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연구/창세기

창세기강해(14)그 방주로 들어가라(창6:9-22)

금빛돌 2021. 10. 9. 13:04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셨는가를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 이 세상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지 않으시고 근심하셨습니다. 근심이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완전히 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아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까? 노아는 500년 동안 한 자녀도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완전한 실패자 같았습니다. 500년 동안 하나님의 복을 하나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내가 노아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누구는 모두 잘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왜 이런가 라고 하십니까? 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어떤 기도의 응답도 없는가? 라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한 준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번성하고 잘 될 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임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9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6: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의 족보는 노아의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죄가 없는 완전한 의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은 노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것도 노아가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완전한 자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완전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완전한 자란 인간적으로 부족해도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완전한 자라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노아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노아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노아는 무엇보다 그 시대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노아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예수님은 노아시대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홍수가 나서 다 멸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드는 일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당연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런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시대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단순히 일상적인 일에만 빠져서 종말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로서 그 시대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어떻게 다르게 살았겠습니까? 그 비결은 매일 매일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120동안 종말을 준비하며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하늘에서 홍수가 올 징조가 있는 가운데서 방주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눈으로 볼 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 어떤 종말의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반드시 내가 이 세상을 쓸어버리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날을 지구 최후의 날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또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오실 것처럼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매일 망치질을 했습니다. 또 오늘 밤 주님이 오실 것처럼 하고 살아도 자녀를 낳았습니다. 오늘 밤 주님 오실 것처럼 하고 자녀를 믿음으로 잘 길렀습니다. 이렇게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된 비결은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726절에 예수님은 17: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종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도 사람들은 노아시대와 같이 단순히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어떻게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도 이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매일 종말의 날로 여기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고전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주님이 오늘 밤에 오신다고 생각함으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며 살아가는 가야합니다. 그래서 기쁜 일도 너무 기뻐하지 마시고, 슬픈 일도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라니다. 권세를 가진 자도 천년만년 가지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끝입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절대화시키지 말고 상대화시키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절대화 시킬 것은 오직 주님과 그분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시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노아시대는 어떠했습니까?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1절에 보시면 그때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하나님이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매 순간이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 때 이 땅을 하나님의 얼굴로 보시니까 이 땅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패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혈육 있는 자란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 육체의 정욕만 남은 인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부패한 것은 절대 이 땅에 있는 동물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 고깃덩어리만 남은 인간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고 육신의 정욕만 남은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함으로 그 끝 날이 내게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멸하리라는 말인 샤하트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땅이 부패하였다는 말도 쌰햐트입니다. 또 혈육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부패하였다는 것도 샤하트입니다.

그러니까 부패했다는 말과 멸할 것이라는 말이 같은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미래에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현재의 부패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부패가 곧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뱀의 후손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여러분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미래는 현재 나의 모습을 보면 됩니다. 현재 나의 모습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고 육신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것은 곧 심판입니다.

그러나 현재 나의 모습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나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이 없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마시고 오직 성령을 쫓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땅의 심판을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제 노아에게 말씀하십니다.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고페르 나무는 옛날 번역에서는 잣나무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어 그대로 고페르 나무라고 했습니다. 고대에 삼나무의 일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을 대비해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방주라는 말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테베라는 말입니다.

이 테베라는 말은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만들었는데, 그 갈대 상자가 바로 테베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 방주는 큰 테베이고, 갈대 상자는 작은 테베입니다.

이 창세기를 모세가 기록을 했는데, 모세는 자신이 어릴 때 물에서 건짐을 받은 갈대 상자와 노아의 가족들이 물에서 건짐을 받을 방주를 같은 테베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모세의 갈대 상자와 노아 방주의 공통점은 모두가 인간적인 동력장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갈대상자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갈대 상자에 태울 때 옆에서 노를 저어서 바로의 공주에 간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모두가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갈대 상자는 하나님의 품어주는 손이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를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손에 그냥 맡겼습니다. 그 상자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 상자가 나일강의 급류에 휘말려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어머니는 그 상자를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손으로 생각하고 그냥 맡겼습니다. 그랬을 때 정확하게 바로의 공주의 딸에게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노아방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방주에도 인위적인 노가 없습니다. 키도 없습니다. 노아방주는 그냥 물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아방주도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그 손에 노아와 그의 식구들과 동물들이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홍수가운데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노아에게 방주에 들어가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의 동력장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손안에 네 인생을 모두 맡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도서관이 비치할 책으로 선한목자병원 이창우박사의 바디바이블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잠이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 부르심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자는 사람은 아기입니다. 아기는 하루에 18시간 이상 잡니다. 그 자는 시간을 통해서 몸이 자랍니다. 아기가 잠을 잘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엄마의 품에 안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잠은 하나님께 나를 완전한 맡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동물 중에서 물에 빠져 죽는 유일한 종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평생 우리 밖을 나온 적이 없는 돼지를 물에 빠뜨리면 물에 둥둥 잘 뜹니다. 물에 대한 경험도 없는데 수영을 합니다. 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에 빠지면 가라앉습니다. 허우적거리다가 가라앉아 죽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물에 뜹니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도 물에 뜨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페에 사람 주먹 만한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만큼 물보다 가벼워 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왜 인간만 가라 앉는 것일까요?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온 몸이 굳어 혈관이 막히는 것일까요? 왜 암에 걸리고 화가 나고 병이 들어 삶의 해수면 위로 둥둥 뜨지 못하는 것일까요?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으시겠다는 신호입니다. 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는 고요한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명성에 있습니까? 우리를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은 오직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손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품어주시는 그 손에 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노아방주가 무엇입니까? 노아방주는 우리를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손에 여러분들의 모든 걱정, 근심, 그 모든 것을 다 맡기고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신 구조물은 노아 방주와 성막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노아방주를 성막의 모형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노아 방주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습니까?

