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적관점에서 본 약자보호법
서론
요즈음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앙은 극단적 보수주의(개혁주의는 아님)와 자유주의
신학이 서로 대립해 있는 상태이다(사회의 많은 분야에서도 좌익과 우익의 서로 대립된 상황이다). 모두 제각기 성경적이라고 주장은 하지만, 성경을
더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입장에 따른 교리에 의해서 성경의 한쪽 부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똑같은 성경을 들고
나오지만, 서로의 입장이 대립되는 양상을 보게된다. 특히 "가난한자"에 대한 문제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 자체를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라고 보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고통받는 그 자체를 구원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라는 것도 가난한 자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극단적 보수주의에서는 교회는 영혼 구원의 단체이지 자선단체나 구제기관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저주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영혼구원을 받은 사람은 내세에도 천당을 차지하지만, 현세에서도 하나님을 더 잘 섬김으로써 부자가 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같은 성경을 들고도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를 한 쪽에서는 선이라고 보고 한쪽에서는 악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
가난한 자에 대한 바른 성경적 시각은 무엇인가? 이것을 구약에 나타난 약자보호법에 대한 바른 해석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보수니,
자유니 하지 말고 바른 성경해석을 통해 가난한 자에 대한 바른 성경적 입장이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구약에 나타난 약자보호법이란 무엇인가?
구약 성경에서 약자보호법이란 십계명(출20:1∼21)뒤에 나오는 일명
"계약법전"(20:22∼23:19)을 가리켜 "약자보호법" 이라 한다. 즉 계약법전의 중심 사상이 약자(나그네, 과부, 고아와 같은 가난한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약한 편에 속한 자)를 보호하라는 사상이기 때문에 약자보호법이라 한다(이하에서는 가난한 자라 칭하겠음). 이 약자보호법의
정신은 나중에 희년사상으로 확대되어서 나타난다. 또한 선지서에서 보면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이 종교의 의식은 지키면서도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음을 두고 책망하고 있다(사1:10∼17,23, 렘5:28, 슥7:10). 또한 예수님이 전하여 준 복음도 가난한 자에게 전하여준
복음이었다(눅4:18).
이와 같이 약자보호법의 사상은 전 성경을 통하여 펼쳐진 중요한 사상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서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사상이 중요한 말씀이기에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 대해 무조건 열심히 구제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물론 이 말씀이 단순히 이론으로 그쳐서는 되지 않는다.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지켜져야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일반적인 법칙을 생각해야 된다. 그것은 기독교 윤리란 먼저 무엇을 행하느냐에 앞서 "무슨 동기로 그것을 해야하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라는 영화에 보면 대부가 상을 타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상을 타는 이유는 그가 가난한 자를 위해 많은 돈을 희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신부들은 이 사람이 마피아의 대부라는 것을 알고, 또 그 돈이 부정한 돈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신부가 하는 말은 "지금
이 돈이 없으면, 당장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업이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금 문제가 있는 돈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상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요즈음에도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 특정한 선거철이 되면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고아원,
양로원, 재활원에 찾아온다. 그러나 그 기간이 끝나면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기독교 윤리에서는 겉으로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선한 행위라 하더라도, 그 사람의 동기가 옳은지를 따져 봐야한다.
더 나아가 그 동기가 아무리 선한 동기라 하더라도, 그 동기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적인 동기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방콕의 짬렁이라는 시장이 온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분을 존경한다. 그러나
짬렁은 당시 강연회를 다니면서 불교의 교리 강연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한 정치를 하느냐? 그것은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이다. 욕심을 가져봐야 인생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의미 없이 살지 말고 가난한 자를 위한 정치를 해야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즉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돌아 본 동기는 단순히 정치적인 동기도 있지만 그 사람의 종교적인 동기로 말미암아 그렇게 했다. 비록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 아니며, 자기의 신앙적 동기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를 돌아본 일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사람을 비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의 신앙적 동기가 있어야한다. 요즈음 행동주의 신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교리적인 것, 신앙적인 것 배제한다. 오직 행동 그 자체에 모든 가치를 둔다. 그래서 기독교를 단순히 착한 일 하는 단체,
구제하는 단체로만 생각한다. 신앙고백을 따지지 않는다. 마치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착한 삶으로서 구원을 얻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면
과연 이것이 성경적인 바른 신앙일까? 그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모든 윤리적인 가르침은 신앙적 동기를 가지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윤리는 "그러므로"의 윤리이다(롬12:1,2). 물론 궁극적으로 이 말씀은 구체적인 삶과 행동으로 지켜져야 될 말씀이다. 그러나 어떤
신앙적 동기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가를 살펴 봐야한다.
