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디 있느냐(창3:1-10)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인간에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입니다.
여기서 아담은 인류의 조상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또 아담이란 말은 원래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먼저 첫 사람이 아담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또한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으신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아담이 있어야할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담은 그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조상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이 계시는 어떤 장소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있어야할 자리를 묻는 질문입니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인이 싸움에 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자기가 지키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하면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도 사람들이 있어야할 그 자리에 바로 서 있지 못한 것입니다.
검사는 남을 법으로 재단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법의 정도에 바로 서 있어야합니다. 정치인 경제인 연예인도 그들이 있을 자리에 바로 서 있어야합니다. 왜 공익근무를 하는 연예인이 왜 밤에 나이트클럽에 갑니까? 거기서 이상한 일을 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곳에 간 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있어야할 자리에 과연 바로 서 있습니까? 무엇보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지금 우리의 영적상태가 어떠한지를 하나님을 지금도 묻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있어야할 자리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하나님께 대하여 도피하는 자리에 있지 않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아담은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아담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숨었다는 말은 하나님에게서 도피하여 숨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죄인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16절에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도피하여)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가인의 후예들이 나옵니다. “창4: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가인의 후손에게서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나옵니다. 또 가인의 후손가운데서 음악을 하는 자의 조상이 나옵니다. 여기서 왜 가인의 자손들이 여호와 앞을 떠나 가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또 왜 가인의 자손들이 음악을 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범죄 한 후에 가인의 후손들은 그들의 직업을 하나님께 도피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범죄 한 후에 가인의 후손들은 음악을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어떤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의 음악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은 다 세속적이며 모두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는 수단이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도 직업이 있었겠습니까?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면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말씀하고 난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범죄 하기 전의 모든 일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이후에는 이 세상의 모든 직업들이 하나님에게 도피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인간이 범죄 하지 않았다면 월화수목금토 안식일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계속해서 영원한 안식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초의 안식일에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함으로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안식을 노래하던 음악이 이제는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범죄 한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탕자의 비유에서 제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둘째아들을 쫓아냈기에 둘째 아들이 나간 것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괜히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도피하고자 하였습니다.
첫째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보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처럼 하나님의 풍성하신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피하여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이 인간은 자꾸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에게 묻고 계십니까?
“누구야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너는 지금 아담처럼 가인처럼 하나님에게 도피하는 자리에 있지 않느냐”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고 계십니다. 지금 여러분들도 하나님에게서 도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에게서 도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더 가까이 찾아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8과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여기서 그 날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날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그 날에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바람은 자연세계속의 바람으로도 볼 수 있지만, 성경에서 바람이란 성령을 가리키는 말도 되기 때문에 성령의 바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범죄 하여 하나님에게 도피하고자 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동산에서 하나님이 거니신다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거니신다는 말은 그냥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는 아담을 찾기 위하여 거니고 계십니다. 또 여기서 거니신다는 말은 한 순간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쉬지 아니하시고 찾으신다는 행동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담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인간과 더 가까이 사랑의 교제를 나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소리를 내시면서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소리는 어떤 소리이겠습니까?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는 소리입니다. 또 “아담이 네가 지금 나를 도피하여 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일속에 파 묻혀서 하나님에게서 도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세상음악의 세계 속에 빠져서 이제 하나님에게서 도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인터넷, 티브이, 오락과 같은 일들 속에 빠져서 하나님에게서 도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 같이 아무 일이 없는데 괜히 하나님에게서 멀리 도피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또 우리는 첫째 아들과 같이 이 자리에게 앉아 있지만 하나님의 풍성하신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도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은 지금도 치제하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여러분들을 부지런히 찾고 계심을 기억하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성령으로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누구야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왜 너는 지금 거기에 있느냐 왜 너는 지금 나의 낯을 피하여 숨어 있느냐 네가 아무리 나를 피하여 도망한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 너는 놓치지 않는다. 네가 아무리 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다 할지라도 나는 끝까지 너를 찾아다닐 거야----누구야—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39:7. (여호와여)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나님께 피하여)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하나님께 피하여) 스올(지옥 같은 곳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하나님께 피하여)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73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하나님에게서 피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주를 피하는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담처럼 하나님에게서 도피하는 자가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또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네가 지금 이 세상과 인간의 주인의 자리에 있지 않느냐 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 되어 선악을 (네 인간적인 기준으로) 알(판단할 줄)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 노릇하는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 노릇하는 자리에 있게 된 후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종류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입니다. 또 모든 것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인생의 주인이 되니까 우리에게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생겼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모든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분별은 하되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여기서 보면 아담이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수치심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처음부터 벗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벗었음에 대해서 그 어떤 수치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2장25절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는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 인간은 분별은 했지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벗어서 자신의 알몸이 공개되고 드러났지만, 그것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키가 크든, 또 하와가 키가 작든, 또 얼굴이 어떻게 생겼든지 그것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죄가 들어와서 이제 인간은 모든 것을 인간 자신이 기준이 되어 선악 간에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판단하고 나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무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하여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아담 네가 이제 하나님과 같이 되어 네가 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노릇 하는 위치에 있지 않느냐,,그래서 네가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는 말씀입니다.
