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중심주제/언약과 하나님 나라

모세언약-언약의 명령성

금빛돌 2011. 4. 9. 07:16


십계명
성경을 찾아보자.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5절에서 언약을 지키면, 6절에서 내 백성(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언약에 대해서 신4:13 무엇이라 이야기하고 있는가? 거기서는 언약에 대해서 십계명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언어적인 혼란을 겪는다. 앞에서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언약이 십계명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번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언약이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브리트]라는 말인데,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것이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대개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면들을 가리킬 때는 [약속언약]이라고 표현이 되고, 인간 편에서 책임(규례)을 강조할 때는 [율법언약]이라고 표현이 된다. 이 율법언약이 바로 모세 언약이다. 또 내용상에 있어서도 앞에서 말한 언약과 서로 대조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으로 보았는데, 여기서는 인간 편에서 율법(십계명)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유대율법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이에 대해서 세대주의자들은 말하기를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시대이고, 신약시대에는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이다" 라고 한다. 안식교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에서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하고, 여기서 율법을 추가하여 구원받는 길을 말했기 때문에, 구원이란 은혜50% 더하기 인간의 행함50% 해서 구원이 완성이 된다고 본다. 이것은 분명한 이단적인 생각이다.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법칙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결코 조각난 단편이 아니라, 계시가 서로 점진적으로 발전해 오는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 하나만 떼어놓고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의 계시史적인 배경을 알아보고,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계시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이 말씀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과 출애굽을 경험한 후, 홍해를 지나 가나안땅으로 가기 전에 광야 길의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 유월절사건과 출애굽사건, 그리고 홍해의 사건이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유월절 사건이 어떻게 이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가? 하나님의 죽음의 사자가 애굽 온 땅 위를 지나갈 때 모든
애굽의 장자들은 죽게 되었다. 그런데 죽음의 사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문설주 위에 있는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 유월절사건으로 이스라엘백성은 출애굽하게 되었다. 출애굽사건의 절정인 홍해사건도 마찬가지이다. 홍해사건에 대해서 고전10:1∼2에서는 이스라엘백성이 홍해에서 모두 세례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고 있는데, 세례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세례는 원래 물에 잠기는 침례가 원칙이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상징한다. 이것은 홍해사건에서 그 배경을 두고 설명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모두 모세를 따라 홍해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물속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모두 죽었음을 나타낸다. 구약 문학에서는 물은 인간의 한계 또는 죽음을 상징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홍해의 물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 물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이 물 속에서도 살아났다는 것은 그들이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났다는 것을 나타낸다(바로의 무리는 다 죽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합하여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의 계시사적인 배경을 이루는 출애굽의 유월절과 홍해의 사건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어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유월절사건을 통해서는 언약의 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홍해의 사건은 구원이란 죽음을 극복한 부활과 생명의 사건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출애굽사건 후의 시내산에서의 모세언약의 계시사적인 위치는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가 아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언약과 출애굽의 사건에서 보여주고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율법주의자들의 말이 옳게 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백성은 모두 이와 같은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백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시내산에서의 이 모세율법은 그들이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계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구원받은 백성인 것을 드러낼 것인가를 드러내는 계시사적인 위치에 있다. 또한 모세 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출애굽을 경험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계획을 담고 있다.

그러면 이제 이 모세 언약의 대표적인 이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무리들은 어떤 모습이며, 이것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살펴보자.

