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60)역사적 부활과 성경적 부활(요20:1-10)
여러분 가운데 혹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고 싶다는 분이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면 내 신앙이 더 좋아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9절까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안식 후 첫날은 지금으로 하면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부활의 찬송을 불러야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서 죽으실 때도 끝까지 함께 했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와보니까 예수님의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막달라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에게 달려가서 사람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막달라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고,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3절에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인 사도 요한이 나가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갑니다.
3절입니다.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라고 합니다.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가는데 누가 더 빨랐겠습니까? 사도 요한입니다.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왜 사도요한이 더 빨리 갔겠습니까? 나이가 어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빨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사도 요한이 먼저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덤 속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6절과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사도 요한은 무덤에 와서도 바로 들어가지 않았는데, 뒤에 온 베드로는 따라와서 바로 무덤에 들어갑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성격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격에 소심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 먼저 왔지만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격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 보니까 세마포가 놓여 있습니다. 또 머리에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쌋던 그대로 놓여 있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잘 보시기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간 줄 알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갔다면 시체를 쌌던 세마포도 함께 가져갔을 것입니다. 사실 시체와 세마포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마포로 시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마포가 그대로 놓여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만 그대로 세마포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 방에도 들어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마포를 그대로 두고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그래서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베드로가 보고 난 다음에 무덤에 먼저 갔던 사도 요한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사도 요한이 무엇을 믿었다는 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갔다면 세마포와 수건도 같이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마포만 그 곳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9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분명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이 더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믿더라도 무엇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면 내 신앙이 더 좋아지겠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부활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 옳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데, 부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정말 우리의 죄를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롬4장 25절에 “롬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사해주기 십자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이제 그를 따라서 부활의 둘째 셋째 열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육신의 질고를 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희망이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는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육신의 질병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또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도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종말에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육신의 질병이 없습니다. 장애가 없습니다. 죽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영생하는 몸을 입게 된다는 이 영광스러운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성경적인 의미가 무엇입니까?
3)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죽음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세가 죽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그 어떤 과학기술이 죽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로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절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 너희 마음의 눈이 밝아 하나님께서 이미 너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 주신 능력은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을 이미 베풀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베풀어져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고전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사망에 대하여)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부활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천만번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단순히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