또 아담아 네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네게 기준이 되어서 선악을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네가 너 자신에 대해서 네 스스로 판단하여서 너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또 네가 스스로 주인노릇을 하여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있지 않느냐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세상과 네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의 주인의 자리에 오직 하나님을 모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네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돌보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지금 이 시간에 무엇을 가지고 염려하시고 걱정하시고 근심하고 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지금 염려와 걱정과 근심가운데 계시다면 아직 여러분들 자신이 삶의 주인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스펄전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성도 여러분! 늘 수심어린 표정을 짓고 다니면서 여러분이 믿고 있는 기독교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짐을 모두 주님께 맡겨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끙끙대며 지고 다니는 짐이 하나님 아버지께는 조금도 무겁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짓누르는 커다란 짐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는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먼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손 안에 가만히 누워 하나님의 뜻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보다 더 달콤한 것도 없습니다. 오, 고난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하나님의 섭리가 여러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참새도 먹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여러분에게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절망에 빠져 앉아 있지 말고 계속 소망을 갖되 그 소망을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 환난의 바다 한가운데 있습니까? 믿음의 팔을 걷어붙이고 싸우십시오. 그러면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을 돌보시는 주님이 거기 계십니다. 주님의 눈이 여러분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재난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여러분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시며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이제 전능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고 있는 도움을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 아래서는 아무리 시커먼 구름이라도 다 흩어지며 아무리 깜깜한 어둠이라도 곧 아침으로 변하고 맙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과정에 있습니까? 지금 당하고 있는 그 고난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행복할 때와 마찬가지로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평온하고 차분한 인생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항아리에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기름과 통에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밀가루를 가지고도 그 기근을 거뜬히 넘겼습니다. 여러분도 그와 똑같이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영혼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지만 육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여러분의 짐을 져 주시되 한번도 거절하지 않고 져 주셨습니다. 또 그 짐에 눌려 기절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달하며 염려하던 것을 그치고 어서 모든 염려를 자비하신 하나님 손에 맡기십시오”
//또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이심을 믿는다면 분별은 하되 아무 것도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도 분별은 하되 어떤 판단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분별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몇 달 동안 컴퓨터 바탕화면에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이 말씀을 올려놓고,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또 나를 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마음으로 판단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럴 때 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염려 걱정 근심 판단은 내가 있어야할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의 주권을 모두 하나님께 다 맡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삶의 주인의 자리에 오직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만 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아무 것도 내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또 오늘 본문에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때 가인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가인은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은 가인아 “네가 살고 살리는 자리에 있느냐, 죽고 죽이는 자리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있어야할 바른 자리에 대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물어야할 바른 자리에 대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네가 돌봐야할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21장에서 시몬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질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있어야 자리가 어디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자리입니다. 또 예수님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는 자리에 있다면 날마다 우리에게 맡기신 양들을 잘 돌아보는 작은 목자의 자리에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오시면 내 마음속에 내가 예수님과 사람들로 인한 사랑으로 가득한 가슴을 열어 보일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