(1)첫번째로 이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 얻은 우리들의 왕이시고, 우리를 그 왕국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십계명은 고대 근동의 군신조약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이 십계명은 주전 1500∼700년사이의 힛타이트문서들에 나타난 군신조약과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 군신조약들은 군주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수립이 되며 속국의 왕들은 철저히 군주에게 행할 의무규정들이 있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전문에 군주를 소개하고 특히 군주의 역사적인 업적을 약술해 놓는다. 십계명도 보면 그 전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준 역사적인 업적을 약술하고 있다.(출20:1,2) 그리고 이 군신조약의 규정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군주에게 충성을 요구하면서 다른 왕들과의 일체의 동맹을 금하고 있다. 십계명에서도 제일 중요한 제1계명을 보면 거기서도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왕으로 섬기지 말 것을 기록해 놓고 있다. 또한 군신조약의 마지막에는 이 조약을 지킬 경우에 복이 있지만 지키지 않을 경우에 저주가 임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명기서에 나타난 십계명을 보면 축복과 저주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다. 십계명이 군신조약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나라의 속국백성이고 하나님의 그들의 왕이시라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이 군신조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십계명은 군신조약의 형태를 지니되 또 계시 안에서의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구원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 십계명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표현이다. 이러한 구원받은 자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언약에 계속 진전됨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다윗 언약에서는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구원받은 우리는 그의 아들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질문/.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2)둘째, 이 십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열국 중에서(세상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또는 제사장 나라로 거룩한 백성을 삼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을 찾아보자.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중에
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봐야 할 것은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제사장은 어떤 사람인가? 제사장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자로서,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다(제사장의 특권). 이러한 그의 특권과 아울러 제사장은 축복의 매개자로서 백성을 축복하는 사람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왕국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백성]인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또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한 것도 제사장의 의무와 연관이 된다. 제사장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이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거룩한 삶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삶으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아무런 목적과 계획없이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신 것을 알 수 있다(구약 시대에는 세상에 대한 복음증거의 사명이 없었다. 단지 그들의 세상에서의 거룩한 빛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해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백성으로서 예배하는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것은 복음증거와 우리의 거룩하고 공의로운 삶이다).

질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율법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3)세째-십계명의 의미는 출애굽사건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종과 아들의 차이).

1계명(요약)-하나님은 과연 폭군인가? 왜 자기만 사랑하고 하시는가(요22-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니다. 이 계명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다. 호세아서-출애굽할 때 내가 너희만 알았거늘 왜 너희가 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느냐 고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믿음)을 요구-주님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아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어린양을 준비-아브라함아 네가 정말 네 마음을 아는 구나-네가 아들을 바친 그 사랑의 심정이 바로 어린양인 내 아들을 준비한 내 마음과 같다-그러므로 이제 부터는 네가 내 친구다-
우리의 삶--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날마다 더 사랑하는 삶이다-이런 삶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깨달아가는 것이다.

2계명-하나님을 이 세상의 피조물화 시키지 말라.
2계명은 하나님을 형상화시켜서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계명은 하나님만 섬겨라-다른 종교금지, 이중종교, 배교금지,단군을 신으로 섬기는 것-일본의 신, 귀신 등--2계명은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해당됨.
하나님을 이 땅에 사람이 모양으로 만든다든지, 아니면 동물의 모양으로 만든다든지, 또 어떤 자연이 일부의 모양으로 하나님을 형상화시켜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천주교에서는 2계명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성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분명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라고 하면서 마리아의 형상도 만들었습니다.
참 재미 있는 것은 천주교에 가면 마리아가 아기예수님을 데리고 있는 형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터어키에 가니까 옛날 고대종교에 여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신이 아들신을 데리고 있는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님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거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권력으로 무조건 기독교로 개종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와 우상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종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을 그대로 가지고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신이 아들을 데고 있는 그 우상을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아들신보다 여신더 더 높다는 뜻이라고 합니다-그래서 당신은 영원히 어린 아들로서 남아 있으라는 말입니다-그리고 우리는 여신을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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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분명 우상숭배입니다.(그들은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2계명조차도 없애버렸습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15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
16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17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18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魚族)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19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21 여호와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진노하사 나로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22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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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길때, 형상화시켜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조각한다든지, 형상으로 만들 때 왜 만듭니까?
