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시편강해(시편5편,8편)
시편 5편
[개 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다. "관악"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네힐로트"(twlyhn)인데 이는 '구멍을 내다'라는 뜻의 다른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피리나 플루트 등 관악기를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노래는 호른, 트럼펫, 플루트, 코넷과 같은 관악기에 맞추어서 부른 노래인 듯하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 머리말을 해석하는 적합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70인역에서는 이 머리말을 "기업을 얻을 자를 위해서"라고 붙였고, 아벤 에스라(Aben-Ezra)는 이 머리말이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노래에 맞추어 이 시를 부르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도 이 머리말을 해석하는 데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시 1편부터 4편까지의 내용은 의인과 악인의 위치, 특성, 그들의 운명이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 시에도 같은 내용이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자기 자신과 그를 대적하는 원수를 대조시킨다. 경건한 마음으로 이 시를 읽는 자는 주 예수의 존귀하신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그분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7절 하나님께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간구한다.
8-12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 근거를 제시한다.
[강 해]
1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말로 표현된 기도이고, 두번째는 조용한 묵상과 같이 말로 표현되지 않은 채 마음속에 깊이 있는 소망이다. 우리의 기도에서 말로 표현된 것은 기도의 핵심이 아니라 기도의 의복과도 같은 것이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마음이 혼란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영혼에 힘을 더하며, 하나님께 더 깊은 헌신을 하게 할 수 있다. 다윗은 말로, 묵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말을 들으시고, 묵상을 통촉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1절.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이 말은 지극히 인상적인 표현이다. 오, 주여! 내가 바른 것을 구했다면 이것을 내게 허락하소서. 내가 당연히 구했어야 할 것을 빠뜨렸다면 내 기도에 부족한 것을 채워 주소서.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영광스러운 중보자를 통해 여호와께 드린 기도를 살펴보소서. 당신의 지혜로 살펴보시고, 저울로 달아보시고, 내 간절한 마음을 판단하소서. 내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구했다면, 자비를 베푸사 당신의 시간에 응답하소서!
기도하는 자가 비록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가 있다. 아! 그러나 말은 많이 하지만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기도하는 습관보다도 기도하는 심령을 가져야 한다. 외양으로는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헌신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기 전부터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무릎을 펴고 일어난 후에도 우리는 기도를 중지해서는 안 된다.
2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2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여기에 나오는 대명사를 주의해서 살펴보라. 그분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우리가 그분께 간구하고 간청하는 핵심과 같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가? 바로 이 구절이 그 핵심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분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잘 아신다. 그분은 우리 나라의 왕이시다. 왕은 그 백성의 소리와 간구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 이방인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예배하는 백성들이다. 그분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하시고, 맹세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왕이 되신 것이다.
"나의 부르짖는 소리." 다른 시편에는 "내 흐느껴 우는 소리"라고도 표현되었다. 흐느끼는 울음에는 소리가 있다. 이 소리는 듣는 자의 가슴을 녹이고 귀를 울린다. 이 소리는 간청하는 소리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이다. 부르짖는 소리에는 영혼을 감동시키는 유창함이 있다. 이 소리는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나와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흘러간다. 아! 형제 자매들이여, 때로는 우리가 기도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때가 있지 않는가? 우리는 부르짖어 울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우리가 부르짖어 우는 소리를 다 들으시고, 그 의미를 아신다.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자녀의 울음은 음악과도 같은 것이다. 이 소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영역본에서는 "기도하나이다"라고 현재형으로 번역된 역본도 있으며<NIV, NASB, RSV>, "기도하리이다"라고 미래형으로 번역된 역본도 있다<KJV>. 히브리어 성경에는 미완료 동사가 사용되었으며, 현재 지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본 강해는 미래형으로 해석한 것에 근거했다-역자 주.) 다윗은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 그분만이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깨어진 독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이 마시게 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샘에서 마셔야 한다. "내가 주께 기도하리이다." 다윗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기도할 것이라고 결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그는 결코 기도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3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3절.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이 구절은 기도라기보다는 시편 기자의 결심을 말한 것이다. 주여, 내가 잠잠하지 않으리이다. 내가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내 마음이 기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곧 시들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벙어리 귀신 들린 자들은 없다.
"아침에." 이 시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아침에 한 시간은 저녁에 두 시간과 그 가치가 같다. 풀잎에 이슬이 맺혀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의 영혼에 떨어지게 하라. 매일 아침 시간을, 우리 인생의 아침을 하나님께 드리자. 새벽이 되면 기도로 하루를 열고, 밤이 되면 기도로 하루를 닫자. 새벽별이 뜰 때, 그리고 황혼에 별이 뜰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자.
3절을 번역본으로 읽으면서 그 뜻을 이해하려면, 활을 쏘는 사수를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내가 주께 기도하고"라는 구절을 보면서 '기도'의 화살을 활에 먹이고 쏘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바라리이다"라는 표현은 활을 쏜 후에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를 쳐다보는 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내 기도를 진열하리니'라는 뜻으로서 이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제물을 태울 나무를 쌓고 제물을 제단에 올려 놓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탁자에 진설병을 놓는 것을 말할 때에도 이 단어를 썼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내가 나의 기도를 당신 앞에 진열하리니'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침이 되면 제사장이 제단에 제물을 놓듯이, 내가 제단에 나의 기도를 진열하리이다. 트랩 선생은 "내 기도를 정렬하리이다"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내가 내 기도를 정렬시켜서 그것들이 당연히 있어야 할 자리에 두고서, 내 힘을 다하여 당신께서 받으시도록 기도하리이다.
"바라리이다."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차파"(hpx)라고 하는데, 원문의 뜻을 잘 살려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내가 밖을 보리이다.' 당신의 응답을 보기 위해 밖을 보리이다. 내가 기도한 후, 당신의 축복이 임할 것을 기대하리이다." 이 단어는 아침을 기다리는 자가 하는 행동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처럼 당신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바라리이다. 제단에 제물을 쌓듯 내 기도를 당신 앞에 진열하고, 위에 계신 당신을 바라보리이다. 그리고 이 제물을 태울 불이 하늘로서 내릴 것을 바라리이다.
이 구절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기도하기 전에 조용한 묵상을 하지 않아서 기도의 향기와 효과를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둘째, 기도한 후에 소망을 잃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겸손한 마음이나 별생각 없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둘러 가지는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도 특별한 간구를 하지 않는다면, 간구한 후에도 그 결말을 지켜보지 않는다면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는 마음의 묵상이 끊이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이 묵상은 기도의 물레를 돌리는 물과도 같다. 메마른 강의 수문을 열고서 물레를 돌리고자 한다면 이는 얼마나 게으른 일인가? 열심을 품지 않은 기도는 죽은 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는 것과 같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기도하는 것은 눈먼 사냥매를 데리고 매사냥을 나가는 것과도 같다. 기도는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지만, 그분은 다른 도구를 통해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으나, 이 땅의 흙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성령께서는 기도의 역사를 일으키시나, 그분은 금으로 그릇을 치장하듯 열정적인 영혼의 생각을 도구로 사용하여 기도하게 하신다. 우리는 찬양과 기도의 불이 타오르게 하자. 그러나 마른 풀이 타듯 조급하며 일시적인 것이 되지 않고, 장작불이 타오르듯 오래오래 타게 하자.
우리는 또한 기도하고서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는가? 기도하고서 그 결과를 보지 않는다면, 마치 알을 낳고서 돌보지 않는 타조와 같다. 씨를 뿌리고서 추수하지 않는 게으른 자와 같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고서 창문을 열고 그분의 은혜와 축복이 내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분의 은혜의 창문을 열고 축복해 주실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묵상하며 준비하고, 기도한 후에 기대하자. 그리하면 우리의 기도는 진정 더 많은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5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겠다는 결심을 표현한 후, 이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를 대적하는 잔인하고 악한 원수를 탄핵한다. 그가 사용하는 논리는 지극히 타당한 논리이다. 그는 하나님께 그들을 멀리하실 것을 기도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그들을 싫어하시기 때문이다:"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나를 해하려는 자들을 미워하며 기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그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오, 주여! 당신은 악을 미워하시나이다. 주께 간구하옵나니 악에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엄숙한 진리를 배우자. 죄악이 어떤 형태로 아름답게 치장된다 할지라도, 그분은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죄악이 외형적으로 아름답게 보여도 그분께는 아무런 매력도 없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가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 사용했던 비열한 짓은 잊어버릴지 모르지만, 거룩하신 여호와는 우리와 같으신 분이 아니시다.
4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하나님은 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악은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없다. 아! 그리스도와 마귀는 이처럼 서로 적대적인 관계인데, 우리가 그 둘을 모두 손님으로 모시려고 한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을 기억하라. 우리의 마음속 일부분이라도 마귀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속에 결코 유하지 않으신다.
5절.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죄인들은 오만한 자들이며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아무리 작은 죄라도, 이는 오만한 자가 행하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은 자들은 하늘의 궁전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이 땅의 왕들도 어리석은 자들을 부하로 쓰려 하지 않는다.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들을 온전히 구분하여 가까이하지 않으신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조금만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온전히, 철저하게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오! 우리는 주변에 있는 악한 자들에게 경고해야 할 것이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6절.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악을 행하는 자뿐만 아니라 악을 말하는 자도 멸망받는다는 것을 유의하라. 거짓말하는 자들은 모두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서 사람의 법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하나님의 법을 피하지는 못한다. 거짓말하는 자들은 짧은 날개를 가졌다. 그들이 날아간다 해도 멀리 가지 못하고, 곧 파멸의 불못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은 자신의 피에 취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으로 시작한 자들은 결국 자신들이 속는 것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옛 속담에도 "피 흘리기를 좋아하고 속이는 자들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한 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도 같다. "싫어하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품으신 증오가 얼마나 강력하고 뿌리 깊은지 알 수 있겠는가?
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이 구절과 함께 이 시의 첫째 부분이 끝이 난다. 시편 기자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구원을 간구하며, 악인의 특성과 운명을 묘사했다. 이제 그는 이것을 의인의 모습과 대조시킨다.
7절. "오직 나는······주의 집에 들어가." 나는 멀리 서 있지 않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듯, 나는 당신의 전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전에 들어가는 것은 나 자신이 잘한 것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난 죄가 지극히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전에 들어갈 때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들어가겠나이다. 당신의 은혜는 측량할 길이 없기에, 이것을 의지하여 당신께 나아가리이다. 당신의 심판은 헤아릴 수 있으나, 당신의 인자는 끝이 없습니다. 당신의 진노는 무게를 달 수 있으나, 당신의 인자는 무게를 달 수 없습니다.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편 기자는 거룩한 성전을 향한다. 당시 성전은 땅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아니라 회막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눈을 들어 성전을 바라본다. 이 성전에 여호와께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빛 가운데 거하시고, 두 그룹 사이에 거하셨다(출 25:18-22). 다니엘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자.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이제 이 시의 둘째 부분에 다다랐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논리를 반복해서 전개하며, 왜 기도를 들으셔야 하는지 그 근거를 제시한다.
8절. "여호와여······나를 인도하시고."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인도를 받듯이, 소경이 친구의 인도를 받듯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인도를 받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실 때 그 길은 안전하고 기쁨이 있다.
"주의 의로." 내 의로 인도하지 마소서. 내 의는 불완전하오니 주의 의로 인도하소서. 주는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내 길이 아니라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성도들이여! 우리가 우리의 길을 포기하고 주의 길을 걷기를 소망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길이 우리 목전에 곧게 되었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크신 인자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의 바다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9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 나오는 악한 사람에 대한 묘사를 다른 성경 구절과 함께 인용하여 로마서 2장에서 모든 사람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이는 다윗의 원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속성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9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이 표현은 지독한 표현이다. 열린 무덤은 구역질나는 곳이고, 독기가 서려 있으며, 지독한 병과 죽음이 있는 장소이다. 이 무덤은 "열린" 무덤이다. 이것은 큰 문젯거리다. 이 열린 무덤에서는 무서운 독가스가 솟아 나오고 주위에 죽음과 파멸을 불러온다. 악한 자의 목구멍은 이와 같은 것이다. 이 목구멍이 닫혀 있기만 해도 얼마나 큰 자비일까! 악인의 입으로 침묵하게 할 수만 있다면, 닫힌 무덤처럼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다. 그 결과 가슴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뿜어 댄다. 열린 무덤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여행을 하는 자들은 쉽게 넘어져 이곳으로 빠져들게 되며,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 악한 자를 주의하라. 그가 말하는 것 중에 당신을 파멸로 이끌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성품을 파괴하고, 그의 악한 목구멍에 있는 무서운 무덤으로 당신을 매장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위로가 있다. 부활의 때가 되면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품까지도 부활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학대를 당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큰 위로가 된다. "그때에 의인들은······해와 같이 빛나리라"(마 13:43). 세상은 당신을 악하다고 생각하고 당신을 매장시키려 할지 모르지만 당신이 의롭게 살았다면, 무덤이 열리고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할 그때에 죄인의 열린 무덤도 당신의 아름다운 성품을 토해 낼 것이며,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이 구절은 "저희는 기름칠한 혀를 가지고 있나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기름칠한 혀는 악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칠한 혀에 속아 넘어갔다. 동물 중에는 혀로 개미를 잡아먹는 동물이 있다. 기다란 혀에 기름을 칠하고서 개미를 잡아먹는 인간을 상상해 보라. 그는 기름칠한 번지르르한 말로 순진한 사람을 유혹하고 덫에 걸리게 하여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다. 늑대가 혀로 양을 핥을 때, 그는 양의 피로 이빨을 적시고자 준비하는 것이다.
10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0절.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다윗은 원수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를' 대적한다고 하지 않았다. 오, 주여! 그들이 내 원수였다면 내가 그들을 용서하였으리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원수를 용서할 수 없나이다. 우리는 우리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수를 용서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세련된 사람들은 이러한 표현이 너무 가혹하고 귀에 거슬린다고 한다. 그들은 "아! 이렇게 저주하는 것은 너무 복수심에 끓는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한다. 이런 구절들은 시편 기자의 소원이 아니라 예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며 도피처를 삼을 필요는 없다. 성경에서 이런 구절을 읽고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나는 이 구절을 읽고서 복수심을 품는 자를 아직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보고서 이 구절의 특성을 판단하는 것이 공평한 일이다. 여기 살인자가 법정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재판관이 살인자에게 준엄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해를 가했다고 해서 당신도 재판관처럼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시편 기자는 재판관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악인을 저주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에게 이처럼 저주할 수는 없다.
겉으로 축복하면서 속으로 저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로마의 어느 늙은 제사장이 프랑스의 황제를 축복했으나 사실은 저주했던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었다. 그는 겉으로는 축복하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정반대로 행했다. 그는 죄인들에게 임박한 저주를 경고했는데, 이것은 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친구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네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당할 파멸에 대해 경고할 것이다! 우리가 전하는 이 심판의 메시지는 땅을 심판하실 재판관이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게 내릴 심판을 전하는 것이다.
다음 절에서는 악인의 운명과 대조적인 의인의 모습에 대해 나타난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시편들과 같은 것이다.
11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1절. 기쁨과 즐거움은 성도들의 특권이다. 죄인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 우리의 기쁨은 충만할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웃었으나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눈물을 흘리지만, 영원히 즐거워할 것이다.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승리의 소리를 발할 것이며, 그들이 괴로움 가운데 탄식할 때에 우리는 즐거움의 소리를 외칠 것이다. 우리들의 즐거움은 거룩한 즐거움이며, 그 기초는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여호와,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 안에서 즐거워한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 우리가 매일 기쁘게 살아가는 것은 그분이 주시는 양식을 먹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에는 음악이 있고, 우리의 마음과 하늘 나라에 음악이 있음은, 여호와 우리 주께서 우리의 힘과 노래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12절.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며, 어떤 것도 그들의 기업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그분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축복하실 것이며, 선하시고 인자하신 그분은 그들로 만족케 하실 것이다. 이 축복은 현재 우리가 받는 축복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축복은 먼 미래에까지 지속되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이 약속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을 축복에는 어떤 제한도 없으며, 그 귀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성도들이 인생의 전투 현장에서 싸우는 동안 하나님은 성도들을 어떻게 보호하시는가? 하나님은 성도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신다. 고대에는 사람을 온전히 둘러쌀 만큼 거대한 방패가 있었다. 다윗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에인즈워스는 이 구절에서 왕의 투구로 관을 쓰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영광과 보호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 여호와여! 이처럼 은혜로운 대관식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1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사람들이 하는 기도 중에서 많은 부분이 그저 헛된 말과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것과 같아서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들으실 가치도 없다.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하면서도 간절한 마음도 없고 그 결과에 대한 소망도 없는데, 이런 기도는 헛된 말을 나열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기도한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응답받을 것을 확실히 믿으며, 단호하고 지속적으로 간절히 간구를 드리며, 헛된 소망으로 무의미한 말을 하지 않는다. -로버트 레이턴.
1절. "심사/묵상." "묵상"은 영혼의 간구를 말한다. 묵상이 영혼이란 통에 좋은 술을 담는 것이라면, 기도는 그 통에 호스를 연결하고 술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다윗은 먼저 묵상을 하고, 이어서 입으로 기도했다:"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시 39:3, 4). 묵상은 기도를 낳는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아들과 부모의 이름을 함께 불렀다:"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묵상이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권총을 발사하는 것과 같다. 창세기에는 이삭의 묵상이 나온다:"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63). 70인역, 제네바역, 트레멜리우스(Tremellius)는 책의 여백에 "기도하다"라는 주를 달아 두었다. "묵상"은 히브리어로 "타나그"(gnt)라고 하는데 이 말은 '기도하다', 또는 '묵상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두 단어는 매우 가까운 뜻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쌍둥이가 한 자궁내에서 자라듯이, 이 두 가지 뜻이 한 단어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묵상은 기도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기도는 묵상에 대한 가장 좋은 결론이다. 다니엘이 창문을 열고서 기도했듯이, 성도들은 묵상을 통해 영혼의 창문을 열고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다. -조지 스윈녹.
1, 2절. 다윗은 기도를 "나의 말", "나의 부르짖는 소리"라고 했으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을 "귀를 기울이사", "통촉하소서", "들으소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다윗의 감정과 간구가 얼마나 급박하고 전심을 다한 것인가를 점증적으로 보여준다. 첫째, 다윗은 "귀를 기울이사"라고 했다. 이 말은 '내 말을 들으소서'라는 말이다. 그러나 말을 단순히 듣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는 소리"와 "심사/묵상"을 "통촉"하시고 이해하셔야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나는 깊은 염려 가운데 말하나 이것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통촉하시고 이해하소서.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부르짖나이다. 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나를 이해하소서. 오, 여호와여 나를 이해하신 후에는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사 당신께서 듣고 이해하신 것으로 나를 멸시치 마소서." 그러나 '귀를 기울이시고', '통촉하시고', '들으시는' 행위가 하나님의 각각 다른 행동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전달하는 우리의 감정이 이처럼 변화가 있고 감정의 증가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라고, 이어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나아가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듣고 무시하시지 말 것을 바라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3절.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네 영혼도 눈을 뜨게 하라
우리의 육신은 영혼의 갈 길을 먼저 가나니
꽃이 태양을 향해 두 팔을 벌리듯
진실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가슴을 펴네
눈을 뜨면 맨 처음 하나님을 생각하라
그분 안에서 잠들기까지 그분은 종일 너와 함께하리라.
그러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잠을 자지 말아라
새벽이 열리면 너는 기도를 드려야 할지니
만나는 태양이 떠오르고 나면 좋지 않은 것
뜨거운 태양은 꽃을 시들게 하네
태양이 떠오르기 전에 일어나라
세상이 닫혀 있을 때 하늘 문은 열리는 것이라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과 함께 걸어 보라
숲속에서 흔들리는 가랑잎 소리를 들어 보라
나뭇잎도 아침의 찬양을 드리지 않는가?
떡갈나무도 스스로 있는 그분을 아는데
네 모든 염려와 걱정을 던져 버리라
그리하면 온 종일 주님을 찬양케 되리라.
-헨리 본(Henry Vaughan, 1621-1695).
3절.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헤만(Heman)은 "아침에 당신께 기도드리리"라고 했다. 아침은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영혼은 신선하며, 어떤 잡념도 들지 않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행하는 거룩한 의무는 '아침의 날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에드워드 레이너(Edward Reyner, 1658).
