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송영목교수
작 성 자 송영목
빌립보서 강해
빌 1:1-11
신약 서신은 우선적으로 특정 상황을 염두에 둔 문서이기에 역사적인 배경을 꼭 알아야 한다. 빌립보는 어떤 도시인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의 북동부의 도시며 데살로니가 근처에 위치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즉 마케도니아의 빌립 2세에 의해 주전 358-360년에 건설되었다. 따라서 ‘빌립보’라 불린다. 행 16:12에서 누가는 빌립보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마케도니아 지역 첫 성이요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교회는 주후 48-49년에 바울의 전도로 세워진 유럽의 첫 번째 교회이다. 행 16:9-12은 기록하기를 2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은 도와달라는 환상을 드로아에서 보고 마케도니아의 빌립보로 실라, (빌립보서의 공동저자인) 디모데와 누가와 더불어 갔다. 행 16장은 빌립보에서의 바울의 사역을 길게 설명한다. 그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것 같으나 그들은 강가에서 기도를 했으며, 첫 회심자는 여자 루디아였고, 점치는 여자의 악귀를 쫓아내었으며,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투옥되었다. 유대인은 소수였다. 행 16:40은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교회의 본거지라고 밝힌다. 이방인 성도가 다수였을 것이다.
빌립보서는 빌레몬서,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더불어 옥중서신이라 불린다. 그리고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 불린다. 아마 로마감옥이 아니라 에베소의 감옥에서 기록한 것 같다. 왜냐하면 에베소에도 로마처럼 시위대가 있었고, 바울이 조만 간에 빌립보교회를 방문하겠다는 것을 밝힌 것을 보면 빌립보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닌 것 같다.
1절:
현대의 우리가 편지를 쓴다면 우리 이름을 제일 나중에 쓰는데 바울 당시에는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제일 먼저 썼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 유대인 이름인 사울 대신에 헬라식 이름인 바울을 쓴 것은 그 당시의 문화가 헬라 문화였기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경우 이해력과 호소력이 더욱 있었을 것이다. ‘종’이란 말은 둘로스인데, 이것은 노예를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영적으로 죄에서 구원받아 자유자가 된 바울과 디모데가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된 것을 말한다. 바울 당시의 노예처럼 좋든 싫던 억지로라도 섬기는 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라는 말을 사용하여 바울은 자신이나 디모데에게 시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가장 중요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빌립보서는 인간 바울과 디모데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 예수’ 즉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님이라는 말을 통해서 세상의 주관자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왕으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신 예수님임을 강조한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편지를 쓴다. 복음의 전파자인 자기를 투옥해버린 로마 황제를 세상의 주로 인정하지 않는다.
빌립보서, 살전후, 빌레몬서에서만 편지의 인사말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로 소개하지 않는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면서 사도라고 소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빌립보 교회에게 자신은 이미 확고한 신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모든 성도’에게 편지 쓴다. 특정 교회의 지도층이나 인물에게만 편지를 써보내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바울은 교회 내의 파벌이나 분쟁을 책망했고 (빌 4:2),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으며 (1:4), 모든 사람을 사랑했으며 (1:7), 사모했으며 (1:8), 그들 모두와 함께 계속하여 소망을 가졌고 (1:25), 모두에게 문안하였다 (4:2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고 부른다. 즉 그 누구도 자기 의로 성도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예수님과 연합된 덕분에 성도가 된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에게도 편지를 쓴다. 감독과 집사 혹은 장로라는 직분은 바울이 선교할 동안에 교회에 세운 것으로 매우 오래된 직분이다 (주후 44년경의 행 11:27-30; 주후 44-50년경의 행 14:23; 주후 52년경의 살전 5:12-13; 주후 57-58년경의 행 17-38).
2절:
바로 이들 모두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한다. 은혜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인자하심을 가리킨다. 바로 이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가 평강이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를 맛보아 아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평강-샬롬이 있다. 이 평강은 주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케 된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물론 성령님의 역사로 십자가 사건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만 나타나지만 성령의 사역도 암시되어 있다. 우리 삶은 3위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교제하는 복된 삶이다.
