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29)소돔의 심판이 주는 교훈(창19:1-29)
오늘 본문은 소돔의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창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소돔의 죄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시지만 직접 내려가셔서 확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 보시면 두 천사가 소돔에 이릅니다.
1.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여기서 보시면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천사를 봅니다. 고대에 성문은 주로 재판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롯은 소돔에서 재판을 할 정도로 놓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12장 12절에서 “창12: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소돔가까이) 이르렀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소돔까지란 소돔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소돔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13장에 보면 이미 소돔의 백성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돔이 전쟁에서 패했을 때 같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제 롯은 소돔에서 다른 사람을 재판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저녁때라고 한 것은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롯이 소돔에서 남을 재판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밤늦게 까지 수고 하고 있지만 오늘 밤 소돔은 곧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아서 없어질 도성이었습니다.
/요즘 특별새벽기도회 때 보고 있는 이사야서가 기록될 당시가 bc8세기였다고 했습니다. 이때가 유다나라와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제일 크게 잘 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특히 남 왕국 유다의 경우에는 종교적으로 제일 부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제사에 열심이었고, 예배에 열심이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은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열심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사람이 망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다가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제일 잘 나갈 때 그때가 위기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심지어 종교적으로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그것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일 때 위기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경제적으로 잘 나가고, 또 세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지 않으면 그 높은 자리는 멸망으로 내려가는 미끄럼틀 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시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고, 세상으로 롯처럼 안정된 위치에 있다고 절대 안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롯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가 소돔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롯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면 롯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롯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창 18장과 서로 대조하면서 보아야합니다. 창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롯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과 교제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단순히 성문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풍습대로 2절에서 나그네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롯도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면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라고 합니다.
앞에서 아브라함은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대접했습니다. 또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해서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무교병을 구워서 대접합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은 거친 음식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롯은 손님이 왔는데, 라면 하나 끊여서 대접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롯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그네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마25).
여러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한 모습이 아닙니다.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극진히 대우를 하면서 힘이 없어 보이는 약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굽실거립니다. 그런데 약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대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나그네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 대하듯이 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롯의 문제는 세상으로 성공하고 바쁜 삶이었지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대접하는데, 세상방식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롯과는 반대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또 세상으로도 높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하더라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리를 잃지 않고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도 하나님 대하듯이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여러분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4절부터 소돔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4절에서 그들은 두 천사입니다. 여기서 “그들은”은 남성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천사들은 모두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래서 아주 잘 생기고 아름다운 남자가 롯의 집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소돔 백성들이 젊은 사람 늙은 사람 막론하고 원근에서 모여서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그리고 “오늘 밤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끌어내려 우리가 그들과 상관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남녀노소라고 하지 않고 노소라고 합니다. 또 노소를 모두 남성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상관하리라는 “야다”라는 말로서 성적으로 관계를 가지다는 말입니다. “야다”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였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창4:1). 또 8절에 롯이 딸을 주려고 하면서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딸이라고 하는데, “가까이” 란 성관계를 의미하는 “야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소돔의 남자들은 동성애를 하려고 천사를 부르고 있습니다. 또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원근의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려고 합니다. 또 한 세대만 아니라 모든 세대 남자들이 동성애를 하려고 천사를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천사는 소돔의 죄를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알아볼 것도 없이 직접 소돔의 죄악상을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롯의 행동이 어떠합니까? 6-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여러분들은 이런 롯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나그네를 지키기 위해서 딸을 사람들에게 준다는 말이 됩니까? 우리 정서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롯이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정말 이 두 천사들을 지키기 위해서 딸을 주겠다고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롯의 체면을 세우기 위합니다. 중동지방에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들의 체면을 세웁니다. 그래서 나그네를 잘 대접하면 그 집의 어른의 체면이 서고 위상이 높아집니다. 그러니까 롯은 동성애에 대해서는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소돔의 타락한 성문화에 빠져 있고, 잘못된 체면문화에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10절과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 사람들(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이제 천사들이 손을 내 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문밖에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소돔 사람들이 영적으로 민감했다면 여기서 행동을 중단했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사를 통해서 눈이 멀어도 계속해서 문을 찾느라고 헤메고 있습니다.
이제 천사가 롯에 말합니다. 12절입니다.
12.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천사들은 롯에게 네게 속한 자를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합니다.
13절에서 천사는 롯에게 “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4절에 “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합니다. 롯은 소돔이 곧 멸망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사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사위될 사람들이 장인이 될 롯의 말을 농담으로 들은 것은 누구의 문제이겠습니까? 첫째는 롯의 문제입니다. 평상시 롯이 사위들에게 어떻게 했기에 이런 급한 상황에서 롯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겠습니까? 또 사위들도 문제입니다. 누구를 통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듣는 사람도 문제입니다. 아마 이들은 롯의 위치로 보아 소돔에서 유력한 집안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아무리 높은 집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듣는 사람은 결국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성을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6절에서 막상 소돔을 떠나려니 롯은 지체합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들의 손을 강제로 붙잡고 성 밖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천사는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롯은 산에까지 갈 수 없으니 다른 작은 성읍에 머물게 해 달라고 합니다(18-20). 그러니까 천사가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22절에서 롯이 그 작은 성읍에 가기까지 천사는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십니다(24).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됩니다(26).