3절. "아침에." 버넷(Burnet)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우리 조상들의 시대에는 이웃 사람이 아침 일찍 와서 주인을 만나고자 할 때, 종은 '주인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주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한다."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이 말은 "내가 기도를 정렬하리라"라는 뜻이다. "내가 야곱처럼 주께 계속 간구하고, 계속 간청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리이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사람과 논쟁을 하거나 하나님께 간구하는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였다. 이 구절에서 수사적인 표현을 모두 제해 버리고 간단히 말한다면 "당신 앞에 내 말을 정돈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단어를 계속 내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말을 잘 정리해서 제시해야 한다.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말을 구분하고 잘 정돈해서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조셉 캐릴.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이 구절에서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첫째, 다윗이 기도하는 태도이다. 기도하는 태도는 "내가 주께 기도하고"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다. 둘째, 다윗이 기도한 후에 취하는 행동이다. 기도한 후에 취하는 행동은 "바라리이다"에 나타나 있다.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 군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째, 다윗이 기도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그는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정렬시켜서 전투에 나가는 것처럼 전투 대형으로 세운다. 히브리어로 "테라크"(^rf)가 쓰였는데, 이 단어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둘째, 다윗이 이처럼 기도한 후에는 보초가 서는 관망대 위에 올라가 정탐꾼처럼 그가 승리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히브리어로 "차파"(hpx)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다윗은 그가 기도와 간구를 드릴 때 대오를 지어 잘 정돈시킨 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보내시는지 주위를 잘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지 않는 자는 바보이거나 정신이 나간 사람이며, 매우 약한 자이거나 매우 악한 자이다. 이는 하늘을 향해 많은 화살을 쏘아 대면서도 화살이 어디로 가는지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토머스 브룩스.
3절. "내가 바라리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위를 바라보겠다고 했다. 그는 이 타락한 세상을 내려다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 것인가를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시 85:8). 당신도 이와 같이 결심하라.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미 7:7). -윌리엄 그린힐(William Greenhill, 1650).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결심한다. 내가 장사를 하리라. 나의 영적 일용품을 보내어서 이익을 얻으리라. 내가 기도한 후 잊지 않고 그 응답을 바라보리라.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했으나,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달리 그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리라.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갔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신뢰하여 그를 돌아오게 하시리라. 오! 하나님께서 집으로 보내시는 배에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들로 채워져 있을까! -조지 스윈녹.
3절.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믿음은 기도를 지지하고 붙들어 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내 영혼을 붙들어 은혜로운 응답을 기대하게 한다:"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아무 곳에나 화살을 쏜다. 그리고 그 화살이 어디로 갔는지, 그의 기도에 어떤 결과가 오는지 결코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영혼에 기대감을 심어 준다. 무역하는 상인이 장사를 할 때, 그는 바다에 띄워 보낸 배에 무엇을 실었는지, 현재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계산한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그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리면서 무엇을 보냈으며 아직 응답받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미 받은 하나님의 자비는 무엇인지 계산해 본다. 믿음은 기도의 배를 띄워 보내고 아직 그 배가 돌아오기 전 기다리는 시간에, 영혼으로 조용히 안식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때로 믿음은 기도의 응답을 얻고서 승리의 함성을 외치게 한다. 이 믿음은 성도의 영혼으로 자비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인자가 임할 것을 알고서 괴로운 생각을 잠재우게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전에 성도들로 찬양을 돌리게 한다······기도하고서 그 결과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많은 기도들이 잃어버린 바 된다. 믿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 믿는다면, 왜 기대하지 않는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 기도할 때 보였던 신뢰가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오, 성도들이여!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당신이 간구한 것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라······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위해 많은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섭리로 어떻게 응답하실 것인가를 기대하며 대궐 문에 앉아 있었다. 당신도 이처럼 행하라. -윌리엄 거놀.
4절.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사람이 무딘 칼로 종이를 자른다면, 사람은 종이를 자르는 원인 제공자이지만 잘못 잘라진 것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다. 무딘 칼이 종이로 잘못 잘라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를 연주한다면, 그는 소리를 내는 원인 제공자이지만 불협화음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다.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가 불협화음을 내는 것이다. 사람이 저는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제자리에서 비틀거린다면, 사람이 말로 움직이게 하는 원인 제공자이지만 비틀거리는 것은 말로 인한 것이다. 사람이 철로 기구를 만들지만 녹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철로 된 기구에 녹이 스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행동이 일어나게 하는 분이시지만, 악한 행동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시다. 악한 행동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와 불의를 만들지 않으셨다.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선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스펜서, Things Old and New.
4-6절. 하나님께서 악인을 멀리하시는 것이 점진적으로 나타나며, 여섯 단계를 거치는 듯하다. 첫째, 그분은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둘째, 그들은 주와 함께 거하지 못한다. 셋째, 그분은 그들을 던지시고, 그들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 넷째, 그분은 그들에게서 마음을 돌리시고, 행악자를 미워하신다. 다섯째,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치시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 여섯째,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대적하고 멀어지며,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신다. 이처럼 악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분명히 임하는 심판이다.
"행악자"라는 말은 죄질이 가장 나쁜 죄인들로서 고의로 악한 죄를 짓기로 마음을 굳힌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죄를 열심히 또한 능수능란하게 지으며, 죄를 짓는 데 명성을 얻고자 야망을 가진 자처럼 부단히 죄를 짓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마땅히 부끄러워할 일에도 이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이들은 "행악자"들이다. 악명 높은 죄인들은 죄로 사업을 한다. 모든 죄가 악한 일이지만, 죄인들 중에서 별난 자들을 "행악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죄를 짓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자들이다. 거짓을 사랑하여 거짓말하는 자에 대한 구절이 요한계시록 22:15에 나온다. 거짓말을 결코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말을 진정 좋아해서 거짓말을 하는 자들도 분명히 있다. 이처럼 죄를 짓는 데 탁월한 자들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오히려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의 강포를 달아 주는도다"(시 58:2). 시편 기자는 그들의 마음 중심에 악이 있다고 하지 않았고, 악을 행한다고 했다. 마음은 사람의 내면에 있다. 거기서 사람들이 죄 지을 것을 연구하고 날조하여 악한 목적을 만들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조셉 캐릴.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 죄는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로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과 원수가 되게 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만 깨끗게 할 수 있다! 성경을 믿는 자들이 이것을 다 알아야 하지만, 죄에 대해 민감한 사람이라도 죄가 지극히 죄스러운 것임을 조금만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이것을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토머스 아담(Thomas Adam, Private Thoughts, 1701-1784).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라:신 7:22; 잠 6:16; 계 2:6, 15.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그분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따라 이러한 죄에 심판이 임할 것이다. 죄의 행위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행악자들도 그분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윌리엄 거놀.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미워하신다면, 죄악은 얼마나 미워하시겠는가! 사람이 독성이 있는 동물을 싫어한다면, 그 독은 더욱 싫어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면, 우리도 또한 죄를 미워하고 또 힘을 다해 미워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이라면, 우리에게도 혐오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잠언의 말씀을 들어 보라:"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 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 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 6:16-19). -윌리엄 그린힐.
5절. "주는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는 멸망을 피할 수 없다. 그분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 행악자를 미워하신다. 이로 인해 멸망당할 것을 알면서도 죄를 떠나지 않는 자, 이처럼 악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용서치 않으시리라. 악을 행하는 자는 멸망당해야 한다:"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눅 13:27). 여호와께서 분노 중에 찢으신 자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분은 미워하는 자를 찢으신다(참조. 욥 16:9). 이처럼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주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머리에 진노를 쌓으니, 진노를 당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가(롬 2장)! 그분의 영이 싫어하는 자들을 사랑의 품안에 안으시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당연히 파멸을 당해야 한다(잠 21:15). 율법이 그런 자들을 저주하고 복음이 그들을 경계한다면, 이 땅과 지옥의 심판을 받아 그는 멸망할 것이다. 여호와의 강한 손이 그를 친다면, 그는 죽을 수밖에는 없다(시 68:21)······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것을 멀리하라.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인정하고 허용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시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악을 미워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했다(시 45:7)······그리스도께서 악을 미워하시는 것처럼, "행악자"도 미워하신다. 악을 사랑하지 말고, 그것과 친밀하게 지내지 말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나 경건을 비웃는 자나 경건의 능력을 방해하는 자나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즐거워하지 말라(고후 6:14-18). 당신이 악한 자들과 가까이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영적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이나 이런 일을 행하는 자와 교제를 나누지 말라.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B.D., 1621-1686).
6절.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주께서는 재미로 하든 진정으로 하든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신다. 재미로 거짓말을 하고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진정 지옥으로 갈 것이다. -존 트랩.
6절.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압살롬이 그의 아버지를 대적하여 전투를 하던 곳에 상수리 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그의 교수대가 되었다. 그가 타고 갔던 말은 그를 교수대에 달아매는 자가 되었고, 그가 자랑하던 긴 머리는 그를 매는 밧줄이 되었다. 악인은 그가 소유한 것들이 어느 땐가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실 때에 그를 잡는 덫이 될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윌리엄 카우퍼(1612).
7절. "주를 경외함으로······경배하리이다." 공포심이 생기면 외적인 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속으로 경계심을 품듯이, 주를 향한 경외심은 외부의 잡다한 것들에서 마음을 돌이켜 자신이 수행해야 할 거룩한 의무에 집중시키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한다. 도장으로 밀랍을 찍는다면 도장에 새겨진 조각이 밀랍에 그대로 찍히듯이,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새겨져 있으면 당신이 행하는 모든 행사에 그것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윌리엄 거놀.
7절.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성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중보자 되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기도를 드리면 아버지는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 솔로몬은 성전을 바라볼 때에 이것을 생각했다.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D.D., 1620-1677).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이 구절은 참으로 복된 말씀이다. 이 구절에는 두 가지가 강한 대조를 이룬다. 성도들은 세상에 살면서 소망과 경외심, 이 두 가지를 행사해야 한다. 갈렙이 딸에게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듯이(삿 1:15), 이 두 가지는 하나는 위에서,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오는 것이다. 경외심은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바라볼 때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모두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감미로운 자비를 바라볼 때 소망이 생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다:"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 25:6). 마치 맷돌의 윗짝과 아랫짝 사이에 있듯이,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거해야 하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위선자들이 행하는 것이며, 그들은 안전과 건방짐이라는 두 가지 모순되는 것들을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다. -마르틴 루터.
9절. 사람의 영혼이 이처럼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되어 있을 때, 영적인 생명을 회복시키고 활력을 불어넣어 다시 새롭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혼의 부분 부분이 이처럼 죽을 병에 걸려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이 영혼을 깨끗게 하고 회복시키신다면, 이는 얼마나 위대한 치료인가! 사람의 폐나 간은 육체의 일부분이다. 이것들이 병들었을 때 이것들을 치료한다는 것은 진정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당신의 영혼은 완전히 썩어 버렸다:"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을 치료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치료인가!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토머스 굿윈.
9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이 구절은 악한 자들의 방탕하고 더러운 대화를 보여주는 듯하다. 죽은 시체는 썩은 냄새를 풍긴다. 이 시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열린 무덤처럼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 이 사람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것은 이처럼 더럽고 악취가 나는 것이다. 무덤에서 나오는 악취로 안에 있는 시체가 썩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죄인들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로 그 영혼을 알 수 있다. -로버트 홀데인(Robert Haldane, Expositions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1835).
9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교훈한다. (1)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대화는 썩은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무덤에서 악취를 내듯이 악인도 더러운 말을 내기 때문이다. (2) 무덤은 그 안에 놓인 몸을 썩게 하듯이, 악인은 그들의 잔인한 말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위한 심연과도 같다. (3) 무덤은 그 안에 있는 몸을 모두 썩힌 다음에도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몸을 썩힐 수 있듯이, 악인은 그들의 말로 다른 사람을 넘어뜨린 후에도, 삼킬 자를 분노 가운데 다시 찾아 나선다. -토머스 윌슨(Thomas Wilson, 1653).
9절.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마음은 악마의 소굴과도 같다. -존 트랩.
10절.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시편 기자의 기도에는 원수들에 대한 저주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로운 자들이 동조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과 같은 일이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신 것과도 같다:"이제 나무를 베어 버리소서. 더 이상 그를 중보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심판은 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이 아버지를 배반하였사오니, 그들의 많은 허물로 심판을 받게 하소서." 이와 같이 악인들을 저주하면서도 그는 성도들이 그의 결정에 동조할 것을 바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계 18:20).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를 보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나무를 찍어 버리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도 역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도끼로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
아브라함이 소돔을 파괴하던 천사 곁에 섰더라면,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면, 그도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불과 유황이 하늘로서 내려오게 하라!" 그러나 그가 복수하는 심정으로 한다거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들을 저주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시편에서 악인을 저주하는 난해한 구절들을 해석하는 진정한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악인에 대한 저주를 선언한 후에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선포하게 하는 신명기 27: 15-26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노에 동참하는 것이며 요한계시록 19:3에 나오는 것처럼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치며 공의로운 심판을 기뻐하는 것과 같다. -앤드류 보나(1859).
10절.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일반적으로 저주의 시를 대할 때 다음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다윗의 시를 묵상할 때마다 시편의 주제를 따라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소서. 그가 죄를 고백하며 당신의 용서를 구할 때면, 내 마음도 겸손하게 하소서. 그가 당신이 베푸셨던 은혜와 앞으로 베푸실 은혜를 인해 찬양을 드릴 때면, 내 영혼도 기쁜 소리로 하나님께 찬양하게 하소서. 그가 원수를 저주할 때면, 내 영혼으로 겸허하게 하소서. 나는 다윗이 원수들을 저주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할 만큼 의롭지 못하나이다. 내 마음이 나를 속여 내 원수들을 당신의 원수로 착각하지 말게 하소서. 다윗은 진실된 마음으로 당신의 원수를 저주했으나, 나는 악한 마음으로 내 원수를 저주할까 하나이다. 나로 경건을 가장하여 원수를 갚지 말게 하소서.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1608-1661).
12절.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우리에게 달려와 불붙은 창을 던진다고 해도, 만일 하나님께서 방패로 우리를 지키듯이 그분의 인자로 우리를 둘러 지키신다면 누가 우리를 해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우리를 공격하는 자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 악행을 제어하시며, 우리 발 아래 엎드리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그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면,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는 너무나 교묘하고 능력이 있고 능수능란하여 우리가 대적할 수 없다. 우리 자신만의 힘으로 그들을 대적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우리 자신의 지혜만 의존하다가 넘어지고 상처를 받은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하나님께 겸손히 도움을 구하기만 하면 그분은 어느 때고 기꺼이 도와주시지 않았던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면, 우리는 승리할 것이 너무도 확실하지 않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1, 32).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떠나 누구에게 피하겠는가! 숲의 사자가 부르짖으며 우리를 무섭게 하고 괴롭힌다 해도, 잠시 동안 괴롭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슬로 묶으실 때에는 어떻게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티모시 로저스(Timothy Rogers, 1691).
12절. "방패로 함같이." 루터가 아우그스부르크에서 펼쳤던 주장이 이단의 주장과 같다고 하며 카예타누스(Cajetan) 추기경은 그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루터가 그에게 나아갈 때 있었던 일이다. 추기경의 총애를 받던 자가 루터에게 물었다:"작센(Saxony)의 제후가 지금까지 당신을 보호했으나 이제 만일 그가 당신을 버린다면 누구에게서 은신처를 찾겠는가?" 루터는 "하늘의 은신처 아래서 찾지요"라고 답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은 뒤돌아서서 자기 갈 길을 갔다.
12절.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다른 방어용 무기는 몸의 어느 일정한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방패는 육체의 어느 일정한 부위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투구는 머리를, 흉배는 가슴을, 그리고 다른 무기는 신체의 또 다른 부분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며, 바로 그곳에 붙들어 매져 있다. 그러나 방패는 몸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래서 방패는 매우 크게 만들어졌다. 몸 전체를 덮으려면 길고 넓게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만일 방패가 몸을 모두 덮기에 그리 크지 못하다면, 숙련된 군사는 이 방패를 이리 저리 움직이며 그의 몸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이나 칼을 막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믿음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몸 전체를 방어한다. 믿음을 활용하면 어떤 부위도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방패는 몸 전체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군사의 무기까지도 방어한다. 방패는 화살이 머리뿐만 아니라 투구도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가슴과 흉배를 모두 지킨다. 이처럼 믿음은 무기 중의 무기이고, 다른 모든 은혜를 보존하는 은혜이다. -윌리엄 거놀.
[설교힌트]
1-2절. 세 가지 형태의 기도-“말, 묵상/심사, 부르짖는 소리.” 마음 없이 내뱉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말은 없을지라도 조용하고 간절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3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의 효과.
3절 하반절. (1) 기도하라. (2) 응답을 바라라.
4절. 죄에 대한 하나님의 미워하심은 백성들이 따를 본이다.
5절. 바보. 왜 죄인이 바보인지 설명하라.
7절. “주의 풍성한 인자.”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와 선하심을 묵상하라.
7절. 거룩한 결심.
7절. (1) 단호한 결심. (2) 결심의 대상-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을 결심함:“나는······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3) 결심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동을 받음:“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② 경외감을 가짐:“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윌리엄 제이(1842).
8절.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한다. 특히 원수가 우리를 노리고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10절. 원수들에 대한 위협.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라는 구절은 엄숙한 설교를 하는 기초로 사용될 수 있다.
11절. (1) 의인의 특성-믿음과 사랑. (2) 의인의 특권-① 의인이 받는 특권은 크고, 순수하고, 만족스럽고, 승리하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보호는 능력으로, 섭리로, 천사들로, 은혜로 베풀어 주신다.
11절.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의무요, 또한 특권이다.
12절 상반절. 의인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 이 축복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효과적이고, 변함이 없고, 많은 복이며, 돌이킬 수 없고, 놀라운 복이며, 영원하고, 무한하다.
12절 하반절. 하나님의 호의는 영혼을 지킨다.
시편 6편
[개 요]
주제-이 시는 맨 처음 나오는 “참회의 시”로 알려져 있다. (다른 여섯 편의 참회의 시는 32, 38, 51, 102, 130, 143편이 있다.) 이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참회하는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여기에는 슬픔(3, 6, 7절)과 부끄러움(2, 4절), 그리고 죄에 대한 미움(8절)이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설 때 분명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오, 성령님이여! 우리 안에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이다. 스미닛은 제8음으로서 한 옥타브를 말하는 듯하다(참고. 대상 15: 21).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베이스나 테너를 지칭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시의 탄식하는 어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고대의 음악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도 “셀라”의 의미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도 이 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이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학자들도 시편에서 아직도 많은 단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이러한 시편들이 고대에 쓰였다는 것을 증거하며, 다윗 왕이 이 시를 기록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구성-이 시는 두 부분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1-7절심한 어려움 중에 시편 기자가 간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8-10절첫째 부분과는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어조를 바꾸어 단음을 버리고 장엄한 곡을 취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노래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선언한다.
[강 해]
1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첫번째 부분을 읽어 보았다. 이제 한 절, 한 절씩 살펴보도록 하자.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시편 기자는 그가 당연히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견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곡식을 추수할 때 바람을 일으켜 깨끗한 알곡을 모으지만, 영혼은 견책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다." 우리를 징계하여 영혼을 부요케 하는 그 존귀한 손을 떠나가도록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는 이 견책을 그만두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견책은 축복이 위장을 하고 오는 것인데, 이것을 놓칠 수는 없다. 그는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라고 기도했다. 주여, 주께서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대적하는 자처럼 나를 대하지 마옵소서. 주의 종이 낙담하여 절망할까 하나이다.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했다:"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렘 10:24). 내가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나이다. 내가 징계의 회초리 앞에서 몸을 움츠리지만, 이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나이다. 그러나 오, 내 하나님이여,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당신의 회초리가 변하여 칼이 되며, 당신이 나를 칠 때에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 징계를 온전히 거두어 들이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노 가운데서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사랑 가운데서 징계하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2, 3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당연히 멸망당해야 하오나, 당신의 자비로 내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선함, 우리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말고, 우리가 보잘것없다는 것을 말하며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라:"여호와여, 나는 연약하나이다. 나를 부수지 마시고 내게 힘을 주소서. 나는 연약한 그릇이오니, 내게 진노하지 마소서. 나는 시들어가는 가련한 꽃과도 같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자비롭게 대하시고, 나를 꺾지 마소서. 나는 연약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교만한 마음이 꺾였다. 그래서 자신이 율법을 지킬 힘이 없고 연약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슬픔으로 인해서 연약해졌고, 약속을 부여잡기에도 너무 연약해져 있다:"나는 수척하였사오니." 원문은 이런 의미이다:"나는 고개를 숙인 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뿌리 뽑힌 나무가 시들어 가는 것과 같다. 아!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영광에는 흠이 갔고, 우리의 아름다움은 시들어 가는 꽃과도 같았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은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한다. 그가 고통을 받던 병에서 잠시 동안 진정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고 병의 근원을 고쳐 달라는 기도이다. 뼈가 '떨린다'는 말은 히브리 표현을 따르자면 뼈가 '흔들린다'는 말이다. 그는 이처럼 공포에 휩싸여 그의 뼈조차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의 골격을 유지해 주는 뼈가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내 뼈가 떨리나이다." 아! 우리의 영혼이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아래에는 지옥의 불꽃이 타오르고, 위에는 진노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주위에는 위험과 의심이 둘러싸고 있다면, 머리털이 서고 뼈가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내 뼈가 떨리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 외부로 나타난 표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는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영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내 영혼이 평안하고, 단지 뼈만 떨리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이 고통을 당한다면, 이는 정말 깊은 고통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다윗은 이 말을 짤막하게 외쳤다. 말로 그의 심정을 다 표현할 수 없고, 슬픔이 그에게서 모든 위로를 다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소망을 품고 있다. 그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래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친 것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가장 바라는 바는 은혜로운 대제사장 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소망이다.
