식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라고 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것이 자신에게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 죄가 그들을 파멸시키고, 특별한 심판을 불러온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여러 가지 죄악 중에서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먹는 죄에 특별한 무게를 두고 심판하신다.
이 시에서 관찰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몇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상한 점은 악인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5절). 그들은 무엇인가 두려운 일이 그들에게 임할 것을 알았던 듯하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압제와 욕정의 정상에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신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그 이유를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라고 했다. 그들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들은 탈취한 고기나 빵을 소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으려 하면서도 정작 그들을 삼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을 두렵게 하고, 놀라게 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서 맛있는 빵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먹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 속에 자갈을 집어넣으시고, 그들의 턱주가리를 부숴 버리신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5절).
성령께서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어리석은 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묘사한다. 잡아먹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잡아먹히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몇 가지 방도를 취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한 방도를 어떻게 대했는지가 다음 구절에 나타난다:"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6절).
여기에 나오는 "가난한 자"는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가난한 사람은 이처럼 위기의 시간에도 소망과 피난처가 있다. 이 소망은 바로 여호와이시다. 가난한 자는 여호와로 자기의 피난처를 삼는다.
시편 기자는 모든 악한 사람을 한 사람 "어리석은 자"로 묘사하듯,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도 한 사람 "가난한 자"로 묘사하며 단수로 취급했다:"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6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데는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여호와로 자기 피난처를 삼게 되었는가? 그들은 "경영"을 통해서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았다(6절). 그들은 우연히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혜를 짜 내어 그렇게 결정했다. 그들은 충고를 들으며 심사숙고하여 결정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결정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한 이 행동에 대해 악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은 그들의 경영에 대해 뭐라고 판단하는가? 그들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6절) 했다.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조롱하며 수치심을 품게 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들로 피난처를 삼는 것은 괜찮은 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것은 가장 바보스런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조롱을 받는 시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만일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부르짖으며 기도하라. "오,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바라나이다!" 시온으로부터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소리가 들리게 되고, 이것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존 오웬(John Owen).
1절. "어리석은 자." 진액이 다 빠져 버린 듯한 사람, 걸어다니는 시체와 같은 사람, 그 안에 종교나 올바른 이상이 시들고 말라 썩어 버린 사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배교자, 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 버린 사람, 그저 미물에 불과한 동물과 같은 존재, 무신론을 배우는 악한 사람. -존 트랩.
1절. "어리석은 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 중에서 다수가 완전히 비이성적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지극한 열심으로 영원보다 일시적인 시간을 선택하고, 영원한 기쁨보다 일시적인 기쁨을 누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보다 사탄의 권고를 선택한다. 이것이 그들의 어리석음 중에서 가장 심각한 어리석음이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선택이며, 지속적으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아무런 치료책도 없게 된다. 이 세상에 속한 일시적인 일에 실수가 있었다면, 이것은 나중에 바로잡을 수 있다.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이고 영원한 문제에 대한 실수는, 전 생애에 걸쳐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결코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죽음 후에는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가 범할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은 바로 위대한 조물주의 존재와 그분의 온전하심을 부정하거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불렀다. -존 제이미슨(John Jamieson, M.A., 1789).