3절: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의 하나님께 감사했다.
4절: 간구할 때마다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했다.
관련 구절인 빌 4:1에 보니,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는 사랑받은 존재, 사모하는 존재, 기쁨, 면류관이었다. 이런 기쁨과 감사의 이유가 5-6절이다.
5절:
직접적인 이유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에서 (with the furtherance of the gospel) 빌립보 교회가 교제 (코이노니아)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복음 사역-전도 사역을 촉진함에 있어서 시작부터 호의적으로 도우며 동참했다는 말이다. 행 16:14-15절에 보니 빌립보의 루디아라는 여인이 자기 집을 교회당으로 제공했고 거기가 선교본부 겸 가정 교회가 되었다. 행 16:19-34에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복음을 믿고 바울과 실라를 친절히 접대했다. 빌 4:16에 보니 바울의 2차 선교여행 중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에게 헌금으로 도운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다. 빌 4:18에는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을 계속해서 도와서 궁핍함이 없었다고 한다. ‘복음’이란 말은 빌립보서에서 9번 등장하는데, 빌립보서보다 4배나 긴 로마서에도 9번 등장한다. 이 말은 빌립보서 전체를 묶어주는 줄이 복음이란 말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으로 여기기에 복음은 곧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가리킨다 (빌 1:15-16). 빌 1:27에서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했다”고 한다.
복음을 촉진하기 위한 교제는 자발적인 동시에 지속적이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고 간구할 때 기쁨으로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도의 교제는 복음 사역을 장려하는 교제여야 한다.
6절:
바울은 감사의 궁극적인 이유를 설명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하나님)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하나님께서 빌립보교회 안에 시작하신 착한 일은 무엇인가? 좁게는 빌립보 교회가 한 선교후원이다. 넓게는 그들을 통해서 이루시려던 복음 전파이다. 개인적으로는 교인을 통해서 이루시는 성화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성도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성화를 동반한다.
여기서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본다.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 믿은 순간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인간 역사를 완성하실 때까지 인도하신다. 계획을 세우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도에게 있어 미래는 보장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미래의 은사와 구원을 현재에 종말론적으로 맛볼 수 있다.
7절:
빌립보 교인을 향한 바울의 태도를 보여준다. “너희는 내 마음에 있음이며”. 바울의 마음속에 늘 자리잡고 있는 빌립보교회의 모든 교인들. 교사의 마음에는 늘 학생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것도 모범적인 학생이건 그렇지 않건 차별없이 그들을 풂을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마음에는 자녀가, 목자의 마음에는 양이, 회장의 마음에는 회원이 늘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 (변호)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매임 즉 투옥을 두려워하거나 모른 체 하지 않았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물질로 도왔다 (빌 2:25; 4:10-14, 18).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변명-변호하는 일과 확정하는 일에 참여했다. 빌 1:29-30에 보니, 바울이 경험한 투옥과 고난과 싸움을 빌리보교인도 겪고 있는 것이었다.
8절:
바울은 빌립보교인이 그의 마음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님을 8절에서 증명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 마치 맹세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 만큼 하나님 앞에 자신감있게 빌립보 교인을 얼마나 사모하는가를 말한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심장 (splangkna)은 원래 창자 혹은 내장을 가리킨다. 이것이 마음 혹은 깊이 느끼는 애정과 친절과 자비와 온유한 사랑의 감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바울은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9절:
바울의 기도-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랑은 지식과 총명 즉 분별력으로 아름다운 협력을 이룬다. 지식과 분별력이 없는 사랑은 지나친 열광주의자로 만들거나 무분별한 헌신으로 인도한다. 이단에 빠지게 한다.