칼빈은 종종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외쳤다. 그가 괴로운 삶을 사는 동안 겪었던 그 고통을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천년 왕국의 영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외칠 말이다:"오, 여호와여! 그분이 타시는 말은 왜 이렇게 오지 않나이까?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자들이 아직 용서함을 받기 전에는 일 분이 한 시간 같고, 한 시간이 일 년 같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은혜의 해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우리의 영혼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외친다:"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셨으므로 고난과 비극이 생겼다. 이제 그분께서 돌아오신다면 다윗은 고난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어떤 손을 부여잡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왼손을 붙잡지 않았다. 자비를 행하시는 그분의 오른손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악이 많아서 자랑할 것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이 간청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하나님은 이 간청을 결코 거절하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그분께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의지한다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분께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이 1-4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는지 주의해서 살펴보라. 그는 다섯 번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이름은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분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변치 않으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에 나타나 있다. 그분의 이름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이제 다윗은 사망의 위험에 빠져 있다. 이 사망은 일시적인 사망을 말하고, 또한 영원한 사망을 말할 수도 있다. 5절을 읽어 보라.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무덤은, 그것이 교회에 있다 해도, 침묵의 장소이다. 무덤 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흙에 덮인 육체는 그저 침묵할 뿐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리시면 내가 찬양하리이다. 내가 죽는다면, 이 육신으로 드리는 찬양을 일시 중단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나이다. 그리고 내가 지옥으로 떨어져 멸망한다면, 나는 결코 당신께 감사의 노래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지옥의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어찌 감사의 노래가 울리리이까. 내가 영원한 저주를 받아도 여호와는 찬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찬양하는 인생 중에서 한 사람이 궐이 날 것입니다."
아! 두려움으로 떠는 성도들이 있는가? 우리 여호와께서 당신을 도우사 다윗처럼 간구하게 되기를 바란다. 죄인이 사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자들은 복을 받고, 용서를 받는 자들도 복을 받는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6, 7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시편 기자는 그의 길고 긴 고통을 토해 낸다. 그는 탄식하다가 마침내 목이 상하기까지 했다. 그는 진력을 다하여 노동을 하듯이, 부르짖으며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탄식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할 수는 없다. 그렇다! 성도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탄식해야만, 구원의 날에 기쁨의 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밤이란 만물이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고, 내 하나님과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다. 이 시간에도 나는 슬픔을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면, 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흐르는 눈물이 너무 많아 내 침상으로 물 위에 뜨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실제로 일어났다기보다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묘사한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 심판을 생각하며 현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노인의 눈이 해가 바뀌면서 어두워지듯이, 그의 눈이 눈물로 충혈되고 어두워졌다고 다윗은 말한다. 죄책감은 이처럼 신체에도 영향을 미쳐 고통을 받게 한다. 아일랜드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발작을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손이 다윗을 누르시니 다윗이 노쇠해지고, 눈물로 침상을 띄웠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낄 때에 땅에 엎드려 우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아!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 시의 표현은 억지로 강조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처럼 슬픈 곤경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이다.
8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8절. 지금까지 시편 기자는 슬픔 가운데 울며 탄식했다. 그러나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당당히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두려워 떠는 성도들이여, 수금을 들어라
슬픔을 떨치고 노래를 불러라.
슬퍼하고 탄식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라. 그러나 슬픔의 시간은 짧게 하라. 네가 빠진 구덩이에서 일어나라. 이제 그만 일어나라. 네 베옷과 재를 떨쳐 버리라. 밤에 울었을지라도, 낮에는 기쁨이 찾아오리라.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다윗은 평안을 찾았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집에서 악인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악한 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그와 충분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라. 너와 아무 상관도 하고 싶지 않다." 참회하는 자는 생활에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마음속에 있는 성전이 파멸된 것을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채찍을 들고서 마음의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쫓아내고,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 버려야 한다. 용서받은 죄인은 구세주의 피를 흘리게 했던 죄를 미워해야 한다. 은혜와 죄는 이웃이 될 수 없다. 둘 중에서 하나는 이사를 가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이 구절에는 히브리인의 아름다운 사상이 들어 있다. 또한 번역에도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흐느낌에도 목소리가 있는가? 흐느낌으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언어로 의미를 전달하는가? 흐느낌은 이 땅 어느 곳에서든나, 그리고 하늘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야만인이든 종이든 자유자이든, 모든 사람이 흐느껴 울 때에는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다. 흐느낌은 슬픔을 표현하는 유창한 언어이다. 그는 유창한 변사이다. 그의 말은 어떤 통역도 필요없이 누구나 이해한다. 우리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을 눈물이 표현해 내다니! 이는 정말 감미로운 일이 아닌가! 눈물은 액체로 만들어진 기도라고 생각하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있을 때, 흐느낌은 이 모든 장애물을 치운다. 그리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직통으로 나아가 간구하는 기도를 방울 방울 떨어뜨리는 것이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말로 간구할 수 없을 때, 내가 흐느껴 울리이다. 당신은 내 울음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성령께서는 시편 기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주셨다. 이것은 성도들이 때때로 누리는 특권이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과 기도로 씨름하다가 그의 골방에서 뛰어 나와 이렇게 소리쳤다:"우리가 이겼네! 우리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환상적인 꿈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 확신을 주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는다 해도 우리는 그 실재를 알며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기자는 과거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해 격려를 받는다. 이전에는 "들으셨음이여"라고 과거의 체험을 말했으나, 여기서 더 나아가 "받으시리로다"라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 논리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이와 같은 논리를 모방하라.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이것은 원수들을 저주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 것이다. 그들은 갑자기 부끄러워하며 물러갈 것이다." 그들이 사망과 죽음을 당할 것은 확실하고, 이 일이 어느 날 갑자기 닥칠 것이다. 로마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복수의 신은 그 발을 양털로 감쌌다." 복수는 그 원수에게 소리 없이 다가가서 갑자가 후려쳐서 넘어뜨린다. 이 구절이 저주를 말한다면, 구약 시대의 언어와 신약 시대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그들을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바른 길로 걷게 하신다.
이 시도 앞의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경건한 자와 악인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오, 여호와여!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까지 당신의 백성 중에 속하게 하소서.
[주해와 설명들]
시 6편 전체. 다윗은 질병과 원수들의 박해로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시편에서 그가 받은 고난에 대해 살펴보면, 그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아프거나 핍박을 받을 때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신이 지은 죄를 기억했다. 이 시도 그가 병들었을 때 기록했으나, 8절 이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그의 영혼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작은 시냇물이 흘러 큰 강에 합류하면 그 특성이 변하는 것처럼, 다윗이 당하는 모든 고난은 이처럼 그 특성이 바뀌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의 신체적 질병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으나, 이제는 영혼의 위독한 상태와 두려움 아래서 슬픔을 표시한다. 이와 같은 시는 시 38편과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리처드 길핀(Richard Gilpin, 1677).
1절.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순종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 첫째는 말로 그들을 견책하시고, 둘째는 매로 그들을 징계하신다. 그분은 먼저 말씀으로 견책하시는데,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그분의 종을 보내셔서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잘못을 범한 아들을 먼저 말로 견책하듯이, 하나님도 먼저 말씀으로 책망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하나님은 선한 아버지처럼 채찍으로 그들을 징계하신다. 우리 구세주께서도 동산에서 세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말씀으로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경계를 받지 않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경계하여 깨우고자 하셨으나 실패한 것을, 이제 유다와 그의 무리들이 그들을 깨우러 왔다고 했다. -아치볼드 심슨(Archibald Symson, 1638).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그는 하나님의 견책과 징계를 모두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옳은 일이 아니다. 견책과 징계가 없다면, 이는 그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해로운 것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죄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분노이다. 다윗은 분과 진노 대신에 아버지의 온유한 견책을 바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런 견책과 징계를 기꺼이 받고자 한다. -존 칼빈(1509-1564).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여호와의 분노라고?
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폭풍과 같은 그분의 분노를 어찌 견딘단 말인가!
그분의 심판을 피해 어디로 도망을 가랴
십자가로 도망하라!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화목이 죄인을 둘러 보호하리라
태양을 가리던 검은 구름이 떠나가듯
하나님의 진노가 그분의 얼굴에서 떠나리라.
-작자미상.
1절.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나를 율법을 따라 심판하지 마소서.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실 때 분노하신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호 11:9; 참조. 마 3:11).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진노하겠다고 하셨으나, 이제는 진노하지 않으며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악인을 심판하신다. 그분은 이것을 하시겠다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실행에 옮기신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심판을 실행하실 때에 이 진노가 나타난다. -리처드 스톡(Richard Stock, 1641).
1절.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당신께서 내리시는 징계의 채찍을 받을 때에도
내 안에 생명과 평강을 지키게 하소서!
나를 죽이지 마시고, 내 죄를 죽이사
당신은 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내게 베푸실 영광을
내 영혼이 조금이라도 알게 하소서!
마지막까지 믿음과 사랑으로 외치게 하소서
"오, 주여! 오소서, 주를 신뢰하나이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2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했으나, 다윗은 하늘과 땅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치신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 치료를 받고자 한다. 그는 아담처럼 숲으로 피신하지 않았고, 사울처럼 영매자에게 가지 않았으며, 요나처럼 다시스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로 피했다.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피한 것이다. 분노한 필립 왕에게서 유죄 판결을 받은 여인은,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온 필립 왕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품인 공의에서 또 다른 덕스러운 성품인 자비에 호소하는 것이다. 인간의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상고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게 상고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분의 자비로운 심판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마지막 상고의 장소이다. "내게는 하늘에서도 주밖에, 땅에서도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나이다."······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대할 때에 그랬던 것처럼, 다윗은 자비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얻었다. "내가 자비를 얻었으니, 이제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나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는가? 자비를 구하라. 이 샘에서 다른 모든 좋은 것이 흘러나온다. -아치볼드 심슨.
2절.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다윗이 하나님을 움직이기 위해 어떻게 말하는지 주의해 보라. 그는 "내가 수척하였사오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들어서 하나님을 움직이려 했다. 이것은 사람을 움직이기에는 약한 논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논리이다. 병든 자가 의사에게 와서 그가 치명적으로 아프다는 것을 호소하면, 의사는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서 당신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자가 재판관에게 가서 그가 당한 모든 일을 말하고 조언을 구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말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상인에게 가서 무엇인가 사기를 원한다면, 그 상인은 돈을 요구하거나 보증서를 요구할 것이다. 또한 왕이 신하들의 충성을 원하다면, 무엇인가 그들에게 보상할 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겠는가? 우리의 가난과 눈물, 비참함과 무가치함을 고백한다면, 그분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우리가 비극적인 일을 당해서 흘리는 눈물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꿰뚫는 화살과도 같아서, 그분은 우리가 곤란한 환경에 처한 것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실 것이다. 걸인들은 신체적으로 연약하고 다친 부분을 노출하여 사람들에게서 동정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의 비극적인 상황을 주께 알리자. 그리하면 우리의 상처를 보시고, 자비를 베풀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이다. -아치볼드 심슨.
2절. "나를 고치소서."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온 것은 그의 병이 깊고, 그가 당한 사고가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깊은 병에 걸리고 큰 사고를 당했기에 "나의 뼈가 떨리오니······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두번째 간구를 드린다:"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존 던.
2절. "나의 뼈가 떨리오니."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우리의 신체에서 가장 강하고 둔감한 부분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게 하실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의 뼈가 떨렸다. -데이비드 딕슨.
2절. "나의 뼈가 떨리오니." "뼈"는 시편에서 자주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조사해 보면, 세 가지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1) "뼈"는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육체를 말한다:"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시 22:16, 17). (2) 이 단어는 때로 그분의 신비스런 몸, 즉 교회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믿음 안에 굳게 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들, 핍박이나 시련이나 어떤 혹독한 압제로도 쓰러뜨릴 수 없는 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시 35:10). (3) 어떤 구절에서는 "뼈"가 성도의 영혼이나 속사람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그것은 바로 시편 6:2에서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 갖게 되는 불굴의 용기, 영혼의 힘과 강건함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어거스틴, 암브로스, 크리소스톰(Augustine, Ambrose, Chrysostom, Parochial Lectures on the Psalms<1855>에서 던웰<F. H. Dunwell>이 인용함).
3절. "나의 영혼." 죄의 친구는 고통의 친구이다. 죄인의 영혼은 죄에 대한 뜻을 품는 자요, 몸은 이를 행하는 자이다. 죄의 뜻을 품는 자와 행하는 자, 원인 제공자와 도구는 모두 심판을 받는다. -존 던.
3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기에서 세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하신 십자가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이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할 시간을 정한다거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제한하려는 생각을 품지 말고 잠잠히 십자가를 져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30년이 차기까지 애굽에서 지내야 했다. 요셉은 구원받기까지 정해진 시간, 3년 반을 감옥에서 지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을 지내야 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언제 금식하고, 언제 식사를 조절하며, 언제 휴식을 취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고난과 영광의 시간을 아시고 정해 주신다.
둘째,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조급해 한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영을 거스리며, 하나님과 변론하고 다투게 된다. 이것은 욥과 요나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다윗도 그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여호와께서 성도들을 구원하시는게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하시는 큰 이유가 있다. 우리가 죄중에 탐닉하고 있을 때, 그분은 선지자들과 종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오, 바보들아, 이 어리석은 짓을 어느 때까지 계속하겠느냐?" 그때에 우리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심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한 날이 일 년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생각될 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해도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평하게 대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분이 외치실 때 우리가 듣지 않았다면, 이제 우리가 부르짖어도 그분이 들으려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아치볼드 심슨.
3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계 6:10)라고 묻는다. 원수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신원하는 기도는 우리의 임의로 한다거나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지시적인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처럼, 신원하는 기도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도이며,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기도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다:"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분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는 그분의 뜻을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광스러운 부활을 촉진시키는 기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고치고자 하시는 것을 저항하지 말고,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분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도 바로 이것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분이 우리를 고치시는 것은 우리로 그분께 순복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분의 손 아래서 겸허하고,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하자:"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미 7:9). 이때에 그분은 만족하사 죽음의 천사에게 말했듯이 심판의 천사들에게 "이제 됐으니 그만하라"고 말씀하시고, 칼을 거두시듯이 채찍을 거두실 것이다. -존 던.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다윗은 멀리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가까이 있는 것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을 포위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는 이 시의 서두에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마실 것을 기도했다:"나를 견책하지 마소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이렇게 작은 것을 부탁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한 가지 간구를 드리며, 하나님을 움직여 마침내 하나님을 이겼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응답을 받자, 이제는 더 가까이 나아가 신원하는 기도에서 요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마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무엇인가 행해 주실 것을 간구한다. 하나님은 선례를 따라 행하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비밀을 알았다. 하나님은 자신보다 먼저 계셨던 선임자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임자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신의 선례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선례를 따라 행하신다. 예전에 행하신 것처럼 지금도 행하시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무엇인가 받았던 자에게는 더 주신다. 그분은 자신의 것을 달라는 자를 기뻐하시고, 하나님 자신과 겨루는 자에게 지기를 기뻐하신다. 그분은 이전에 행했던 대로 행하시며, 자신의 본을 따라 그대로 행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날마다 이전보다 더 좋은 것을 주기를 기뻐하신다. 이후의 자비는 이전의 자비보다 더 크다. 그래서 다윗은 후에 드리는 요청하는 기도에서 전에 드렸던 신원하는 기도보다 더 큰 것을 간구한다:"여호와여, 돌아오소서. 내 영혼을 건지소서. 나를 구원하소서." -존 던.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나와 화목하소서. 내가 여호와와 화목하기 전, 내가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에 주께서 내 생명을 취하신다면, 당신에게 이것이 무슨 영광이 되겠나이까? 주께서 나를 살리시고, 내가 진실된 마음으로 회개하여 주님의 은총을 얻는 것이 당신께 무한히 더 영광스럽지 않겠나이까? 그렇게 해 주시면, 내가 살아서 당신의 자비와 은혜를 찬양하고 높이리이다. 이처럼 큰 죄인을 사하시는 당신의 자비는 무한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고백하며 당신께 순종하리이다. 내게 이런 변화를 일으키신 당신의 은총을 내 삶을 통해 보이리이다. 주께서 나를 죽이시면 죄인을 보수하시는 당신의 공의로운 심판은 드러나지만, 주의 은총과 자비를 찬양하고 높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헨리 해먼드(Henry Hammond, D.D., 1659).
6절.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다윗은 담대한 사람이다. 그러한 다윗이 이처럼 낙담한 것은 정말 놀라운 변화이다. 그는 불굴의 정신과 배짱으로 골리앗을 치고, 사자와 곰을 잡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그는 흐느끼고, 탄식하며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답은 간단하다. 다윗의 대적이 사람들과 짐승일 때, 그는 정복자였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이 되었을 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6절.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비가 이슬보다 더 낫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이슬을 내려 주시고, 참회하는 심령을 주셨다면 이것으로 족하다. 다윗처럼 눈물을 강처럼 흘려보내지 못해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눈물이 흐르는 샘이 없어도, 예레미야처럼 우리 머리를 샘으로 삼아 주야로 눈물 흘리며 울지 못해도, 베드로처럼 심하게 통곡하지 못해도, 우리가 슬퍼하지 못함을 슬퍼하며 울지 못함을 운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만일 우리가 양심의 가책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이 참회가 외식이 아니라 참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 주신다. 도마가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십자가의 못자국을 만졌을 때 그분은 도마를 환영하셨다.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그리스도의 옷깃을 만졌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는 도마를 환영하듯 그 여인을 환영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회개의 양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의 회개가 참된 것인가를 보신다.
6절. "내 침상." 그가 죄를 범했던 장소가 바로 그가 회개하는 장소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죄를 범했던 장소를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찔림을 받고, 거기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게 된다. 아담은 동산에서 죄를 범했고, 그리스도는 동산에서 피눈물을 흘리셨다. "침상에서 너 자신을 돌아보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네가 침상에 누워 악을 꾀했다면, 그곳에서 회개하고 침상을 하나님의 전으로 만들라. 죄로 더럽힌 장소마다 네 눈물로 성결케 하라. 아가서의 여인이 신랑을 찾았듯이 우리의 침상에서 그리스도를 구하자:"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아 3:1). -아치볼드 심슨.
6절. "내 요를 적시나이다." 다윗은 눈물로 침상을 씻을 뿐 아니라 가득 적셨다. 목자장의 충성스러운 양들은 씻는 장소로 가며, 모두 쌍태를 낳으며 새끼를 낳지 못하는 양은 하나도 없다(아 4:2). 야곱의 양 떼들도 물통 곁에서 새끼를 배고서 강하고 얼룩 무늬를 한 양을 출산했다. 다윗도 길 잃은 양처럼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의 침상으로 씻는 장소를 만들고 참회의 열매를 맺었다. 솔로몬의 성전에는 놋으로 만들어진 큰 솥이 있었는데, 여기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씻었다. 솔로몬의 아버지는 눈물을 모아서 물을 삼고, 그의 침상으로 솥을 만들며, 그의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삼아, 그 자신의 육체를 씻어 살아 있는 제물로 드렸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다. 히브리어로는 단순히 적시는 것이 아니라 수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거룩한 의식을 행하고 봉사한 다음에는 그의 몸을 깨끗게 하기 위해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이처럼, 다윗은 그의 침상에서 씻고 수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참회와 슬픔의 바다에서 눈물로 침상을 띄웠던 것이다. -토머스 플레이피어(Thomas Playfere, 1604).
6절.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우리의 침상을 밤마다 눈물로 적시자. 가끔 한번씩 바람을 통하게 하여 요를 깨끗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 이렇게 하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죄란 이제 금방 꺼진 냄새나는 촛불과 같다. 그것은 곧 다시 불이 붙을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면 상처가 되겠지만, 개가 그 상처를 핥고 온전해지듯이 곧 회복되고 말 것이다. 죄란 조금만 용납해도 금방 그 수가 늘어나는 히드라뱀의 머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룻동안 무슨 죄를 지었든지, 밤에 흘리는 눈물로 이것을 다 씻어 버리자. -토머스 애덤즈.
