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충성하라(계2:8-11)
몇 년 전에 중국의 태산에 있는 태산신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직접 중국의 지하교회를 가보고 느낀 점은 중국의 지하교회가 한국교회보다 영적으로 더 부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으로 보면 분명 한국교회가 더 부자입니다. 중국공산당은 교회에서 헌금을 못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지도자들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니 중국교회는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의를 하는데, 교실 창문에 유리가 없고, 비닐로 막아 놓아서 바람이 부니까 금방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중국 공산당이 인정하는 교회를 가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분명 중국교회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우리보다 더 부요한 교회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교회였습니다. 9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당시 서머나는 황제를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황제를 숭배함으로 로마로부터 많은 경제적인 유익을 얻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황제숭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서머나 사람들은 서머나교회 성도들을 경제 공동체에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서머나교회 성도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와 결탁해서 서머나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유대인을 통한 환난을 내가 안다고 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로 인한 경제적인 궁핍을 내가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너는 부요한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서머나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사탄의 무리들로 인한 환난이 있었습니다. 또 그 환난으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교회가 서머나 교회였습니다.
--중국 지하교회가 그렇습니다. 대만 선교를 오래 하신 유환준 선교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중국교회를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은 중국 공산주의가 중국교회로 보면 나쁜 것이지만, 오히려 영적으로 더 큰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마치 수족관에 게를 넣으면 고기가 도망치려고 하다가 더 생기가 있듯이 중국교회가 그렇습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어려움이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또는 경제적인 가난이 있습니까?그것이 오히려 영적으로 더 부요할 수 있는 기회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서머나 교인들을 향해서 주님은 어떤 분으로 나타나십니까?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요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시는 분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 너희들을 괴롭히는 사탄의 무리들을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말씀입니까? “네가 말할 수 없는 고난과 환난을 당했느냐 나를 보아라 나는 너는 너보다 더 극심한 환난과 고난을 격었다. 그래서 죽었었다. 그러나 그 환난과 고난 가운데서 승리하여 살아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네가 당하는 그 모든 환난과 궁핍을 내가 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지식적으로 아는 앎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앎을 말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같은 일을 격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같은 일을 격었지만, 그것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이 아픔을 격은 사람을 가장 잘 위로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죽었지만, 살아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환난에서 승리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서머나교회를 향해서 전혀 책망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칭찬도 들었지만, 나중에 책망도 같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피아 교회와 서마나 교회만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만 들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서머나 교회 사람들에게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환난 당하는 교회가운데 예수님은 책망하지 않습니까?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책망 할 것이 있어도 위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서도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있어도 그들을 책망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환난과 궁핍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이 책망하지 않은 이유는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궁핍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도록 합니다. 사람이나 환경을 의지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래서 환난과 궁핍은 우리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게 해서 주님 앞에서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로 만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환난과 궁핍은 우리로 죄를 지을 틈도 없게 만드십니다. 사람이 언제 죄를 짖습니까? 편안하니까 죄를 짖습니다. 대개 7계명을 어긴 목사님들은 목회에 성공하니까 죄를 짓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환난과 궁핍은 우리는 거룩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은 책망하지 않고 칭찬하시고, 또 이제 권면하십니다. 그 권면이 무엇입니까? 10절입니다.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주님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앞으로 편안한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더 큰 환난을 닥칠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환난 가운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리고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0일 동안 환난을 받는다는 말은 그 환난이 영원히 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환난과 궁핍도 다 주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궁핍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 환난에도 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들에게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 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죽도록 이란 죽기까지입니다. 또 생명의 면류관이란 미래에 받게 될 영생의 면류관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면 미래에 영생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미래에만 받는 면류관이 아니라 현재에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교제함으로 현재에 누리게 되는 영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현재에 고난이 있지만 우리에게 주님으로 말미암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둘째 사망의 해란 지옥의 고통을 말합니다. 이렇게 복음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현재에 고난이 있지만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이것도 단순히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에게 이 땅에서도 그 어떤 사망의 권세가 결코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못하도록 해주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예언대로 서머나 교회는 더 큰 환난이 있었습니다.
ad 155년 경에 당시 서머나 교회 감독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었습니다.
