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학/설교모음

환난가운데서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롬5:1-11)

금빛돌 2014. 2. 5. 23:40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제일 큰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평상시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환난을 당할 때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환난을 당하면 자신의 의지로 이겨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좌절하거나 실망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환난가운데서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1장에서도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고후9장에는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이 풍성한 연보를 하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3절에서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여기서 다만 이뿐 아니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51,2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또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 볼 때는 항상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볼 때는 항상 기뻐할 수 있지만 현실을 볼 때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실의 환난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환난이라는 단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 피와 땀과 눈물을 짜낸다는 의미를 가지진 여성 명사입니다. 우리나라단어에는 여성명사다 남성명사라는 것이 없는 헬라어에는 여성명사가 있고 남성명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오늘 말씀 뒤에 나오는 인내라는 단어도 여성명사이고, 연단이라는 단어도 여성명사입니다

그래서 이 환난이라는 말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때 피와 땀과 눈물을 짜내면서 낳을 때를 염두 해둔 말입니다. 여성들은 평생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은 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가운데서 여성이 아이를 낳는 고통과 같은 환난을 일상의 삶속에서 격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글을 쓰고 있는 사도바울은 산모가 아이를 낳는 그런 환난을 일상의 삶속에서 당했습니다. 그래서 고후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후4장에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격었고, 박해를 받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였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바울이 받았던 환난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또 지금 우리는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환난도 매일 받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환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시80:5에 보면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의 삶의 환난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만 아니라 환난가운데서도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그냥 적당하게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하다. 자랑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랜 어린 친구를 만날 때 기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환난이 있느냐 슬퍼하지 말라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너희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그 환난가운데서도 친한 친구를 만나듯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가운데서 우리는 환난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환난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환난을 통해서 받는 고통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E. James wilder박사는 사람의 머리에 있는 전두엽 오른 쪽에 조이 센터, 즉 기쁨센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고난이 50인데, 기쁨센터에 기쁨의 용량이 60이면 뚫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의 고난이 50인데, 기쁨의 용량이 40밖에 되지 않으면 이것이 상처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기쁨의 용량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만일 내게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이 상처가 아니라 기쁨으로 돌아오면 기쁨의 용량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게 어떤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것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린다고 한다면 그만큼 내 안에 기쁨의 용량이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모든 환난과 그로 인한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내 안에 기쁨의 용량이 얼마나 크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내 안에 환난으로 인한 고통보다 기쁨의 용량이 크면 우리가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기쁨의 용량을 키울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 기쁨의 용량을 키우려고 인간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우리 안이 있는 이 기쁨의 센터에 기쁨의 용량을 충만히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이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한 모든 환난으로 인한 고통보다 더 강한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16:11에 보면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고 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고자 했을 때 쓴 시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으로 인한 고난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16: 1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고난가운데서 사람에게 피하지 않고 하나님께 피했습니다. 고난가운데서 인간적인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갔습니다. 그랬을 때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충만한 기쁨이라는 것은 흘러넘치는 기쁨입니다. 또 영원한 즐거움은 순간적이지 않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한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그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예수님도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으로 인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의 용량이 충만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3:1)”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환난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으로 인한 화평을 누리자 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하자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 때문에 환란가운데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서 환난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주안에서 더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이 기쁨이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늘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에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의 용량을 날마다 더 늘리시기 바랍니다. 기쁨의 용량은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더 크게 늘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주신 그 기쁨으로 인해 환난가운데서도 능히 즐거워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감옥에 갇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년을 감옥생활을 한 목사님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얼굴이 환하고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수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처음 감옥에 갔을 때 도무지 기도도 할 수 없고, 찬송도 할 수 없었다 고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감옥의 죄수들의 인분을 처리는 일을 사람들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 목사님은 내가 인분을 처리는 일을 하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분을 처리하는 그 곳에는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그곳에서 마음껏 찬송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때 불렀던 찬송이 저 장미꽃위의 이슬입니다. ‘저 장비꽃위의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두 번째, 우리가 환난가운데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환난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하기 때문입니다.

