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어떻게 하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는가?(왕상9:1-9)
오늘 이 시간에는 교회가 어떻게 하면 세상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는가? 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전도를 시작합니다. 전도할 때 제일 부담스러운 것은 요즘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이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 자체는 부끄럽지 않지만 세상에 비친 교회 모습들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이번 주 월요일 큐티 본문을 보면 왜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대략 이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무리 높은 성전을 지을지라도 네가 내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너희가 이 세상에 이야깃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6. 그러나 너나 네 아들들이 만약 나를 따르지 않고 등을 돌려 내가 네 앞에 둔 내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가서 섬기고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에게 준 그 땅에서 그들을 끊어내고 내 이름을 위해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을 네 눈앞에서 던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8. 그리고 비록 이 성전이 지금 이토록 으리으리하더라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여호와께서 이 땅과 이 성전에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 하고 비웃을 것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역사 가운데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솔로몬 말년에 솔로몬은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라가 2개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왕들도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구약 시대 때는 눈에 보이는 다른 신들을 섬겨서 이스라엘이 세상에 조롱거리가 되었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시대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이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 우리 교회들의 우상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첫째, 물질이 이 시대의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에 단순하게 물질의 축복을 받은 그것을 무조건 성공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도 똑 같다라고 합니다. 교회도 결국에는 돈이 물질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교회들이 물질이 돈이 하나님보다도 더 우선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둘째, 오늘 이 시대의 우상은 이데올로기 즉 이념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수의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진보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수적인 생각이 완전히 절대적입니까? 아니면 진보적인 생각이 절대적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수적인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진보적인 생각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생각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고, 진보적인 생각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에 대해서 서로 타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보주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략 나이가 드신 분들은 보수적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대략 진보적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보수, 진보보다 하나님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과연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가정에 대해서는 성경에는 철저히 보수적입니다. 동성애와 같은 가정을 해치는 그 어떤 것을 성경에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는 약자에 대해서는 아주 진보적입니다.
여러분 혹시 구약성경에서 약자보호법을 아십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 나그네 고아와 과부와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너희들이 고아가 되고 과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희년법을 아십니까? 50년이 되면 모든 재산을 원래대로 돌려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주 진보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보수도 절대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고, 진보도 절대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교회의 우상입니까?
보수면 무조건 절대적이라고 하고 진보면 무조건 절대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수면 무조건 절대적이라고 하고 진보면 무조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과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왕상10:9.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스바의 여왕이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정의(체타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정의란 법에 의한 공정한 재판을 통한 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의 정의(체타카)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세상의 정의란 당리당략에 의한 정의입니다. 내 편 네 편에 의한 정의입니다. 그래서 우리 당이면 무조건 의롭다고 합니다. 우리 편이면 무조건 의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당이면 무조건 불의라고 합니다. 남의 편이면 무조건 불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정의(체타카)가 무엇입니까? 법에 의한 공정한 재판에 의해서 내 편이라도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또 공의(미쉬파트)가 무엇입니까? 공의란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같은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사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공의/미쉬파트)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지금 스바의 여왕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네 편 내 편이 아니라 법에 의한 바른 재판에 의한 정의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서 가난하고 약한 자라를 따뜻하게 돌아보는 공의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솔로몬이 보수라 할 수 있습니까? 진보라 할 수 있습니까?
오늘 지금 이 시대라고 한다면 솔로몬이 창기와 같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공의를 행했기 때문에 진보라고 할 것입니다.
또 오늘 지금 이 시대라고 하면 솔로몬이 공정한 재판에 의한 정의를 행했기 때문에 보수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솔로몬이 지금 이 시대처럼 한쪽으로 치우신 생각을 가졌다면 스바의 여왕은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믿지 않는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 때문에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습니까?
솔로몬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지혜는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생각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진보적인 생각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습니까? 보수면 무조건 옳고 진보면 무조건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오늘날의 교회가 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교회가 한쪽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각자의 입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절대적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적대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하는 우상을 섬기면 너희가 아무리 높은 성전을 지어도 너희가 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웃음거리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우상이 없는지 자신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 이 시대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자아가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기분과 감정을 더 우선하지 않습니까? 내 하나님보다 내 만족을 더 우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이 내 기분과 감정에 맞지 않으면 그 말씀을 배척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나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도 우상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의 우상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길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 곳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은 항상 어디에 가 있습니까?
성전을 향하여 있습니다(왕상 9장3절— 내 눈과 마음이 항상 거기(성전)에 있으리라).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눈은 여러분들이 있는 그 모든 곳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무엇을 살펴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물질이 우상이 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내 생각이 우상이 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내 자아가 우상이 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의 우선권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무엇을 가장 염려하고 있습니까? 걱정하고 있습니까? 청년들은 내 진로를 가장 염려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 염려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우상들을 다 내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을 다 하나님깨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이 시간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