1절. "어리석은 자." 이 단어는 성경에서 악한 자를 묘사하는 데 쓰이며, 이방 철학자들도 사악한 사람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히브리어로 "나발"(lbn)은 "나벨"(kbn)에서 파생한 단어이며, 이는 사람이나 동식물의 생명이 죽어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꽃이 시들다'라는 표현으로 "나벨 치츠"([yx lbn, 사 40:7)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수액을 모두 상실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주신 지혜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을 모두 상실해 버린 자를 말한다. 그는 죄에 빠져서 죽은 자요, 은혜를 상실해 버린 자이다. 이 사람은 이성이 없는 자가 아니라 이성을 남용하는 자이다. -스티븐 차녹.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마음이 결박당한 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혀는 결박당하지 않았다. 이 혀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며,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하는 말의 강약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마음으로 하는 말과 속삭이는 말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을 다 아시듯 분명하게 듣고 아신다. 아! 아무리 작은 죄라도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지. 이 죄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그토록 상처를 주는 것이다! -데이비드 클락슨.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 시는 시 53편과 거의 동일하다. 단지 5절에서 변화가 있지만 그 의미는 같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령께서는 한 번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셨을까? 어리석은 자가 내뱉는 말이나 미친 짓을 우리가 극히 경계해야 하겠기에 시편에서 두 번,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 세번째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우리들 중에 어떤 사람도 여기 묘사되어 있는 자와 같이 어리석은 자는 아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우리가 찾아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알지 못했던 신앙 고백을 하고, 그에게 한두 가지 알려 줄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신앙을 가졌다. 우리 안에 어리석음과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의 만나로 삼아 넌더리가 나도록 먹었고, 대학이나 성직자들도 다 해결할 수 없는 교리를 배우고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은 없다'라고 주장할 만큼 어리석고 미친 짓을 하겠는가?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이렇게 책망할 만큼 냉혹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당신은 로마서 3장을 진지하게 살펴보라. 바울은 아담의 모든 후손이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단정했다. 각 사람의 속성이 시편에 나타난 이런 자들과 같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렸겠는가? 바울은 또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들을 예외로 인정하며 말하는 표현은 아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 그들의 계획에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보기에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며 사는 무신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윌리엄 칠링워스(William Chillingworth, 1602-1643).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왜 사람들은 그들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하나님을 저항하려 하는가? 그들이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일까? 이렇게 '가벼운 멍에'를 싫어하고 '가벼운 짐'을 배척하며 평화롭고 즐거운 길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영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종하기보다는 멸망의 길을 택하면서 그들은 죽음의 장소로 내려가고 지옥을 붙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들의 마음이 냉담해지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보다 더 확실히 증거해 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그들이 "아! 하나님 같은 존재가 없다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그들이 악의 정상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정신 이상이 되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을 모두 조롱하고 저주하는 표현이 나올 것이다. 마치 독기어린 숨을 내쉬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든 자연 만물을 시들게 하고, 우주 만상을 시들고 사라져 가도록 하려는 듯하다. 그들이 말로 하늘과 땅을 대적하는 것이 마치 전능하신 자의 말씀을 대적하고, 하늘과 땅의 기둥을 흔들며, 전능하신 자의 명령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들이 소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의 일반적인 모습, 반역한 모든 인류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이처럼 일반적인 표현으로 묘사되었다:"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기보다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기질이다. 이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우리는 그들을 돌이킬 다른 방도가 없다. -존 하우.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자연의 계시를 부정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들이다. 땅에 있는 미물들이나 파리, 그리고 기어다니는 구더기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자들의 주장을 논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사람이 달려가면서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옥에 있는 마귀들도 무신론을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두려워 떤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떠느니라"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리수신"(frivssousi)인데, 이는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이는 것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 이것은 극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말로서 두려워 떠는 것뿐만 아니라 공포로 인해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쓰인다(막 6:49;행 16:29). 마귀들의 말을 주의해서 관찰해 보라:"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마귀도 우리가 믿는 네 가지 믿음을 인정하고 있다:(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심판의 날, (4) 그들이 괴로움을 당할 것.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마귀보다 더 악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지옥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신론에 속한다.
땅에서는 무신론자들이 많이 있으나
지옥에는 하나도 없다네.