6, 7절. 영혼의 문제는 일반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러 모로 상처를 받고 낙담하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 그의 육체가 성하지 못하다고 했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욥 6:4). 마음의 슬픔은 사람을 나약하게 하고, 그 행하는 것을 느리고 약하게 한다. 그리고 상처받은 몸은 일반적으로 쇠퇴하고 약해진다. 그러므로 헤만은 이렇게 말했다:"내 영이 심히 곤고하니, 내가 무덤으로 가는도다." 사람의 내적 고민과 고통은 불 앞의 양초가 녹아 내리듯, 육체의 힘을 소진시킨다. 슬픔은 영혼을 어둡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아름다웠던 모든 추억을 잊어버리게 하고, 마음에 검은 구름을 드리워서 촛불을 약하게 만든다. 이처럼 곤고한 처지가 되면 사람은 그 안색이 창백해지고, 마치 강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처럼 파랗게 질리며 의기소침해진다. 그가 하는 행동은 느릿느릿하고, 기운찬 것도 명랑한 것도 없어지고 만다. 기쁜 마음은 양약처럼 좋으나, 상한 심령은 뼈를 마르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런 고백이 나온다:"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몸에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욥 16:16; 30:17, 19). 육체의 약함이 영혼의 고통을 낳기도 한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아무런 치료책도 없을 때에 우리 영혼도 생기를 잃어 가는 것이다. 다윗은 종종 병상에 누웠고, 분노하는 원수들을 대하기도 했다. 시편에서 다윗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외적인 고통이 그로 하여금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시 6:1, 2, 5, 6).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가 되었다는 엄청난 생각에 그는 슬퍼한다. 작은 시냇물도 큰 강과 합류하게 되면 그 이름과 특성이 바뀐다. 이처럼 고통을 처음 당할 때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 길어지고 심해지며 피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회의를 품게 된다. 오랫동안 육체가 약해져 있으면 영혼이 고통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고 불안정하게 된다. -토머스 로저스(Thomas Rogers, Trouble of Mind).
7절.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두 개의 눈을 주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눈에 불을 켜고 지옥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들의 마음이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어두워진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보응하셨다. 하나님은 질병을 보내셔서 마귀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던 두 눈을 어둡게 하시고, 그들의 정욕으로 육체의 필요한 것을 채우게 하셨다.
7절.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해적들은 빈 배를 보면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배가 귀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들은 필히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공격할 가치를 느끼지 않고 지나쳐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그를 경외함, 그리고 이와 같은 영적인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존 트랩.
8절. "다 나를 떠나라." 이제 네 갈 길을 가도 좋다. 너는 내가 사망하는 것을 보고자 하지만, 이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시고, 내가 눈물로 기도하던 그것을 은혜스럽게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토머스 윌콕스.
8절.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성도들이 악한 자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은 책망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성도들이 친구들을 조심스럽지 않게 선택하는 것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다. 공중의 새도, 들의 짐승들도 이질적인 무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새나 짐승들도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세상의 자연인과 중생한 사람, 죄와 은혜,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루이스 스터클리(Lewis Stuckley, Gospel Glass, 1667).
8절. "내 곡성." 흐느껴 울면 소리가 난다. 물결 위에서는 음악이 더 멀리, 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퍼져 나가듯이, 눈물과 함께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귀에 더 크게 울리고, 눈물이 없을 때보다 더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린다. 안티파트로스(Antipater)가 알렉산더에게 알렉산더의 어머니가 잘못한 것을 탄핵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자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 한 방울이 어머니의 모든 결점을 씻어 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참회하는 눈물은 물리칠 수 없는 대사이며, 은혜의 보좌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법이 없다. -스펜서, Things Old and New.
8절. "행악하는 너희." 악인들은 이렇게 불리운다. 그들은 자유롭게 죄를 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악을 행하고자 하는 심령을 가진 자들이며, 악을 행할 때는 철저하게 행한다. 그들은 미끼를 조금씩 먹는 것이 아니라(선한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한다), 이것을 탐욕스럽게 삼켜 버린다. 그들은 온전히 죄악 가운데서 지내면서 죄를 온전히 범한다. 그들은 일을 삼고 죄를 범하기에 "행악자"라고 불린다. -조셉 캐릴.
8절.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천성이 울 줄 모르는 사람이야. 내 눈에서 눈물을 흘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바위에 가서 물을 짜 내는 것이 더 쉬울 거야"라고 한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울 줄 모른다면, 마음속으로는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는가? 지성이 있는 울음이 가장 좋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진실된 마음으로 슬퍼할 수도 있다. 밖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마음 가득히 눈물이 고일 수 있다. 하나님은 겉으로 흐느껴 우는 것보다는 참회하는 마음을 더 좋아하신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있다면, 난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다:"내가······네 눈물을 보았노라"(사 38:5). 다윗의 눈물은 하나님의 귀에 음악처럼 들렸다:"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참회하는 자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진주와 같아서 천사들도 보기를 즐겨 한다. -토머스 왓슨.
8절.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말로 하는 소리보다도 우리의 태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눈물에서 나오는 소리를 더 잘 들으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탄식과 눈물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이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 구절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말로 하지 못하고 흘리는 단순한 눈물이 하나님의 귀에는 더 크게 들린다고 했다. 지하에 있는 수맥의 물이 지표로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물을 보시듯이, 사람의 눈물이 얼굴 밖으로 나오기 전에 하나님은 마음속에 있는 눈물을 보신다. 사람이 슬퍼하나 눈물을 흘리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슬퍼하는 영혼 속에 흐르는 눈물의 소리를 들으신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에 있는 슬픔을 쏟아 내면 이는 하나님을 향해 창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열린 창을 통해서 마른 눈동자 저편에 젖어 있는 마음을 보신다. 잘못을 뉘우치는 자녀가 잘못을 깨달으면 말로 잘못한 것을 분명히 표현하기 전에 이미 부모가 기뻐한다. 참회하는 죄인이 처음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후에 이 죄인이 분명한 언어로 참회하고 기도를 드리게 된다. 다윗은 그가 잘못한 것을 분명히 말로 표현했으며,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을 안 다윗은 이처럼 확신 가운데 감사했다:"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절). -존 던.
8절. "다 나를 떠나라." 이 구절에서 갑자가 어조가 바뀐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기도는 영혼의 거머리와도 같아서 영혼의 독을 빨아 낸다." 또 다른 사람은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죄와 비극을 몰아낸다"고 했다. 베르나르(Bernard)는 이렇게 말했다:"기도는 절망 가운데 있는 나를 찾아와 내가 승리하고 죄 사함을 확신한 것을 보고서 떠나간다." 다윗은 이들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다윗에게 모욕을 주었던 원수들에게 이 얼마나 통쾌한 말인가! 물러가라! 이리 나와라! 사라져라! 이러한 말들은 마귀나 개들에게나 하는 말이며, 도엑이나 시므이에게 적합한 말이다. 또한 다윗의 자손이 심판하러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원수들에게 하실 말씀이다. -존 트랩.
9절.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시편 기자는 세 번이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받으셨다는 확신을 표현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했던 것처럼(고후 12:8)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많이 기도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셨다(마 26:39, 42, 44).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강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혹은 그로 인해 넘치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존 길(John Gill, D.D., 1697-1771).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이 구절이 원수들에 대한 저주와 악담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원수들을 치료하고 불쌍히 여기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게 어떤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언적 열정으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셨으며 앞으로도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들에게 무거운 심판이 정녕 임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 징계를 받을 것이나 그 결과는 분명치 않다. 그분의 징계를 받고서 원수들이 마음을 부드럽게 할 것인지, 아니면 더욱 완고하게 할 것인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이어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 대해 "심히 떪이여"라고 했다. 그는 원수들도 자신이 당했던 것을 당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나의 뼈가 떨리오니"라고 했으며, 그의 영혼에 대해서도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라고 했다. 다윗이 이처럼 '떨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원수에게 같은 것을 경험하라고 하는 것은 악의에 찬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폭풍이 분 뒤에 풍랑이 남아 있는 바다와도 같다. 큰 위험은 지나갔으나, 파도는 아직도 거칠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서도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마음을 완악하게 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폭풍 중에서나 평안한 가운데에서도 위험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고 괴로움을 당하며 거룩한 마음으로 떤다면, 폭풍은 지나가고 하나님의 진노는 끝난 것이다. 거룩한 마음으로 떨었던 영혼은 양심의 안식을 누리고, 그 영혼이 평온함을 누리게 된다. -존 던.
10절.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시편 기자의 탄식이 나타나는 시는 이렇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성도들로 앞을 바라보고, 그의 전쟁이 끝나는 그날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도록 교훈한다. 그날이 되면 죄와 슬픔은 사라질 것이며, 의인을 대적하던 원수들에게 영원한 혼란이 갑자기 덮칠 것이다. 그날이 되면 참회하는 성도들의 베옷은 영광스러운 의복으로 바뀌고, 그가 흘리던 눈물은 방울방울 그의 관에 빛나는 보석이 될 것이다. 그날이 되면 한숨과 탄식에 이어 하늘의 노래가 천사들의 하프와 함께 울릴 것이며, 믿음의 눈은 전능하신 그분을 뵈올 것이다. -조지 혼.
[설교힌트]
1절. 고난받는 영혼을 위한 설교. (1) 하나님의 두 가지 손길-① 설교.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심판, 자신이 겪는 가벼운 시련, 성령께서 우리 양심에 엄중히 경고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는 견책. ② 징계. 이것은 먼저 임하는 견책으로도 성도들이 고쳐지지 않으면 두번째로 임하는 것이다. 고통, 재산의 손실, 가족의 죽음, 또는 다른 시련들이 여기에 속한다. (2)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를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는 방법은 겸손, 고백, 회심, 여호와에 대한 믿음 등등.
1절. 성도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분노이다. 이것은 마음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왜 그런가?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무엇인가?
2절 상반절. 하나님의 치료. (1) 이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뼈가 떨리오니.” (2)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 (3) 여기에 따르는 것은 무엇인가?
3절. 다음의 질문을 통해 풍부한 주제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이 어느 때까지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가?
4절.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이 기도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임박한 위험을 당해서, 응답하신다는 보증을 가지고서, 모든 자비를 구하며 드리는 기도이다.
4절. 징계받는 성도의 기도. (1) 그의 상태-그의 영혼은 자유롭지 못하고 위험에 처해 있음이 분명하다. (2) 그의 소망-여호와께서 돌아오시는 것에 소망이 달려 있다. (3) 그의 간구-오직 자비만 구할 뿐이다.
5절.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주를 섬기는 일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5절. 우리가 생존하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의무.
6절. 성도의 눈물-질, 양, 영향력, 완화시키는 것, 마지막 결과.
7절. 흐느끼는 소리. 이것은 무엇인가?
8절. 사함받은 죄인은 나쁜 친구들을 멀리한다.
9절. 과거의 응답은 현재의 믿음에 대한 기초가 된다. 그분은 이전에 행하셨던 일을 이후에 다시 행하실 것이다.
10절. 악인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시편 7편
[개 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여호와께 한 노래”이다. 성경에서 이 시편을 제하고는 유일하게 식가욘이란 구절이 붙은 하박국 3장과 비교해 보고, 또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참조하면 “식가욘”이란 말은 ‘가변곡’을 말하는 듯하며, 이 노래에는 위로와 기쁨이 포함되어 있다. 인생을 노래하는 시편에는 가변적인 구절들로 점철되어 있다. 한 연이 승리의 찬가를 부른다면, 또 다른 연은 고통 중에 탄식을 노래한다. 여기에는 낮게 깔리는 베이스 음이 들어 있다. 우리들의 인생 여정은 영국의 날씨만큼이나 가변적이다.
이 시의 머리말에서 이 노래를 지은 상황을 알 수 있다. 베냐민 사람 구시는 사울에게 다윗이 왕위를 도전하며 반역을 꾀한다고 모함을 했을 것이다. 사울 왕은 이 모함을 사실로 인정했을 것이다. 사울 왕은 다윗에 대해 질투를 느끼고 있었으며, 또한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인 사울 왕과 베냐민 사람 구시(혹은 기스) 사이에는 어떤 인척 관계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보다는 왕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왕의 신하에게 큰 해를 끼칠 수 있는 법이다.
이 시는 “모함받은 성도의 노래”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억울하고 불행한 상황이 시편이 나오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인생의 쓰라린 비극을 노래의 주제로 삼아 원수들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다윗은 시를 지었다. 우리도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우리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고, 마귀를 대적하자.” 우리는 루터의 말에서 교훈을 얻어야겠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2절위험한 상황에 대한 묘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3-5절시편 기자가 자신의 무죄를 맹세함.
6-7절여호와께서 심판하실 것을 간구함.
8-9절보좌에 앉으신 여호와께서 모함을 받은 자의 간구를 들으심.
10-13절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보호하시고, 악인들을 위협하심.
14-16절다윗을 무고한 자가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저주를 부름.
17절다윗이 그의 의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련에서 벗어남.
이 시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너를 치려는 어떤 무기도 성공할 수 없으며, 너를 치러 일어나는 사람들을 네가 심판하리라.”
[강 해]
1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2건져 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1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반역을 꾀한다고 자신을 모함하는 자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을 탄원한다.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으로 이 시는 시작된다. 우리가 어떠한 급박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예수의 피로 맺어졌으며, 이 언약으로 내가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 다윗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도 나는 "주께," 그리고 "주께만" 피해야 한다. 나는 흔들리지만, 내게 피난처가 되신 그분, 반석이신 그분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며, 그분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느 때든지 결코 헛되지 않다.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이제 다윗은 언약을 맺은 그분께서 힘을 주실 것을 믿고서 간절히 소망하는 바를 여호와께 아뢴다. 그를 추적하는 자들은 너무 많으며, 누구든지 잔혹한 마음으로 그를 삼키고자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모든" 사람에게서 구원해 주실 것을 부르짖는다. 우리의 "모든" 죄와 원수들로부터 보호해 주실 것을 간구하기 전에는 우리의 기도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를 구하소서"라는 기도는 그들의 덫에서 구출하고, 그들의 모함을 막고, 나를 해하는 시련에서 진실되고 공의롭게 구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이다. 다윗은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고 분명히 말했다. 우리도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에 무엇을 간구해야 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나아가자. 기도하기 전에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하여, 어리석은 자의 제물을 드리지 않도록 하자.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확실히 파악하여 더욱 열심히, 그리고 분명하게 기도로 우리의 필요를 알려 드리자.
2절. "건져 낼 자 없으면." 다윗을 위협하는 사자는 맹렬하고 잔혹하다. 다윗을 건져 낼 자가 없으면 이 원수는 다윗을 찢고 뜯을 것이다. 이 모습은 목동 생활을 했던 다윗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맹렬한 사자가 무방비 상태의 양을 덮쳐 잡게 되면, 사자는 양을 갈기갈기 찢고 모든 뼈를 부수어 먹어 치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목자가 거기 없어서 맹수로부터 양을 보호하거나 구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양의 모습은 사탄에게 던져진 사람의 모습과도 같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가 이런 위험에 처했을 때 잠잠히 있을 수가 없다. 그분은 결코 사랑하는 자녀가 사자의 이빨에 찢기는 것을 볼 수 없다. 급히 일어나 사자의 입에서 자녀를 구출하실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이처럼 파멸을 당하지 않도록 구원해 내실 것이다.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원수들에 대한 두려움이 혼합되어 있다. 다윗의 원수 중에는 다른 원수들보다 강한 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위엄과 힘이 있고, 맹수처럼 맹렬하여 "사자" 같은 존재이다. 다윗은 이 원수에게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긴박하게 간구한다. 어쩌면 바울은 사울 왕을 지칭하여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우는 사자처럼 우리 주위를 돌아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원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그를 모함하는 자들에게서 이런 위험을 당했다. 다윗은 그가 당한 시련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칼로 생긴 상처는 쉽게 치료된다. 그러나 혀로 인해서 생긴 상처는 육체에 생긴 상처보다 더 깊게 파헤치고 들어가서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모함은 그것이 거짓으로 판명되어도 치욕이 남는다. 터무니없이 거짓 된 명성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믿는다. 사람들이 나쁜 말을 퍼뜨리면, 그것을 다시 없애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노송이 잘리우면 다시는 잎을 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명예가 한번 손상되면 다시 회복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의 푸르름과 신선함은 쉽게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선한 사람의 명성에 칼질을 하는 것은 얼마나 혐오스럽고 치사한 일인가! 그러나 악마와 같은 증오심으로 싸우는 곳에는 어떤 체면도 염치도 없는 법이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에덴의 정원에서 하나님이 모함을 받았다면, 이 죄인들의 땅에서도 우리를 욕하는 자들이 분명히 생길 것이다. 부활의 자녀들이여, 허리띠를 조이라. 이 불 같은 시험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3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5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3, 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이 시의 둘째 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무죄함을 강변한다. 사람들이 모함하는 죄를 정말 지었거든, 심판을 내려도 좋다고 했다. 그가 결코 반역할 의도를 가졌던 것도 아니다. 또한 그와 화목한 친구에게 복수를 하지도 않았다.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한글 개역 성경과 RSV 역본은 이렇게 번역했으나, KJV에는 "그러나 까닭없이 내 대적이 되었던 자를 내가 구하였도다"라고 번역하여 괄호 안에 넣었다-역자 주.)* 다윗은 원수를 꼼짝없이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저 살려 보냈던 것이다. 그는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려 주었다. 한 번은 아둘람의 굴에서 살려 주었고, 또 한 번은 사울이 잠들고 그를 지키는 병사들도 모두 잠들어 있을 때에 사울의 진에서 죽일 수도 있었으나 살려 주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며 맹세할 수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의 저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저주하며 맹세한다는 것은 정말 삼가야 할 일이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맹세를 삼가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고 하셨다. 우리가 하는 말을 신뢰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하는 맹세도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된 성도들은 단순한 말도 다른 사람들의 맹세처럼 신실해야 한다.
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은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데비지스에 있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오! 그녀는 동업자와 함께 구매하기로 한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면 죽어도 좋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빠져 죽었는데, 그녀는 지불해야 할 돈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5절. "셀라." 다윗은 "셀라"라고 말하며 시의 진행을 잠시 정지한다. 하나님의 법정에 항고한다는 것은 엄숙한 일이다. 다윗은 이렇게 잠시 정지하면서 엄숙한 마음을 증가시킨다.
이 구절들을 보면서 중상과 비방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죄한 사람도 악한 자들의 중상과 비방에서 보호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사울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며, 그에게 반역한다는 모함을 받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조심해도 거짓말하는 자들이 그를 모함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따르듯이, 선한 것에는 질투가 따르게 마련이다. 사람이 돌팔매질을 해 대는 것도 열매가 많이 열린 나무 아래서 하는 법이다. 우리가 모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려면 천국에 이르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은혜로운 사람을 괴롭히는 유언비어를 믿지 않도록 주의하자. 거짓말을 믿는 사람이 없다면 거짓의 시장은 한산할 것이고, 훌륭한 사람들은 안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죄인들은 성도들을 향해 악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도들을 향해 좋게 말할 것을 기대하지 말라.
6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7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이제 다윗의 맹세에 근거해서 새로운 기도가 시작된다.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지만, 그렇게 늘 기도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마음이 진실되다면, 실이 바늘을 따라가듯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6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다윗은 슬픔 가운데 재판관 되신 여호와께서 심판의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것을 보았다. 오직 믿음만이 여호와를 움직이고, 성도들을 위해 원수들에게 심판을 내리게 할 것이다.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다윗은 여호와께서 권세를 행하시고 심판주의 자리에 앉으실 것을 안절부절하며 간절히 바란다. 오,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그들보다 높은 곳으로 임하사 당신의 공의가 악한 자들 위에 임하게 하소서.
"나를 위하여 깨소서." 다윗은 담대하게 이렇게 외쳤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활동을 아니하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무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할 때는 지극히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그분은 결코 주무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악인이 성행하고, 성도들이 땅의 티끌처럼 압박을 받을 때는 그분께서 종종 주무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침묵은 오래 참으시는 인내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기 어려울 때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죄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즐겁게 인내해야 한다.
7절.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여호와여! 당신의 성도들은 그들의 불평을 쏟거나 당신을 크게 환영하며 당신의 재판대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KJV에는 "그들을 위하여 높은 자리에 오소서"라고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알레하"<hyl[>는 '그 위'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그를 위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는 집합적으로 "민족들의 집회"를 말한다-역자 주.) 재판관이 순회 재판을 돌 때면,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사건을 들고서 재판정으로 몰려들어 사건을 처리해 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의로운 자들이 여호와께로 몰려올 것이다. 다윗은 만일 여호와께서 심판의 보좌에 오르시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도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며 간구하는 것이다. 주여, 내가 못나서 주께서 나를 기억하실 수 없다면 "그들을 위하여,"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을 향한 사랑을 인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소서. 당신이 은밀히 거하시는 곳에서 나오사 성문에 앉으시고 당신의 백성 가운데 공의를 실현하소서. 내가 간구하는 것이 의로운 사람들이 모두 소망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속히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택한 자를 신원하여 주시지 않겠는가?"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이제 다윗은 그의 마음의 눈으로 여호와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신 것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는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새롭게 소송을 올린다. 6, 7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일어나실 것을 간구했다. 이제 여호와께서 일어나셨다. 다윗은 주를 둘러싼 "민족들의 집회"와 함께 여호와께 나아갈 준비를 한다.