그것은 그 형상 속에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욕망을 표헌 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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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내 생각의 틀 속에서 제한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내 개인적인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만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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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내 생각을 틀속에서 제한시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내개인적인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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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형상을 우리가 만들지 안더라도--하나님을 내 생각의 틀속에서 제한시킨다면 그것도 2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또 내가 하나님을 내 욕망의 도구로 만들어 놓고, 내 탐욕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도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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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저는 오늘 이시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생각의 틀속에 제한시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지난 한주간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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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내 생각의 틀속에서 제한시키는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첫째는, 아무 벌을 주지 아니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진을 만들 때도 무조건 그런 분으로 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죄에 대해서는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하고 분명 항상 웃는 스마일상을 그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또 반대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무조건 벌을 내려주는 공포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너무나 오랫동안 고난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거나 풍성한 하나님이 아니라-고난만 주고 벌 만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
--이것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이야가 이렇게 생각햇습니다-너무 오랫동안 고난과 눈물가운데 잇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고난만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그때 예례미야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애가3장
32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니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38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40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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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하나님이 무조건 복, 무조건 화(벌)이 아닙니다--우리가 어떻게 행했느냐 따라서 화와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생각의 틀속에서 고정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형상화시키는 것이고, 2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내 생각의 틀속에서 제한시키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경험의 틀속에서 하나님을 제한 시키는 경우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경우가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별과 같이바다의 모래와 같은 자손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한 자녀도 없습니다. 또 그의아내 사라는 원래부터 불임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기때문입니다.
또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은 가나안따에서 나그네로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과연 이루어질까 생각햇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창세기 17장
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내 지식과 경험의 틀속에서 하나님을 제한 시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할수 없으면 하나님도 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으면 하나님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시켜서 생각해도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없던 생명을 있는 생명으로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안 되는 것도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보십시오-창17장 17절에서 이삭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심중에 비웃었습니다-또 사라도 그랫습니다-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비웃음조차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 비웃음이 하나님께 대한 경의의 웃음으로 변화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
이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할수 없지만 하나님은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특히 우리 자녀의 문제에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가진 아비--간절한 바램은 있었다-그래서 예수님게 데려왔다-그런데 무엇이라고하는가--할수 있으면 예수님 이아이를 고쳐주옵소서--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는 자녀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나는 할수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게 맡기면 내 자녀문제 남편문제-가정 문제를 해결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내 좁은 생각의 틀속에서 제한 시켜서 믿지 못했던 죄를 회개합시다-
그러나 혹 내가 하나님을 내 좁은 생각의틀속에 제한시켰더라도 하나님은 그 틀속에 계시지 않고--더 풍성하고 강력하게 역사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때도 우리가 기도한 것대로만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생각한 것 이상으로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이나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로도 형상화하거나 고정화시킬수 없는 지금도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계명-하나님을 이름으로 섬겨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오늘은 3계명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계명과 3계명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1계명은 하나님만 섬겨라
2계명은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다-그것은 하나님은 형상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3계명은 무엇인가? 2계명과 3계명의 관계가 무엇인가?
2계명은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자 말라는 것인데, 3계명은 하나님을 형상화시키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섬겨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형상화 시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2계명에 나오는 하나님을 형상화시키는 것과 반대입니다. 이름이란 보여지거나 잡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상은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여 지는 것으로 섬기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섬겨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시는 눈에 보이는 그 무엇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로 섬겨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이름으로 섬겨라는 말입니다(이름은 형상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신앙의 실패의 근본원인은 그들은 하나님 그 자체로만 섬기지 않고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눈에 보이는 무엇이 있을 때는 감사했지만 아무 것도 없을 때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구약신앙의 최고봉은 욥의 신앙과 하박국의 신앙입니다.
욥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물을 주시고 풍성한 것을 주어도 그것 때문에 교만치 않고 감사했는데, 또 그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려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라고 이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1장21b-22절).