어거스틴은 이 무신론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스스로 자신을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악하게 살았던 자들도 죽은 후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세네카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낮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밤이 되면 그들이 했던 말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또한 어떤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그가 한때는 하나님이 없다고 했으나, 병들었을 때에는 하나님을 찾으며 도움을 구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고, 그들의 양심의 빛을 거스르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툴리(Tully)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나라는 역사상 하늘 아래에 있었던 가장 야만적인 나라라고 말했다. -브룩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사람의 마음이나 영혼이 받은 상처보다 더 치명적인 상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믿음, 소망, 자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질식시키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치명적인 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종교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로버트 코드레이(Robert Cawdray, Treasury or Storehouse of Similes, 1609).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무신론자보다 더 어리석고, 무식하고,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 자신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과거에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도 있었고, 그 자신이 앞으로 변할 것이며, 여러 세대가 흐르면 그가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밤이 되면 그는 날마다 잠을 잔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하나님께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사람이 모든 기술을 동원해도 조개 하나를 만들지 못하는데, 이처럼 정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원인이 없는 결과, 통치자가 없는 훌륭한 정부, 중심이 없는 원, 영원이 없는 시간, 첫째가 없는 둘째, 조물주가 없이 만들어진 세상, 이런 것들은 철학이나 정상적인 사고에 배치되는 것이며,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은 지각 없는 야수와 같은 자들이다. 이것이 무신론자들이다:"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이것이 그의 성품이다. 지음을 받은 자가 지은 자를 부정하면서 아무도 그를 짓지 않았다고 하고, 혀는 스스로 말할 수 없었으나 말을 하도록 하신 분을 대적하여 말하고, 만들어진 것은 존재한다고 하면서도 만드신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은 아무런 빛이나 밑바닥이 없는 지옥과도 같고,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흑암과도 같은 것이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1613-1667).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지혜로운 자는 이성과 덕을 따라 살아간다. 그가 고요히 우주를 바라보면서, 이 모든 것이 서로 연관을 갖고 조화롭게 지어졌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욕정을 물리치며,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모습을 그린다면, 전능하신 분은 이 사람을 누구보다도 가장 고귀한 존재로 바라보실 것이다. 이와 반대로, 무신론자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동물은 없다. 그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을 이 땅에서 여기 저기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별볼일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의 주위에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동물이 죽어 없어지는 것처럼 자신도 죽어 없어질 유한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동물과 다른 점은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서 살아간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는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욱 무능한 존재가 된다. 재난을 당하게 되면, 지난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희망으로 어떤 위로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이런 때는 권총으로 자살을 하거나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을 떠나 버리는 것으로 피난처를 삼고자 한다. 그러나 이처럼 우울하고 신앙심이 없는 자가 극히 어려운 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다가오는 죽음에 공포감을 느낀다. 약 30년 전에 나는 이런 망나니 같은 사람과 함께 배에 올랐는데,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자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배가 흔들리자 그는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은 악한 무신론자로서 지극히 높으신 분을 부정해 왔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소식은 사람들에게 빨리 전달되었고, 사람들은 그 배에 무신론자가 타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함께 탔던 뱃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서 결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고백하는 것을 보고서 더욱 놀랐다. 그는 그때까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배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는 동안 한 선원이 갑판장에게 "이 사람을 바다로 던지는 것이 더 좋겠어요"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에 항구가 들어왔고, 바람이 갑자기 잔잔해졌다. 회개한 그 사람은 다시 태도를 바꾸어 우리에게 배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육지에 내린 지 이틀 후에 한 사람이 그가 배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헌신했다고 떠들어 대자 그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큰 소리로 다투다가 격투를 벌이고 말았다. 그 무신론자는 몸을 다쳐 피를 흘린 후에야 배에서처럼 하나님을 인정했으나 그 상처가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또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 후에 그는 자유로운 사상가가 되었고, 현재는 요정이 실존한다는 의견에 반박하는 글을 쓰고 있다.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 The Tattler, 1671-1719).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은 없다."
"하늘이나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없다."
어리석은 자는 이렇게 말하네
믿음 없는 자의 눈을 가리는 가리개를 뜯어 내라
그들의 눈에 하나님이 들어오도록!
하나님이 없다고?
하늘에 펼쳐 있는 수천 수만의 별들
이것들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은빛 물결치며 흐르는 강물,
상쾌한 공기, 땅, 나무,
꽃, 풀, 모래, 산들거리는 바람,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말하네, 한 목소리로
어리석은 자가 두려워하는 그분을
유창하게 증거한다네.
보지 못하는 자여
이 모든 것들에서 그분을 보라!