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의 재판이 이제 개시되었다는 소식을 엄숙하게 알린다. 다윗은 즉시 일어나서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외친다:"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그는 정직한 가슴에 손을 얹고 의로운 재판관을 향해 외친다. 왕의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보고서, 다윗은 여호와를 둘러싼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외쳤다:"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이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나 이 소돔 사람들의 더럽고 추잡한 대화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메섹의 더러움과 게달의 검은 장막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9절.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KJV에는 "심장"을 "심장과 신장"으로 번역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신장이 번역되지 않았으나 히브리어로 "켈라오트"<twylk>라는 단어가 나타나며, 이는 사람의 장기로서 신장을 뜻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신장이 감정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했다-역자 주.) 이것은 진정 엄숙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깊은 곳을 다 아신다! 그분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정확하시고, 깊이 숨겨진 것까지도 감찰하신다. 그분은 "심장"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숨겨진 비밀한 생각을 아시고, 또한 "신장"을 감찰하시고 내면에 있는 애정도 다 아신다.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10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10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재판관은 박해받던 고소인의 말을 다 듣고서 죄 없는 자를 죄 없다고 선고하시고, 그를 무고히 모함하던 박해자를 큰 소리로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 판단하시는 재판정에 가까이 나아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자. 억울하게 무고를 당하던 자는 수금을 손에 들고서 공의의 여호와께 찬송을 돌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을 큰 소리로 노래하며 기뻐한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아! 진실되고 정직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마음이 구부러진 죄인들, 그들이 아무리 계교를 부려도 마음이 정직한 자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입은 흰 옷에 묻어 있는 더러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로 이것을 씻어 버리시기 때문이다. 경건한 자에게 더러운 오물을 던졌던 자들은 이것을 보고서 뼈가 떨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원을 들어 주시는 날, 그날은 우리에게 해가 뜨는 날이고, 죄인들에게는 영원히 해가 지는 날이다. 진실은 기름과 같아서 항상 물 위에 뜨는 법이다. 우리의 원수들이 모든 힘을 다한다 해도 그것을 물 속에 빠뜨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팔 소리에 죽은 자들이 깨어나는 날, 우리는 그들의 모함을 이겨 낼 것이다. 그날이 되면 거짓말을 일삼던 입술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우리는 영광 가운데 빛날 것이다. 오, 성도들이여! 원수들이 네게 행하는 그 모든 행위와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무는 어떤 바람도 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그분은 원수들의 입술로 당신이 저주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이 생명책에서 당신의 이름을 지울 수도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에 그들에게 보수하실 것이다.
11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분은 죄를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죄에 탐닉하는 자에게 분노하신다. 우리 하나님은 감정이 없고 무감각한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너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참회하지 않는 죄인들아!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매일 매일 너희들을 향해 분노하신다. 죄인에게는 가장 좋은 날이라 해도,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는 날이다. 죄인들에게 축제의 날이 계속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안전한 날은 하루도 없다. 태초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뜨겁게 달구어지지 않은 때는 한 시간도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은 악한 자를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악인이 불살라지는 날에 그들은 그루터기만 남게 될 것이다.
12, 13절.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하나님의 길고 높이 들린 손으로 후려치는 심판을 견딜 자 누가 있겠는가! 우리가 매일 행하는 악은 악의 숫돌을 돌리고, 하나님은 그 위에 칼을 갈고 계신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칼은 우리를 속히 조각 조각 자를 것이다. 죄인은 회개하느냐, 아니면 불에 타느냐, 두 가지 중 선택해야 한다. 다른 선택은 없다.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지금도 그 화살은 목말라 한다. 그래서 박해자의 피로 목을 적시고자 한다. 활은 당기어졌다. 목표물은 정해졌다. 오, 죄인들아! 이제라도 화살이 활을 떠나 네게 날아온다면! 하나님의 화살은 결코 목표물을 비켜 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 화살은 "죽이는 기계"라는 것도 기억하라. 심판이 더딘 것 같으나, 결코 지체하지 않는다. 헬라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하나님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 그러나 그 맷돌은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14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15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이 세 절의 묘사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모함하는 자들의 역사를 볼 수 있다.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인이 첫번째 비유에 나타난다. 악인의 배는 죄악으로 가득 찼다. 이제 죄악을 더 이상 배에 담고 다닐 수가 없어서 그것을 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는 해산의 고통을 겪다가 마침내 악한 의도를 행한다.
"잔해를 잉태하여." 이것은 그가 맨 처음 했던 추한 행동이다. 그는 마귀와 교제했고, 악의 세균에 감염되었다. 이처럼 불경건한 수태로 생긴 자손을 보라. 자식은 아비를 닮았다. 그 아비의 이름이 "거짓의 아비"였더니, 그 자식은 과연 아비를 존중했다. 악인이 낳은 자식은 '거짓'이었던 것이다:"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첫번째 비유는 이렇게 결론이 났다.
15절.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그는 교활하게 계획을 세우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서 땅을 파는 더럽고 힘든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에 흙이 묻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빠지기만 한다면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악한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기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 마치 맹수나 되는 것처럼 사냥을 나섰다. 아니, 이것도 아니다. 그들은 토끼나 여우를 사냥할 때 쫓아다니는 것처럼, 경건한 자들을 쫓아다니지 않았다. 이런 방법으로는 경건한 자를 따라 잡는다거나 화살을 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몰래 덫을 놓고서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우리 원수들은 우리를 대면하여 보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를 멸시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 장면을 보자.
15, 16절.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아! 이것이 그의 마지막 운명인 것을! 그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우리는 이것을 보고서 웃지 않을 수 없다. 보라! 바로 그 자신이 야수와도 같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사냥한 것이다. 그가 무엇인가 쫓아 다니더니, 정말 합당한 것을 희생 제물로 삼았다. 하 하 하!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모두 이곳에 와서 덫에 걸린 사냥꾼을 보라. 즐겁지 않은가. 다른 사람을 물어뜯으려 하더니 자기 자신을 물어뜯었구나. 그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이런 자비는 쓸데없는 낭비다. 자신을 제물로 삼아 값을 치렀으니, 이것은 공의롭고 당연한 일이다. 그의 입으로 악을 내뱉더니, 그 자신의 가슴에 떨어졌구나. 이웃집에 불을 놓으려고 횃불을 들고 다니더니, 자기 집을 불태웠구나. 불길한 새를 내보냈더니, 자기 집으로 돌아왔구나. 그가 높이 들었던 매로 자신의 등을 후려쳤구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더니, "자기 머리로 돌아왔구나." 돌멩이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내던졌더니, 그것이 "자기 정수리에 내렸구나." 저주는 병아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 병아리들은 결국 집에 돌아와 알을 낳는다. 재는 그것을 뿌리는 사람의 얼굴로 돌아오는 법이다.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시 109:17). 고대의 역사나, 현대사에 이런 일들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던가! 이웃에게 누명을 씌우려던 자들은 결국 자기 손에 불을 질러 대는 것이다. 이런 일이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결국에는 일어나고 말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나봇의 포도원에 개를 보내셔서 아합의 피를 마시게 하지 않으셨던가. 조만간에 박해자들의 악한 행위는 결국 그들의 품으로 뛰어들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은 마지막 날에도 일어날 것이다. 사탄이 쏘았던 그 모든 불화살들은 사탄의 심장을 꿰뚫을 것이고,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들이 뿌렸던 씨앗을 추수하게 될 것이다.
17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7절. 우리는 이 시편의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에는 이 시의 서두와는 대조적으로 즐거움이 나타난다. 모든 시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시편은 의인이 복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악인의 비극과 대조되어 더욱 빛이 난다. 빛나는 보석은 검은 박편을 배경으로 반사될 때에 더욱 반짝이는 것이다.
찬양은 경건한 자가 하는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영원히 행할 일이며, 현재 누리는 기쁨이다. 찬양에는 노래가 따른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모함을 받던 자가 이제는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되었다. 그는 잠시 동안 수금을 현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아름다운 곡조로 노래하며, 삼층천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보내는 것이다.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식가욘." "식가욘"은 이 시가 나타내고 있는 세상의 도덕적인 측면을 말하는 단어라고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시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 단어는 문체의 불규칙함과 다른 시편에 나타나 있는 평온이 없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에발트는 이 시를 "혼란스러운 서정시"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불규칙한 문체, 그리고 의미가 무질서하게 전개되는 것이 하박국 3장과 비슷하다. 이 시와 하박국 3:1에만 "식가욘"이란 단어가 나타난다. -앤드류 보나.
시 7편 전체. 이 시의 직접적인 기록 배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시의 진정한 주제는 메시아가 그를 무고히 모함하는 자를 심판하실 것을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과, 모든 인류의 최종적인 회심, 미래에 있을 심판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명백하다. -사무엘 호슬리(Samuel Horsley, LL.D., 1733-1806).
1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시편에서 다윗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호와"와 "내 하나님"을 합하여 함께 부르는 첫번째 예이다.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린다면, 서두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다. 하나님의 이런 이름들은 다윗의 신뢰와 믿음의 기초가 된다. "이 이름들은 최상의 경외심과 가장 소중한 믿음을 나타내 준다. 또한 하나님께서 흠이 없이 온전하시고, 그분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은혜로운 관계를 맺으셨음을 뜻한다." -윌리엄 플러머.
2절.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호랑이들은 향기로운 음식 냄새를 맡으면 분노하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악한 사람들은 경건한 모습을 보면 분노한다. 어떤 야만적인 나라에서는 태양이 뜨겁게 내리쬘 때면 태양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글을 읽었다. 이와 같이 악한 자들도 경건한 자들의 빛과 열정을 향해 화살을 쏜다. 경건한 자와 악인 사이에는 자연스런 증오심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예레미야 버로즈(Jeremiah Burroughs, 1660).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고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의 욕을 많이 받았다. 터툴리안은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을 빗대어 욕을 하는 기발한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 예를 들면, 그들은 티에스테스에게 저녁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그는 자기 형제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했고, 이때에 자기 살로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고 했다. 그들은 또한 크리스천들이 밤에 만나서(사실 그들은 낮에 만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촛불을 끄고 함께 지내면서 지저분한 짓을 저지른다고 악담을 했다. 또한 그들은 모두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터툴리안 시대에 이방인들은 크리스천들의 하나님을 손에는 책을 들었으나 머리는 나귀의 머리를 한 괴물로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에 대해 학식이 있는 체하나 사실 배운 것이 없는 바보들이고, 촌스럽고 무식한 자들이라고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쥬얼(Jewel) 감독은 누가복음 11:5에 대해 설교할 때 터툴리안의 이 글을 인용하며 그의 시대에도 이와 같다고 했다:"오늘날에도 우리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을 대적하며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는가?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 보라:'크리스천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구두 수선장이, 양복장이, 베 짜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이라고는 문턱에도 가 보지 못한 자들이 아닌가?'" 그는 터툴리안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크리스천들을 제국의 원수로 취급한다고 주장했다. 요세푸스(Josephus)는 아볼리나리스(Apollinaris)에 대해 언급했다. 아볼리나리스는 유대인과 크리스천들에 대해 말하면서 그들은 어떤 야만인들보다도 바보라고 했다. 파울루스 파기우스(Paulus Fagius)는 애굽인들이 크리스천들을 대했던 이야기를 전했다:"그들은 가장 지저분하고 음란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악담을 했다:"그들은 병에 걸린 자들이다. 제7일이 되면 이 병 때문에 쉬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원수들의 비방을 받을 준비부터 해야 한다." 그들은 이렇게 비방했다:"네가 엘리야냐? 예레미야냐?"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를 "사타나시우스"(Sathanasius)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아리안 교도들을 대적하는 특별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키프리안(Cyprian)을 "코프리안"(Coprian)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똥을 치우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키프리안이 했던 그 모든 훌륭한 일들을 그저 똥이나 모으는 사람으로 비하했던 것이다. -예레미야 버로즈.
3절.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당신은 당신의 이름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좋은 이름은 향기로운 기름과 같다(아 1:3). 이와 마찬가지로 악한 이름은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욕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들어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하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만 깨끗하면 될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의 무죄가 당신에게 위로가 될지는 몰라도, 당신이 깨끗하다는 것을 하나님에게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아 당신의 선한 이름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모함을 하고 거짓을 말할 때에 분노를 보여서는 안 된다. -토머스 구지(Thomas Gouge, 1660).
3절. 악한 세상이 당신을 핍박한다면, 이는 당신 안에 선한 것이 있다는 증거이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무엇을 행했기에 이 악한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가?"라고 했다. 악인의 칭찬은 어떤 악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들이 비난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한 것이 있다는 증거이다. -토머스 왓슨.
3절.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다윗은 죄악이 손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사람들이 대부분 손으로 죄를 범하지만, 항상 손으로 행하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탈취해 가고, 손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 행사를 못하게 한다. 다윗도 이렇게 말했다:"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대상 12:17). 그는 아무것도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셉 캐릴.
3, 4절. 선한 양심은 확신이 흘러 넘치는 샘과도 같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선한 양심에는 든든한 확신이 따른다. 이것을 가진 자는 소동과 난리가 일어나는 와중에서도 노아처럼 신실함과 평안함, 의로움과 담대함을 갖는다. 제자가 되고자 했으나 예수께서 금하셨던 한 사람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따르오리다"라고 했던 것처럼, 선한 양심은 믿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내가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강건케 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붙들어 줄 것입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위로가 될 것이며, 당신이 죽을 때에도 친구가 될 것입니다. 모두 당신을 떠난다 해도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토머스 브룩스.
4절. "그러나 까닭없이 내 대적이 되었던 자를 내가 구하였도다."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살려 준 것을 말한다. 첫번째는 엔게디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그가 들에서 잠을 잘 때 살려 주었다. -존 길.
4절.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선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공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크리스천의 온전함이다. 이것은 은혜의 특성이기도 하다. -윌리엄 세커.
4절. "그러나 까닭없이 내 대적이 되었던 자를 내가 구하였도다." 사람이 악에게 진다는 것은 그가 약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을 이길 때는, 은혜가 승리하는 것이고, 고귀하고 용감한 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쪽에 수치와 정복을 당하게 하신다. 다윗이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을 때에도 그의 옷자락을 조금만 베었을 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사울의 마음이 녹았으며 다윗을 향해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라고 했다. 사울이 다윗을 향해 악의를 품고 그를 추적했지만, 다윗은 원수를 갚을 수 있을 때에도 원수를 갚지 않았고, 이때 사울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 -토머스 맨턴.
5절.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이 표현은 전투에서 피정복자가 말발굽에 채이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에서 따온 표현이다. 다윗이 말하는 바는 만일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의 원수들이 그를 정복하고, 그가 이 모든 수치와 조롱을 당해도 좋다는 것이다. -알버트 반스.
5절.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아킬레스가 헥토르의 몸을 땅에 끌고 트로이의 성벽을 돌 때, 그는 야만적인 시대의 관례를 따라 행한 것뿐이다. 다윗은 자신의 양심상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므로 검은 베냐민 족속의 말이 사실일진대 자기에게 이런 저주가 임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호된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도전하는 것은 그에게 강인하고 아름다운 성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C. H. S.
6절.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명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욕심내면서 간구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다윗은 올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여호와여, 나는 개인의 야망이나 어리석은 정욕이나 타락한 욕망으로 나 자신의 육체를 즐겁게 하고자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에서 나오는 분명한 인도를 따르며, 이 말씀을 굳건히 부여잡나이다." -존 칼빈.
7절. "민족들의 집회." 이 구절은 다음의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1)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많은 사람들로서, 이들은 나를 잔혹하게 압제하는 자들을 막으시고 나의 의로움을 변호하시는 여호와의 공의와 거룩함과 선하심을 목도할 자들이다. (2)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며,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를 두르게 하시고." 당신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왕으로서 나는 그들이 각자 거하는 곳에서 나와서 함께 모여 당신께 예배를 드리도록 하겠나이다. 사울의 시대에 그들은 이 일을 게을리 했고, 사울 왕도 이것을 묵인했으나 나는 당신께서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인하여, 그리고 내가 왕이 되어 통치하는 동안 백성들이 받을 그 많은 축복을 인하여 그들과 내가 함께 당신을 찬양하며 제물을 드리겠나이다.
"그들을 위하여." 백성들은 압제를 당하고, 공의롭게 판단을 받지 못하였고, 그리고 당신을 경배하는 특권도 누리지 못하고 있나이다. 그들을 위하여 구원하소서.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당신의 높은 자리, 당신의 재판석에 오사 그곳에 앉으시고 나를 위해 판단하소서. 이 구절은 사람들의 재판정을 염두에 두고서 한 표현이다. 사람들의 재판정은 일반적으로 사람들 위에 있는 높은 곳에 세워졌다(왕상 10:19). -매튜 풀(Matthew Poole, 1624-1679).
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성도들이여! 마지막 심판의 날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심판주를 가볍게 생각했던 자들, 그를 지속적으로 대적하고 그분의 거룩한 길을 멸시했던 자들이 두려워할 일이다. 그날이 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들은 즐거워하며 머리를 들라. 마지막 날은 그대들에게 최고의 날이 될 것이다. 심판주는 그대의 머리시며 남편이시고, 구속주이시며 그대를 변호하는 분이시다. 그대들은 심판대 앞으로 나아오겠지만, 심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오심은 그대들을 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무시했던 구세주는 마침내 엄한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 1676-1732).
9절.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KJV에는 "심장"이 "심장과 신장"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우리들의 공통적인 체험에 의하면 우리 마음에 있는 즐거움, 슬픔, 두려움은 신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참조. 잠 23:16; 시 73:21). 사람들은 신장이 우리 몸 깊숙이 숨겨져 있고, 기름에 싸여 있으면서 우리 영혼의 비밀스런 활동과 애정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신장을 감찰하시나이다"라는 표현은 우리의 숨겨진 비밀스런 생각이나 영혼의 소망을 시험해 보고 아신다는 말이다. -존 파크허스트(John Parkhurst, 1762).
9절.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나는 전능한 여호와라
나만이 네 마음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을
감찰할 수 있나니
뱃사람의 낚시추는 땅에 닿아도
네 마음속 깊은 곳은 알지 못한다.
-프란시스 퀄스(Francis Quarles, 1592-1644).
9절. "심장." (KJV에는 "심장과 신장"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심장은 사람의 사고력을, 그리고 신장은 애정을 상징한다. -헨리 에인즈워스.
10절. "나의 방패는······하나님께 있도다." 이 말은 "나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무기 드는 자가 곁에 있다가 전사에게 필요한 무기를 주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앤드류 보나.
11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학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논쟁을 많이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히브리어 원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하나님은 의인을 심판하시며,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읽는 것이 정말 잘 해석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남는다. 이러한 해석과 반대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또 이것을 지지하는 증거 자료도 있다. 에인즈워스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분노하시며 매일 위협하신다." 이와 비슷한 번역이 커버데일 성경(Coverdale's Bible)에 나타난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하나님은 항상 위협하신다." 1549년에 출간된 에드워드 성경(King Edward's Bible)에도 이와 같은 번역이 나타난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이와는 정반대로 해석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호슬리 감독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다. 그러나 그는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 그는 대부분의 고대 번역본을 따르는 듯하다. 불가타 역본에는 "하나님은 의롭고 강하고 인내하시는 재판장이시다. 그분께서 매일 분노하시겠느냐?"라고 번역되었다. 70인역에서는 또 이렇게 번역되었다:"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강하고, 오래 참으시는 재판관이시다. 그분은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 시리아 역본에는 "하나님은 의의 재판장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라고 번역되었다. 클라크 박사도 이에 동조하며, 본문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맨 처음 훼손되기 시작했다고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이 학자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회복하여 읽었다. 히브리어로 "엘"(lae)과 "알"(la')은 모음만 다를 뿐 자음은 같다. "엘"은 '하나님'을, 그리고 "알"은 '아니다'라는 부정의 뜻을 갖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원문에는 한 절에 하나님의 이름이 두 번 나타나지 않으며, 이것을 고려하여 이렇게 간단히 번역할 수 있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이시며, 매일 분노하지 않으신다." 이 구절은 불가타 역본이나 70인역, 다른 고대의 역본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분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죄인을 향한 분노에는 무한한 인내가 담겨 있다. 그분이 매일 진노를 보이시는 것은 아니다. -존 모리슨(An Exposition of the Book of Psalms, 1829).
11절.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원문의 표현은 지극히 강하다. 이 강조를 그대로 살린다면 분노로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맨트(Richard Mant, D.D., 1824).