또 하박국은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그 자체만으로 기뻐하며 감사한다고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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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눈에 보이는 형상--그 무엇 때문에--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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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이것 주십시오 저 것 주십시오 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을 내게 보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 자신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도 더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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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이름 그 자체로 섬겨야합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유대인들은 너무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여호와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성경을 기록할 때 여호와의 이름이 나오면 다시 몸을 씻고 정결케 하고 난후 기록했고, 또 읽을 때도 여호와라고 하지 않고, 주(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영어 성경중에서 킹제임스 성경--여호와란 말 대신에 주란 말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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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은 이 말씀을 너무 문자적으로 지나치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십계명을 볼 때 이 십계명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알고 지켜가야합니다.
--
먼저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는데, 망령되다란 무슨 말입니까?
1)이 말은 먼저 생각 없이, 의미도 모르고 말하는 것입니다--
2)또 망령되다란 말은 또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름답게 진실 되게 믿고, 고백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3)또 망령되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계명을 발전시켜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이런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첫째로 앞에서 망령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의 뜻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겠습니다(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모르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은 먼저 본질적인 이름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이름이 있습니다.
본질적인 이름은 주란 이름이고, 여호와란 이름이고, 하나님이란 이름입니다.
주란 온 세상과 우리의 모든 삶의 주관자란 뜻입니다.
또 여호와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있다고 해서 있거나 또 우리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 만들어 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살아계시는 인격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란 엘로힘이란 말로서 전능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이런 본질적인 하나님의 이름에 따른 사역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중요한 여호와의 성호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요리문답서에 있는 것).
a. 그 중에 여호와 이레(창22:14)는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양을 준비하셨을 때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준비해두신다).
b. 여호와 샤파(출15:26)는 출애굽 때 라마에서 쓴 물을 단물로 고쳐주셨을 때의 이름으로 "치료하시는 여호와"(시103:3)란 뜻이 있습니다.
c. 또 여호와 닛시(출17:15)는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의 이름으로 "여호와는 나의 기"란 뜻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살롬(삿6:24)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단을 쌓았을 때의 이름으로 "여호와는 나의 평강"이란 뜻이 있습니다.
d. 여호와 레아(시23:1)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요10:19)란 뜻이 있습니다.
e. 여호와 칫키누(렘23:6)는 여호와는 나의 의(고전1:30)란 뜻이 있습니다.
f. 또 여호와 삼마(겔48:35)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계21:3)는 뜻이 있습니다.
--
이것 외에도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우리의 주가 되시고 구원주가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또 우리 곁에 계시는 보혜사란 이름의 성령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것을 포함해서 그 외에 어떤 이름과 뜻이 있는 가를 연구하고 공부하고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름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가야만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그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2. 또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그 하나님의 이름을 이름답게 진실 되게 믿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 대표적인 경우가 마르다의 경우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어떻게 말합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지식적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려 했습니다-그때 마르다가 어떻게 말했습니다-예수님 내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고 했습니다-
-즉 머리와 입술로는 예수님이 주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놓고, 실제 삶의 현장가운데서는 예수님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지 않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시오, 또 지금도 살아계신 인격적인 분이시오,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습니까?
--
그렇다면 왜 낙심하십니까? 왜 좌절하십니까? 왜 한숨을 쉬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면서 내가 진정으로 그 하나님을 내 삶속에서 진실로 믿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합니다.
--
만일 그 하나님의 이름이 머리로만 인정이 되고, 내 가슴속으로 인정되고 고백되지 않는다면--그 하나님의 이름이 내 삶속에서 온전히 그 이름대로 여겨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한 의미입니다).
--

3. 또 마지막으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은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예에 더럽히지 않고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전에 옷로비사건을 통해서 나는 그 교회 권사입니다. 나는 그 교회 집사입니다-또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께 맹세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고 했습니다-그런데 나중에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4계명
구약에 "안식일"에 있어서 "안식한다"는 의미는 신약의 주일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구약(안식일)에 나타난 안식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서 주일의 의미를 되세겨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안식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머누하"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을 중단한다, 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평안을 누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안식과 주일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1.일을 중단한다ㅡ, 쉰다, 의미로서 주일의 의미입니다(육체의 쉼).
