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34)결혼이란 무엇인가(창24:1-27)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말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아가 140세입니다. 창2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2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 늙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 늙었지만 하나님께서 범사에게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은 시작도 중요하고, 중간도 중요하지만 끝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엘리제사장이 나옵니다. 그는 당시에 사사이자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엘리는 당시에 정치적인 모든 권세도 가지고 있고 종교적인 권세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의 나이가 많았습니다. 장수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제사장은 평생 아무 일이 없이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엘리는 끝이 좋지 않으니까 그의 모든 생애가 좋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욥을 보시기 바랍니다. 욥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이 어떠합니까? 욥42: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평생 고난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하나님께서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욥의 생애는 말년이 좋으므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이 다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께서 범사에 복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을 때 범사에 그에게 복을 주셨는데,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의 결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종을 고향에 보내어 이삭의 신부감을 데리고 와서 이삭을 결혼시키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창세기에서 제일 긴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인 창 24장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아들을 결혼시키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생애에 있어서 결혼문제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에 대해서 어릴 때 들었던 설교 중에서 제일 기억이 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세 번 기도하라”입니다.
옛날에는 바다가 나가는 것은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나가기 전에는 한번 기도해야합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는 것은 더한 죽음을 각오해야합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두 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위해서는 세 번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 만큼 우리 인생에 있어서 결혼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생애는 아내 사라가 죽고 난 이후에 인생의 8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한 능선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결혼시키기 위해서 이삭의 배우자를 찾는 문제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아브라함처럼 자녀를 결혼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실제 결혼을 앞두고 준비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결혼한 분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결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이삭의 아내를 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결혼을 통해서 결혼이 무엇지에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삭의 결혼을 통해서 결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결혼이란 하나님 안에서 두 사람의 만남입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여기서 허벅지는 남성의 생식기를 뜻 합니다. 이것은 고대에 맹세하는 의식으로 만일 이 맹세를 어기면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결혼에 있어서 목숨을 걸고 지키라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은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라 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가나안은 이방신을 섬기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명기7장 3절에 신7:3. 또 그들(가나안사람)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이 반드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합니까? 왜 우리자녀들을 믿는 사람에게 결혼시켜야합니까? 또 사도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해서도 반드시 믿음의 길로 인도하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결혼이란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그림1
우리는 결혼을 단순히 그림a와 같이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림2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보시면 남자와 여자가 어디에서 만납니까?
하나님 안에서 만납니다. 남자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여자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안에서 만나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을 앞둔 남녀가 있으면 이렇게 물어봅니다. 신랑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정말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예 라고 대답하면 그러면 하나님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어봅니다. 이때 옆에 있는 신부를 사랑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결혼이란 나는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가 아닙니다. 만일 나는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가 그 사람에게 실망을 하면서 곧 두 사람의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결혼해야합니까?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람이 결혼해야합니다.
누구와 결혼해야합니까? 나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고 하는 사람과 결혼해야합니다.
그래서 누가 1등 신랑감입니까? 여자가 없이도 하나님한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1등 신부감입니까? 남자가 없이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과 리브가가 그렇습니다. 6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3.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지금 이삭은 아브라함의 종이 그의 신부를 데리러 간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또 지금 이삭의 나이는 40살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신부가 올까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가 오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삭은 저물 때까지 들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부가 오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삭은 신부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64절과 65절을 보면 리브가가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는 이삭을 봅니다. 그리고 6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6. 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라고 합니다. 그러면 종이 행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실함으로 인도하여 리브가를 만나게 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신부를 데리고 온 일을 말했습니다.
“27-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이삭의 배우자를 찾는)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그러니까 이삭이 어떻게 합니까?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합니다. 이삭은 그녀가 얼마나 얼굴이 예쁜가를 먼저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하니까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이 당시는 일부일처사회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일부다처였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삭만 일부일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삭은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 리브가 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지금 아브라함의 종이 신부를 데리고 오는 길은 900키로가 됩니다. 이것은 서울과 부산 왕복거리가 됩니다. 당시에는 이 거리는 한 달은 더 걸리는 험한 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종은 먼 거리를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가자고 했을 때 어떻게 신부가 따라가 가겠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 신부가 가지 않으려면 다시 이삭을 신부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야합니까? 라고 종이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그러니까 6절에 “6.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리브가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고 합니다. 그리고 8절에 ”8.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먼 길을)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리브가가 있는 곳으로) 가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신부를 구할 때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는 신부입니다. 둘째는 900키로나 되는 먼 길을 하나님만 바라보고 따라올 수 있는 신부입니다.