11, 12절.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와 위엄에 도전하는 반역자의 무리들에 대해 자신의 기준을 세워 두셨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불과 칼로써 이 땅을 정복하신다. 죄인들에 대한 심판은 하늘로서 좇아 나며, 매일 하나님의 분노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 의로우신 발로 악한 죄인을 밟으셔서 죽음에 이르게 하신다. 죄가 들어오는 가정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의 각 기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의한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영혼과 몸의 각 부분은 혀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그러므로 심판도 철저하게 임한다. 우리는 안과 밖으로, 우리의 영혼과 몸에 심판과 저주가 빼곡이 적혀 있어서, 또 다른 심판을 추가로 기록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윌리엄 거놀.
11절-13절.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힘이 있어서 이와 같이 죄인을 심판하게 한다. 루터는 이 구절에 대해 훌륭한 글을 썼다. 시편 기자는 분노하고 복수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했는데, 이렇게 한 주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굳건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 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내적 경험을 묘사하며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시편 기자와 선지자에 대한 구분을 간과했다:"선지자는 야비한 인생들과 비교하여 교훈을 주었는데, 이는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무지하고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에게 야비한 인생들의 일로 비교하여 말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경각심을 품게 될 것이다. 이제 선지자는 칼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기에 활을 덧붙였다. 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목표물을 정하고 활을 당기고 화살을 쏠 준비가 되었음을 말한다. 불경건한 자들은 목이 곧고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여, 그들에게 어떤 위협과 경고를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심판을 받기 전에는 그 심판이 어떠할 것인가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불경건한 자들에게 임박했다는 것을 강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다른 시편에서는 죄인들에게 이와 같이 무서운 위협과 진노가 표현되지 않았다는 것도 언급해 둔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이처럼 많은 말로 그들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선지자는 죄인들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자신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인지를 말해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참소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불의하게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헹스텐버그(E. W. Hengstenberg, 1845).
12절.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악인과 다투신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지극히 적다. 우리가 믿었더라면, 무너져 내리는 집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떨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빌 2:15)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악한 자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더라면, 이처럼 우리에게 간곡히 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활을 당기셨고, 화살은 시위를 떠날 준비가 되었다. 그들을 파멸시킬 도구도 모두 준비되었다. 하나님께서 쏜 화살이 우리 귓가를 지나가는데 우리가 악인들과 함께 거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다. "떠나가라! 고라와 도단과 아비람의 장막에서 떠나라! 그들의 죄와 함께 너희가 파멸을 당할까 하노라!" 좋은 무화과가 나쁜 열매와 한 그릇에 있으면 모두 섞는 것이 아닌가! 순금이 찌꺼기와 함께 있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닌가? 롯은 소돔 사람들과 함께 거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해 내지 않으셨다면 그는 소돔 사람들과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당신은 악한 자들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기적적으로 구해 주시기를 바라는가? 하나님께서 강도들의 무리를 향해 그들의 등 뒤에서 복수의 소리를 외칠 때에 그들과 함께 길을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안전을 도모하고 싶으면 짐승들의 세상에서 교훈을 받으라. 사슴은 맹수들에게 쫓기다가 다친 사슴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무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친 사슴을 무리 중에서 밀어낸다. -루이스 스터클리.
12절.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칼을 가는 목적은 더 깊이 상처를 내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칼을 가시는 것은 잘라 내기 위한 것이다. 그분이 활을 당기시는 것은 죽이기 위한 것이다. 그 과녁이 되어 있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윌리엄 세커.
13절.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하나님은 그를 대적하는 자에게 화전을 쏘신다. 이 말에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증오가 나타나 있다. 그분은 화살을 아무 곳에나 쏘지 않으시고, 악인을 정조준하여 쏘신다. 일리리쿠스(Illiricus)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 준다. 로마 황제 찰스 5세의 장군 중에 펠릭스(Felix)가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가 죽기 전에 루터교도들의 피를 박차에 묻히며 말을 달릴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는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조준하여 화전을 쏘셨다. 바로 그날 밤,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셨다. 그는 목이 매였고, 자신의 피에 숨이 막혀서 죽었다. 그가 말을 타지 못했으나 목욕을 했고, 루터교도들의 피로 박차를 묻힌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 목까지 묻혀 죽었다. -예레미야 버로즈.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여기 나오는 단어들은 다윗을 향한 음모의 잉태와 출산과 유산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그의 원수들은 무엇을 했는가? (2)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구절에서 원수들의 의도와 우리의 의무를 살펴볼 수 있다. 원수들은 죄악을 해산하고 잔해를 잉태했다. 그들이 죄를 잉태할 때에 누구에게서 강요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이는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리처드 십스.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잉태한다는 것은 해산하는 것보다 먼저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해산이 먼저 나타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악인은 그가 의도하는 악에 사로잡혀서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행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악을 즉시 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거짓을 출산한다. 그들은 스스로 성공을 약속했으나 악한 결과가 나타나 스스로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인들은 의인을 대적하려 하나,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이 계획했던 것들은 모두 유산되고 만 것이다. -존 메이어(John Mayer).
14절. "궤휼을 낳았도다." 모든 죄는 거짓이다. -어거스틴.
14절.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세상 사람들의 환대는 야엘의 환대와 같도다
왼손에는 우유가, 그러나 오른손에는 말뚝이 들렸네.
-토머스 풀러.
14, 15절.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그들이 만든 함정은 지옥처럼 깊고 낮다. 그러나 그들은 제가 만든 함정에 빠진다.
함정을 파 만드는 자가 그 함정에 빠지는 것보다
더 공정한 법은 세상에는 없다네.
악인들은 죄의 홍수 가운데서 살았지만, 이제 그들이 갈 구덩이는 물이 없는 곳이다. 그토록 많은 술을 소모했던 다이비즈(Dives)가 이제는 물도 구할 수 없다(누가복음 16:19-31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이름을 다이비즈로 불렀다-역자 주). 한 주전자의 물도, 한 방울의 물로도 그의 혀를 시원케 할 수 없었다. 이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그는 나사로에게 빵 한 조각도 주지 않더니, 이제 한 방울의 물도 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극히 적은 한 조각을 아끼더니, 이제 한 방울의 물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살아 있던 나사로에게 어떤 적선도 하지 않더니, 이제 나사로는 그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죄에 탐닉하는 자는 죄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토머스 애덤즈.
15절.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웅덩이를 만드는 것은 고대에 맹수를 잡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 적군을 잡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 구절은 어떤 사람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빠지게 하려고 구덩이를 만들고, 위험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위장을 했으나, 마침내 부주의하여 자신이 함정에 빠지고 자신이 쳤던 덫에 걸리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Pictorial Bible.
16절.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주석을 재미있게 잘 쓰는 트랩 선생은 이 구절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것은 스토리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영국의 감옥을 탈출하여 안트워프로 도망갔다. 이제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그는 알바 공작의 명을 받아 그곳으로 오는 모든 배에서 영국 서적을 색출해 내는 일을 했다. 한 영국 상인이 안트워프로 무역을 하러 왔다가 이 나쁜 새를 잡기 위해 덫을 놓았다. 그는 자신의 배에 이단 서적과 또 다른 책들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스토리 박사에게 비밀리에 들어가게 했다. 스토리 박사는 이 모든 소문이 사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서 그 배로 쫓아갔다. 그는 배를 샅샅이 조사했다. 배의 한 쪽에서 무엇인가 수상한 것을 발견하고서 밑으로 내려가 조사하기 위해 뚜껑을 열게 했다. 선원들은 주저하는 표정으로 마지못해 뚜껑을 열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나타났다. 스토리 박사는 이것을 보고서 그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다시 나올 수가 없었다. 뚜껑이 닫히고, 배의 돛이 올려지고, 영국을 향한 바람을 맞으며 즐거운 항해가 시작되었다. 머지않아 배는 영국에 도착했고, 그는 붙잡혀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마침내 사형을 당했다. 그에게 마땅히 임한 심판이었다."
16절. 팔라리스(Phalaris)는 다른 사람을 고문하기 위해 황소를 사용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이 고안한 것으로 고문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이방 세계에서도 유명하다······대주교였던 크랜머(Cranmer)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손을 불에 넣고서 태웠다. 그는 교황에게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면서 "아! 내 오른팔은 쓸모가 없어!"라고 탄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이 일이 일어나게 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Divine Judgments by Way of Retaliation, 1697).
17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는 더욱 많은 자비를 받는다. 불행한 일을 당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는 불행을 면하게 된다. 좋은 일로 감사하면, 이 좋은 일은 더욱 오래 간다. 어려움을 당해서 잠잠히 인내하면, 이 어려움은 즉시 사라진다. -윌리엄 다이어.
[설교힌트]
1절.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 여호와께 신뢰함이 없이 드리는 기도가 무용하다는 것을 보여주라.
1, 2절. 모든 원수, 특히 사자와 같은 사탄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기도함.
3절. 사람 앞에서 행하는 자기 변호. 자기 변호를 할 때에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설명하라.
4절. “최선의 복수.”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과 같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며,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자들이 하는 일이다.
6절.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가 의인의 소망이 될 수 있는가? 불로 불을 진화하며, 하나님의 진노로 사람의 분을 다스린다.
7절. “민족들의 집회.” (1) 그들은 누구인가? (2) 그들은 왜 함께 모이는가? (3) 그들은 어디서 모이는가? (4) 그들이 둘러싸는 자는 누구이며, 왜 그를 중심으로 모이는가?
7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도들의 모임.
7절 하반절. 성도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오심.
8절. 우리가 그 앞에 서야 할 심판주의 성품.
9절 상반절. 이러한 기도를 언제, 왜 드려야 하며, 이것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이라. (1)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 (2) 그들의 의지를 제어함으로. (3) 그들의 능력을 빼앗음으로. (4) 그들을 제거함으로.
9절.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위대한 기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여호와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는 증거가 들어 있다.
9절. 죄인은 일시적이고, 의인은 영원하다.
9절. “의인을 세우소서.” 의인은 어떻게 서며, 의인이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삶을 말하는가? 참되게 세워진 교회.
9절 하반절. 사람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
10절. “마음이 정직한 자.” 그 성품을 설명하라.
10절. 성도들이 하나님을 신뢰함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심. 믿음의 행위가 하나님의 보호를 얻어 내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셔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하신다.
11절. 심판주, 그리고 심판을 받는 두 사람.
11절 하반절. 하나님은 악인을 향해 오늘도, 매일, 지속적으로, 극한 분노를 보이신다.
12절. “Spurgeon’s Sermons,” No. 106., “Turn or Burn.”
14, 15, 16절. 악인이 쓰는 도구와 그 결과를 세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라.
17절. 찬양은 우리의 지고한 의무이다.
17절. 이 구절을 시편의 주제와 관련하여 살펴보라.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심판은 우리가 부를 노래의 주제임을 보이라.
시편 8편
[개 요]
주제-이 시의 머리말은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이다. “깃딧”이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갓 족속을 지칭하며, 그들이 불렀던 곡조나 고안해 낸 악기를 말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궤가 머물렀던 깃 족속 오벳에돔의 노래라고 하는 자들도 있으며, 갓 족속 골리앗의 죽음에 대한 노래를 지칭한다고 하는 자들도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단어의 히브리 어원을 추적하면서, 포도를 밟고 포도주틀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한 즐거운 노래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깃딧”이란 제목이 붙은 시편은 이 시 외에도 두 편이 더 있다(81, 84편). 이 두 편의 시가 모두 즐거운 시라는 점에서 이 머리말이 붙은 시는 모두 기쁨의 시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를 “천문학자의 노래”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다. 황혼이 지고 저녁이 되었을 때 밖에 나가서 별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서 이 노래를 불러보자.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인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이런 시상이 떠올랐을 것이다. 찰머스(Chalmers)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밤하늘을 바라보노라면 우리의 영혼은 경건한 묵상에 잠기게 된다. 저기 있는 달, 그리고 여기 저기 수없이 많은 별들은 다 무엇일까? 그것들은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우리로 높은 곳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인간의 욕정과 염려를 떨쳐 버리고 저 높은 곳을 향해 날아가는 듯하다. 우리 마음은 환상에 젖어 들며, 저 멀고 아직 탐험해 보지 않은 세상을 찾아가게 된다. 이 시는 자연을 단순하게 바라보며,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은 지혜와 위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노래한다.”
구성-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 9절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높이는 감미로운 찬양의 노래이다.
2-8절창조에 나타난 여호와의 위대하심과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가오심에 놀라는 내용들이 나온다.
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 시가 일반적인 모든 사람에 대한 노래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영광을 주신 것을 노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직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노래인지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니며,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목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창조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에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시고, 이 시에 나타난 바처럼 영광과 통치를 넓혀 나가셨다. 이것은 그분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시의 가장 중요한 중심 주제가 된다. 우리 주님도(마 21:16),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도(고전 15:27; 히 2:6, 7) 이 시를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했다.
[강 해]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하나님의 영광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시편 기자는 탄성을 올린다. 오, 여호와 우리 주여!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절반도 측량할 수 없고, 어떤 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주의 이름이 온 땅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는 그분의 영광이 가득 차 있고, 그분의 놀라운 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분의 선하심과 지혜는 어느 곳에나 나타나 있다. 하늘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천 수만의 별들, 위로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는 땅에 기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유지하시는 것들이다. 이 광활한 우주도 그분의 영원하신 팔을 의지하고 있다.
그분은 우주 어느 곳에나 계시고, 그분의 이름은 어느 곳에나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일하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미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우리는 도처에서 그분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기적들을 맛볼 수 있다. 깊은 계곡, 양 옆으로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는 곳, 저 머리 위로는 푸른 하늘이 작은 손바닥처럼 보이는 곳, 그 깊은 계곡을 지나 보라. 당신이 이 깊은 계곡을 지나는 첫번째 인물일 수도 있다. 새들은 깜짝 놀라서 푸드득거리며 날아가고, 사람의 발자국 아래서 이끼는 몸을 떨며 사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 계셔서 수천 가지 경이로운 일을 일으키신다. 그분은 깎아지른 듯한 바위도 붙드시고, 꽃들에게는 향긋한 향기를 담아 주시며, 외로이 서 있는 소나무는 그분의 입김으로 생기를 얻는다.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 보라. 거기에는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태고적 고요가 있다. 밑바닥에는 모래밭이 적막 가운데 펼쳐져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거기에도 있어서 조용한 바다 궁전 속에서도 여호와의 아름다운 이름을 선포하고 있다.
아침 햇살의 날개를 잡아 타고 바다 저편 끝까지 가 보라. 하나님은 거기도 계신다.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라. 하나님께 드리는 영원한 찬양을 듣게 될 것이다. 지옥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보라. 거기서는 하나님께서 무섭게 보복하시는 것을 볼 것이다. 어느 곳에나 하나님은 계시고 역사하신다.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여호와는 땅에서만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땅 위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빛을 발하신다. 그분의 영광은 별이 빛나는 하늘의 영광보다 더하다. 수천 수만의 별들을 지나서 하늘 저편에 그분은 영원한 보좌를 세우셨고, 거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란한 빛 가운데 거하신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욥 9:8, 9). 이런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자. 느헤미야는 이런 하나님께 적합한 찬양을 돌린다:"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시 본문을 살펴보자. 이 시는 하나님께 바쳐진 시이다. 여호와 그분만이 자신의 영광을 온전히 아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만드신 것을 보고 황홀감에 젖어든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아신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우리" 주여라고 부른다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일인지! 그분을 "우리 주"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분의 이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떤 말로도 그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탄성을 토할 뿐이다. 여호와의 이름은 아름답다. 그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하늘도 그분의 영광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나 위대하여 피조물이 그 영광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알프스 산을 오르내리면서 우리는 이 장엄한 피조물보다도 이것들을 지으신 여호와가 무한히 크고 위대하심을 느꼈다. 그 감동을 받아 몇 줄 적어 보았다.
이 모든 장관이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분과 비교할 수는 없네
그분을 보기에는 창이 너무 어둡고
우리의 눈이 너무 침침한 까닭이라네.
구름 위로 머리를 드러내고
수많은 별들과 대화를 나누는 알프스도
그분의 무한한 신성과 비교하면
한줌 먼지에 불과한 것이라네.
눈으로 왕관을 쓴 정상도
영원하신 그분을 드러내지 못하네
그분의 이름만이
고귀하고 높은 것이라네.
측량할 수 없는 깊음도
여호와의 지혜와 지식을 드러내지 못하네
피조물의 모습으로는
영원하신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네.
여호와는 그분의 이름을 세상에 새기시고
그분의 도장을 피조물의 이마에 찍으셨다네
그러나 토기장이는 그가 만든 그릇보다 아름답다네
여호와, 그분도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보다
더욱 아름다우신 분이라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여호와를 담지 못한다네
영원하신 분이 쉬기에는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라네
눈사태나 천둥 소리도
그분을 온전히 찬양하기에는 소리가 부족하다네.
그러할진대 내 어찌 그분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으리요
내 어찌 그분의 이름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요
조용히 그분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겸손히 그분을 경배할 뿐이라네.
2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만 여호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있는 땅도 그분의 위엄을 선포한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장엄하게 자기 궤도를 달리며 여호와의 능력을 증언한다. 그러나 땅에서는 그분의 능력이 작은 것들에 나타나 있다.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를 들어 보라. 여호와의 능력을 증언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린아이를 보면서 우리가 잊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알게 되지 않는가! 세상에서 학식 있는 바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그들보다 더 큰 소리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언하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혀를 붙들어 매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 않지만, 젖먹이는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지 않는가!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증언한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이 침묵하고 주 예수를 경멸할 때에 어린이들은 성전에서 "호산나!"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때에 우리의 구세주께서도 바로 시편의 이 구절을 인용하며 어린아이들의 외침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던가?
교회사를 돌이켜 보라. 어느 세대에나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놀라운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사에 나타난 사건을 말하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이다.
폭스(Foxe)는 순교자들의 책(Book of Martyrs)에서 로렌스(Law- rence)가 콜체스터에서 화형을 당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불 가까이 나아갔다. 교황 체제를 신봉하는 자들이 그를 고문하여 그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몇몇 어린아이들이 불 가까이 와서 외쳤다:"여호와여, 당신의 종을 강건케 하시고, 당신의 약속을 지키소서."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로렌스는 어떤 사람보다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며 평안하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천주교 사제는 스코틀랜드의 순교자인 위샤트(Wishart)에게 마귀가 그의 안에 있다고 했다. 이때에 어린아이가 곁에 서 있다가 외쳤다: "마귀는 저 분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말은 하지 못해요."
더 최근에 있었던 일을 한 가지 말하겠다. 휘트필드(Whitfield)는 무어필드에서 그의 첫번째 설교를 할 때 겪었던 박해를 편지로 자세히 전하면서, 후기에 이렇게 기록했다:"내가 설교를 하는 동안 내가 서 있던 강대상 주위에 몇몇 어린아이들이 둘러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계란이나 다른 오물들을 내게 던졌는데, 그들이 맞곤 했지요. 하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던진 것에 내가 맞을 때면, 그들은 울면서 눈을 들고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그들이 내 대신 맞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살피시고, 당신을 위해 살아 있는 위대한 순교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온전한 찬양을 받으신 것이지요!"