10절: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고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 까지 이르고”. 지식과 분별력을 겸비한 사랑이 더 풍성하게 되어야 하는 목적은 악한 것을 버리고 대신 지극히 선한 것을 선택하여 진실하고 허물없이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진실하다는 말은 불순물과 혼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도덕적으로 순결함을 의미한다. ‘허물없이’는 길에서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손상되지 않고 흠없이 결백한 것을 의미한다. 언제까지? 그리스도의 날까지= 주님 다시 올 때까지, 우리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러므로 우리의 성화는 계속되어야 하고 우리의 영적인 싸움은 방학도 공휴일도 없다.
11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0절의 ‘허물이 없다’는 소극적인 의미가 11절에서는 적극적인 의미로 바뀐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의로운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된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성령으로 행하지 않고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빌 1:12-18
복음의 진보가 된 바울의 투옥! 얼마나 역설인가! 바울은 지금 옥중에서 기쁨의 서신을 쓰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낙천적인 죄수다.
12절:
사단은 바울을 투옥시키면 복음도 매이는 줄 알았지만 복음은 오히려 방해받지 않고 진보되었다. 진보가 된다는 말은 원래 공병대원들이 본 부대가 진군해 갈 길을 앞서서 닦아놓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투옥과 고난 가운데서 열심히 복음을 확증한 것은 복음이 전진해 가는데 있어서 장애물들을 제거한 것이었다.
13절:
바울의 메임은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 시위대는 왕을 지키는 경호원들을 의미한다. 바울을 간수들이 교대로 지켰다면 많은 사람과 접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간수들은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며 복음을 전파하려는 이상한 죄수를 처음에는 제대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결국은 바울의 진심어린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14절:
형제 중 다수가 바울의 투옥 때문에 주님 안에서 신뢰하였기에 그들은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이 형제들은 누구인가? 바울이 에베소 감옥에 지금 갇혀 있다면 아마도 (유대인 출신과 이방인 출신으로 구성된) 에베소 교인들일 것이다.
15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모두 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는 했지만 동기가 모두 순수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투옥된 에베소에는 바울이 투옥되기 전에 이미 교회가 서 있었던 것 같다. 그 교회의 어떤 전도자들은 다른 성도 보다 더 탁월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 전파자로 이름이 알려지자 이들은 상대적으로 바울보다 덜 중요한 사람으로 비쳐졌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을 투기 (시기)와 분쟁 (rival 의식을 가지고)의 동기로 전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했다.
16절:
복음을 착한 뜻으로 전한 사람들은 사랑으로 전했는데 왜냐하면 바울이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입은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세우신 바울의 권위를 시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바울이 받은 은사도 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17절:
하지만 복음을 투기와 분쟁으로 전한 자들은 자신의 야망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이들이 이런 부당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옥중에 있던 바울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
18절:
그러면 무엇이뇨.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즉 외모-거짓 동기로 하든지 참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면 그만이다.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었기에 악한 동기로 복음을 전파하여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사람조차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영광의 복음만 전파되면 그것으로 만족한 바울이었다.
빌 1:19-26
바울은 자신의 투옥이 복음의 진보를 위한 것임을 알 뿐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실 것도 확신하고 있는 낙천적인 죄수이다.
19절: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바울 자신에게 일어난 것은 구원으로 판명될 것을 ‘안다’ (oida). 에베소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기쁨을 주신 분은 변함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성령님이셨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특별히 빌립보 교인들의 간구이다. 성령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언급한 것은 성령께서 예수님의 사역을 주도하신 것처럼 바울의 사역도 책임지시고 계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할 때 도우심 (epixoreigias)은 힘을 주다, 준비하다, 공급하다는 뜻이다. 성령의 힘주시고 공급하시는 은혜를 확신한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20절:
바울은 자신의 간절한 기대 (apokaradokia, 목을 쳐들고 다른 것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고 어떤 것에만 열렬히 관심을 두는 것)와 소망을 밝힌다. 이전처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석방되어 살게 되다면 그는 복음을 다시 전할 것이다. 만일 바울이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면 그는 죽음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켜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21절:
왜냐하면 나에게 사는 것 (현재 능동태 부정사. 관사와 함께 쓰여 주어 역할을 한다)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는 것 (아오리스트 능동태 부정사: 육신적인 죽음의 단회성. 주어 역할을 한다)은 이득-유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은 나의 생명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뜻은 우리 중심적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소망과 믿음을 주님께만 두며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성품을 가지고 주님 주신 의를 덧입고 사는 것을 말한다.
