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강해(30)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는 무엇인가?(요11:1-7)
예전에 성수대교가 무너진 큰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죽었데, 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까? 예 분명히 있었습니다.
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까? 예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어떤 교회에서 한 청년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 청년은 집안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래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청년과 그를 인도한 청년이 상품백화점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인도했던 사람과 그 청년이 그 사고로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고를 당하여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우리가 이런 사고들을 보면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생각은 그런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눅13장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던 갈릴리사람들이 빌라도의 군병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다가 죽임을 당하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그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 죄에 대한 징계로 죽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눅13:1. 그 때 마침 (제자 중에서)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그리고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눅13: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13: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당시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명의 예루살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 사고를 두고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죄에 대한 징계로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예수님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죽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은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는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아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사실 가장 괴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자녀가 그렇게 예수를 잘 믿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사고를 당하는 그 순간에 내 딸과 죽은 내 아들과 함께 하셨는가? 하나님은 과연 사고로 죽은 내 자녀를 사랑하셨는가? 라는 생각입니다.
/세월호 사고로 자녀를 잃은 어떤 어머니가 한 말이 있습니다.
“사고 이후에 가족 대부분은 '하나님 무엇을 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 계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 향해서 소리도 치고, 온몸으로 기도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만이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셨으면, 그 참혹한 죽음을 막아 주셨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다니 촌에 아주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정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오빠와 두 여동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빠는 부모님 역할까지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었던 것은 오빠와 두 동생은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또 그 어느 가정보다 예수님께서 많이 사랑하셨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피곤하시면 자주 이 가정에 오셔서 쉬기도 하시고-식사도 하시고-말씀도 전했습니다. 그때마다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예수님을 위해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또 동생 마리아는 열심히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그 집안의 가장이었던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또 2절에 보면 이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붙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던 자였습니다.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셔서 병을 치유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여기서 보면 이웃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또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동생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런데 6절에 보면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신다고 하시고,,,,,,,즉시로 가셔서 나사로의 병을 낫게 하지 않으십니다.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신 후 나사로에게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 나사로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나흘 뒤에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찾아가십니다.
---이때 먼저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21절에 보면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32절에 보면 마리아도 마르다와 같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원망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 왜 빨리 오시지 않고 이제 오셨습니까?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시고,,빨리 오셔서 우리 오라비의 병을 낫게 해주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왜 우리와 함께 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 해놓고 왜 죽도록 버려두셨습니까? 우리 오라비가 죽는 그 순간에도 왜 예수님은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맞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일찍 오셔서 그의 오라비의 병을 고쳐주지 아니한 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과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무엇보다 나사로가 병이 낫기를 바라고 기도했던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바로 가지 아니하시고-이틀을 더 있다가 가신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가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에게 “죽기 전에 가지 아니한 것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가지 아니하시고--“죽도록 내버려 둔 것이 예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병든 나사로에게 바로 가셔서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고 죽도록 버려두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25절과 26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25절 26절입니다.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우리 육신의 몸이 병들거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죽도록 내어 버려두었다고 다시 살리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것"을 나타내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원망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원망한 것은 왜 빨리 오셔서 나사로의 육신적인 병을 낫게 해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관심은 나사로가 단순히 병들지 않고 오래 사는 정도가 아니라,,,,,,,,,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들을 사랑하심을 믿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단순히 생각하기를 이 땅에서 아무 어려움이 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 것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로 삼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육신적으로 아무 어려운 일이 없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이것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시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하나님은 영적인 구원만 주시는 분이시고, 세상적인 복은 바알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영, 육간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야베스의 기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께 평생을 기도하기를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시고” 라고 기도하였고-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랑하심으로—우리의 육신적인 삶 가운데 어려운 일을 막아주시고-환난이 없이 평안하게 해주십니다. 병도 낫게 해주십니다. 이것도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시는 기준들을 오직 육신적인 삶이 잘 되고 못 되느냐에만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적으로 조금만 어려우면, “과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증거와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사실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말라기서에도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버리고 너를 선택하여 구원한 것이 내가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로 삼아야합니다.
--35절에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특히 왜 마리아의 울음을 보시고 우셨습니까? 그 이유는 말씀의 신앙인이라고 하던 믿었던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의 마음을 잘 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도 당장 나사로가 낫지 않고 죽었던 것을 가지고--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어떤 아이가 기차 철길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그 아이를 보고 달려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 기차에 치여 몸이 두동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품속에 아이는 울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해서 보니까 아이의 입속에 사탕이 있습니다. 그 사탕을 빼니까 이제 아이가 웁니다. 그리고 엄마를 원망합니다. “엄마 정말 날 사랑하는 것 맞아 왜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라고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웁니다.
왜 이 아이가 왜 웁니까? 어머니가 자신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을 보고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사탕을 빼앗았기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사탕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울었습니다. 또 어머니를 원망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님 앞에 나와서도 낙심해 있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또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답답해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마음으로 생각하시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기도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께 기대했던 일들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병이 낫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 일찍 데리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병이 낫기를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일찍 데리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민감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기분이 좋으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하던 일도 잘되지 않습니다. 또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고 어렵습니다(하나님 솔직히 제가 그렇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수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시고 왜 이렇습니까?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다고 왜 이렇습니까? 왜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아니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하시고 왜 이 병을 고쳐주지 않으십니까? 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무엇하고 계시는 줄 아십니까?
울고 계십니다.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도 이럴 때 탄식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왜 날 몰라주느냐는 고 탄식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 잠시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어떤 분은 아이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이 병을 낫게 해주지 않으면 하나님 당신은 나와 함께 해주지 않은 것입니다.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사랑하는 증거로 아이의 병을 고쳐달라”고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그 분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십자가였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내 생명을 주었다. 너를 구원 해주었다.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 그런데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나를 원망하느냐” 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리빙스톤이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탐험가로 알고 있는데, 선교사입니다. 그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유품에 낡고 헤어진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 설교의 제목은 “징계가 아니라 사고입니다”입니다.
설교의 내용은 우리가 겪게 되는 인생의 불행이 모두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사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왜 리빙스턴 선교사님이 그 설교를 헤어지도록 보았겠습니까? 선교를 하면서 수많은 어려운 일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혹 이런 일들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면서 끊임없는 의문을 가졌기때문 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읽을 것).
롬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도 우리에게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곤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벌거벗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도 우리가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오 주님). 그런데 37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당장 기도의 없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가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게 여러 가지의 일들을 격습니다. 어떨 때는 참으로 하나님이 기적으로 나를 도우셔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항상 그렇지 않습니다—살다 보면 내가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내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일을 겪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도 스스로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는 것이 아닌가? 혹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일을 당해도--결코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증거는 십자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아무 것이 없어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만을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을 것 같은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날마다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삼풍백화점에서 사고로 아들을 잃은 믿지 않는 부모님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18일 동안아들을 찾았는데,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을 다 치르고 난 다음에 그 부모님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 교회는 마치 죄인이 된 듯이 그 부모님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부모님들이 그 교회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들이 반대로 눈물을 흘리면서 그 교회에 감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아이를 찾던 18일 동안 매일 그 교회 청년들이 사고 현장에 찾아와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모습에 너무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는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구나, 우리 아이의 죽음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구나 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부모님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 갑작스럽게 어려움을 당한 분들이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함께 같이 울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절대 그분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다고 말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한 주간동안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심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현재의 모든 어려움들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