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연구/창세기

창세기강해(54)진정한 가족의 의미(창43:1-16)

금빛돌 2022. 9. 10. 21:01

사람은 넘어지고 사탄은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은 일으켜 세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으켜 주시고 새워주시고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게 전 세계적인 기근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살려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42장과 43장에서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2장에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합니다(42:2).

그리고 요셉도 형들에게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말합니다.

42:18.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20.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고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동생을 데리고 오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요셉이 형들에게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합니까?

단순히 요셉이 인간적으로 동생 베냐민을 보고 싶어서만 아닙니다.

42장에서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꿈은 10 형제가 아니라 11형제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형제만 자신에게 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꾼 꿈은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있을 때는 문자로 기록된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시대에는 꿈이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꾼 꿈대로 동생을 데리고 오면 살리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살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실패한 이유는 좋은 환경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록 극심한 기근의 때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베냐민만은 절대 보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4238절에 43:38.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베냐민)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요셉)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만일 너희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길에서 요셉과 같이 재난을 당하여 그가 죽게 되면 나는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스올이란 죽음을 뜻합니다. 베냐민이 죽으면 나도 죽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야곱은 베냐민만 데리고 갈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기근이 더 심하여집니다.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여기서 심하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이 기근이 더 심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2절에 보시면 이제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으로 가서 양식을 조금 사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어떻게 말합니까?(3-5)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 우리가 애굽으로 갈 수 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어떻게 말합니까? 6절에서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또 다른 아우가 있다고 애굽의 총리에게 말하여 나를 괴롭게 하였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먼저 말한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자세히 질문을 하여 우리가 그 묻는 말에 따라 대답한 것뿐이라고 합니다(7).

그러면서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우리 모두가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이야기 합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고 합니다. 아버지 저 아이 베냐민을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어린 아이들이 다 죽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다가 마지막으로 야곱의 마음을 돌이키는 이야기를 합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는 내가 베냐민을 위하여 담보가 되겠습니다고 합니다. 여기서 담보란 내가 그를 위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생명을 죽여서라도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오겠습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를 아버지에게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어 그 죄 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다의 위대성은 그의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네가 옳고 내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자신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의 제물이 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 재물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우리가 죽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유다가 자신이 죽어서라도 베냐민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니까 야곱은 비로서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13절에 “13.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삶을 끝까지 움켜잡는 삶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자의 명분을 움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에서에게 20년 동안 쫓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라헬이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7년을 수고해도 하나도 힘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녀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야곱은 라헬의 소생인 요셉을 움켜잡았습니다. 그만 사랑하고 편애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도 잃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노년에 이른 야곱에게는 베냐민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갈 때도 베냐민만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애굽에서 와서 베냐민을 데리고 가야한다고 하니까 야곱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야곱의 집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야곱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벌써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일이 있었을 때 야곱은 한마디를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때 야곱을 보면서 비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으로서 야곱의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만일 그때 야곱이 흥분하여서 세겜 사람들과 싸우자고 했다면 야곱의 가족들을 더 이상 가나안땅에서 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집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외톨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 집착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한 가지에만 집착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에게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베냐민에게 집착합니다. 그래서 아들들이 베냐민을 내려놓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베냐민을 내려놓으라고 해도 내려놓지 못합니다. 이런 심리를 가리켜 보속증(保續症)이라고 합니다. 한번 집착하는 감정을 가지면 그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보존하고 지속하려는 증상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적으로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도 집착하려는 감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속하고 보존하려는 심리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그가 마지막에 한 가지 붙들고 있었던 베냐민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야곱은 마지막에 붙들고 있었던 베냐민을 내려놓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긍휼)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보다 자신이 죽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자식을 읽으면 잃으리로다 고 합니다.

왜 이렇게 고백했겠습니까? 이것은 야곱의 신앙 때문입니다.