-조반니 코타(Giovanni Cotta).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무신론자들
대낮에 음탕한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는
올빼미 새끼
눈꺼풀을 내려 굳게 닫아 버리고
하늘에 있는 찬란한 태양을 향해 야유하며
"어디 있어?"라고 외치는
올빼미 새끼.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
1절.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죄는 육체를 즐겁게 한다. 타락한 성품은 부패한 행동으로 그 욕구를 채운다. 유다의 탐욕은 부정한 소득으로 채워졌다. 요압의 굳은 마음은 피로 강퍅해졌다(왕상 2:5). 도둑질하고자 하는 마음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으로 살찐다. 교만은 어울리지 않는 칭찬으로 만족해 한다. 신성 모독은 교회에 강도들이 생겨 나게 하고, 알랑거리는 제사장들은 수고하지 않은 소득으로 배를 채운다. 마음의 성이 함락되면, 이성의 포탑은 곧 무너지는 것이다. 위통이 두통을 야기시키고, 어둡고 습한 땅에서 일어나는 안개가 상쾌한 공기를 질식시키며 태양을 어둡게 하듯이, 우리 영혼의 어두운 구석에서 나오는 타락하고 음란한 욕정은 우리 이성을 어둡게 하고 질식시키는 것이다. 욕정의 구름이 부정한 비를 내릴 때에는 하나님의 제단(사람의 마음)에서 은혜의 불이 타오를 수 없다. 욕정의 편견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토머스 애덤즈.
1절.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베르나르는 이렇게 말했다:"사람이란 마음이 부패하면 행동도 가증해진다.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면, 사람 앞에서도 가증해진다. 세상에는 선을 행하지 않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다. 둘째, 하나님을 알지만 찾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악한 자들이다. 셋째, 하나님을 찾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중세의 한 작가는 이렇게 기록했다:"오, 하나님이여, 오늘날 기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가증한 일을 행하는지요! 사람마다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경배하나이다. 교만한 자들은 세상 권세라는 우상 앞에서 절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은 재물의 우상 앞에서 절하고, 음란한 자들은 미의 우상 앞에서 절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우상 앞에서 절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6).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바울은 이 내용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롬 3:9). -존 메이슨 닐.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내가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무신론자들의 신관이다. 그들의 신념은 "하나님이 없다"라는 짤막하고 부정적인 구절에 담겨 있다. 이것은 한 구절에 불과하지만, 여기에서 어리석은 내용이 수없이 많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비종교적이고 불경스러워서 그 자신도 감히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다만 "그 마음에" 비밀스럽게 속삭일 뿐이다.
본문에서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1)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2)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3) 어떻게 이것을 말하는가? "그 마음에"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이가 어린 어린애가 있고, 생활 태도가 어린아이 같은 어린애가 있다고 했다. 어린아이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헬라어로 "내이피오이"(nhpioi)라고 부른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가 있고, 은혜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도 있다. 후자가 더 심각한 자이나, 양자가 모두 이성이 없는 자들이다. 주정뱅이는 그가 하려고만 하면 이성을 사용할 수 있지만, 죄인은 이성을 사용할 수 있어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윗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도덕적으로 어리석은 자이며, 악하고 은혜를 모르는 자이다. 이것이 원래의 의미이다······이제 어리석은 자의 행동을 살펴보자.
이 어리석은 자는 무엇을 했는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말만 했을 뿐이다. 그는 무엇을 말했는가? 역시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다만 생각했을 뿐이다. 마음속으로 말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째는 입으로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마음으로 소망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두번째의 말을 의미했다. 어리석은 자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마음속으로' 한 말이었다. 어거스틴은 마음에도 입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마음을 들으시며, 마음의 말을 입술로 한 말과 동일하게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왜 부르짖느냐고 물으셨는데, 그때 모세는 아무것도 입으로 말하지 않았었다. 그레고리는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도 그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말로 하지 않는 조용한 언어가 있다. 다윗은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시 4:4)라고 했다.