“죽는 것은 이득-유익하다”는 말은 육신의 죽음으로 바울은 영원히 예수님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육신의 죽음은 영생과 본향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일평생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다면 이것만큼 그리스도께서 존귀케 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22절:
바울은 여기서 사는 것과 죽은 것 중 선택해야만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한다. 만일 바울이 육신으로 사는 것 즉 석방되어서 살게 된다면 자신의 일의 열매 즉 더욱 더 교회를 세우고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땅에서 영적으로 아직 어린 빌립보 교회를 위해 해야할 일들이 아직 많은 것을 바울이 알고 있기에 막연하게 저 천국만 사모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23절:
바울은 이 땅에서 사는 것과 떠나 (죽어)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사는 것 중에서 후자를 더 사모한다. 우리의 죽음은 곧바로 주님과의 교제로 인도한다. 저 천국에는 눈물과 고통, 더 이상의 전쟁도 없고 온전한 평화와 기쁨만 있기에 바울이 더 사모했던 것이다.
24절:
육체에 사는 것이 너희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 바울은 교회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참된 목회자요 참 목자이다. 빌 3:1-3절과 4:2절 등에 보면 여전히 빌립보 교회는 불신 유대인들을 위시한 많은 대적의 위협과 교회의 내분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10년도 채 되지 않은 어린 교회다. 바울 자신이 설립한 교회의 절실한 요구가 자기 개인의 영적인 욕망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참 목자는 늘 양들 곁에 있어 그들의 필요를 살피고 돌보고 싶어한다.
25절:
바울은 석방되어 살게 될 것과 믿음의 진보와 믿음의 기쁨을 확신한다. 믿음의 진보는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열매를 맺어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매일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퇴보하여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진보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생기가 있다.
26절:
바울의 석방은 빌립보 교회에 기쁨과 자랑(의 근거)이 된다. 실제로 바울은 사도행전에 의하면 2차 전도여행 중에 (행 16:11-40) 그리고 3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고후 8:1-5) 그리고 귀환하면서 (행 20:5-6) 빌립보를 방문하게 된다. 하나님의 섭리이다.
빌 1장 27-30
빌 1:27절: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가서 확인하던지 아니면 소문으로 듣던지 간에 너희가 한 마음으로 굳건히 서있는 것과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을 내가 알 것이다”.
빌립보교인은 바울이 자기들과 함께 있든지 없든지 간에 성도로서 확신있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특별히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씀은 ‘politeuo’인데 ‘시민권을 행사하라’는 말이다. 즉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살아라는 말이다 (빌 3:20). 눈에 보이는 많은 특혜를 보장했던 로마의 시민권이 아니라, 비록 고난을 당할지언정 온갖 신령한 은사를 맛보는 ‘하늘의 시민권자답게 살아라’는 말씀이다. (목회자가 옆에 있던지 없던지 하늘의 시민권자답게 살아야 한다).
27절에서 복음이 2번이나 등장한다.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께 일어난 모든 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기쁜 소식이다. 주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주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라는 기쁜 소식이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살아서 천국을 맛보는 것이 기쁜 소식이다. 이 복음을 모든 성도가 함께 알고 즐기도록 우리는 협력해야 한다.