어떤 신앙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죽여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려주신다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신앙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리라는 신앙입니다. 여기서 은혜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직역을 하면 여성의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은혜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긍휼이라는 말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이 바로 여성의 자궁을 뜻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만 하시고 긍휼이 없으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힘이 있지만 우리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또한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픔과 슬픔 가운데 넘어져 있을 때 왜 너는 일어서지 못하니, 왜 너는 그것밖에 못하니 라고 추궁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자신의 가슴으로 느끼시는 분십니다. 마치 여성이 자신의 자궁으로 낳은 자녀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우리는 불쌍히 여겨주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 더욱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하나님 내가 내 사랑하는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고 했을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절대 우리 자녀를 잃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베냐민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에게 베냐민은 그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은 다 내려놓아도 내 자존심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내 자존심도 잃으면 잃으리로다 고 하였을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을 때 우리의 진정한 자존심을 세워주십니다.

이렇게 야곱이 전능하사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그가 마지막 하나 붙들고 있었던 베냐민을 잃으면 잃으리로다 고 하면서 내려놓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요셉은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자기의 청지기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야곱은 베냐민을 내려놓았을 때 죽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베냐민과 형제들을 위해서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그리고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0.요셉이 아우를 사랑(긍휼)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동생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얼굴을 씻고 돌아올 정도로 울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 자녀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로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녀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추석명절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교회도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가족은 나보다 우리입니다.

기근이 있기 전에 야곱의 가족은 콩가루 집안이었습니다. 모두가 각기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큰 기근이 있으니까 야곱은 애굽에 가서 우리를 곡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죽지 않고 살리라고 합니다.

또 본문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지금까지 유다는 베냐민을 단순히 배가 다른 야곱의 아들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같이 우리 동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유다는 베냐민을 우리 아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겠습니다 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가족이 무엇입니까? 가족은 나보다 우리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 사람이 가족인가 아닌가는 위기 때에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오직 나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닥치니까 우리가 되는 것이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이 위기의 때에 나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우리를 생각하십니까?

또한 여러분 교회가 위기의 때에 나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우리를 생각하십니까?

위기의 때에 나만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위기의 때에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면 그 사람이 진정한 가족입니다. 위기의 때에 나보다 우리를 먼저 더 생각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위기의 때에 진정한 가족이 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족의 의미는 희생입니다.

가족은 서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본문 아래 34절을 보시면 34.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고 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다른 형제들보다 베냐민에게 다섯 배의 음식을 주면 시기하고 미워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냐민도 우리 동생이고, 우리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 보면 요셉은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잔치 날에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쁨이 잔치 날이 제삿날에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형제들이 서로 즐겁게 잔치를 즐기기까지 누가 있었습니까?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다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곱은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베냐민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진정한 가족입니까? 기쁨의 잔치를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가족입니다. 정말 화목한 가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에 얼마든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어떻게 매주 기쁨의 잔치를 베푸는 곳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이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내가 왜 가정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해야하는가? 하는 사람은 진정한 가족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면 그 어떤 희생을 하더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를 위해서 그 어떤 희생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또 진정한 가족은 서로를 향한 긍휼이 있습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긍휼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긍휼의 마음으로 요셉은 베냐민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진정한 가족은 서로를 향한 긍휼이 있습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대구지하철 참사가 있을 때 지하에서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딸과 통화하면서 내 마음은 저 밑에 있는 딸보다 더 타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고린도후서11장에서 사도바울은 그가 받았던 고난의 목록들을 말합니다. 내가 유대인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았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여러 번 자기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며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을 말하기를 고후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향해서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필요한 자임을 깨달아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불쌍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야곱도 불쌍하고 야곱의 자녀들도 불쌍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목사도 불쌍하고 여러분들도 다 불쌍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쌍한 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이란 동정심이 아닙니다. 동정심이란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나보다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이란 하나님 앞에서 모두 불쌍한 사람으로 서로 같이 불쌍히 여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같이 서로를 불쌍히 여겨줄 수 있는 진정한 가족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