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능력(고전1:18-24)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전기의자를 목에 걸고 다닌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또 모임을 할 때마다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말씀히시겠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또 아주 거리끼는 일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인 줄 아십니까?
초대교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악세사리로 목에 걸고 다닙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초대교회 때 전기의자와 같았습니다. 가장 흉악한 죄인을 죽이는 사형도구였습니다.
또 초대교회 당시 세상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모일 때 마다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자들이라고 오해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모일 때 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라고 하고 마시고 이것은 예수님의 살이라고 하고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또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절대 고상한 철학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헬라인의 입장에서 십자가는 정말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십자가는 어떤 것이니까?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이방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찬식이 있습니다.
성찬의 제일 중요한 의미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고전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념하라는 말은 '기억하라'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살을 상징하는 떡을 떼어서 먹음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성찬식 때나 또 예배를 드릴 때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예수님은 성찬식을 행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고 하십니까?
왜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까?
1.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 때 이런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제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내 삶속에서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내 삶속에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네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느냐, 네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를 평생 붙들고 살라”고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오늘 차를 타고 오는데 갑자기 내 앞차에서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크게 다쳤습니다. 그래서 “아 내가 앞차를 타고 있지 않게 한 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차를 타고 사고가 난 사람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랑하심으로 큰 사고에서 우리를 막아주십니다. 그것도 분명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단순히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좋은 일들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조금만 사고를 당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내가 조금만 병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여러 가지 일들이 생깁니다. 병이 걸리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격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가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기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지금도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지금 당장 내 병이 고침을 받지 않았어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금도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성찬에 참여하심으로 다시 한 번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고 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왜 우리가 십자가를 매일 기억해야합니까?
2)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여인처럼 우리의 잘못 때문에 실수하거나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어려운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안돼"라고 하고 자포자기합니다. 또 이런 것이 거듭되면 사람은 실패의 운명론에 빠집니다. "나는 안되는 놈이야--별수 없는 놈이야--나는 이 땅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자로 운명지어졌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납한다하더라도 사람들이 우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너는 실패자야,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안돼"
무엇보다 우리는 그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실패했단 말인가? 도무지 내 양심에 거리껴 감히 예수님 앞에 못서겠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 곁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이 너를 정죄하고 네 양심이 너를 정죄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수하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백번이라도 넘어진 우리에게 단 한마디의 말씀을 하십니다. “괜찮아 앞으로 다시는 그리지 않으면 돼, 다시 용기를 내, 다시 시작해, 넌 할 수 있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줄께 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하면서 매일 느끼는 것은 그 말씀 앞에서 날마다 쓰러지고 넘어지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크고 깊은 좌절감과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안돼--나는 절대 말씀대로 살 수 없어---아무리 노력해도 또 말씀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는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럴 때 마다 내 마음에 항상 용기를 주었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다시 그러지 않으면 돼"라고 말씀 하십니다
정말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마치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여기저기에 실패와 좌절의 올무를 놓습니다. 뒤에서 숨어서 가만히 엎드려서 우리가 그 올무에 걸려서 넘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실수하여 넘어지면 사탄의 왕국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또 동네방네 다니면서 우리의 실수를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올무를 점점 더 크게 조이려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와 실수를 인한 고통의 멍에를 끊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피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담궈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인해 사유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건망증을 아십니까?
우리가 같은 죄를 가지고 99번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제 100번째입니다. 이제 너무 죄송해서 감히 예수님께 회개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나옵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 이번이 처음이구나“고 말씀하십니다. 100번째의 죄로 보지 아니하시고, 첫번의 죄로 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건망증입니다. 우리는 죄를 기억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회개하고 용서한 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과거의 죄의 올무가 아닙니다. 과거의 실패의 올무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의 행동으로 우리의 미래의 삶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그 사람은 과거에 저런 사람이야, 그러니 앞으로 저럴 수밖에 없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과거의 삶이나, 심지어 현재의 내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비록 내가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았고, 또 현재에도 자주 넘어지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를 보십니다.
비록 내가 아직도 온전치 못한 삶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내 마음의 바른 태도만 가지고 있으면,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태도만 가지고도 우리의 미래를 봐 주십니다. 그리고 격려해주십니다.
"지금은 네 모습이 아직 그런 모습이지만--네 마음의 중심을 내가 알고 있어--너는 반드시 앞으로 네가 마음에 소원하는대로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떤 이유로 인해 실수하시거나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절대 좌절하시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여러분에게 날마다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 그러지 않으면 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힘을 입어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새롭게 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왜 우리가 십자가를 매일 기억해야 합니까?
셋째, 십자가는 하나 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엡1장 13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엡1: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은 무엇이었습니까?
15절에 보시면 법조문으로 계명의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인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이 율법은 구원받기 위한 수단으로서 율법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한 율법도 있습니다. 이것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율법은 구원 얻기 위한 율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율법은 절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폐하여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한 율법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내가 그 율법을 지켰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율법이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그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이제 구원받기 위한 율법은 폐하여졌습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하나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이미 하나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성찬식의 한 떡을 먹고 한 잔을 마실 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하나가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왜 우리가 십자가를 매일 기억해야 합니까?
4.십자가는 사탄을 이기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가장 큰 공격무기는 죄입니다. 우리로 끊임없이 죄를 짓게 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값으로 사망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서 이 세상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도 그 죄의 권세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사망의 권세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우리를 대신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의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사탄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크게 세상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어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싸우게 만듭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불안을 줍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줍니다. 할 수 없다고 하는 마음을 줍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줍니다. 절제하시 못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사탄이 주는 두려워하는 마음, 할 수 없다고 하는 마음,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 절제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습나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할 수 없다는 마음을 주고 미워하는 마음을 주고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을 주는 사탄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패했고, 이미 죽었음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날마다 사탄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