28절:
너희를 대적하는 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면 이것이 너희의 대적에게는 (영생을 잃어버리는) 멸망의 빙거-증거-표이지만, 너희에게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구원의 표이다. 대적을 무서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복음의 능력을 믿는 자는 결코 두려워해서 안 된다. 그렇다면 빌립보교회의 대적자들은 누구인가? 빌 3:2절에 보니 ‘개, 행악자, 손할례당’이다. 즉 율법주의자 혹은 쾌락주의자 혹은 황제를 신으로 받들고 있는 사람들 모두 가리키는 듯 하다. 율법을 준수해야만 의롭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방종으로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 우상 숭배자 모두가 어린 빌립보교회의 대적으로 보인다.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말씀이다. 아마 Cassius가 빌립보 전투에서 패배의 두려움으로 자살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29절: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은혜를 준 것은 너희가 주님을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위해 힘에 넘치는 수고를 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성숙한 성도의 특권이다. 행 5:40-41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의 전도 열매가 많은 것을 보고 시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으로 때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매를 맞고 만신창이가 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특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30절:
왜냐하면 너희도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싸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가 여전히 그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듣고 있다. 전도자 바울이 당한 고난을 빌립보교회도 동일하게 당하고 있다. 어두움과의 전쟁은 모든 크리스챤이 참여해야 한다. 예외가 없다. 바울의 삶은 싸움 자체였다.
빌 2:1-4
우리는 이 짧은 4구절 안에서 바울의 4중 강조와 3중 권면을 본다.
2장 1절:
여기서 바울의 ‘4중 강조’가 나타난다 (조건절; protasis. 하지만 실제로는 조건절이라기 보다는 전제절-presuppositional clause라 할 수 있기에 ‘since there is’로 번역 가능하다. 전제절이기에 다음 구절에서 명령할 수 있다):
“(1)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무슨 격려가 있다면, (2) 만일 너희에게 예수님의 사랑으로부터 어떤 위로가 있다면, (3) 만일 너희에게 성령님과 가지는 교제가 있다면, (4) 만일 너희에게 긍휼과 자비가 있다면”. 바울은 계속해서 ‘만일 –있다면’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격려와 위로, 성령의 교제와 긍휼과 자비가 있는 줄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바울은 이런 것들이 빌립보교회에 지금 있는 줄 알기에 그 결과도 현재에 나타날 것을 안다는 말이다.
우리는 성도이다. 이 말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말이다. 즉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인해 위로를 받고 있다. 그리고 성령님과 교제하면서 살고 있고,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고 있다. 성자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와 성부의 긍휼과 자비라는 축도에서 받는 복을 받고 있는 존재가 교회이다.
2절:
(귀결절; apodosis) 나의 기쁨을 같은 마음과 같은 사랑과 하나의 뜻과 목적을 가짐으로써 완전하게 하라.
이런 4중적인 복을 소유한 사람이 교회라면 교회는 마땅히 같은 마음, 같은 사랑, 하나의 뜻과 목적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개성과 특성과 성격이 다 다르지만 동일한 3위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즉 4중 강조 다음에 3중 권면 중 첫 번째인 “하나가 되라”는 말씀이 2절에 나온다. 이미 1:27에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라”고 말한 적 있다.
3절:
이기적인 야망이나 헛된 속임수로 하지 말고, 남을 더 낫게 여겨서 겸손 가운데 행하라. 3중 권면 중 두 번째는 겸손 가운데 남을 낫게 여기라. 이기적인 야망 (eritheia)은 원래 일일 노동자를 뜻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정치인이 정치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 불골정한 방법까지 동원해서 쟁취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삯 혹은 이권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기에 봉사와 섬김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 겸손이 없이는 남을 나보다 낫게 대할 수 없고 하나가 될 수 없다. 겸손은 사람의 부출분성과 하나님의 충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겸손을 위해 이기적인 야망과 허영-헛된 속임수는 금물이다.
4절:
너희 각 사람은 너희 자신의 관심을 살펴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살펴 보라.