천사들의 노래를 좋아하시는 그분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받기를 기뻐하신다. 하늘의 영광과 어린이와 젖먹이의 입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그러나 이들 모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더욱 아름답게 된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 딕(Dick) 박사가 저술한 태양계의 구조(The Solar System) 말미에서 본문의 의미를 파헤치는 아름다운 글을 발견할 수 있다:"태양계의 구조를 조감하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는 경향이 있다. 교만이란 하잘것 없는 사람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교만은 이 세상의 모든 다툼과 전쟁과 노예 제도와 이 세상을 황폐하게 하는 야심찬 사업의 원인이 되었다. 사람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특성은 없다.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을 고려할진대, 우주의 어떤 지적 존재보다도 사람은 교만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이란 여러 가지 위험과 재난에 노출되어 있다. 태풍과 폭풍, 지진과 화산의 황폐함, 맹렬한 회오리 바람, 바다에서 이는 노도와 같은 파도, 전쟁, 기근, 질병에 사람들은 노출되어 있고, 마침내는 무덤에 묻히고 그의 몸은 구더기의 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 아무리 고상하고 위엄이 있는 자들이라도 가장 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고 부패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땅의 티끌이나 보잘것없는 벌레와도 같은 인간, 지식이 제한되어 있고 잘못한 것이 그렇게 많은 인간은, 교만하게 걷고 그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
어떤 말을 해도 사람의 교만한 마음을 꺾어 겸손하게 할 수 없을 때는 천문학과 관련된 자료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 천문학을 연구해 보면 사람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무한한 피조물 가운데서 사람은 마치 보잘것없는 원자와도 같이 작은 존재처럼 보인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시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무한한 피조물의 세계에 견주어 볼 때에 인간이란 지구 전체에 비해서 한줌 모래와도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자체도 지구의 만 배보다 더 큰 질량을 가진 태양계에 견주어 볼 때에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체 망원경을 통해 발견한 수억 개의 태양과 또 다른 세상들에 비교해 볼 때, 이 지구는 얼마나 작은 세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한 나라, 한 지방, 또는 한 마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이런 작은 영역을 다스린다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나 되는 양 교만할 수 있겠는가? 이것들을 하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늘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눈에 띄지도 않는 한 점 지구를 내려다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세네카와 함께 이렇게 외쳐야 할 것이다:"인간의 위대한 계획과 그 큰 소망이 오직 이 작은 점과 같은 곳에 국한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을 위해서 나라들이 그처럼 소란과 전쟁을 일으키며 사람을 대량으로 학살한다는 말인가? 아! 속임을 당한 자의 어리석음이여! 한 점, 원자와도 같은 곳에서 위대한 왕국을 꿈꾸고, 칼과 군대를 일으켜 땅을 차지하려 하다니!" 찰머스 박사는 천문학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이렇게 진실되게 말했다:"광활하게 펼쳐진 울창한 숲에서 나뭇잎이 하나 떨어진다 해도, 숲의 영광에는 어떤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소멸된다 해도 이 광활한 우주의 영광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5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이 구절들은 타락하기 전의 사람의 모습에 대한 기록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 의미를 찾았으며,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존귀와 위엄의 순으로 따지자면,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은 존재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이루어졌다. 그분은 죽음의 고난을 당할 때에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던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었다. 피조물들은 모두 그 앞에 나와서 이름을 받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리는 사람에게 순복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영광 중의 예수는 이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가 되신다.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 그분을 제외하고, 예수께서는 만물의 주가 되신다. 그분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첫 아담보다 더 넓은 영역을 다스리도록 높임을 받을 것이며, 이것은 그분이 다시 오시는 때에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늘의 달과 별들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사람만을 높이신 것에 놀라움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천사는 죽음을 당하는 존재가 아니기에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 그러나 천사보다 못한 기간은 잠시 동안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육체로 존재하는 기간은 짧기 때문이다. 이 기간이 끝나면, 성도들은 더 이상 천사들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다.
5-8절.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은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이다. 다스린다는 것은 존귀한 일이며, 가장 높은 자리에서 다스리는 자가 관을 쓴다. 다스림을 받는 피조물의 명단이 모두 나타나 있다. 사람이 죄로 잃어버린 다스리는 권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된다. 우리는 이 땅의 피조물이 우리의 덫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들을 다스릴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것들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자. 우리는 이 세상을 우리 발 아래 두어야 한다. 세상의 염려와 쾌락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게 해서는 안 된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9절. 시편 기자는 마치 탁월한 작곡가처럼 그가 처음에 놀라며 경배를 드렸던 곡조로 다시 돌아온다. 그가 서두에서 소개한 명제를, 이제 증명이 끝난 결론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아! 그 아름다운 이름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주해와 설명들]
머리말. "깃딧." 이것은 포도 수확을 마치고 즐거워하며 축제를 벌일 때에 사용했던 악기 이름일 것이다. 포도 수확이 마치면 유대인의 일 년이 끝난다. 이 시는 주께서 모든 원수를 정복하고 이 땅의 왕이 되시는 마지막 날의 영광을 보여준다. 포도 수확은 하나님의 원수를 모두 멸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사 63:1-6; 계 14:18-20). 고대의 유대 해석가들은 이 시를 이렇게 이해했고, 메시아께서 원수를 정복하는 신비로운 포도 수확에 적용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흥미로운 시를 "오는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세워질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예언적 기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참조. 히 2:5).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그분의 발 아래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결국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그래서 모든 원수들, 사탄, 죽음도 모두 정복되고 멸망을 당하며,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게 될 것이다(롬 8:17-23). 이 시에서 우리는 그 승리를 바라보며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힘에 힘을 더 얻고, 마침내 우리의 영광스러운 머리가 되시는 그분과 함께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된다. -윌슨(W. Wilson, D.D.).
시 8편 전체. 이 시가 누구에 대한 시인지 알아보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시를 인용하며 오는 세상을 증명했다(히 2장). 이 시를 읽는 자들은 시편 기자가 에덴 동산에 있는 옛 아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을 받은 자-천사들은 단순히 영인데 반해서 우리의 영은 혈과 육으로 싸여 있다는 점에서-에 대해 글을 썼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이 시가 주로 옛 아담에 대한 시이며,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저 암시만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편지를 읽는 자들에게 이 시는 그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시라고 말한다.
이제 이 시가 누구에 대한 시인지 분명해졌다. 로마서 5:14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다. 시 8편에는 아담의 세상, 즉 오는 세상의 모형이 나타난다. 첫째 아담에게도 그의 세상이 있었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도 그에게 속한 세상이 있다. 그의 세상에는 소와 양, 그리고 공중의 새도 있다. 또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듯,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한다.
이 시에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라는 구절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22에서 인용했다. 바울은 죄를 범하기 전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했다. 그러므로 이 시에 나타난 세상은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메시아를 위한 세상을 말한다.
첫째, 이 시에 나오는 사람은 타락 이전의 아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2절에서 시편 기자는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라고 했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어린이도 젖먹이도 없었다. 또한 그는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덧붙였다. 마귀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원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 그를 다스리겠다고 하셨다. 아!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마귀는 아담을 이기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대로 원수와 보수자를 잠잠케 할 사람은 아담이 될 수 없다.
또한 그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했다. 아담은 동산을 가졌을 뿐,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전파하지는 않았다. 그는 동산에 있은 지 오래지 않아 타락했고 아들을 낳았다. 또한 그가 하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또한 4절에서는 "사람이 무엇이관대······인자가 무엇이관대"라고 했다. 아담은 사람이었지만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논리를 펼쳤는가? 이 시에 나오는 사람은 만물을 그 발 아래 둔 자를 말한다(엡 1:21, 22). 그는 하나님 외에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모든 정사와 권세를 다스리는 분이시니, 천사들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 사람은 아담이 될 수 없다. 아담은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지 않았다. 아담이 이 모든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 천사들과 이 모든 것들이 순종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것들은 모두 그분의 발 아래 있고, 그분은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시다.
둘째, 이 사람은 타락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시 8편에 나오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말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한 인간은 시 8편에서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한다. 왜 그런가? 모든 만물이 타락한 인간에게 복종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을 정복한 사람이나 인류는 없었다. 때로는 피조물이 사람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라고 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의 특성을 말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군왕들을 보라. 그들은 온 세상을 정복한 것이 아니었다. 죄인 중에서 어떤 사람도 만물을 정복한 자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와 다르다. 히브리서 기자는 죄인들과 그리스도를 강하게 대조하며 말한다:"오직 우리가······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히 2:9).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 8편에서 나오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도 시 8편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해석하셨다. 어린아이들이 그리스도를 보고서 "호산나," 즉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을 때에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심을 외친 것이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분노했지만, 우리의 구세주는 바로 이 시를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을 물리치셨던 것이다:"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16). 그러므로 이 시가 그리스도에 대한 시라는 것을 그리스도 자신과 사도가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시 8편을 인용하셨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도 어쩌면 여기에서 힌트를 얻고서 같은 논리를 펼쳐 나갔고, 이런 논리로 유대인들을 수긍시켰다. -토머스 굿윈.
1절.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분의 성육신, 출생, 겸손한 삶, 가르침, 기적,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을 전 세계가 기념하고 축하한다. 그분의 종교, 성령의 은사와 은혜, 그분의 백성인 크리스천들, 그분의 복음, 이것들을 세상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어떤 이름도 이처럼 널리 퍼진 이름이 없고, 어떤 사람의 권력이나 영향력도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분을 따르지 못한다. 아멘. -아담 클라크.
1절.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하늘에 두신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 두셨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위대하고, 하늘보다 위에 있다.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모두 그분에게 복종한다. 바울은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엡 4:10)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있고, 그분은 성령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땅에 선포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주셨으니"(엡 4:10, 11)라고 덧붙였다. 이 시에서도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했다. -아이작 윌리엄스(Isaac Williams).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무한한 자비를 어린이들이 수백 년 후에 찬양할 것에 대해 예언한 것이다.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을 때 예수께서는 이 시를 인용하시며 그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셨다(마 21:15, 16). 바실(Basil)과 또 다른 고대와 현대의 해석가들도 이와 같이 해석했다. 그러나 칼빈은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젖먹이들을 놀랍게 공급하시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피를 우유로 변화시키시고, 젖먹이들에게는 이것을 빨아들이는 기관을 주셔서 그들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자들에게 그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속수무책인 존재를 놀라운 섭리 중에 보호하신다는 것을 수긍시키기에 충분하다. -존 메이어(1653).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 누가 어린아이와 젖먹이인가? (1) 일반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린이와 젖먹이로서 약한 존재로 시작하지만, 마침내 자라서는 힘을 얻고 원수와 보수자와 견주고 그들을 이기게 된다. (2) 다윗을 말한다. 그는 혈색이 좋은 소년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골리앗을 이기도록 하셨다. (3)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죄가 없으시나 모든 연약한 것을 받아들이시고, 어린아이의 연약한 시절도 지내시고, 죽으신 후에는 하늘에서 다스리기 위해 이전의 존재로 회복되시고, 마침내 모든 원수를 그분의 발 아래 두셨다(시 110: 1; 고전 15:27). 하나님의 아들께서 여인의 몸을 통해 나셨을 때, 우리 사람들은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도 높임을 받은 것이다. (4) 사도들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위대한 자들과 비교해 볼 때, 외양으로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처럼 보잘것이 없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멸시를 받았으나,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된 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주시는 것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처럼 그들은 미천한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또한 제자들에게 악한 영을 이길 권능을 주시고 밖으로 내보낼 때에도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눅 10:21). 그분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것으로 이해하셨다. (5) 그리스도를 향해 "호산나"를 외쳤던 어린아이들도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시를 인용하시며 그들을 변호하셨기 때문이다······(6)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연합하여 싸우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첫째, 하나님은 연약하고 멸시받는 그들을 도구로 삼아 이 세상의 나라를 정복하기를 기뻐하셨다. 둘째, 그들은 가장 겸손한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마 18:3)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너희들은 내 나라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위대한 자가 되고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구나. 그러나 내 나라는 젖먹이들의 나라이며, 겸손한 자, 자신들이 보기에도 작은 자, 다른 사람들이 멸시해도 작은 그대로 만족해 하는 자, 세상에서 위대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 자들의 나라이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들어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며, 그들이 기대하는 세상 나라에 대한 소망을 끊어 버리고자 하셨다. -토머스 맨턴(1620-1677).
2절.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타락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사탄에 대한 심판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했던 첫번째 약속과 복음은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불쌍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토머스 굿윈.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사랑으로 행하는 일은 어려움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것은 돌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마른 땅에 노출되어 있는 큰 돌을 생각해 보라. 그것을 움직이려 힘을 다 쏟아도 그 돌은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들판을 덮고, 큰 돌이 물 속에 잠겼다고 하자. 이때에 돌을 움직이려고 힘을 써 보라. 아! 이때는 돌이 움직이고, 박혀 있던 땅에서 굴러 나오며, 팔로 들어올릴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의 은혜가 사랑의 홍수처럼 내려 우리의 의무와 어려움을 덮어 버린다면, 어린아이들도 성인이 하는 일을 해 내고, 어른들은 거인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에 사랑을 품을 때,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권능을 세우신다. -토머스 거스리(Thomas Guthrie, D.D.).
2절.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순교자 앨리스 드라이버(Alice Driver)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주교의 감독을 침묵하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자가 이 미약한 여인을 꺾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래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당신이 벌레처럼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일하시고, 당신 안에 있는 욕정을 없애 주시며, 당신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다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당신이 그분을 의지하기만 하면, 여호와께서는 당신을 위해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독수리의 날개에 태우고 날아가게 하실 것이며, 그분을 위해 고난도 감수할 수 있게 하실 것이고, 믿음으로 살며 기쁨으로 당신의 달려갈 길을 마치게 하실 것이다. 아! 그분은 당신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실 것이고, 이 겸손은 당신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개미를 만드신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 사람들은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놀라지 않는가? 그처럼 많은 부분들이 함께 모여 이처럼 작은 몸을 이루다니! 이처럼 작은 피조물이 겨울에 먹을 양식을 여름에 저장하다니! 벌을 보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보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커다란 몸을 가진 동물의 엄청난 힘을 보고서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을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입히신 것을 보았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당신에게 연약한 점이 있다면, 이것도 받아들이라.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을 배척했으나 당신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당신에게 앞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당신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받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면, 우리 주님께서도 칭찬하시리라. 너희 마음이 가난한 자들아,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 세상에서 교만한 자들, 너희를 멸시하던 자들로 너희 발 아래 꿇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많은 것을 행하셨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너희의 분깃을 주시리라. -다니엘 로저스(Daniel Rogers, 1642).
3절. "내가 보오니." 묵상하는 자는 겸손하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 그 영광과 조화, 별들의 움직임과 그 영향에 대해 묵상했을 때, 그의 교만한 마음은 떨어지고 자신을 겸비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토머스 왓슨.
3절. "주의 하늘과······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다윗은 하늘을 쳐다보고서 이렇게 외쳤다:"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왜 달과 별은 언급하면서 해는 빠뜨렸을까? 이것들은 해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해가 지고 밤이 되어 더 작은 빛들이 하늘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지은 시이기 때문이다. 낮이 되면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듯이, 또한 밤이 되면 여러 가지 다양한 별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밤은 사람들이 쉴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시편 기자와 함께 좋은 생각을 하며 지내야 하지 않겠는가? 밤을 아편을 복용하는 시간이나 더러운 생각을 하는 시간으로 삼지 말고 이것들을 지워 버리는 시간으로 삼으라. 그렇지 아니하면 이것들이 내 영혼을 사로잡게 될 것이다. -토머스 풀러(1608-1661).
3절. "주의 하늘." 육적인 마음은 어떤 것에서도, 심지어 영적인 것, 그분의 말씀과 율례에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은 어떤 것에서도, 심지어 자연적인 것에서도,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서도 하나님을 본다. 하늘과 땅과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솜씨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분의 피조물을 혹 잘못 남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분께서 베푸신 호의로 그분께 욕을 돌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경외심으로 주 앞에 선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또한 주의 것이오니 내가 주야로 당신을 잊지 않겠나이다." -로버트 레이턴.
3절. "별들." 별들의 수가 무수히 많고, 무한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마음에 혼란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이것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별들이 저 멀리 천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 속한 것들은 지극히 미미하고 사소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저 넓은 우주 공간에 깔려 있는 별들과 비교해 보면,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지극히 미미하게 느껴지고, 사람의 운명이나 그가 즐기는 것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모든 것들을 사소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하늘의 모든 별자리들은 사람들의 경주를 살펴보았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마지막 시간까지 인류의 모든 역사를 지켜보았으며 또 지켜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 나는 조용한 환희에 젖어든다. 만물이 잠든 듯한 조용한 밤, 깨끗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별들, 이것들이 마치 우주의 합창대처럼 제 궤도를 도는 동안 이 땅의 존재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땅에 속한 것으로서 밤의 적막 가운데서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것들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별들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 그 영광과 위엄을 묵상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묵상한다면, 별이 빛나는 하늘은 우리에게 도덕적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850).
3절.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우리가 달 저편으로 여행하고, 우리 머리 위에 빛나는 별 중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로운 별들과 새로운 태양들과 더 장엄하게 치장된 새 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른다 해도 우리의 위대하신 조물주의 영역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 중에서 일부에 속한, 지극히 작은 것을 보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놀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부분을 보고서도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알고 경탄하게 된다.
이처럼 무(無)에서 무한한 별들을 만드신 분, 별들의 행로를 지정하고, 능한 손으로 이 모든 별들을 붙드시는 그분은 얼마나 위대한 분일까? 이 지구에는 장관들이 펼쳐지지만,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우주와 비교해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흙덩이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광대한 우주에서 이 지구가 없어진다 해도, 해변에서 한줌 모래가 없어진 것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일부에 불과한 나라들과 지역들은 어떻겠는가? 이것들은 공중에서 춤추는 원자에 불과하고, 태양빛에 반사되는 먼지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은 무한히 많은데, 여기서 나 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 나는 정말 지극히 무가치한 존재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보좌를 두신 곳, 별이 빛나는 하늘은 진정 아름답다! 그 별들은 얼마나 경탄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 현란함에 어지럽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고 귀하게 치장되었어도, 이 하늘은 지성이 없는 존재이다. 하늘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난 비록 진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진 바 되었고, 지성과 감성을 부여받았다. 나는 이 빛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묵상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도 이 모든 것을 지으신 존귀하신 분과 어느 선까지는 교제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믿음으로 창조주의 영광을 조금은 바라보고 있다. 아! 그분이 하신 일을 날마다 더 알아 갈 수 있다면! 마침내 내가 영광스럽게 변화를 받아 별이 빛나는 저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까지,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날마다 배워 갈 수만 있다면! -크리스토퍼 크리스천 스텀(Christopher Christian Sturm, Reflections, 1750-1786).
3절.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이것은 가장 정교하고 정확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수를 놓는 모습에서 가져온 비유이다. -존 트랩.
3절.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자연을 바라보며 경외심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자연에는 이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권위가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도 이것을 강조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그분은 한 가지 꽃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면서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갖도록 논리를 전개하셨다. 그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건을 결합하셨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감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교훈을 찾도록 하셨다. 시편 기자는 이 지구를 뛰어넘어서 지구 위에서, 그리고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며 상상의 날개를 편다. 그는 상상의 날개를 타고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서 거기서 묵상한다. 그는 우주 공간에서 어둡고 적막한 고독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광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모든 것들이 무한한 것임을 알게 되고, 이 세상은 지극히 작은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이처럼 장엄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무관심하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게 되었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자연을 지으신 분의 아름다움에 눈을 돌리며 이렇게 외쳤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방문하시나이까" 시편 기자가 영감을 받아 현대의 천문학에서 밝혀진 그 경이로운 모습을 이해했는지는 우리의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발달된 과학 문명에 대해 문외한에게도 하늘은 장엄한 모습을 연출해 낸다. 둥근 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천장과 같은 하늘, 공중에 매달려 엄숙하게 운행하는 수많은 별들. 시편 기자는 밤에 이것들을 바라보면서 묵상에 잠겼다. 해가 힘있게 솟아 찬란한 빛을 발하고, 그리고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달과 별들이 나타나고 더 작은 별들이 빛을 발할 때, 시편 기자는 이 모든 모습을 보고서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토머스 찰머스(1817).
3절. "주의 하늘."
이 장엄한 모습, 이것은 진정 무엇일까?
이것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
밤이면,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하나님의 손으로 쓰여진 참된 성경!
사람의 손으로 오염되지 않은 것.
-에드워드 영(Edward Young).