입으로 묵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마음으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과 입은 때로 그 역할을 바꾸어서 하기도 한다. 생각하는 혀가 있듯이, 말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마음이 모든 것을 행한다. 마음에서 말을 하면, 혀는 그것에 소리를 담아 주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혀는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의 메아리에 불과하다. 마음은 입을 다스리며,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알려 준다. 마음이란 영혼이 보낸 전령과도 같다. 마음은 영혼이 무엇을 선포하려는지 그것을 읽어 내고, 입은 그것을 외치는 것이다. 마음이 먼저 말한 것이 아니면, 혀는 그것을 결코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다. 가장 진실된 언어는 마음의 언어이다. 혀와 입술은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지만, 마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다. 마음이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말할 수 있다면 스무 개의 입보다도 더 귀한 것이다. -리처드 클러크(Richard Clerke. D.D., 1634).
1, 4절. 악한 사람들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성경은 그 원인으로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시 10:4)라고 했다. 그들은 심판의 하나님이 계시고,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부패해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는다. 그들은 떡 한 조각 먹듯이 사람들과 그들의 기업을 먹어 치우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죄가 사람을 그토록 비열하게 만들었기에 천지에 충만하신 여호와께서 그분이 거하기 위해 지으신 사람의 마음에 오실 수 없게 되었다(렘 23:24)! 세상 만물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있다는 것보다도 더 명백한 사실이다. 그분이 계시지 않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도 힘을 주셨건만, 악인은 그 힘으로 죄를 범한다. 죄는 무신론보다 먼저 생긴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 묵상하고 사모한다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죄에서 분리해 낼 것이다. -리처드 십스.
2절.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분을 간절히 찾지 않고, 또 그들이 죄 가운데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데 여러 면에서 실패했다.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 그분을 목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 그분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먼저 찾는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을 냉담하고 부주의하게 찾는다. 다섯째, 그들은 하나님을 항상 찾는 것이 아니다. 유다와 데마가 그 예이다. 여섯째, 그들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이단과도 같다. 일곱째,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 속에서 찾지 않는다. 이것은 위선자들이 행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마땅히 찾아야 할 시기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과도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아간다. -토머스 윌슨(1653).
2, 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피시고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다 치우쳤으며." 인생들이 다 치우쳤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분의 도에서 멀리 떠나갔다는 말이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그들로 냄새 나게 하는 것들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이 땅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지만,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빼어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하나님을 알거나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물 같은 사람이나 지적인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것은, 이것이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윌리엄 그린힐.
3절.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비루한 자들이다:"네 무덤을 예비하리니 이는 네가 비루함이니라"(나 1:14). 죄는 사람들을 비루하게 만들고, 그들의 이름을 지우게 하며, 그들의 피를 오염시킨다. 그들은 "더러운 자"가 되는 것이다. 히브리 표현으로는 그들이 냄새가 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악인을 부를 때에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돼지이며(마 7:6), 독사요(마 3:7), 마귀이다(요 6:70). 악인은 찌끼와도 같은 존재들이다(시 119:119). 순수한 하늘을 이런 찌꺼기들로 오염시킬 수 없다. -토머스 왓슨.
3절.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로마의 풍자가들은 그 자신의 세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죄악의 목록에 더 첨가할 새로운 것이 없다
우리 후손들도 같은 욕망을 느끼겠지
그래서 조상들의 어리석은 짓을 따라 하겠지
악은 이제 그 정상에 도달한 것이다.
-주베날리스(Juvenal, Sat. 1).
3절.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오리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중에는 헐벗은 자를 입히고, 배고픈 자를 먹이는 등 여러 가지 선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처럼 선한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대답했다:"집의 기초를 놓고 그 위에 벽을 쌓는다고 해도, 그가 집을 완성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그들은 선한 행동을 조금은 하겠지만, 온전한 선에 이르지는 못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온전히 선한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자들도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보이고, 모두 죄 아래 있고 저주 아래 있으며, 은혜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없음을 말했다. 누구든지 선한 행실을 했다면 이는 은혜로 인한 것이며 그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다. 그가 자연 계시를 받아서 선행을 했다면,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게 마련이며 온전히 선한 행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앤드류 윌렛(Andrew Willett, on Romans 3:10, 1562-1621).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사람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무지 때문이다. 악한 자들이 죄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그들은 지식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라는 구절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런 떡 조각을 먹지만, 그 결과 그들은 끓는 물로 입에 화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것을 알았더라면, 이처럼 박해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멸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백성을 감히 만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리처드 알레인.