바로 리브가가 이런 신부였습니다. 리브가는 900키로나 되는 먼 길인데 갈 수 있느냐고 했을 때 바로 가겠다고 합니다. “58.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먼 길을)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그러면 리브가가 왜 이렇게 신랑 얼굴도 모른 체 고향을 떠나서 먼 길을 따라서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도 오직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결혼이 무엇입니까? 결혼이란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결혼은 믿는 사람과 해야 합니다. 만일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게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이란 하나님 안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두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결혼한 사람의 경우에 두 사람의 사랑의 수원지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나의 사랑의 수원지는 배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의 사랑의 수원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배우자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 신혼 때 몇 년 간은 배우자에게서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의 수원지는 하나님에게서 찾아야합니다.
그래서 결혼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아내에게 흘려보내시고 남편에게 흘려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기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황성주박사). 사람에게 기대하면 실망이 생깁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을 남편에게 아내에게 흘려보내시기 바랍니다.
또 혼자 사시는 분이 있습니까? 이런 분들도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결혼한 분들이나 하지 않은 분들이나 또 배우자와 같이 사시는 분들이나 혼자 사시는 분들이나 우리의 진정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삭의 결혼을 통해서 본 결혼이 무엇입니까?
둘째, 결혼이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녀를 위한 것입니다.
3절과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여기서 보시면 아브라함은 누구를 위하여 이삭의 아내를 택하라고 합니까? 내 아들을 이삭을 위하여 입니다.
저를 포함한 부모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자녀의 배우자를 생각할 때 자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얻게 될 사위가 나에게 어떻게 잘 해주겠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또 내가 얻게 될 며느리가 나에게 어떻게 잘 해주겠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부모들이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내가 평생 이 자녀를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결혼할 때도 자녀를 위하는 마음보다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더 앞섭니다. 그래서 부모를 위하여 자녀의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를 먼저 보냈기 때문에 허전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들여서 자신도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종에게 말하기를 나를 위한 이삭의 아내가 아니라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이삭의 아내를 택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 말합니까?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모를 섬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부모는 섬겨야합니다. 그런데 결혼이란 부모를 떠나 하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자녀를 떠나 보내야합니다. 내가 평생을 키운 자식인데, 어떻게 며느리에게 사위에게 뺏길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떠나 보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결혼할 때 부모를 떠나야합니다. 경제적인 독립만 아니라 정신적인 독립도 이루어져야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평생 떠나보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사랑하는 아들도 떠나보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을 떠나보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슬플 때가 기쁠 때나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결혼을 통해서 내 사랑하는 자녀를 떠나보내더라도 한 순간도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한분만 사랑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이삭의 결혼을 통해서 본 결혼이 무엇입니까?
셋째, 결혼이란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우리는 결혼의 배우자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내가 결혼할 배우자는 정확하게 미리 예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과연 이런 생각이 맞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만나는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은 “12.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이삭의 아내를)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은 물을 기를 때 자신에게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여인이 있으면 “14-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에서 자신만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리브가를 만납니다.
그래서 48절을 보시면 “48.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고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를 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또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택하라”입니다. 그래서 3절과 4절과 7절과 37절과 38절과 40절에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도 아브라함은 종에게 “선택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계적인 운명론이 아닙니다. 기계적인 운명론은 하나님께서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무조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운명론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있어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기로 미리 정하신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도 하나님께서 미리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와 결혼할지도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운명론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무조건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인간이 거부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복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도 네가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결혼을 앞 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혼할 배우자가 미리 운명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내가 선택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혼의 배우자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를 만날지 모릅니다. 또 누가 정해져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의 배우자를 만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와주심이 필요합니다. 그러하오니 하나님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내 삶을 선하게 인도하여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내가 선택해야합니다.
이렇게 선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좀 더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선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나의 믿음의 그릇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 입니다. 또한 나의 인격의 그릇이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느냐 입니다. 운명론에 있어서는 나의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의 그릇과 인격의 그릇이 준비된 만큼 나의 믿음과 인격의 그릇에 맞게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또 선택에 있어서 왜 상대방보다 내가 더 중요합니까? 사람을 선택할 때는 항상 내가 준비된 만큼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청년의 때가 정말 중요합니다. 기계적 운명론에 따르면 나의 운명은 미리 정해져있습니다. 그래서 내 부모가 이렇게 힘들게 살았으니 나도 이렇게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론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모로 네모로 라고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삭과 같이 믿음의 그릇을 잘 준비해야합니다. 또 리브가와 같이 인격의 그릇을 잘 준비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배우자를 잘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무엇보다 배우자를 만남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믿음의 그릇과 인격의 그릇을 잘 준비하여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도 운명이 아닙니다. 내가 평생을 이렇게 살았으니 나는 운명적으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계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든지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범사에 복 있는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