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연구/욥기

욥기강해(9)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할까?(욥8:1-7)

금빛돌 2023. 8. 4. 17:16

필리핀에서 김일영목사가 보낸 사진

오늘 본문은 욥의 말에 대한 수아 사람 빌닷의 말입니다(1). 앞에서 엘리바스는 제일 연장자이고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아 사람 빌닷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고, 또 감정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그의 말이 아주 과격합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앞에서 엘리바스의 말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4:2.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면, 자네는 귀찮게 여기겠지.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일세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처음에는 욥의 감정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이렇게 힘든 상태에 있는데,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건내려 한다면 자네는 귀찮게 여기겠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입을 다물 수 없어서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빌닷은 처음부터 어떻게 말합니까?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여기서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다는 것은 미친 바람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번역에서는 광풍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욥이 어떤 말을 했습니까?

욥은 처음에 6:2.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 저울에 달아보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힘들면 힘들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더욱이 친한 친구에게는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까? 왜 이런 말이 미친 바람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욥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6:10.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욥은 내가 아무리 큰 고통이 있을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는 고통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을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와 친구들이 듣고 싶은 말은 어떤 말입니까?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어떻게 말합니까? 아니다, 내가 그래도 위로를 받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왔다 고 말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옥한흠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욥은 그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정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은 것이라고 하니까 귀찮아서 그래 내가 그런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한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정직하게 말을 해야합니다고 했습니다.

박준형이라는 재심 전문 변호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재심을 청구하게 해서 다시 무죄를 받아내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 다시 재심을 청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또 재심을 청구해도 법원에서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처음 그 사람에게 네가 이런 죄를 지었나라고 경찰이 묻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실 그대로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경찰이 정말 네가 그런 죄를 짖지 않았냐고 물어봅니다. 며칠을 밤낮으로 물어봅니다. 심지어 밥을 사주면 물어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중에 더 큰 벌을 받아. 그러니 그냥 그랬다고 말만 해 그러면 나중에 풀어줄게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진술을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수십년 옥살이를 해도 그때 했던 자신의 말 때문에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37장까지 욥과 친구들의 지루하고 반복된 말들이 나옵니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 네 죄를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끝까지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같으면 나중에 귀찮아서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래 내가 죄인이다 다 내 잘못이다 그러니 더 이상 말하지 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욥기가 이렇게 길게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네 죄 때문이다고 말해도 정직하게 말합니다.

나는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위로고 기쁨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욥의 이 말이 미친 바람과 같은 말입니까? 왜 욥이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닷은 욥이 왜 그런 미친 바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느냐고 합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여러분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찌 공의를 굽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빌닷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입니까?

빌닷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죄를 짓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욥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빗닷은 욥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정의를 굽게 하겠느냐 공의를 굽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이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한 자녀만 잃어버려도 평생 자녀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데, 욥은 하루에 10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빌닷은 그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죽은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막말합니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또 맞는 말도 아닙니다.

1장에서 우리가 보았지 않습니까? 욥은 자녀들이 생일 때 마음껏 즐기게 했습니다.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잔치하는 가운데 마음으로도 죄를 지었을까 해서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1: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욥의 자녀들이 어떻게 죄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여러분 이 말도 절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만일 한 구절만을 가지고 설교를 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딧의 말을 풀어보면 어떤 말입니까?

욥아 너는 그동안 기도하지 않았어 제발 기도해 그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께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너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야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 7장에서 욥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7장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7:7. (하나님이여) 잊지 마십시오. 이 목숨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 이 눈이 어찌 다시 좋은 일을 보겠습니까?(공동번역)

욥은 하나님이여 내 목숨은 한낱 입김과 같으면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 앞에 등불과 같습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를 잊지 마옵소서 나를 생각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눈이 어찌 이 세상에서 다시 좋은 일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내 인생은 더 이상 행복이 없습니다. 주님 이 생은 이미 망했습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이 하나님이여 나를 잊지 마옵소서 나를 생각하여 주옵소서라고 욥은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욥에게 네가 기도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욥에게 기도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욥에게 하나님께 간구하면 너를 돌보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왜 빌닷이 욥이 기도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까?

그 이유는 욥은 단순히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욥은 바리새인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딧이 볼 때 욥은 눈에 보이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딧은 욥이 기도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한글에서도 욥77절의 말씀을 기도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에서는 욥기 77절부터를 욥의 기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함께 모여서 사람들이 보이는 데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탄식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출2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여기서 보시면 이스라엘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된 노동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백성들 하는 것이 기도입니까? 기도가 아닙니까? 분명히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기도했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남들에게 보여주는 기도를 했습니까? 그들은 어떤 형식을 갖추어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힘든 노동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현장에서 마음으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도하는 장소가 없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모이지도 못했습니다.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시편 5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심사/마음)을 헤아려 주소서

다윗은 하나님께 말로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란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서는 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고 합니다. 이것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나의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욥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기도하였습니다.

욥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상한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마음의 탄식도 기도로 들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름답고 거창한 기도가 아닐지라도 여러분들의 고통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입으로 표현하지 못한 여러분들의 모든 신음소리조차도 기도로 들어주시고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5절에 나타난 빌닷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욥에게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6절에서 욥아 너는 청결하지 않았어 정직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다시 회개하고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에서 너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야라고 하는 말도 맞지만 욥에게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도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 심히 창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항상 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문맥적으로 보면 이 말은 어떤 말입니까? 욥아 지금은 네가 회개하지 않아서 미약하지만 네가 말을 듣고 회개하면 나중에 심히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이렇게 미약하게 된 것은 너의 과거의 죄 때문이야 그러나 지금 네가 네 죄 때문에 미약하지만 내 말을 듣고 회개하면 미래에 창대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할까?”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우리의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를 통해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반드시 잘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도 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믿음으로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고, 믿음으로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믿음으로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고, 믿음으로 전쟁에서 이기기도 합니다(11:33,34)

그런데 히1136절부터 믿음으로 살았어도 11:36.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시작은 미약하였느나 나중은 창대하였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139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11: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았어도 이 땅에서 약속하신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나중에 창대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오직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분명한 상급이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