4절.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오스틴(Austin)은 그들이 떡을 먹듯이 매일, 또는 떡을 먹고자 하는 열심과 탐욕으로 이렇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식인종들, 잔인한 야만인들은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배고플 때에 좋은 음식을 먹듯이 가난한 자들을 먹어 치웠다. 연못 속의 큰 고기나 바다의 상어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처럼,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마치 타조가 어떤 금속이라도 소화시키는 것처럼, 이들은 무엇이나 소화시키는데 특히 돈을 소화시키는 데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자들이다. -존 트랩.
4절.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악인들과 하나님의 백성은 원수 사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하는데도 이것을 믿는 자가 왜 이리 적은지! 성경은 악인들이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는다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성도들을 핍박하고 탈취하는 이상한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배고픈 자가 음식을 먹듯이 큰 즐거움으로 이렇게 행한다는 것이며, 성도들을 괴롭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그들의 나쁜 성질을 사자나 곰, 교활한 여우, 야생 황소, 탐욕스러운 돼지, 전갈, 찔레나 가시 등으로 비유한다. 성경은 그들이 피 흘리는 일에는 지치지 않고 지극히 열심을 내며, 악한 행동을 하기 전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헤로디아는 나라의 절반을 갖기보다는 성도의 피를 원했다(마 14:1-12). 하만은 왕께 거금을 바치고서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했다. 악인은 자기 영혼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은 성도들을 향해 칼을 던지기를 바란다. 그들이 결국에는 심판을 받고 후회한다고 해도, 사회와 정부와 도덕적 의무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괴하고자 한다. 성령께서는 그들을 "무자비한" 사람들, 난폭한 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끓는 가마솥처럼 분노하며, 노도처럼 진노한다.
그러나 누가 이 성경 말씀을 믿었는가? 이처럼 악한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가 안전을 위해서 이 사람들을 의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분노에서 피하기 위해 방주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들 가운데서 아무런 해를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도 노아처럼 우리를 원수들의 분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들이 야만적으로 잔혹함을 보일 때에 놀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일 그들을 억제해 주시는 것에 놀라야 한다. 경망스럽고 천박한 자들과 함께 지내게 될 때, 우리는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자와 전갈을 피하듯, 우리는 그들을 피해야 한다. 그들을 신뢰하지 말고, 우리의 비밀을 그들에게 털어놓아서도 안 된다. 그들이 사는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경망스럽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아비 마귀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약속도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게달의 장막"에서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 성도들이 악인과 관계를 맺고서도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녀들을 벨리알의 아들이나 딸들과 결혼을 시켜서 그들과 혼합시키지 말아야 한다. 마귀가 우리의 종이 되리라고 믿어서도 안 된다. -루이스 스터클리.
4절.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이 세상은 악한 세상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한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하만은 모든 유대인들을 증오했다. 독이 없는 독사, 반점이 없는 표범을 찾을 수 있다면, 성도를 미워하지 않는 악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경건한 자를 표적으로 삼는다. "악으로 선을 갚는 자들이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시 38:20). 세상은 경건한 자를 표적으로 삼으면서, 무엇인가 다른 이유를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문제삼는 것은 성도들의 거룩함이다. 세상의 증오는 마음속 깊이 맺혀 있다. 분노는 화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증오는 화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하늘과 지옥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했다면, 또한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해야만 하는가? 순결한 비둘기와 같은 그분은 어떤 악의도 없으시고, 샤론의 장미와 같이 가장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성도들을 먹어 치우는 세상이다. -토머스 왓슨.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이 구절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만한 죄인들이 임박한 위험 앞에서 항상 기가 죽고 겁쟁이처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이 모두 진정한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대할 때에는 필사적으로 용기와 담대함을 보이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죽어 있고, 그들의 양심이 악에 대해 담대해져서 생기는 것으로서, 이로 인해 그들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나 여호와의 뜻을 따라 그들이 죽음의 잠에서 깨어 나게 되면, 이 가르침은 예외 없이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며, 가장 담대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가장 비열한 겁쟁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가장 악한 일을 가장 담대하게 했던 자들이라도 하나님의 보수하시는 손이 그들을 붙잡으면 가장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 -존 도드(John Dod, 1547-1645).