14절을 다시 보시면 “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주를 만들되 먼저 방주 안에 칸들을 막고라고 합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는 둥지들을 만들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방주 안에 칸막이들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모든 동물들이 쉬고 안식할 수 있는 둥지를 만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둥지를 어떻게 만들어야겠습니까? 모든 동물들이 방주에서 쉼과 안식을 얻도록 각기 그 동물들에 맞게 둥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새 둥지에는 새에 맞게 둥지를 만들었을 것이고, 또 동물들에게는 그 모든 동물들에게 맞게 둥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노아 방주에 모든 동물들도 각자 맞게 안식할 수 있는 둥지가 있듯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집에는 우리 모두가 각기 맞게 안식할 수 있는 거처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의 품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는 여러분들을 각자에 맞게 품을 수 있는 여러분들에게 가장 알맞은 거처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4절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14-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청은 지금으로 말하면 아스팔트와 같은 것이나 나무 송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청을 칠하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카파르입니다.

이 카파르는 어린 양의 피로 우리의 죄를 덮는다고 했을 때 사용되는 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카파르가 우리의 죄를 속한다. 우리의 죄를 사한다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우리가 죄악의 물결이 넘실대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속제 제물이 되시는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안팎으로 칠해져서 더 이상 우리 안에 죄악의 물결이 들어오지 못하게 주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마치 방주가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저 산속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이 세상의 물속에 잠겨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죄악 된 몸과 마음을 온전히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방주와 같이 이 세상의 물위에 떠 있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 선박전문가들은 배의 길이가 높이의 10배가 되고, 길이가 너비의 6배가 비율이 물위에서 가장 안전하게 뜰 수 있는 배라고 합니다. 바로 노아 방주가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길이가 삼백이고 높이가 삼십규빗이니 길이가 높이의 10배가 되고, 또 길이가 삼백규빗이고, 너비가 오십규빗이니까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6배가 됩니다(길이 삼백-높이 삼십(10)/길이 삼백-너비 오십(6). 그래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노아방주는 현대 선박구조에서도 가장 안전한 구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설계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인생 설계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가장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인생 설계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무리 풍랑이는 이 세상에 살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설계하신 대로만 살아가면 가장 안전하게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방주는 오직 위에만 창이 있습니다. 노아 방주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위의 창문을 통해서 위만 바라보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앞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면 얼마든지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 대한 설계도를 말씀하신 뒤에 이제 이 세상을 홍수로 완전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홍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언약은 어떤 언약이겠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언약입니다. 아무리 큰 홍수가 와도 내가 반드시 너를 지키겠다는 언약입니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성경에서 언약의 증표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항상 성경에서는 언약의 증표는 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가 너희를 향한 언약의 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22:20-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살 된 어린아이가 급성폐렴에 걸려 숨을 몰아쉬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 절대 날 떠나지 마, 절대 날 버리지 마, 언제든지 나와 함께 할꺼지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아가야 절대 널 떠나지 않는다. 언제든지 너와 함께 할 거야 라고 하면서 딸아 사랑한다 고 하면서 안아주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부모님들이 우리 곁에 계시는 보혜사 성령하나님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른 채 숨을 몰아쉬면서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까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고 근심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않겠다. 네가 땅 끝까지 갈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닌 그런데 하나님 난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요 라고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내 아들을 피를 보아라, 나는 내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너에게 약속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버리지 않겠다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바로 우리 곁에 계신 보혜사 성령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은 노아홍수 때와 같이 완전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 안에 들오기만 하면 안전합니다. 이 노아의 방주는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또 이 방주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옆구리에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노아 방주에 옆으로 난 문은 옆구리에 창이 찔려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고 구원의 방주로 들어오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