여기서 쉰다는 것은 첫째로 육체적인 쉼을 의미합니다. 또 이것은 6일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내내 놀다가 주일날 피곤하여 또 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성수의 문제는 오늘 이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 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주일에 쉰다는 것은 6일 동안 힘써 우리의 맡겨진 모든 일을 잘 감당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창조하실 때, 인간의 육체는 6일 열심히 일하고 하루 쉬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주일은 먼저 육체적인 쉼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쉼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이 쉼이 없이 일하는 것-욕심-결국 질병을 부른다--우리나라는 노는 문화가 없다----놀이문화--놀이도 중요하다. 학생들-오전 잠자게 해야한다)
둘째 또 우리는 쉼의 두 번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믿음의 쉼입니다).
6일 동안 우리는 행위의 법칙 속에 살아갑니다. 즉 6일동안 수고하고 땀을 흘린 만큼 수고의 대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일을 한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경성함이 허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6일 동안은 행위의 법칙 속에 열심히 일하다가 주일 하루를 쉼으로서" 하나님 이제 저의 이 산업(일하는 것) 주님 손에 맡김니다. 제가 아무리 수고한다 하더라도 주님이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일을 중단해야합니다..
--그리고 또 "내가 오늘 하루 일을 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대신 일해주심으로 더 잘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라고 주님을 믿는 마음으로 쉬는 것입니다(그냥 쉬는 것 아님-믿음으로 쉬는 것-).
rm리고 또 우리가 6일동안 일을 하면서도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제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지 아니하시면 되지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우리가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우리의 일들을 감당해야합니다(하루만의 문제가 아님)
세번째 쉼-아무 일하지 않음의 의미--일하지 않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출애굽기--창조때 안식을 기억--출20-창조기억//신명기5장에 나타난 안식일준수-출애굽의 구원을 기억하는 의미). 교사,성가대, 예배-모두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봉사해야한다---주일의 봉사가 단순한 노동이나 힘든 일이 아니라,,,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나누고 드러내는 일이 되어야한다--힘들어서는 안됩니다,,,구원의 은혜에 감사-주일날 일하고 피곤하다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은혜로 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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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두번째 평안을 누림으로 안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날 그냥 쉬는 날이라고만 생각해서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주일날 쉰다고 해서 교회도 쉬고(나오지도 않고) 집에서 하루종일 tv나 보면서 그냥 잠만 자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안식한다는 말이 쉰다는 말도 되지만,,평안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이 주일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안식과 평안을 누려야합니다.
어떤 교인은 인간적으로 너무 힘이 드니까, 주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예배도 드리지 않고) 산이나 들로 가서 안식을 누리려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하여 진정한 안식과 평안이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작년 휴가 때 2주일을 정말 산으로 들로 다니면 실컷 놀아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너무 영적으로 너무 피곤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 휴가때는 정말 조용하고 짧게 보내면서 오히려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진정한 참 안식(평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누려야합니다. (어느정도는 힘이 됨, 그러나)

--이와 같이 우리는 주일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여 그냥 인간적인 쉼만을 추구하면 그것은 진정한 주일의 안식(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그냥 노는 것).
--그래서 이날은 무엇보다 우리가 육의 쉼만 아니라ㅡ, 하나님 안에서의 영혼의 안식(평안)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1)첫째로,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일에 먼저 공적예배를 잘 드려야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진정한 영의 안식과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에배의 감격에 빠져야합니다. 그 힘으로 우리가 일주일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지 아니하시면, 저는 도무지 한 주간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하는 마음(사모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2)성도간의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잡담하면서 그냥 노는 것도 필요하지만, 말씀 안에서(진리 안에서) 교제가 있야 합니다.
우리는 주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값이면 그 많은 시간(주중엔 시간이 없다고 못함),,,,,성경을 공부하면서 말씀의 진리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안식과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합니다.