그리고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창 18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사 롯을 멸망 중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벧후 2장 6절에 보면 “벧후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라고 합니다.
소돔의 심판은 과거에 역사가운데 한 번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소돔의 심판은 언제든지 일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돔의 심판은 오늘도 우리에게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심판의 본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소돔의 심판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서 롯처럼 높은 자리에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재물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롯처럼 우리가 쌓아놓았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불타서 없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그러면 롯이 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많은 것을 얻었지만 모든 것이 불타고 부끄러운 구원만 받았습니까? 그 이유가 창13장 10절에 있습니다.
창13: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옆에 있던 소알지역까지 그곳은 물이 넉넉함으로 에덴동산과 같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풍요로웠던 소돔이지만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창13:13.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사실 이미 소돔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이것을 알고도 당장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어느 때까지는 계속해서 올라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한순간에 불타서 없어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창13: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만일 롯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열심히 땅 밟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평이라도 더 많은 땅을 자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창13: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돈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꿈에 그 목사님에게 지갑에 돈이 가득 차 있는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돈에 대한 모든 걱정은 다 내려놓고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소돔을 선택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헤브론을 선택하십니까?
어떤 아들이 지방에서 서울로 직장을 정했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와서 아들에게 다짐을 시킨 것이 있다고 합니다. “엄마는 네가 어떻게 돈을 벌고 일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 엄마가 네게 당부하는 것은 아무리 바빠도 주일예배는 기본이고 수요예배도 빠지지 마라 그리고 큐티도 빠지지 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거다”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니까 회사에서 정말 성실한 직원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최고의 실적을 거두는 사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합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또한 인생은 해석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다 같이 애굽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해서 아내를 잃어버릴 뻔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리어 바로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손에서 구출해주시고, 아브라함에게 많은 재산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내가 물질을 쫓아갔더니 믿지 않는 사람 바로에게 책망을 듣는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아무리 물질을 얻었지만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절대 물질 중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겠다”는 해석을 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궁핍 때문에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던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물질을 먼저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너는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너는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같이 애굽의 사건을 경험하고 롯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내가 보니 정말 애굽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풍요로운 땅이구나, 아마 에덴동산도 이와 같았을 것이야. 또 하나님은 아브람이 거짓말을 해도 바로를 책망하시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시네, 그렇구나 나도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서라도 돈만 많이 벌면 되겠구나”라고 해석했습니다.
그 해석의 결과 롯은 소돔은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격고 있는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고 계십니까?
내가 격고 있는 인생을 단순히 세상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인간적인 선택만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인생은 단순히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단순히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서 성취를 해도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불타서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들의 인생을 인간적으로만 해석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롯처럼 당장 눈에 보기에 좋은 소돔을 선택을 하지 마시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는 헤브론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수고한 모든 것들이 불타서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상급으로 남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살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의 사위가 될 사람들은 롯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동성애입니다. 동성애를 가담하거나 방관하거나 묵인하면 소돔고모라와 같이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롯의 사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동성에 대해서 계속 연구하면서 느낀 것은 동성애의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또 단순히 소수의 인권에 대한 문제도 아닙니다. 또 차별의 문제도 아닙니다. 동성애의 문제는 동성애는 죄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왜 우리가 동성애가 죄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소돔고모라가 심판받는 말씀을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으면 이와 같이 멸망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음으로 날마다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소돔을 떠나야 인생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한 주간동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일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이 “창19:23. 롯이 (소돔을 떠나)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는 말씀입니다. 물론 여기서 해가 돋은 것은 실제 해가 돋은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저자는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희망이 있고 없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18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해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것도 실제 해가 떠 오른 것도 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그의 인생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본문 1절에서는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실제 저녁이라는 말도 되지만 롯이 성문에 앉아서 재판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지만 그의 인생이 어두움을 향해서 달려 있는 저녁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롯이 소돔을 떠나 소알로 들어갈 때 실제 해도 돋은 것도 있지만 비로소 롯의 인생에 희망의 빛이 떠오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롯과 우리에게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소돔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롯은 자꾸만 지체합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어떻게 합니까? “창18:16. 그러나 롯이 (소돔을 떠나기를)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천사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소돔)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소돔을 떠나기를 지체하는 롯의 손을 강제로 잡아서 소돔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롯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떠날 소돔은 어떤 것입니까? 에스겔서 16장 49절에서 “겔16: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이 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소돔의 죄는 교만입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또 나를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교만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사야 1장에서는 소돔의 죄는 성전마당만 밟고 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열심을 다해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성전마당만 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성전마당만 밟는 신앙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교만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성전마당만 밟는 신앙에서 떠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롯을 잡아서 소돔을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을 붙잡고 교만의 소돔에서 날마다 나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의 손을 붙잡고 성전마당만 밟는 신앙에서 날마다 나오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소돔에서 나와 희망의 빛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