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목) 어디에 숨습니까?(창3:1-24)
오늘 본문 앞 10절에 보면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왜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숨었습니까? 벗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벗은 몸이 되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는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모든 판단은 다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선악간에 판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키가 작은가? 왜 내 얼굴은 이렇게 생겼는가? 하면서 자기가 선악 간에 기준을 세워놓고 판단하시 시작했습니다. 또 남들과 비교하여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애인의 신학이란 책에 마지막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장애인도 절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저는 하나는 찬성하고 하나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더 이상 장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찬성하는 것은 천국에서는 더 이상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하여 이 모습이대로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면 여러분 감사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좋고, 또 내가 보기에도 제일 좋습니다.
이와 같이 아담이 왜 부끄러워합니까?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선악 간에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기의 선악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좋습니디. 그래야 죄를 보게 되고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부끄러워서 하나님에게서 숨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만들어서 옷을 입습니다.
저는 아담의 이 모습을 보면서 요한복음9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이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겠습니까?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돌려 죽여주었으면 좋을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
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그녀와 우리의 죄를 가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에게서 부끄러워 숨는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 가죽 옷은 예수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워 숨고자합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로 옷을 만들어 지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고자 하듯이 우리도 각자 만든 무화과잎으로 숨고자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세계에서 숨고자합니다. 아니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사람에게서 숨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숨지 말라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가죽옷으로 덮어주십니다. 숨계주십니다. 가려주십니다.
세상의 무화과잎은 절대 우리를 숨길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줍니다. 가려줍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실 때 부끄럽지 않게 해줍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피의 가죽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가죽옷에 숨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정한 안식이 있고 쉼이 있을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