3)치유의 사역을 통해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주로 병든 자, 약한 자, 마음이 상한 자를 치유하시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치유의 사역을 안식일에 주로 하셨다는 것은 안식일에 관한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날은 가급적이면, 서로 치유해주고, 위로해주고 , 돌아 보아주고, 격려하는 날로 삼아야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진정한 주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날 영원한 천국에서의 안식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영원한 안식의 날을 기억하면서 소망가운데 보내어야하며(매주 천국의 기쁨을 누림)
또한 그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또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5계명(출20:12)
성경의 가장 중심적인 사상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크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은혜/인간-감사).
우리가 아무리 지식이 있고, 똑똑하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고, 신앙생활을 오래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감사 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십계명에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인 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서문이 있습니다.
"내가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너희를 이끌어낸 여호와하나님이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십계명은 단순히 의무감과 부담감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1계명에서 왜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겨야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깨서 우리를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1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여, 우리도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2계명에서 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하나님을 형상화를 시키지 말라).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이 그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돈 때문에, 또 명성 때문에 하나님을 섬 길 때가 많습니다.
또 그런 것들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와 사랑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3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앞에 나오는 형상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이것도 2계명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 그 자체만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은혜와 사랑만을 인하여 하나님을 섬겨라는 것입니다.
4계명에서 우리가 왜 안식일을 지켜야합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안식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1-4계명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보답하는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왜 4계명 뒤에 5계명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아는 인간이 되어지면 당연히 부모님의 은혜도 바르게 알고 보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특히 사춘기 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의 은혜만 베풀어 주셨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사춘기 때 겉으로는 부모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저희 집에 가보자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희 집이 너무 초라하고 누추해서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아버지는 왜 가난한가? 왜 더 좋은 집을 내게 주지 않았는가 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그동안 내가 원망하고 불평했던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사춘기 때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아직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사춘기다).
부모님이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
누구는 무엇도 해주고 무엇도 해주었는데, 왜 부모님은 내가 원하는 이것을 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부모님께 원망 불평하는 것은 사실 부모님이 내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내게 아무리 많고 좋은 것을 해주어도,,,내가 바라는 작은 그 한 가지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부모님께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헤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가장 값진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원망 불평하는 사람은 그 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불평하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이 내게 많은 은혜를 주셨지만,,지금 내가 원하는 바로 이것을 이루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내0목회 길-노처녀노총각-시집장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바라고 원하는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게 이미 베풀어 주신
그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5년 전에 저희 집에서 제게 지금 타고 있는 엑센트를 사주셨습니다. 그 당시 중고지만 정말 제게는 너무나 굉장한 것이었습니다(당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의전 차).
그래서 저는 처음 그 차를 사서 제일 먼저 아버지를 태워주었습니다. 그러니 저희 아버지도 너무나 신기한 듯이 뿌듯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아버지에게 마치 내 것으로 무언가 굉장한 것을 아버지께 해 드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그런데 제가 차를 타고 오면서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그 차가 누가 사준 차입니까? 아버지 돈으로 내게 사준 차가 아닙니까?
그런데 저는 마치 내가 내 것으로 아버지를 위해 굉장한 것을 해드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좋은 음식점에 가면 먼저 아내가 생각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제일 먼저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다음에 꼭 모시고 와야지?
제가 대구에 있을 때는 심방할 때 갔던 좋은 식당에 저희 부모님들을 거의 모시고 갔습니다.
지난번에 저희 어머님께서 오셨을 때도 저 남양주에 있는 심방할 때 가본 보신탕 집에 모시고 갔습니다(꽃박람회).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아무리 이렇게 부모님을 대접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대단한 것입니까? 또 그것이 자랑할 만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또 사실 부모님이 제게 해준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할 수 있는데,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없다 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격 파탄자, 이중인격자, 회칠한 무덤은 외식주의자입니다(고르반-유대인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핑계로 부모를 섬기지 않는 것).