3중 권면 중 마지막은 서로 돌아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3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교제하는 사람이다. 수평적으로는 형제 자매와 하나됨과 낮은 자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빌 2:5절 이하에서 말씀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빌 2:5-11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강조하는 단락이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1-4절의 겸손히 남을 섬기는 모습은 곧 예수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죽음 이외의 모든 모습을 본 받아야 한다. 어느 정도? 주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6절: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본체 (morpei)란 무엇인가? 내적이며 근본적이며 영구적인 어떤 인격 혹은 사물의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리고 앞으로 영원 후까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성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성자의 속성 사이에는 어떤 질적인 수준 차이가 있을 수 없다. 325년경의 니케아 신경은 이것을 ‘homoousios’라고 부르는데 '동일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고후 3:18절에 보니, “우리가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도 영원한 주님의 신적 성품에 참여할 것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서 새 사람으로 산다면 신적 성품에 이미 참여한 자로 사는 것이다.
7-8절: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 (scheima)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무엇을 비우셨는가? 하나님의 신성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일뿐이다. 예수님이 비우신 것은 만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영화 (요 17:5)이며 독자적으로 행할 수 있었던 권세 (히 5:8; 요 5:30)와 자신의 부요하신 상태였다 (고후 8:9).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영화와 권세와 부요하심을 포기하셨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그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종의 형체’는 종으로서의 외적이며 일시적인 모양을 의미한다. 기꺼이 종이 되신 주님. 성육신하신 순간이 종의 형체를 취한 순간이다. 눅 22:27절: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 그러므로 빌립보교회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낮추고 비워야야하고 종으로 섬겨야 한다.
9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부활, 슨천, 보좌 우편에 앉음은 예수님의 승귀인데 하나님의 역사이다.
10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님이 높아지신 이유-목적은 만물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이며 영원히 영광을 받기 위해서이다. 빌립보 교회는 네로 박해를 예기하는 시점에서 세상의 주를 로마 제국이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를 받았으나 예수님이 세상의 주이심을 고백해야 한다.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18
12절: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부재 중 일 때도 받은 바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항상 복종해야 했다. 사람의 감시나 체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훈련을 해야 했다. 바울의 도움없이 이제는 자발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만 했다. 우리의 구원은 믿었을 때 이미 이루어진 것이지만 계속해서 이루어 가야하는 과정이다. 우리의 구원은 계속되는 영적 전쟁이며, 마라톤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다른 말로하면 ‘성화’이다. 주님을 닮아가고 성령의 사람, 말씀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은 계속되는 성화의 과정이다. 이 과업이 중요하기에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해 가야 한다. 두려움과 떨림은 전심으로 혹시나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조심하는 것이다.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 행하시는’-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구원-성화를 이루어 갈 수 있다. 우리 스스로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 과정과 결말까지 책임지시고 동참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따라서 의지적인 결단을 하고 행하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14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순종해야 한다.
15절:
그 결과 우리는 흠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의 빛으로 살게 된다. ‘흠없고 순전하다’는 말은 악이 섞이지 않은 온전한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었지만 계속하여 흠없도록 우리는 성화되어야 한다. 빌립보 도시 역시 믿음없고 패역한 도시였기에 그런 사회 속에서 흠없이 살 때 빛처럼 더욱 빛 날 것이다. 세상에 죄악의 밤이 짙게 드리우면 드리울수록 거룩한 주님의 백성은 더욱 더 빛나게 된다. 따라서 세상이 죄악의 밤에 빠져있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라. 오히려 이것은 우리에게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16절:
빌립보교회가 생명의 말씀을 굳건히 붙잡고 있다면 주님의 판단의 날에 바울이 행한 모든 달음질-사역이 헛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나게 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만일 빌립보교회가 성화에 힘쓰고 말씀에 충실하게 산다면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 큰 자랑이다. 그 당시의 경주는 1등만 상을 받을 수 있기에 요즘 보다 경쟁이 더 치열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 앞에서 1등의 상을 받도록 빌립보 교회를 위해 얼마나 힘을 썼는지 모른다.
