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예배(롬12:1-2)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단어씩 그 의미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몸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산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은 살아 있지만 우리가 이미 죽은 제물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음을 인정하고 내 몸을 날마다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영적 예배라고 하니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무언가 신비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영적이라는 말이 헬라어로 “로기켄”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합리적인, 합당한, 이성적인, 논리적인, 분별이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예배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하면 합리적인 예배, 이성적인 예배, 논리적인 예배, 분별이 있는 예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예배와 서로 대조를 이루는 말입니다.
세상종교인들이 하는 예배를 보면 우리가 그 예배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예배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입니다.
/또 구약시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형식적이고 외식적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영적예배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예배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이해를 할 수 있는 예배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예배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삶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몸이란 단순히 우리의 육체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전체, 또는 우리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영적 예배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합리적인 예배,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예배라고 하지 않고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완전히 죽여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육신의 욕망을 죽이지 않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절대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육신의 욕망을 죽이고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예배를 드리며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예배당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장소가 예배의 처소가 되어야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동산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에덴동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즘 제가 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이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면 특정한 공간과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태초에 에덴동산은 모든 곳이 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었습니다.
창 3: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에덴)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동산에 “거니신다”고 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재하여 계실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레26:11. 내가 내 성막(성전)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거니시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여기서 “행하여” 라는 말이 “여기 저기 걸어 다니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어느 특정한 장소에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모든 곳에 하나님께서 거니시는 성전이었습니다.
또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말은 제사장이 성전을 지킬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대상23:32. 또 회막의 직무와 성소의 직무와 그들의 형제 아론 자손의 (성전을 지키는) 직무를 지켜 여호와의 성전에서 수종드는 것이더라”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최초의 성전인 에덴동산에서 에덴성전을 지키는 최초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창2장5절에 “창2: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경작)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서 보시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땅을 경작할 사람으로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작하다는 말이 “아바드”인데, 이 말은 땅을 경작하다는 말도 되지만 예배하다는 말도 됩니다. 또 창 2장 15절에서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땅을) 경작하며 (에덴성전을) 지키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경작한다는 말이 예배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이 노동하는 것은 범죄 한 이후로 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도 에덴동산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은 아담으로 땅을 갈고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땅을 갈고 경작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일에 빠져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두어서 일을 쉬고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특정한 장소에서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시대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 산에서도 말고 저산에서도 말라 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스테반은 성전에서 예배만 고집하는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설교하고 있습니까?
행7: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성전)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성전)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성전)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모든 세상)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성전)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배당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 예배입니다.
그래서 주부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남자들이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의 모든 장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예배가 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우리 삶으로 영적예배를 드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둘째,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거창한 예배를 드리고,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들은 이웃집의 과부된 사람들을 무시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때 선지자는 무엇을 두고, 어떻게 책망을 합니까?
너희가 아무리 내게 많은 예물을 가지고 내게로 오지만, 너희 손이 네 주위의 고아와 과부를 무시하고 학대한 손이라면 내가 어떤 재물이라도 받지 않겠다. 오히려 너희가 고아와 과부를 무시한 손을 가지고 내게로 오면 내가 너희 재물이 역겨워서 도저히 못 참겠다고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 그때 아주 경건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 내 이웃에 있는 과부를 돌아보는 삶은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이 아닙니까?
주님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시시한 일에는 보다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시시하게 여기고 사소하게 여기는 과부와 나는 함께 하고 있다. 나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다. 그런데 너는 그 과부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어떻게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나를 섬긴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 바로 그렇습니다.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 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건의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이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 예배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드려야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중요한 만큼 --똑 같은 비중으로--우리가 일상적인 삶 속의 예배가 중요합니다.
-- 간사시절 매일 11시,12시에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20-30명씩 청년들을 집에 데려와 밥을 먹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아내가 제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제발 집안 일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뭐 내가 세상적인 일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거룩한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방청소하고 설거지 하는 그런 자질구레하고 사속한 일들을 내게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의 예언자들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자질구레한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에 관심을 두고 있고. 그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속에 신학과 신앙이 나타나지 않음을 두고 책망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크게 회개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나가서 말씀을 전하고 강의를 하는 것만큼 집에서 아내를 도와 방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도와주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구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 속에 내 신앙과 신학이 나타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도 보시지만, 지하철 안에서 노약자를 보았을 때 어떻게 자리를 비워주느냐를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교회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듯이 우리가 교통법규도 어떻게 지키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도 보시지만, 길거리에서 우리 이웃들에게 어떻게 인사를 하느냐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밥을 먹느냐고 보고 계시지만, 우리가 식당에서 식당종사자들에게 어떻게 하느냐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도 보시지만, 우리 아파트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공중목욕탕에서 물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도 지켜 보십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은 세상의 학문도 최고로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그는 거기에 더하여 “환상과 몽조”를 깨달았습니다(단1:17). 그 환상과 몽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이상한 환상과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니엘은 정치인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가장 세속적인 세상 정치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tv도 보지 말고, 신문도 보지 말고, 영화도 보지 말고, 오직 교회에 나와서 기도만 하고 성경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tv를 봅니다. 뉴스를 봅니다. 드라마를 봅니다. 영화를 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면서 볼 수 있어야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도 단순히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장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단순히 시집가고 장가가기 위해서 연애하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결혼하라고 하셨는가? 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만나게 하셨는가?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보더라도 저 땅을 왜 미리 사두지 않았느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밭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 밭이 어떻게 되어야하는가를 보셨습니다. 공중의 새와 들의 풀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택하신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속에서도 하나님 동행하시며, 또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시면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