3절. "별들." 내가 별들을 바라보노라면, 별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별들은 그 고요한 곳에서 나를 불쌍히 바라보고 있다. 그것들은 작은 사람들의 불쌍한 운명을 슬퍼하는 듯, 하늘의 눈물을 반짝이는 눈과도 같다.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3, 4절.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자연을 보면서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거기서 영적 교훈을 배우라.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고서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자연 세계에서 당신을 위해 영적 교훈을 추수하고, 당신이 보는 모든 것에서 당신을 지으신 조물주를 찬양하라. 이것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하던 일이었으니 이 일을 하는 동안, 타락 이전의 모습을 향해 회복되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보고서 당신의 지적 호기심만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이 당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영적 성장을 도모하라. 어떤 피조물에서도 조물주의 능력과 지혜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 외에도 우리가 생각할 만한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양에게서는 인내의 교훈을, 그리고 비둘기에게서는 순결을 배울 수 있고, 개미와 벌은 우리의 게으름을 책망하고, 바보 같은 소와 둔한 당나귀는 우리의 무지를 책망한다. -스티븐 차녹.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권고하시나이까." (히브리어로 "파카드"<dqp>는 '시중을 들다', '권고하다',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역본 중에서 KJV에는 '방문하다'로, RSV에는 '권고하다'로 번역되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권고하다'로 번역되었다-역자 주.) 독자들은 시편 기자가 시를 어떻게 구성했는가를 주의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지극히 선하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을 만드신 조물주, 그분의 영광은 위대하여 우리로 경탄하며 경배하게 한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려오셔서 사람을 돌보시는 것은 그분이 은혜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은 그가 사람을 말하면서 "에노쉬"(vwna)라는 단어를 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힘이 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깨어지기 쉽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대부분의 해석가들은 4절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파카드"(dqp)라는 단어를 '권고하다'라는 뜻 대신에 '방문하다'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과 잘 어울리며, 나도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가끔 '기억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시편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단어로 반복하여 표현하는 기법이 자주 쓰이므로 이 단어를 '기억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도 적합하다. 다윗은 이렇게 말한 듯하다:"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시고, 또 계속해서 기억하신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존 칼빈(1509-1564).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오 하나님! 어찌하여 보잘것없는 사람을 이처럼 광활한 세상을 다스리는 주로 삼으셨나이까? 사람은 이 세상의 작은 모래처럼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늘과 태양과 달과 별들, 이것들과 견주어 보아도 사람이 도대체 무슨 존재란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들을 오직 사람을 위해, 피조물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사람을 위해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당신이 만든 피조물 중에서도 오직 사람만이 당신이 하신 것을 볼 수 있으며, 오직 사람만이 그가 보는 것으로 인해 당신을 경배할 수 있나이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 바로 당신을 경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가치는 양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이아몬드 하나는 채석장의 수많은 돌들보다 귀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을 모두 합해도 한 사람 안에 있는 경이로움을 따르지 못합니다. 당신은 다른 피조물을 그저 단순히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드실 때는 회의를 거쳐서 만드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단번에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형체를 먼저 만드시고, 이어서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드시되, 다른 어떤 것도 닮지 않고 그들 자체의 모양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바로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나이다. 다른 피조물들은 노동과 봉사에 적합하도록 만드셨으나, 사람은 다스리도록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이름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들은 사람에게서 이름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다른 피조물보다도 사람을 얻기 위해 더 많은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께 바쳐진 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셉 홀(Joseph Hall, D.D., 1574-1656).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KJV에는 "권고하시나이까"가 "방문하시나이까"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욥은 이렇게 말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욥 7:17, 18). 마음에 교만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돌보신다는 위대한 진리를 보지 못하나, 마음이 겸손한 사람은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겸손한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오! 여호와께서 버러지 같은 나를 돌보시겠는가? 여호와께서 나처럼 추악한 죄인과도 가까이하실까? 여호와께서 내게 팔을 벌리시고, 그분의 마음을 내게 주실까? 나처럼 구역질나는 피조물에게도 그분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에스겔 16:1-5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우시는 모습이 나온다. 사람은 태어난 날에 들판에 버려진 갓난 아기와 같다. 그의 몸에는 피와 더러운 것이 묻어 있었으나,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불쌍한 존재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 곁을 지나실 때에 우리가 피 가운데 더럽혀진 것을 보시고 우리에게 "너는 살라"고 말씀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두 번이나 "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꼭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랑스러운 때"(겔 16:8)가 되었다. 이것은 진정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더럽고 비참한 아기를 돌보시고, 그분의 옷깃으로 싸시고, 벌거벗은 것을 가려 주시고, 맹세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그분의 것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이 비참한 존재와 약혼하시고, 남편이 되어 주셨다. 이 사랑은 측량할 수 없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오! 하나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부요한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은 어떤 느낌을 갖게 되었는가? 이것으로 당신은 놀라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지 않는가? 당신은 밑도 끝도 없는 은혜의 바다에 빠진 느낌이 들지 않는가? 당신은 당신이 느끼는 감정으로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도 백부장의 말을 듣고서 그의 믿음을 판단하셨다:"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마 8:8-10).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친히 오셔서 도우심을 보고서도 영혼에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당신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오, 내 영혼아! 네가 무슨 병이 들었느냐? 하나님의 선하심에 아무런 감동도 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니, 네가 죽은 것이냐? 하나님의 선하심이 놀랍게도 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을 보지 못하다니, 네가 소경이 되었느냐? 보라, 영광의 왕께서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사 너를 찾아오시나니! 그분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는가? '자매여, 문을 열어다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지 않느냐. 영광의 왕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지 않겠느냐?' 보라, 내 영혼아, 네가 문을 열기를 거부하니, 그분께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아! 그분의 선하심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아, 그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도우려고 오시다니. 나를 기다리시고, 나를 만나고 싶어하시다니!" 당신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돕고자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그 은혜에 놀라라. -제임스 제인웨이(James Janeway, 1674).
4절. "사람." 히브리어로 약하고 비참한 사람을 가리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으로서의 원래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비참해지고, 그리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돌보시고, 이처럼 큰 은혜를 그에게 베푸신다.
"인자"(人子). 히브리어로 '아담의 아들'을 말하는데,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죄스러운 아버지에 죄스러운 아들이 생긴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성향과 태도를 닮았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증언한다.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인자를 방문하시는 것은 성경에 자주 나와 있는 것처럼 분노 중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 중에 하신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참고하라:창 21:1; 출 4:31; 시 65:9; 106:4; 144:3.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이 질문에 성경은 여러 가지로 답한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람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라. 그는 사람은 "풀"이라고 답했다:"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사 40:6). 다윗에게 "사람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라. 그는 사람은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 되니"(시 62:9). 그는 거짓말쟁이나 속이는 자라고 하지 않고 "거짓"이라고 했다.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사람이 어떤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사람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아첨하고 서로 서로 아첨하여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명백하게 말씀하신다······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은혜로 대하시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사람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조물주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저를 돌아보시나이까? 사람은 한줌 진흙덩이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람이 죄인이며 부정한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부정한 피조물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시나이까? 여호와께서 부정한 것에 가치를 주시고, 불순한 것을 인정하신다는 말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반역적인 사람, 하나님의 원수, 그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께서 저를 높이시나이까!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을 좋아하시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말인가? 왕께서 배반자를 높이시고, 왕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인가? 사람의 죄성은 하나님의 성품에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하늘에서 끌어내리려 한다.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천국으로 올리고자 하신다. 죄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작은 존재로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크게 하려 하신다. -조셉 캐릴.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아! 사람은 왜 이처럼 모순된 존재인가! 장엄하면서도 왜소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타락했고, 고귀하면서도 천한 것이 사람인 것을! -파스칼(Pascal, 1623-1662).
4절.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KJV에는 "권고하시나이까"가 "방문하시나이까"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방문한다는 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방문한다는 것은 징계하고 벌을 주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서 심판은 하나님의 방문과 함께 이루어진다:"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히브리어 원문에 '보응하다'라는 동사로서 "포케드"<dqp>가 쓰였다. 이는 '방문하다'라는 뜻이다-역자 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해 방문하신다는 뜻이다······재앙은 하나님의 방문과 함께 이루어짐을 유의하라.
둘째, 방문한다는 것은 자비를 보이고, 힘을 주며, 구원하고, 축복하기 위한 것이다:"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룻 1:6).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창 21:1).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신 최대의 자비와 구원은 이렇게 표현되었다:"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눅 1:68).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방문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를 방문하신다. 그리고 이런 자비는 두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방문이라고 불리운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실 때에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란 그분이 친히 사람의 영혼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베푸시고 괴로움을 더하실 때에는 우리와 우리가 사는 장소에서 멀리 떠나신다. 이처럼 그분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실 때에 가까이 오신다. (2) 자비를 하나님의 방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비를 값없이, 자유로이 주시기 때문이다. 방문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일이다. 방문하기 위해서는 사랑 외에는 다른 아무 의무도 필요없다. 그가 내 친구이고,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그를 방문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속하는 값없는 은혜의 행동을 방문이라고 부른다. 친구가 친구를 자유롭게 방문하듯,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유로 이것을 행하셨다. 사람들 편에서는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오히려 방문 오신 그분께 불친절했고, 그분을 무시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 가운데 사람을 구속하러 오셨다.
셋째, 방문한다는 것은 돌아보고 조사하며 지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양 떼를 향한 목사의 직위는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슥 10:3; 행 15:36). 또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은 그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약 1:27). 그리스도는 자신이 옥에 갇혔을 때에 그를 방문한 자를 축복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마 25:34). 이것은 그저 단순히 와서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다른 성도들이 옥에 갇혀 도움이 필요할 때에 도와주고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는 다른 구절에서도 많이 나타난다(욥 7:17, 18).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방문하시나이까?" -조셉 캐릴.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사랑하시나이까?
인자가 무엇이관대
천상의 하늘이 그에게 경배하나이까?
사람은 한줌 진흙에 불과한 것
그러나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난 존재
주께서 이 숨결을 거두시면
다시 죽음을 통해 흙으로 돌아간다네.
그는 가장 미미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
그러나 당신의 자비로 가장 고귀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한줌 흙보다 못한 것
그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였건만
죄가 그로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만들었다네
그러나 당신은 이 짐승을 사랑하십니다.
그는 가장 미미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
그러나 당신의 자비로 가장 고귀해진 존재입니다.
사람은 짐승보다 못한 것
처음에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으나
죄로 마귀의 자식이 되어 버렸다네
이보다 더 저주받은 존재가 있으랴?
그러나 당신의 위대한 자비는
이 저주받은 피조물을 감싸고 있었나이다.
당신은 스스로 천한 몸을 입으셨나이다
당신의 고귀한 의복을 벗어 두시고
천한 육체를 입으심은 당신의 은혜 때문입니다
당신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려 스스로 죽으셨나이다.
그는 가장 미미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
그러나 당신의 자비를 받으면,
그는 축제를 벌이나이다.
보라! 이제 사람은
축복받은 천사와 동일하고, 그보다 더 존귀해졌다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 까닭이라네.
이처럼 사람은 당신의 모든 자비를 받았나이다
비록 그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었건만.
-토머스 워슈번(Thomas Washbourne, D.D., 1654).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가난과 부요, 비참함과 당당함
인간은 이처럼 복잡하고, 또 경이로운 존재!
조물주가 심어 놓은 양 극단!
이질적 기질의 놀라운 혼합
서로 다른 세상의 정교한 만남!
무(無)와 신성(神性) 사이!
영원한 존재, 그러나 더럽혀지고 지워진 것
더럽혀지고 지워졌으나, 그래도 남아 있는 신성!
신적 위대함의 희미한 축소판!
영광의 후계자! 흙으로 만들어진 연약한 아이!
연약하나 영원한 존재! 벌레 같으나 무한한 존재!
버러지! 신성!
나는 나를 바라보며 떤다네
그리고 내 안에서 나는 잃어버린 바 되었다네.
-에드워드 영(1681-1775).
5절.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은 사람의 특성이나 속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위상에 관한 것일 것이다. 천사들이 다른 피조물보다 높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을 말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 원래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졌다면,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정도의 차이를 말할 것이다. 천사들은 영원하고, 지적이며, 거룩하고, 능력이 있고, 영광스럽게 창조되었으며, 이러한 특성이 그들의 조물주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주어지지 않았는가? 사람도 영원하고 지적이고 거룩하고 능력이 있고 영광스럽게 창조되지 않았는가? 만일 천사들이 사람보다 더 낫다면, 그들이 가진 특성을 사람들이 갖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천사나 사람이나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으며,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을 가졌다. 이러한 속성이 사람보다 천사에게 더 강하게 각인되었는지는 우리로서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두 존재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 같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래 천사와 사람이 서로 어떤 위치에 있었든지 간에 사람이 타락한 이후로는 사람이 천사보다 훨씬 열등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은 타락한 결과 그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고, 창조의 서열에서도 낮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위가 낮아져도 사람에게 주어졌던 그 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능력은 천사의 능력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므로 이 능력을 깨끗이 하고 또 확대한다면 천사들과 동등하게 될 것이다······아! 우리가 다시 말하거니와 천사와 사람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을 두고 인간을 창조의 서열에서 지나치게 낮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셨을 뿐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이 귀한 속성들이 그의 자녀들에게 온전히 전수되었을 것인데, 그만 범죄함으로 인해 이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들이 사람처럼 중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타락한 사람을 위해서는 구세주가 나셨으나, 타락한 천사들을 위해서 구세주가 나셨다는 기록은 없다. 이것은 신비스런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비밀이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여기에 근거하여 어떤 교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간섭하시나 천사들을 위해서는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면, 조물주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점에 있어서는 사람이 천사보다 낮은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는 지나친 것일까? 또한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라고 했다.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면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바람의 날개를 갖고 있는 천사들, 불꽃처럼 빛나는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며,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성도들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닌가? 또한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모든 천사들이 기뻐하지 않는가? 천사들도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을 덧붙이고자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엡 3:10). 또한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에서도 교회는 영원하신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천사들은 더 멀리 떨어져 그 주위에 둘러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건대 사람을 천사보다 열등한 존재로 볼 것이 아니다. 비록 현재는 창조의 아름다움을 잃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많이 상실했지만,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영광스럽게 나타내 보일 것이다······.
구세주는 자기를 낮추셨다. 그분이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되신 것은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면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피조물이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어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했다 해도, 우리는 이것을 결코 '겸손'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 서열에서 어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중보자는 지극히 낮아지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극한 고난을 당하셨다. 또한 그분은 중보자가 받는 상으로써 지극히 높임을 받으셨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정사들과 권세들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셨다. 만일 다른 피조물이 이런 높은 위치를 차지할 것을 전제로 하여 낮아지고 고난당할 것을 자초했다면,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높임을 받을 것을 알고서 낮아지는 행동을 취했다면, 이는 겸손이 될 수 없다. 귀족이 왕이 되기 위해 먼저 종이 되었다면, 이런 행동을 겸손한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이미 왕이 되어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자가 겸손히 종이 되었다면, 이는 겸손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하나님 외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낮아졌다면 이를 겸손한 행동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그분이 하나님의 온전함을 버리실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버리실 수 있었다. 하나님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다고 했는데, 이것이 진정으로 겸손한 행동이며,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모든 피조물들이 그분께 경배를 드렸을 것이지만, 그분은 종의 형태로 자신을 숨기시고 피조물의 경배를 받지 않으셨다.
그분이 하나님의 신성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이것은 단 한순간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나타나는 위엄과 위대함은 버리셨다. 그리고 신성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베일 속에 감추시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그분을 보았을 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사 53:2)이 없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될 것을 허락하시고 행하신 일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자신을 비우시고, 아무런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 바로 그분이 그 찬란한 빛과 아름다움을 하늘에 두시고, 이 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은 천사나 천사장의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사보다 못한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의 모양"(빌 2:8)으로, 낮아지고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헨리 멜빌(Henry Melvill, B.D., 1854).
5, 6절.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보다 높여 주셨다. 3-4절은 시편 기자가 무엇을 보고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게 되었는지 알려 준다:"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이 모든 것들을 사람을 섬기는 도구로 만드셨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를 위해 해와 달과 별들을 우주 공간에 심어 두셨단 말인가? 사람이 무엇이란 말인가? 어디서든 거창한 가구들을 많이 들여 놓고 고급스럽게 치장한 저택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집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라고 묻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서, 여기에 사는 사람이 누구냐고 감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여 주신 또 다른 면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시고 높여 주셨다. 6절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타난다:"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이처럼 사람은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임을 받았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그가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인가? 왜 그가 바다의 고기나 들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를 다스린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사람으로 천사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게 하시며 사람을 높여 주셨다:"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시고, 사람을 위해 여러 가지 아름다운 피조물을 만드셨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타락 이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게 되었다(히 2:6). 사람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을 받는다면, 이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여 주시는 것이다. -조셉 캐릴.
5-8절. 어거스틴은 이 시의 머리말에서 포도주틀에 대해 영해(靈解)를 많이 했다. 또한 "사람이 무엇이관대······인자가 무엇이관대"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해석을 했다. "사람"은 "에노쉬"(vwna)라고 하는데 이는 '비극'이란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인자"는 "벤아담"(mdanb)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담의 아들'을 뜻한다. "에노쉬"는 죄를 지어 타락한 사람을 말하고, "벤아담"은 은혜로 중생한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람은 옛 타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며, 옛 사람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육적인 사람은 비참하다. 어거스틴은 몸에 대한 기록에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만물 위에 두셨고, 천사들이나 하늘보다도 높이 두셨다고 했다. 온 세상이 그것을 증언한다(엡 1:21). 그분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우양"으로 내려오셨다. 소와 양은 설교자들과 거룩함을 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소는 설교자에 비유되고, 양은 신실한 자에 비유된다:"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 9:9). "들짐승"은 방탕하게 살아가며 넓은 길을 걷는 대중을 말한다. "공중의 새"는 교만하여 고개를 높이 든 자를 말한다. "바다의 어족"은 물고기가 바다 밑으로 헤엄치듯이 세상의 부귀에 대한 욕심으로 땅의 더 낮은 쪽으로 뛰어드는 자를 말한다:"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여기에는 세상에 대해 세 가지가 나타나 있는 듯하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육신의 정욕"은 욕정이고, "안목의 정욕"은 탐욕이며, 여기에 "이생의 자랑"이 첨가되었다(요일 2:16). 마귀가 그리스도를 넘어뜨리고자 세 번이나 유혹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므로 소와 양과 기타 다른 모든 피조물들 위에 세움을 받으셨다. "양"과 "소"뿐만 아니라 이 모든 피조물이 교회 안에 있다. 노아의 방주에는 모든 종류의 짐승들, 정하고 부정한 짐승이 모두 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 가르치신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그물에는 좋은 고기도, 나쁜 고기도, 모든 종류의 고기가 다 잡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록한 어거스틴의 글은 분별력이 있는 독자가 읽는다면 좋게 사용될 수도 있다. -존 메이어.
6절.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헤르모디우스(Hermodius)는 귀족 출신인데 그의 용감한 통솔자인 이피크라테스(Iphicrates)를 단지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호되게 질책했다. 이피크라테스는 "난 이제 시작일 뿐이오. 그러나 당신은 이제 끝이오"라고 말했다. 헤르모디우스 가문에서는 그에게 공작이라는 직함을 주며 그를 존귀하게 해 주었으나 헤르모디우스는 자신의 힘으로 가문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칼이 칼집에 맞지 않는 것처럼,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했다. 그러나 이피크라테스는 자신이 용감하게 공적을 세워서 자신의 집안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적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가장 훌륭한 신사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더 잘 받아들여서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고상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성에 사는 시민들은 미천한 가문 출신이 아니라 참으로 고귀한 가문 출신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의 족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 얻게 된 새로운 족보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그들의 형님이 되셨다. 성령님은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시고, 천사들은 그들을 수종드는 자들이며,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그들의 하인이 되었고, 이 세상은 모두 그가 임시로 거하는 여관이며, 하늘은 그들의 가정이 되었다. -존 스펜서, Things Old and New.
6절.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기도하면서 헛된 생각을 물리치고 싶다면······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주권, 즉 세상에서 나오는 이익과 쾌락을 다스리는 주권을 행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것들이 당신에게 덫이 될 것이다. 가정의 아버지나 청지기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자녀들이나 하인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 저들은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나 청지기가 이것을 잊고, 아버지는 자식을 너무 귀여워하고 청지기는 하인들과 너무 허물 없이 지내게 되면, 아버지와 청지기는 권위를 잃게 되고, 자녀들은 버릇이 없어지고 하인들은 제멋대로 놀아나고 말을 듣지 않게 된다. 그들에게 "가라"고 해도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임무를 주어도 "당신이나 하시오"라고 하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성도들의 하인들과도 같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피조물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그 발 아래" 두셨듯이 피조물들과 거룩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그들을 품안에 안고서 귀여워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성도들은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행세하며,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할 것이고,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다. 세상의 피조물이 이 교제의 시간을 감히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윌리엄 거놀.
7, 8절. 물질 세계를 다스리는 그분은 또한 지적,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다. 충성스럽고 겸손하며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영혼들은 그의 목장에 있는 양이다. 소처럼 강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생명의 말씀을 파헤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서 밭을 간다. 들판의 사나운 짐승들도 그분의 뜻에 순종한다. 공중의 새처럼 높은 곳을 날아다니는 천사들의 영도 그분의 명을 따라 움직인다. 혼돈과 흑암의 깊은 구렁에서 사는 악한 자들, 그 거창한 레비아단도 모두 왕이신 메시아의 발 아래 있다. -조지 혼.
8절.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생선이나 새 고기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이 피조물을 우리가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그분께 순복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설교힌트]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삼는 개인적 관계. 이러한 관계를 맺는 특권.
1절.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속성.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1절. “온 땅에.”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 아름다움.
1절.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이해할 수 없고 무한한 하나님의 영광.
1절. “하늘 위에.” 하나님의 영광은 천사들의 지성이나 하늘의 영광보다 더 높다.
2절. 젖먹이의 경건, 그 가능성, 힘, 영향력, 하나님께서 잠잠케 하시는 일. 복음의 능력은 설교자가 하는 말의 유창함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일은 작은 일이라도 큰 결과를 가져온다. 영적 젖먹이가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연약한 성도들의 간증으로 악을 잠잠케 하는 능력. 은혜로 원수를 잠잠케 함.
4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미미한 사람의 존재.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심. 하나님의 방문. 이 세 가지는 하나씩 설교를 할 수도 있고, 한 설교에 이 세 가지 주제를 모두 다룰 수도 있다.
5절. 사람과 천사들의 관계. 예수께서 가르치신 입장.
5절. “영화와 존귀의 관.” 주 예수 안에서 발견하는 우리의 영광.
5-8절. 주 예수의 우주적 통치.
6절. 피조물의 세계에 대한 사람의 권리와 의무.
6절 하반절. “그 발 아래.” 세상에 속한 것들의 적합한 위치.
9절.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여러 상황 가운데서 알게 된 여호와의 아름다운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