그는 155년 서머나에 살던 유대인들의 고소로 빌라델비아의 성도 11명과 함께 불에 타는 순교당했습니다. 그는 로마 총독으로부터 "가이사는 주(主)다"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이를 거부하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를 모른다 하라 그러면 내가 맹세코 너를 놓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 폴리갑은 그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믿어왔는데 그는 나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으셨다. 하물며 나의 주인이시며 왕이요 구세주인 그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헛수고를 하고 있소. 내가 가이사의 운명을 걸고 맹세하노니 내가 지금하는 말을 똑똑히 들어 두시오. 나는 그리스도인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총독이 "그대가 사나운 짐승을 풀어 너를 찢게 할 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보았으니 이제 화형에 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단호하게 "그대는 한 시간 정도면 타다가 꺼져버릴 불로서 나를 위협하고 있으나 악인을 위하여 예비된 장차올 심판과 형벌의 영원한 불은 모르고 있소 뭘 주저하시오. 원하는대로 곧 준행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했습니다.
지금도 서머나(이즈미르)에 가면 폴리갑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저도 가보았습니다. 그 폴리갑 기념교회에는 폴리갑이 화형당하는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교회당 벽에는 유명한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폴리갑 순교화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의 구석에는 손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폴리갑의 순교 장면을 지켜보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한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화가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서머나 교회처럼 환경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부요하지 못할지라도 영적으로 더 풍성하고 부요한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서머나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관점과 예수님이 교회를 보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돈이 많으면 부자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가난한 서머나교회를 영적으로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상은 이라는 말이 원어로 “그러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보는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부자였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는 가난한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는 고난이 있는 교회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난이 있지만 서머나교회가 영적으로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큰 환난과 시험이 없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서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계3:17).
또 우리는 교회가 수적으로 많으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수적으로만 많으면 부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수적으로 적으면 좋지 않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은 계3정 9절에서 “계3:9하--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합니다. 여기서 작은 능력에 대해서 성경학자들은 수적으로 작은 것으로도 해석합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수적으로 작은 교회라도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그 이름대로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될 때 예수님은 칭찬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 땅의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예수님이 바라보는 교회에 대한 생각은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교회가 돈이 많으면 안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적으로 많으면 무조건 부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가 돈이 많으냐 적으냐를 보시지 않습니다. 교회가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를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고난이 있으냐 없느냐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교회가 좋다고 하고 그렇지 않다고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돈이나 숫자가 아니라 그 교회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느냐에 따라서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리 그 교회가 가난하고 수적으로 작아도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그 교회가 가난하고 수적으로 작아도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대역전극이 일어납니다. 세상에서 부자라고 생각하던 교회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너희는 가난한 교회라고 판단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생각하던 교회에 대해서는 너희는 부자교회라고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절대 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절대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사람들을 가지고 낙심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를 가지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모여서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다면 그것으로 잘했다고 평가하십니다.
이 시대 가난은 도리어 영적인 축복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 고난이 영적으로는 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또 사도바울도 어떻게 말합니까?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예수님 때문에)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예수님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혹시 육신적으로 가난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인 부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서머나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 상반 을 보시면 “10상.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0일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기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기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교회가 사탄의 무리들로 인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이 영원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 고난에도 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 그 고난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귀가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라. 그러나 그 고난이 영원하지 않다, 너희가 잠시 동안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고난도 결국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전10장에서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서머나 교회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감당할 만하니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감당할 만한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시험을 받을 때 처음에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시험을 허락하실 때 반드시 그 시험을 이기고 남는 은혜를 함께 준비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시험만 허락하신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와 함께 광야를 이길 수 있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시험은 감당할 만한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도무지 우리가 그 고난을 이길 수 없을 때 하나님은 그 고난도 통제하십니다. 그래서 사탄이 아무리 우리를 시험해도 더 이상 우리의 믿음을 흔들게는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시험이 있습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시시 바랍니다. 그 모든 고난도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함께 반드시 그 고난을 이기고도 남는 은혜를 함께 준비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모든 고난들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넉넉히 이기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서머나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한 일에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 하반절을 보시면 “10하--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서 죽기까지 충성한 것에 대해서 보상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초대교회 성도들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까? 죽기까지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내세에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급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성경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행한 일에 상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도 “고전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자신에게 있는 사도의 권리를 다 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에게 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하여 버린 자는 이 땅에서도 보상으로 받게 된다고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복음을 위하여 땅을 버린 자는 이 땅에서 100배나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박해도 같이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세에 영원한 생명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천국에 시골에 가난한 목사님이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부끄러워서 예수님의 얼굴도 처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 문 앞에서 총회장가지 한 큰 교회 목사님이 들어오시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예수님 큰 교회 목사가 왔습나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체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시골교회 목사님은 맨 발 벗고 달려가 안겨주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영광을 다 받고, 저 천국에서 상급 없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영광을 받지 못했지만 저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땅에서만 아니라 저 천국에서도 상급을 받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