*그러면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신앙적인 동기로 이 말씀을 하셨는가?
*약자보호법에 대한 해석
F.C 펜샴은 약자보호법은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윤리일 뿐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태양신
[샤마스]에게 에집트에서는[레]나 [프타]에게도 꼭 같이 적용되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자보호의 정신은 구약 성경의 유일무이한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펜샴의 견해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특수성을 전혀 무시한 견해다. 또한 성경에 나타난 윤리적
교훈을 보편주의화 시키는 견해다. 이에 대해 서인석씨는 이 약자보호법의 제정 동기를 가나안에서의 "정착화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출애굽의
해방신학적 동기에서 찾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공통되는 가난의 형제의식을 경험했다. 그러한 상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자 도시화와 군주체계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거기서 빈익빈, 부익부와 경제착취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가나안 정착 문화의 위기를 염두에 두시고 약자보호법을 제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서인석씨가 약자보호법의 제정 동기를 고대 근동의
윤리의 일환으로 보기보다는 출애굽사건과 연관시킨 것은 타당한 해석이라 본다. 그리고 가나안의 정착화의 위기로 말미암아 약자보호법을 제정하셨다는
것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하면서
십계명을 주셨다(출20:2). 마찬가지로 뒤에 나오는 약자보호의 사상들도 출애굽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레위기25:35∼55에 보면 갖가지
정도의 빈곤함과 좀 더 살림살이가 나은 동족들이 취해야할 행동에 대한 법령들이 나와 있다. 여기서 세 번 씩이나 그 족속들보다 가난한 형제들을
공정히 대하기 위한 동기로서 출애굽을 기억하도록 명령받는다(레26:38,42,55, 26:13). 신명기 15장에서도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고 특별히 빚진 종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명령한다. 신15:15에 보면 그 동기가 분명히 나타난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명하노라". 이와 같이 약자보호법의 제정동기는 일반적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백성과의 신앙적 관계성 속에서, 또한 역사 신학적으로는 출애굽 사건에서 그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출애굽사건에 대한 해석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더 유의해 봐야 할 것은 서인석씨가 이 약자보호법을 출애굽 사건과 연관시키는 것은
타당한데, 문제는 출애굽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출애굽사건이 단지 약자의 해방이며, 약자보호법은 세겜언약에 근거한 축복과 저주의
계약인가?(수24장).
어떤 신학자들은 "히브리"라는 말도, 어떤 민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애굽에 있는 일반적인 약자의 계급"으로 본다.
그리고 바로는 약자를 지배하는 "억압계급"으로 본다. 그래서 출애굽사건이란 약자의 계급이 "히브리 계층"을 억압세력에서 해방, 또는 구원시켜
주는 사건이라고 한다. 출애굽사건을 이렇게 볼 때, 구원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죄에서의 구원, 또는 사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억눌린데서의 해방"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구원자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도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한다.
과연 이러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타당한가? 먼저 히브리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면 창14:13에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 하고 있고, 그의 혈통적
후손인 이삭과 야곱을 히브리인이라 부르고 있다(창43:32, 출2:11). 히브리라는 말은 약자의 계급에 대한 말이라기 보다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을 지칭하는 말로 봄이 타당하다.
또한 이렇게 보는 성경적인 근거는 출2:23∼25에 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시켜 준 동기가 나온다. 여기서 두 가지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히브리인들의 "고통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라는 것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베푸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권념"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출애굽의 동기를 앞에 있는 말대로 "약자의 고통하는 부르짖음"을
출애굽의 동기로 삼는다. 그런데 그렇게만 볼 수 없다. 성경은 절대 그 한 절만을 가지고 해석할 수가 없다. 반드시 계시가 점진적인 발전을
해나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이 앞에 있는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봐야한다. 그렇게 볼 때 여기서 나타난 하나님의 출애굽의 동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베푸신 언약을 기억하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을 시켜주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니까 이것을
정리하면 히브리인들의 부르짖음은 출애굽에 대한 현상적 동기였고, 족장들의 언약은 출애굽의 근본적인 동기였다(창15:18, 17:4,7,
출2:24, 3:15∼17, 6:4∼5). 즉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조상들에게 세운 언약 때문에 그들을 구원 시켜 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출애굽사건과 족장들의 언약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성경을 찾아보자.
출17:7,8 "내가 너로 언약을 세워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을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호와께서 창17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 언약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애굽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을 시켜준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출애굽의 근본적인 동기는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이 언약을 맺은 장소가 가나안 땅이었는데, 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험을 하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주도 면밀한 계획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을 찾아보자.
