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비전과 하나님의 인도(빌2:13)
1.여러분들은 인생의 최대의 비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통 내 인생의 최대의 비전이 무엇이냐 했을 때 대개 내가 무엇이 되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대학생 모임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거기서 생애의 비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학생은 교사라고 했습니다. 또 한 학생은 의사라고 했습니다. 교사라고 말한 학생은 교대를 다니는 학생이었고, 의사라고 말하는 학생은 의대를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생애비전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대부분 내가 무엇이 되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가 무엇이 되느냐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벧후3: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그러니까 내가 교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목사가 되는 것이 우리인생의 최대의 비전이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보았을 때 이제 무엇이 되느냐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되느냐 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우리교회의 교육도 이제는 내가 무엇이 되느냐에 초점을 두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초점을 두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교육이 지식교육이 아니라 성품교육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치부 아이들부터 제일 먼저 기독교적 성품교육이 되어야합니다. 또 부모들이 먼저 부모로서의 성품교육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하반기에 먼저 부모성품학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생애최대의 비전으로 우리는 누구의 성품을 닮아야합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합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예수님의 온유하신 성품, 겸손하신 성품, 인내하시는 성품, 절제하시는 성품, 충성하시는 성품, 경청하시는 성품을 닮아야합니다. 그래서 제 인생 최대의 비전도 예수님 닮은 것입니다. 또 제 인생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예수님 닮은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목회를 잘 했다 하더라도 제가 예수님을 닮지 못했다면 저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 무엇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 삶 가운데 예수님을 닮았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의 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9월 달에 직분자 선출이 있습니다. 직분자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도 성품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의 성품을 닮았느냐 고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의 최대의 비전은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2.그런데 우리가 생애비전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 위해 나를 구원하셨는가?” 또 “나는 이 세상에 무엇을 하기 위해서 태어났는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러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처음에 신학교에 갈 때 정말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라는 꿈을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아무리 잠을 자도 그런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꿈을 꾸면 개가 쫓아오는 꿈만 꾸었습니다.
/한번은 대학4학년 여학생들에게 너희들을 향하신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같이 사모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느냐 물었습니까? 그랬더니 어느 기도원에 가니까 기도원 원장님께서 그렇게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어떤 꿈을 통해서 알기를 원합니다.
또한 특별한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서 이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1)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나의 욕망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롬1:15).
2)가까운 교회공동체의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절한 마음으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분명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목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신이 목사가 되고 싶어도 무조건 그것이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아무리 목사가 되려고 해도 그가 속해 있는 교회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가려면 반드시 교회의 추천서가 있어야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학생이 고등학교 때부터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면 신학대학원에 가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든 모든 교회의 사람들은 그 학생이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4년을 따라다니면서 신학대학원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학대학원에 갔습니다. 결국 그 학생 때문에 신학대학원만 아니라 교단적인 문제까지 되었습니다. 중간에 학교를 그만두고 지금은 평신도로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까운 교회의 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3)또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그것을 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불타는 사명감이 생기는 것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가 어떻게 말을 합니까?
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말씀)를(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저에게도 항상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고 하면 제 마음이 불붙은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내가 그것을 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불붙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4)또 기도할때마다 나의 눈물이 머물러 있는 곳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수산궁에 편안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성벽이 무너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때 느혜미야는 느1장 4절에서 “내가 이 (예루살렘성벽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편안한 왕궁에 있었지만, 그의 눈물은 무너진 예루살렘성벽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에게 주신 눈물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예루살렘성벽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기도할때마다 제 마음가운데 내 눈물이 머무는 곳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눈물이 머무는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결혼문제로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저의 눈물이 머물러 있습니다. 또 방황하는 2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저의 눈물이 머물러 있습니다. 또 질병으로 인해서 고통당하시는 성도님들에게 저의 눈물이 머물러 있습니다. 또 다음세대를 이끌고 갈 젊은 세대들에게 저의 눈물이 머물러 있습니다. 또 생을 끝을 앞두고 있는 성도님들에게 저의 눈물이 머물러 있습니다.