5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세대와 의인들을 좋아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와 함께하시나, 이런 세대를 가장 좋아하신다. 악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셉 캐릴.
5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영광의 왕은 그 영광을 사람들에게 보이신다(시 24:9, 10).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 위엄을 나타내 보이신 것처럼, 그분의 자녀들과 그들이 걷는 길에 영광을 보이시며 함께하신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비참한 경우에 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스데반이 죄수로서 공회 앞에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것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행 6:15). 솔로몬이 의인에 대해 한 말은 사실이다:"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전 8:1).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다:"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영," 또는 "은혜의 영"이라고만 하지 않고 "영광의 영"이라고 했다. 이것은 순교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순수함과 경건한 행동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있다. 그들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떡 먹듯이 삼키던 자들도(4절),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5절)을 알고서 두려워했다.
하나님은 악인의 행동에 놀라서 말씀하신다:"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절). 그들이 이렇게 행하면서도 그들은 큰 두려움 가운데 있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심하게 모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치신다. 왜 그런가? 이는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그분의 백성은 의롭다는 것을 알리며 경고하신다(이것은 빌라도가 그리스도에 대해 경고를 받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에도 나타나 있다:"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빌 1:28). 이 구절에서 '구원의 확신'이나 '두려움의 영'이 모두 하나님께로서 나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고 그를 죽이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했다(삼상 18:9-12).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함께하심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의 경건함과 지혜로운 행동으로 사울의 양심을 치셨으며, 이것이 사울로 두려워하게 한 것이다. -토머스 굿윈.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 53편에서는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시 53:5)라고 표현했다. 시 14편과 시 53편에서 언급하는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 시 14편에서는 악을 행하는 자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시 53편에서는 악인이 마침내 수치를 당할 것과 주께서 그들을 멸시하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하나님께서 그의 가난한 백성을 돌보심이 감미롭게 나타난다.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천한 자, 박해받는 자와 상처받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이 그분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힌두교의 베다, 회교의 코란, 헬라와 로마의 법률을 모두 읽어 보라. 하나님의 압제받고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자비하심이나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이나 사랑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구구 절절이 나타나 있다. -바르통 부시에.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선한 것을 공격하려는 성향이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던 미갈에게도 많은 자손들이 있어서, 그들의 어미처럼, 거룩한 다윗을 조롱하는 것이다. -존 트랩.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만큼 악인들이 마음속으로부터 멸시하는 것은 없다. 악인들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 한다.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고, 강한 자는 자신의 능력을, 부한 자는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자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이다. 원수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4) 그들은 하나님이 주지도 않을 도움이나 물질을 추구하며, 그들의 욕망을 채우고, 분노하고 부패하며 어리석은 일을 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런 것을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죄를 짓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어리석음이 바로 그들의 지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죄에 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래서 가난한 자의 경영을 멸시한다. -존 오웬.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KJV에는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그들이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이유를 들겠지만, 이것이 진정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 교훈을 생각하라. 참되고 경건하게 살려는 하나님의 백성은 악인과 분쟁을 피할 수 없다. 악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싫어하는 이유를 몇 가지 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한다든지, 이웃을 멸시하고 냉소적이라든지, 현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문제만 일으킨다든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이유를 댈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구절에서 악인이 성도들을 멸시하는 참된 이유를 제시했다. 이것은 성도들이 여호와를 신뢰하며, 세상 사람들이 신뢰하는 거짓 되고 헛된 것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 도드.
6절.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으라. 피난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피난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에게 피하라. 이 바위로 달려가라. -랠프 로빈슨(Ralph Robinson, 1656).