17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관제’는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희생 제물 혹은 땅위에 붓는 포도주 한 컵을 가리킨다. “내가 관제와 같이 계속해서 부어진다 할지라도” (현재수동태 직설법 1인칭 단수; spendomai). 여기서 관제는 바울 자신이 흘릴 피 즉 죽음을 상징한다. 한번만에 죽은 것이 아니라 사역 가운데서 계속적인 희생을 가리킨다. 수동형이기에 바울 자신의 죽음을 하나님이 통제하신다는 확신을 보여 준다. 딤후 4:6절도 비슷하게 말한다: 관제와 같이 내가 이미 부음이 되고 (신적수동태). 우리의 매일의 죽음은 하나님이 주장하신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바울의 육체적 죽음이 가까웠다고 하면서 연대를 늦게 잡을 이유는 없다. 비록 에베소 감옥에서 죽을 지은 정 사역의 결과인 빌립보교회의 신앙의 성장을 기억한다면 기뻐할 수 있다.
18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리니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가?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즉 성화를 보고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비록 우리는 사역 때문에 힘에 겨운 일을 만나더라도,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와 학생의 신앙의 성장을 보면서 사역의 결실을 보면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성도의 기쁨은 공동체적인 기쁨이다.
빌 2:19-30
19절:
감옥에서 바울은 목자로서의 사명을 다 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라는 뜻을 가진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어 빌리보교회의 사정을 살피고자 한다.
20절:
디모데는 진실한 마음으로 빌립보교회의 유익을 생각한 사람이어서 바울의 대사로 적임자 였다. 딤후 3:15에 보니,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신앙훈련을 받았고 성경을 알았고 온순하고 순종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신앙의 기초가 어려서부터 잘 다져진 것이다. 행 16:2에 보니, 성장한 후에도 가장 잘 아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형제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고전 4:17에 보니,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주님 안에서 가장 사랑하는 성실한 아들과 같았다. 만일 바울이 에베소 감옥에서 석방된다면 디모데를 곁에 두고 계속 동역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빌립보교회의 유익을 구했기에 즉 주님 안에서 그런 소망을 가졌기에 (19절) 디모데를 보내기로 작정한다.
21절:
바울은 자기와 한 때 함께 동역한 사람들 (누가, 아리스다고 등, 골 4:10, 14; 몬 24)이 더 이상 자기와 함께 있지 않고 각자 자기 일로 떠나가 버린 것을 말한다. 디모데는 예외였다.
22절:
디모데의 연단은 마치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복음을 위해 바울을 철저히 도운 것이다. 디모데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영적 아버지인 바울의 권위에 순종하면서 mentor로 여기면서 따랐다. 이 때 디모데는 30대 중반으로 보인다. 젊었지만 고생을 해본 사람이었고 열정과 영적인 통찰력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23-24절:
바울은 자신에 대한 판결이 무죄 판결이 되어서 속히 빌립보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믿음 가운데 확신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주님을 원망하거나 영적으로 침체된 모습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25-28절: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진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에 돌려보내기로 작정한다. 그는 바울의 형제이며, 동역자이며 동료 영적 군사이고 함께 수고한 자이다. 그는 또한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돕기 위해 헌금을 주어 보내었던 사자-메신저였다. 하지만 그는 위독한 중병에 걸렸다. 하지만 주님은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사 회복시켜 주셨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에 그를 보내면 병의 회복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능력의 종 바울이 왜 에바브로디도가 그토록 죽을 지경까지 되었는데 신유의 기적을 간구하지 않았나? 바울 정도면 기도로 에바브로디도를 고칠 수 있지 않았을까? 신유와 기적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 아무리 사도라 할지라도 아무 때나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때와 목적에 일치해야만 가능했다.
29절:
빌립보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도록 권면한다.
30절: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가 죽음에 거의 가까이 갔다) 주님의 그 일 (to ergon christou, 그리스도의 그 일- 정관사. 중단대격 명사)을 위해 죽기까지 바울을 도왔다. 목숨바쳐서 주연이 아니라 조연의 역할을 감당했다. 아마 에바브로디도의 병은 과로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빌 3:1-9
빌 3:1:
종말로 (to loipon, finally)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종말로’라는 말은 뒤에 아직 44절이나 남아 있기에 편지를 종결지으려는 의도로 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주제로 넘어가려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고 살전 4:1). 우리가 기뻐하되 주 안에서 즉 주님과 연합한 가운데서, 주님의 공로 안에서, 주님의 인격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은 공통적인 요소를 갖춘 기쁨이다.
