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22)아브라함과 믿음의 삶(창12:1-9)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갈대아우르에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고향과 친척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를 설득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자녀들을 데리고 가나안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란이란 곳에 머물렀습니다. 왜 그렇다고 했습니까? 가나안 땅은 미지의 땅입니다. 그런데 하란은 데라의 아들 나홀이 먼저 가서 거주하였던 땅입니다. 또 거기서 기반을 딱은 곳입니다. 또 하란은 무역과 상업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안정된 곳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머물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은 아브라함에게 안정감을 주던 이름들입니다.
또 아브라함에게 신뢰감을 주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진짜 모든 가족들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중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혼시킬 때 내 고향 친척집에서 아내를 맞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네게 가족들이 있지만 그 가족들에게서 안정감과 신뢰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 안정감을 찾고 신뢰감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또 여기서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너의 과거에서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 우상을 숭배하던 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서 너희 조상들이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 우상을 섬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수24:2. -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갈대아우르)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도 원래는 우상을 섬기던 조상들을 두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대가 3대 4대라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는 우리도 다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너희의 과거에서 살던 삶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과거에)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미래의 것)을 잡으려고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합니까?
날마다 과거와 이별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과거는 기억은 해야 합니다. 좋은 기억은 추억하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나쁜 기억은 교훈을 삼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과거를 기억하되 과거를 가지고 살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실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과거)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미래)으로 가라
여기서 보시면 과거를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줄 이란 미완료형으로 미래에 보여줄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 가나안에서 그가 죽을 땅만 차지했습니다(창49:31). 그러니까 이 가나안 땅은 수 백 년이 지난 후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실 땅이었습니다.
또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미래에 주실 약속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당대에 큰 민족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도 미래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하여 이루어주셨습니다.
또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네 안에서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이 약속들은 현재에 이루어질 말씀들이 아니라 모두 미래에 이루어질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미래에 이루어 주실 약속들을 현재에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실 말씀만을 믿고 따라갔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믿고)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차 미래에 그의 몸에서 태어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구원의 복을 받게 될 것을 믿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실 것을 현재에 이미 가진 것처럼 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입니다.
하박국서에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악인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합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악인의 심판)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절. 이 묵시(악인의 심판)은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악인의)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이 반드시 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다나라에서 악을 행하는 자를 바벨론을 통해서 심판하시는 것은 하박국이 사역을 한 뒤인 26년 후였습니다(하박국 사역연도612bc-유다멸망-586bc). 또 그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도 73년 뒤였습니다(539b.c.).
그런데 하박국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합2:4. ○보라 그(악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이 말하는 믿음도 무엇입니까? 악인의 심판이 앞으로 몇 십 년 뒤에 이루어질 사실이지만 그것이 마치 현재 이루어진 것처럼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하박국은 현재 악인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물리쳐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합2장 14절에서는 “합2:1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의인)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의인이 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은 몇 천 년 뒤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여호와를 인정하는 의인들이 장차 미래에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미래에 의인으로 가득 찰 세상이 현재에 이미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1장24절에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눈에 보이게 있으면 너무나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현재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미리 기뻐하는 것입니다.
/한나도 기도할 때 슬퍼하며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삼상2:17-18).
/여러분은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많은 분들이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내년이 어떻게 될 것인가 불안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내 인생의 말년에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래에 대해서 너무나 잘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이 잘 된 사람처럼 너무나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저는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욥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의 말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180도 돌이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말년에 갑절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우리의 미래가 욥의 미래처럼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말년이 욥의 말년처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절대 못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우리의 미래를 보여줄 내비게이션이 있습니다. 그 내비게이션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인생 내비게이션인 성경을 보면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면 반드시 우리에게 복된 미래가 올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잘되는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잘 되는 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첫째, 미래에 꿈만 보고 현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이 걸어가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실 복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현재에 받은 것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는 앞으로 미래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믿음으로 가나안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주실 것을 믿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땅에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왜 마침내 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하란에서 가나안땅으로 가는 것이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800km). 또 가나안땅으로 가는 길에 좋은 땅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가나안땅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고 마침내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갈3장 9절에 보시면 “갈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같이) 복을 받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너는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고 말씀 하십니다. 너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구원의 복을 받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지 믿기만 하고 가만히 있어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같이 받기 위해서 우리도 복 받을 일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 했을 때 바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창22: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어르신들이 자녀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지 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실 복을 믿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 받을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순종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무겁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무겁게 여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 하시든지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복을 나도 받을 줄 믿습니까? 그러면 날마다 매순간 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미래에 주실 복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이란 예배하는 삶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어다는 가나안 땅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고 합니다.
가나안 땅은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땅입니다. 아브라함을 환영하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초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들어가면 이미 거주하였던 가나안 사람들과 다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삶이란 현실 가운데 믿었던 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걸어가지만 현실을 바라보면 순간적으로 실망할 수 있습니다.
이때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현실가운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서 실망하였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에 제단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단을 쌓고 예배했다는 것은 어떤 뜻이 있습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내게 약속을 이루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지금은 가나안 땅에 내 소유의 땅이 없지만 저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한분만으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박국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현실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어떤 사람이 아이에게 묻습니다. 아이야 너는 왜 아빠를 좋아하지 너 아빠가 네가 좋은 것을 주기 때문에 좋아하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말합니다. 아니예요 난 아빠가 내 아빠라서 좋아요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빠이신 것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게 아무 것이 없어도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미래를 현재에 가지고 사는 삶이란 끊임없는 고난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라함은 세겜을 지나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곳은 산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넓은 초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서 처음 장막을 친 곳이 산입니까? 그 이유는 가나안주민들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 위에 올라가서 장막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산위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겠습니까?
그 이유는 산으로 쫓겨서 올라온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의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점점 이라고 하는 것도 아브라함이 장막을 치면 또 쫓겨나고 장막을 치면 또 쫓겨나서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끊임없는 고난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로마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롬5장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으로 더불어 즐거워하고 기뻐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롬5장 3절부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5:3. 다만 이뿐 아니라(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믿음으로 미래를 보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만 바라보면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브라함처럼 끊임없는 고난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또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을 소망을 이루어줍니다. 이 소망은 어떤 소망이겠습니까? 장차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가게 되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잘 되게 하시리라는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롬5:5. (미래의)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래에 잘 되게 해 주시리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절대 부끄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에 잘 되는 소망을 주시면서 그냥 잘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앞으로 잘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예전에 태목사님 아들 건이가 집에 가자고 울었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아이를 테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건아 저기 집이 있다. 곧 집에 간다 고 했습니다. 그래도 아이가 계속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모임이 건이를 품에 안고 건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집에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울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으로 잘 될 것야, 너는 반드시 잘될거야, 내가 반드시 네가 가나안땅을 주겠다고만 말씀하셨다면 그 소망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서 미래의 소망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닙니다. 말씀을 통하여 미래에 소망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끊임없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미래에 우리를 잘 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