우리의 인격이 하나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면 너무나 당연히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만일 내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외식이고, 가식이고, 거짓된 것입니다.
또 5계명의 말씀은 단순히 부모님의 은혜만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모님뿐 아니라, 우리에게 배움을 주신 선생님들, 교회 안에서 여러 신앙의 선배님들, 교역자들, 특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나이 드신 분들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하나님께 먼저 감사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 길러주신 부모님, 모든 것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교회를 세우시고, 그동안 끌어주신 분들께 감사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렇게 은혜에 감사하는 것을 알게 될 때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가운데 임하여 질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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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있듯이 여기서 부모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권위의 대상을 가리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인정하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권위를 인정하지 못한다면--그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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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권위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을 느낍니다-심지어 권위라는 말을 들으면 증오심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권위라는 말과 권위주의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권위라고 말할 때 대부분 권위주의를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른 말입니다-
--참된 권위란 내모든 권위가 위에게신 하나님에게 나온 것으로 여기고--그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내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권위주의는 이 권위가 마치 내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고--내 마음대로--권위를 주장하여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상처를 주는 것을 말합니다--
--
예를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의 권위가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참된 권위란 부모가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자녀에게 부모의 역할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인도해야합니다-이것이 부모로서의 참된 권위입니다--이럴때 당연히 자녀는 하나님의 권위로서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그런데 만일 부모가 하나님이 주신 참된 권위를 모르고--마치 모든 권위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권위주의)--자녀에게--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것을 강요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권위주의입니다--전도해보니까 대부분 할아버지들--자녀들-예수믿는데 죽어도 믿지 않겠다고 했다---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만 순종할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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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정부의 권세가 있습니다(롬13장).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롬13장1절)
-앞에 권세라는 말은 정부라는 말로 생각하시고-뒤에 나오는 권세를 권위라는 말로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정부들에게 굴복하라--그 정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정부의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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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정부가 잘못하고--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된 것을 지시하는데도 그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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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부의 권위가 하나님께로 났다는 말은 정부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세움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일 정부가 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권위주의적으로 나와서 말씀에 위배된 것을 지시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불복종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부의 권위는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정부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하고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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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일 정부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정당하게 국민에게 요구했을때 --우리는 그 정부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로 여기고--복종해야하는 것입니다---(예를들어 세금이라든지-교통법규--또는 나라의 법령들입니다--그런 정당한 것들에 대해서는 잘 지켜나가야합니다-특히 교통법규--위반하면 돈 내야한다-봐 달라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올해는 대통령선거가 있습니다--
유럽에서 덴마크가 제일 행복하게 느끼는 나라라고합니다-이유는 물으니까 정부때문이라고 합니다-또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을 보면 심지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간다고 합니다-그 말은 그만큼 정부가 권위주의가 아니라 정부의 참된 권위를 가지고 나라를 잘 섬긴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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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는 대부분 이야기가 현재의 대통령이야기와 또 다음의 대통령이야기입니다-
-사실 대통령이 있지만 없는듯 해야 잘 살고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는 것은 그 만큼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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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통령--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하는 대통령이 세워져야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자신의 권위를 남용하여 자기 마음대로하여--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대통령이 아니라--대통령의 권위가 하나님께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대통령이 나오도록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 교회가 과거처럼 누구를 공개적으로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성경말씀대로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 나옴을 믿고--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할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앞에서 각자의 신앙 양심대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권위주의가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권위가 설수 있는 정부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이시간 우리가 기도할 때--이땅에 바른 권위들이 회복되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가 회복되고-교회에서도 교회지도자들의 권위가 회복되고--또 나라에서는 정부의 권위가 회복되기를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이런 바른 권위가 회복될때 이땅에 하나님의 권위도 회복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계명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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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계명(출20:13) 살인하지 말지니라
오늘 말씀에 살인하지 말찌니라 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죽이지 말라는 말씀과 구별이 되어야합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살생을 금한다고 합니다. 또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이 계명을 잘못해석해서 전쟁터에 나가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해서 군대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전쟁에서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이면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안식일을 어기거나 부모를 거역하는 경우에도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구약성경에는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은 죽이라고도 명령을 하십니다.
