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강해(20)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2-5)
빌립보교회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파로 나뉘어져서 서로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또 서로 한 마음이 되는 것이 빌1장에서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서로 한 마음이 되지 못합니까?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한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서로의 마음이 너무 좁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 마음, 내 기분, 내 생각의 틀, 내 신앙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다른 사람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좁은 마음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의 신체는 다른 물질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체 기관 중에서 다른 물질을 다 받아들이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장입니다. 위장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관용이라는 말은 톨러런스라는 말인데, 위가 모든 음식물을 받아들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관용이란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특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기에 소화하기 힘든 음식물이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이 음식물을 소화하면 내 몸에 더 큰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물을 소화하지 못하면 그것 때문에 내 몸에 병이 생깁니다.
-이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일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일만한 관용의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일만한 관용의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병든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에 대해서 관용하십니까?
만일 여러분 마음에 관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만 아니라, 내게 좋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위장에 아직 소화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루 빨리 소화해야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소화한 만큼 내 신앙과 인격은 더 커지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모든 관용할 수 있겠습니까?
1)우리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어야 모든 사람을 관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 구조를 보시면 2절에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또 5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2절과 5절 사이에 4절이 있습니다.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라는 말씀 사이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우리는 한 마음을 품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는 문제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마음을 품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는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내가 품을 수 없는 사람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이 너그럽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편 4편 1절에서도 있습니다.
시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좁은 마음)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여기서 곤란이라는 말은 좁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우리 마음이 좁아집니다. 이것을 곤란이라고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시편기자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은 곤란 중에 내 좁은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너그럽게 하셨다는 말은 기도문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내 좁은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좁은 마음을 넓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그러운 마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관용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이 너그럽게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 마음이 더 넓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너그럽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우리 마음이 더 넓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4절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란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격해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떻게 우리 마음이 넓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받을 수 있는 관용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날마다 나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매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안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으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더 넓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어떻게 관용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5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은 예수님의 재림과 전 우주적인 종말을 먼저 말합니다.
그러나 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은 우리의 개인적인 종말(죽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언제든지 죽어서 주님 앞에 갈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은 시체를 보셨습니까? 그 시체를 보신다면 참 인간이라 허무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죽으면 인간이 가진 육체를 하나의 고깃덩어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몸에 무엇을 치장한들 무슨 가치가 있으며, 또 그에게 엄청난 재산이 있어도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죽음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면,,,,,,,우리가 이 좁은 땅에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한 짓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왜 서로 싸웁니까? 왜 서로 용납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죽음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매일 매일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간다면----우리는 그 어떤 사람과도 서로 용납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죽음 앞에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얻는다는 것보다///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얻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사실 돈을 조금 잃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돈은 죽으면 끝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돈 때문에 사람을 잃으면 그것만큼 큰 문제가 없습니다.
4 장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은 그가 돌아보는 지체들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고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면 우리의 면류관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돈이 하나님 앞에서의 면류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사로 사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되면 주님 앞에 나타낼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서 우리가 자랑하게 될 면류관이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죽음과 종말을 생각한다면---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어야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하지라도,,,품음으로 얻어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내가 사랑하고 품은 그 사람을 면류관으로 쓰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 내 머리의 이 사람 면류관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정말 나를 힘들게 한 사람입니다-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신 데로 끝까지 참고 이해하고 관용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 사람이 이제 나의 면류관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런 자의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서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