창15:13∼17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 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에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라 하시더니"
여기서 보면 창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계획하셨다. 즉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의도적으로 출애굽을 경험시키려고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서, 어떤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가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애굽이라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그들이 인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상황이다. 또한 그 가난이 한 두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에게 기대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애굽이라고 하는 상황이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 이스라엘을 두심으로 이스라엘로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를 공통적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애굽에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어디에서, 어떤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약자보호법을 제정해 주셨다.
성경을 찾아보자.
신8:11, 12∼14, 18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말씀대로 살면 가나안 땅에서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1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배부르게 될 때,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게 되어질까 염려하신다. 즉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배부르게 될 때, 그들이 어디에서 구원받은 자인가 하는 것과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구원받은 자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들이 가게 될 가나안땅은 어떤 곳인가? 그 곳은 철저히 배금주의적인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였다. 그러한 가나안의 사회와 문화 속에 젖어들게 될 때, 그들이 어디에서 구원을 얻었는지를 잊게 되어지고, 그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을 잊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이 세상)에서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않고, 어디에서 구원 얻은 자인가 하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 얻은 이후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항상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가 받은 여러 가지 물질적인 복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어떤 복을 받았든지 우리의 출발은 모두 다 똑같다(애굽에서의 가난한 상황).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진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신분의 차등으로 우리의 형제들과 차등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영원한 본질은 애굽에서의 가난한
모습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다. 돈을 가지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더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안식년과 희년법을 제정해주셨다.
그러나 이와 반대가 되는
가나안의 바알적 신앙은 어떠한가? 바알적 신앙은 물질적인 것을 더 쌓고, 체우는 것에 목적으로 두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에서
유목민이었을 때 바알신앙의 유혹을 받지 않았지만,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고 물질을 소유하게 되자 쉽게 바알신앙의 유혹을 받았다. 그들은 겉으로는
여호와를 믿었지만, 신앙의 내용면에 있어서는 바알적 혼합주의였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믿고 몇 대째까지 물질적인 복을 받지 않으면 예수를 잘못 믿은 것이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물론 예수를 잘 믿음으로 물질적인 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적인 복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너무 영적인
복으로만 국한시키는 것도 이원론적 신앙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물질적 복을 받은 그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우리가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한
자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을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천국백성이라 할 수 없다(마5:3).
그래서 우리가 가진 물질적 복을 내어줄 줄 모르고 그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므로 다시 제2의 애굽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또 우리는 구제할 때 저 가난한 자들에게 대하여 단순한 동정과 적선의 마음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만큼 높고 괜찮은 복을 받은
사람이고, 저 가난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항상 부족한 것 같지만, 가난한 사람을 볼 때 정말 나는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도와줌으로서 나의 높음을 확인하고, 그들과 비교할 때 더 높은 자라고 하는 동정심으로 돌아본다면 잘못된
구제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고아와 같이 과부와 같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비록 겉으로 봤을 때는 저 사람보다 나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봤을 때는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돌아봐야한다.
그래서 야1:27에서는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이라 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주여 저는 가난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라고 해놓고,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이 위선이고 외식이고 거짓된 경건이다.
*헌금의 정신이 무엇인가? 평균케 하려 하는 것이다(고후8:13). 예를 들어 월 1000만원을 벌이는 사람이 있고, 월 50만원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 월 50만원내는 사람이 한달에 헌금을 5만원 한다면 1000만월 벌이는 사람은 얼마까지 내어야하나? 같이 5만원(?)이 아니라,
955만원까지 내어야한다.
그러면 모두 같이 되어진다. 물론 이 말을 율법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헌금의 정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즉 많이 가진 자는 많이 내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내거나 아니면 도움을 받음으로 언약공동체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고후8:14,15). 그래서 더 이상 물질적 지위를 가지고 언약공동체안에 차별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 약자보호법에 나타난 정신을 현대교회에 적용하면
1) 교회는 돈 한푼 던져주는 것으로 구제를 다하였다 생각하지 말고, 항상 그들의
마음의 자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2) 가난한 자들을 통하여 나의 육신적인 형편이 조금 나음을 감사하여 동정하지 말고, 내가
여호와 앞에서 저들과 같음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돌아봐야 한다.
3) 교회에서는 가진 것을 자랑하지 말며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 나누어 줄 것인 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4) 교회 안에서 돈이나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를 많이 가진 자들보다,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역설이나 감상적인 말이 아니고 성경의 진리이다. "네 형제중 지 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
5) 가난한 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영역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벧후
1:7). 우리는 교회 밖의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신앙고백의 입장에서 동참해 나가야 한다. 단순한 윤리의 입장이 아닌
참된 경건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