--여기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과 죽이지 말라는 말씀은 히브리어에서도 다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불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러니까 합법적으로는 죽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합법적인 사형에 대해서는 우리가 찬성을 합니다(어제 학교학생들을 18명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교사에게 사형언도가 내려진 것을 보았습니다).
또 부득이한 경우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합법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절대 사람을 살인해서는 되지 않는다고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2장7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명은 자연에 의해서나 또 우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창9: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그래서 살인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직접 살인하는 경우와 함께 좀 더 확대해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합니다.
그것은 첫째--살인하는 것만 아니라 사람과 싸우면서 그 사람의 육체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이 말씀에 해당합니다.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사람을 치고 때리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대구에 있는 어떤 분은 가는 교회마다 사람을 칩니다. 그래서 본 교회에서도 그것 때문에 나오게 되고, 나중에 다른 교회를 옮겨서도 사람을 쳤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개척교회를 한다고 또 다른 교회를 갔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치고 때려서 다른 사람들 육체에 주는 일이 없어야합니다.(언론에 보면 어떤 가정에서 부부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랑해야하는 아내를 치는 경우도 살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몸에 상처만 아니라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주고 나중에 생에 의욕조차도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우리 자신의 몸과 생명을 대해서도 이 말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우리 자신의 몸에 상처를 주거거나 또 자신의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든다고 한다면 술이나 담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몸에 상처를 준다면 그것도 6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또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자살이 정당화되거나 미화되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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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말씀은 낙태의 경우에도 해당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얼마 전에 출산을 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가보았습니다. 지금 병원에 다니면서 수술과 치료를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우리가 임의로 제거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시139:13절에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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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어떻게 확대해서 해석하셨습니까?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로서 살인하는 경우를 더 확대 해석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사람에게 노하거나 화를 내는 경우입니다. 즉 내가 직접 사람을 때리거나 치지 않더라도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도 이 말씀에 해당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미련한 놈이라고 말해서 말로서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이 말씀에 해당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것조차도 이 말씀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조금이라도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으면 그 관계를 청산하고 예배를 드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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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인하지 말라는 이 말씀을 이렇게 확대해서 해석하시고 적용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동기 때문입니다.

조승희가 무고한 30여명의 생명을 죽이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여러 사람들과 자신의 생명을 죽이고 난 다음에 그가 살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그 사람들을 죽이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살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살인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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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에 옮기기 전에 내 마음가운데 가지고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혹 우리 마음속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정말 그 사람은 보기도 싫고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을 보면 화가나고 또 그 사람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이미 살인의 단계에 들어 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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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겉으로 사람을 치거나 또는 죽이는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더라도--그런 마음의 동기와 조짐이 보이면 하나님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감정이나 행동으로 옮겨지면 그것은 마치 초가집에 작은 성냥불을 지피는 것이 같이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의 단계에서부터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살인 죄 인줄 알고 끊어 버려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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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절대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라도 내 마음속에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예배시간에 절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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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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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주일과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이것입니다.
금요일 토요일에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사람들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있거나 화나는 마음이 있으면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두고 하나님앞에서 예민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그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 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완전히 정리가 되면 갑자가 막혔던 모든 말씀들이 풀려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지장이 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 여러분 마음가운데 그 어느 누구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없이 해야 합니다.
--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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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있는 어떤 정당하고 의로운 분이라고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잘못된 죄에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을 증오하거니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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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사랑하는 말씀으로 결론지어져야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더 적극적으로 온전하게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게 되고 증오하게 되고 언젠가는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 그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무관심도 죄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6,7,8,9,10계명-부정적 금령-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