제가 연초에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까? “하나님이여 제가 어느 때까지 이 눈물을 흘려야합니까?” 그때 요한계시록 6장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순교자의 수가 찰 때까지니라”. 순교자의 수가 찰 때 비로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내 눈물이 차면 그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제 카톡에 연초부터 지금까지 “네 눈물이 찰 때까지”라는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기도할 때 마다 여러분들의 눈물이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눈물이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있습니까? 교회에 새로 나온 새신자들에게 있습니까? 우리 주위에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내 눈물이 이 땅이 아니라 저 선교지에 있습니까? 내 눈물이 머물러 있는 곳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가까운 교회사람들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내 마음가운데 불붙는 사명감을 통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내 눈물이 항상 머물러 있는 곳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직업과 연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하고 싶은 불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찬양하고 싶은 모든 사람이 전업 찬양사역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찬양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누구를 돌아보는 상담사역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무조건 상담을 직업으로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도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 삶이 먹고 사는 일에만 끌려 다니는 삶입니까? 아니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끌려 다니는 삶입니까?
또 내 삶이 아무 생각이 없이 바쁜 일에만 정신없이 끌려 다니는 삶입니까? 아니면 나의 내면세계에서 나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입니까?
이것에 대해서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삶이 바쁜 일에 정신없이 끌려 다니는 삶을 산다면 내 삶은 성공을 했더라도 공허하고 허무한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내면세계에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세미한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삶은 참된 평안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삶이라”고 했습니다.
//바쁜 일에 정신없이 살아가지 마시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요셉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신약시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그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꿈은 요셉이 장차 애굽의 총리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은 요셉이 꾸고자 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꿈을 꾸었을 때 그 꿈이 장차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꿈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인 말씀으로 “네가 장차 애굽의 총리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구체적인 음성으로 “너는 앞으로 무엇이 되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되느냐 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에 요셉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낮아지고 남을 섬기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또 그를 팔았던 형들을 용서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예수님을 닮은 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만드신 다음에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계신 것만 아니라,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요셉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요셉은 꿈을 자랑하다가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또 애굽에서 바로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려고 하다가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바로왕의 떡 맡은 관원의 꿈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바로가 꿈을 풀지 못하자 바로의 떡 맡은 관원이 요셉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바로의 꿈을 풀어주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과 구체적으로 함께 하신 것은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요셉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순간에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모든 삶 가운데서 요셉과 구체적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이 청소년 시절에 애굽으로 팔려가지 않았다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또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를 한 것은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가정 총무도 가정의 재산관리고, 또 애굽의 총리도 애굽의 재산관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준비시켜 주신 만큼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또 요셉이 억울하게 가게 된 감옥은 바로 궁중의 죄수를 가두는 궁중감옥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궁중감옥에서 궁중의 모든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요셉이 술 맡은 관원의 꿈을 풀어주었을 때 그때 요셉의 나이가 28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가 30살입니다. 요셉이 28살에 술 맡은 관원이 요셉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어도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나이가 30살이 되었을 때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요셉은 특별하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와 함께 하셨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편 80편 1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80:1.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구약시대에 요셉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의 삶도 요셉과 같이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이스라엘은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들입니다. 요셉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을 지금도 요셉과 같이 인도하고 계십니다.
//저는 강도사 3년 동안 성경신학을 공부하면서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유학의 길이 열리지 않았고, SFC간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간사를 하면서도 “내가 왜 간사를 하는가? 내가 왜 이리로 왔는가?” 그리고 빨리 나갈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후에 학생들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사님은 SFC간사를 하기 위해서 정말 준비를 많이 하셨네요” 라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제가 간사를 하기 위해서 성경신학공부를 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간사를 끝날 즈음에 하나님은 저에게 하경이를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왜 이 아이를 주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님들의 아픔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 아이를 주셨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하신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