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강해(7)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30)
오늘 본문 27절에 보시면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활하라는 말은 시민답게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빌3장 20절에 “빌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합니다.
빌1장 27절에 생활하라는 단어가 “폴리테우에스타이(시민답게 생활하라)”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20절에 시민권이라는 단어도 “폴리테우마(시민권)”라는 같은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시민답게 생활해야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빌립보라는 도시가 로마의 특별시인 것을 연상시켜줍니다. 사실 당시 빌립보라는 도시는 야만인들에 의해서 둘러싸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빌립보는 로마의 특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가 야만인들에 의해서 둘러싸인 도시였지만, 빌립보시는 로마시민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요즘에도 미국시민권이 있으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빌립보시는 로마시민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도시였기에 그들은 로마시민답게 생활해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나라 시민으로서 특권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에 합당하게 하나님나라의 시민답게 생활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 어떻게 생활해야합니까?
첫째는 우리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27절 하반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7하- 이는(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내가 감옥에서 나가서 너희에게 가 보나 아니면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하는 것으로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지금 빌립보교회가 서로 한 마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2장1-11절까지 서로 겸손하게 한 마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왜 우리가 서로 한 마음이 되고 한 뜻이 되고 협력해야합니까?
그 이유는 오직 복음의 신앙 때문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장 13절부터 19절까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
그래서 우리도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앙에 합당하게 서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에는 항상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빌립보서는 보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빌3장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기쁨의 서신이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어떤 일을 행하는 자들입니까?
빌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말씀을 뒤에서부터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배를 신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결국 마침이 멸망이 되는 자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같이 죽지 않는 자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의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의 대적 자들입니까? 십자가의 함께 완전히 죽지 않는 자들입니다. 아직 육신의 옛 자아가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너희를 대적하는 것은 그들이 멸망 받을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너희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받는 것은 너희가 구원 받은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는 삶입니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제일 먼저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고난도 함께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각할 때 예수를 믿는 것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 어떤 고난도 없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그 어떤 고난도 없는 삶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고난이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지 않기 때문닙니다. 또 고난이 아니면 우리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아니면 우리는 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님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복음을 대적하는 자들과의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빌립보교회 안에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로 인한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이 빌립보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끊임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과의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지만 너희가 내 안에서는 듣는 바요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빌립보교인들만 아니라 사도바울도 복음을 대적하는 자로 인한 고난이 끊임없이 있었습니다. 또 지금도 있습니다.
복음을 인한 고난은 사도바울에게도 있고, 빌립보교회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은혜로 여기시고 영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