7절.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우리가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향해 냉담하게 된다. 그러나 역경과 시련에 처했을 때, 우리 영혼은 간절히 기도한다. 이런 예를 다윗의 시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배고픈 자가 고기를 먹듯이, 고난은 기도하게 하는 근원과 같다. 고난이 없는 자의 기도는 향기가 없다. 이들은 기도하지 않으며, 기도를 위조하거나 습관적으로 기도한다.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 1497-1563).
7절. "시온에서." 시온으로서의 교회는 구세주가 아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이나 종교 의식을 의지한다 해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온다. 굶주린 군중들은 제자들의 손을 통해 영적 양식을 공급받는다. 이 제자들은 복음의 잔치 자리에서 섬기는 것을 즐거워한다. 치유하는 샘의 근원이 시온에서 시작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흐르고, 마침내 모든 나라들이 그 물을 마실 것이다.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가 그 역할을 가장 순결하고 힘있게 해야 하는 참된 이유가 된다. -C. H. S.
7절.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우리 주님은 아직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으며, 그 양들을 불러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양들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 이것은 영광스런 꿈이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상상해 보지만, 이 꿈이 이루어지는 때에는 우리의 상상이 실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포로"로 잡혀서 욕정에 시달리고, 육신은 죽음의 법 아래에 있으며, 우리는 두려움에 떤다. 자일즈 플레처(Giles Fletcher, 1588-1623)는 그의 유명한 시("Christ's Triumph over Death")에서 우리가 누릴 자유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슬픔의 그늘이 없는 곳
질병이 얼굴을 창백하게 하지 않는 곳
세월이 흘러도 머리가 희지 않는 곳
헐벗음이 없고
가난과 수치가 없는 곳
죽음의 두려움이 없고 삶의 기쁨이 넘치는 곳
세월이 흘러도 시들지 않는 곳
사망과 슬픔이 없는 곳.
-존 메이슨 닐(자일즈 플레처의 시에서 인용).
[설교힌트]
1절 상반절. 무신론의 오류.
1절. 마음의 무신론.
1절. 어리석은 자의 교리. (1) 그 근원-“마음.” (2) 교리-“하나님이 없다.” (3) 열매-“부패”, “가증” 등.
1절. (1) 죄의 근원-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 (2) 죄가 다스리는 장소-마음. (3) 지식인에 대한 영향-어리석은 자로 만듦. (4) 삶에 나타나는 현상-그들이 행하는 것, 행하지 않는 것.
1절 하반절. 디오게네스(Diogenes)의 등불. 이 등불을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비추고, 그들의 죄를 책망하라.
2절. (1) 굽어살피시는 여호와. (2) 여호와의 호의를 받은 자들. (3) 자비하신 여호와의 의도.
2절.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과 사람이 찾는 것. 사람은 자신의 성품과 어울리는 것을 찾는다.
2, 3절. 하나님은 선한 사람을 찾으신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3절. 인류의 전적 타락.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율법, 죄의 악함, 지옥의 고통, 그리고 다른 진리들을 바로알았다면, 그들이 지금 행하는 것처럼 죄를 지을까?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악을 계속 행한다면, 그들의 죄는 더욱 중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긍정적, 그리고 부정적인 답을 찾아보라. 훌륭한 설교가 준비될 것이다.
4절 상반절. 계시와 지식을 범하는 죄.
4절 하반절.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자의 특성이다.
5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의 두려움.
5절. 여호와께서 의인을 가까이하심. 박해자에게 미치는 영향, 성도들에게 주는 격려.
6절. 여호와를 우리의 피난처로 삼는 지혜. -존 오웬.
6절. 다음의 내용을 설명하라. (1) 가난한 자가 계획하는 것. (2) 그의 경영. (3) 그가 당하는 어려움. (4) 그의 피난처.
6절.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조롱거리가 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지혜임을 보이라.
7절. 주의 재림을 기다림.
7절. “시온에서.” 교회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는 통로이다.
7절. 부흥을 위한 설교. (1) 교회가 자주 처하는 상태-“포로.” (2) 부흥의 방법-여호와께서 은혜로 오심. (3) 그 결과-기쁨과 즐거움.
7절. 영혼의 자유함.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