8: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비전이라 했을 때 어떤 거창한 일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비전이 어떤 큰 일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가장 큰 비전은 먼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만일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내게 큰일을 이루기 위한 비전으로 나를 부르셨다면 내게 그 어떤 환난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은 내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을 허락하십니다. 그 환난을 통해서 인내하게 하십니다. 인내란 내가 어떤 환난을 당해도 도피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 환난의 아래에 머물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환난가운데 인내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여기서 연단이란 순금을 제련하기 위해서 불을 지피는 것을 말합니다. 환난의 불을 통해서 내 안에 불순물을 제거하게 하십니다.

그 환난의 불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일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때 절대 그 환난의 불을 피하여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난의 용광로에 자신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좀 더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좀 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정말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해 환난을 불을 부쳐주십니다. 그때 그 환난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원망하지 마시고 친구처럼 반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내 속에서 정말 아름다운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찬송)

3)또 환난가운데서도 우리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이것 또한 속히 지나가기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신 목적은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환난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이 영원한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에 우리의 소망을 두다가 허무하고 헛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십니까? 그 이유는 이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않고, 속히 지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반지가 하나 갖고 싶어 반지세공사를 불러 명령했습니다. “나를 위한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내가 승리를 거두고 기쁠 때에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넣어라.” 세공사는 그 명령을 받고 반지를 멋지게 만들었는데, 어떤 글귀를 넣어야 할 지 좋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이자 지혜의 왕인 솔로몬을 찾아갔습니다. 반지세공사의 고민을 들은 솔로몬 왕자는 잠시 생각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 또한 속히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여러분에게 감당할 수 없는 환난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속히 지나가리라

여러분에게 정말 좋고 기쁜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까? “이것 또한 속히 지나가리라

와엠의 간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앞을 보니 가시 밭 같은데, 뒤를 돌아보니 꽃밭이더라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그분들은 와엠에서 월급 한 푼도 받지 않으시고, 개인후원을 받으면서 사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평균 얼마의 후원금이 들어옵니까 하니까? 평균 4인가족으로 보았을 때 한 달에 100만원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앞을 보니 가시밭이고, 절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뒤를 돌아보니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한번도 가족이 굶지 않고, 빚지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앞을 보니 가시밭이지만 뒤를 보니 꽃밭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앞길이 가시밭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절벽처럼 보입니까? 그래서 내 인생이 마치 번지점퍼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동안 살아왔던 과거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습니까? 죽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어떻습니까? 그 모든 환난도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환난도 하나님의 은혜로 잘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 앞에 환난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따라하겠습니다.

이것도 속히 지나가리라

8:28“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의 환난은 영광스러운 하나님나라에 이르는 한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현재의 고난은 합력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을 이루기 위한 한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4)또 우리가 환난가운데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5절에 보시면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의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천국의 소망은 부끄러운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태목사님 아들 태건이가 엄마에게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그래 건아 집에 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건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건이는 계속 울었습니다. 엄마 집에 빨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그래 건아 지금 집에 가고 있잖아, 바로 저기가 우리 집이지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건이는 계속해서 울면서 빨리 집에 데리고 가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눈치는 체고 건이를 앉았습니다. 그리고 건이를 품에 안고, 건이야 사랑해, 그래 빨리 집에 가자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건이가 울음을 그쳤습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에게 환난이 있지만 우리가 천국에 갈 소망이 있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현재에 환난이 있지만, 장차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수 있어라고만 한다면 그것도 부끄러운 소망이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 소망을 주시고 어떻게 하십니까? 단순하게 천국만 바라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천국소망을 주심과 동시에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하나님을 통해 내 아들아 내딸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저 천국소망은 부끄럽지 않은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앞으로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겠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선을 이루시는 동안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맗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내가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미래의 소망은 절대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어떻게 말합니까?아니냐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만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면 왜 너에게 환난을 주셨겠어--하나님은 절대 너를 사랑하고 있지 않아라고 마귀는 우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절대 우리가 이런 마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연약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경건하게 살아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 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 심지어 어떨 때는 내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6절부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절에 보면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절에 보면 이제 더 나아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연약할 때, 경건치 않을 때,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이야기를 왜 이 부분에서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후에도 연약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경건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수 노릇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후에 이제 그 전보다는 더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은 더욱더 귀히 여겨주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면 약할수록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또 우리의 삶 가운데 그 어떤 환난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8장에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세상의 그 어떤 환난도 나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랑만이 모든 환난을 능히 이기게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 어떤 환난가운데서도 저 천국에 대한 소망과 장차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기까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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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