2절:
개, 행악하는 자, 손할례당을 삼가라 (계속해서 주의하라, blepete x 3회). 이들은 유대주의자들이다. 즉 구원을 위해서는 이방인들도 할례와 같은 외적인 율법의 준수사항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 다르다. 여기서 ‘개’ (kuoon, 애완용 개가 아니라 몸집이 큰 개로서 길거리의 더러운 것을 먹고 다녔다)는 흔히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경멸적인 의미로 붙여준 이름이다. 바로 이것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에게 경멸적인 의미로 붙여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참된 유대인, 참 이스라엘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손할례당이라는 말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와 반대된다. 이들은 표면적-외적-신체적인 유대인이지 이면적-내면적인 유대인이 아니었다. 할례는 마음에 해야했다 (롬 2:28-29). 성도는 마음과 손과 귀와 입과 발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구로 드리기 위해서이다.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봉사하고 예배하는 사람이 참 할례당이다.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 육체를 (en sarki) 신뢰하지 말라. 예수님을 떠난 모든 것, 예수님과 관련없는 모든 것을 육체라고 볼 수 있다.
4-6절:
바울은 자신도 세상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육체를 자랑할 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도’ (ego)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5절에 보면 바울에게 생득적으로 부여된 명예가 등장한다: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음, 귀족의 가문에서 출생함 (이스라엘 백성, 베냐민지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빌 3:(5)-6에는 나중에 노력으로 획득된 명예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한 자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하지만 바울은 빌 3:7-8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명예와 수치를 재정립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이러한 명예의 재정립은 그 당시의 불신 사회의 기존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7절: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인해) 다 해 (손실, 손해)로 여긴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라는 조건이 빠지면 우리의 모든 삶은 불신자와 다를 바가 전혀 없게 된다.
8절: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얻기 위해서는 이전의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쓰레기로 여긴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이전에 유익으로 여기면서 자랑하던 모든 것을 개에게나 던질 쓰레기라고 말함으로 다시 한번 육신적인 유대인을 간접적으로 공격한다. 그리스도를 완전한 자기의 소유로 여기기를 원한다. 은혜로 구원받은 자는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어야 한다. 모든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 아직도 학벌, 소득, 가문, 외모, 건강, 배경을 예수님 보다 더 자랑한다면 완전히 거듭난 사람이 아닐 것이다.
9절: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기 원한다. 나의 의는 율법으로부터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난 의이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자기 의나 자기 공로에 빠져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소유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없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도 없다. 교회는 예수 그리서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빌 3:10-21
10절:
바울은 8절에서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했다. 이것을 10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기 원한다. 부활의 권능은 성도를 의롭다 하신다 (롬 4:25; 8:1, 16; 고전 15:17).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육체에 채우기를 원했다 (골 1:24). 예수님의 구속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매맞고 헐벗고 돌에 맞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음을 당한 것을 견디어야 했다.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도 본받기를 원한다. 완전한 거룩함을 추구하기 위해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말한다. 10절에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하늘에 앉혀서 왕노릇하는 것을 말한다.
11절: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말은 바울이 아직 구원의 확신이나 부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초월하여 온전히 구원 사역의 일군이 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12절:
완전을 향해 좇아가는 바울의 모습을 본다. 이것을 달리기에 비유한다. 아테네에 있던 육상경기 트렉은 182미터 길이였다. 출발선에는 돌로 된 발판이 있었다. 한 손은 발판에 대고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 최대한 빨리 출발하도록 긴장하면서 서 있다. 이미 얻었다함도 온전히 이루었다함도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구원을 받았다면 인생에 있어서 최선의 경주를 해야한다. 예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사로잡아서 그의 인생을 굳게 붙들고 계신 분이시다.
13-14절: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한 일 즉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뒤에 있는 것은 바울이 복음과 상관없이 살았던 옛 생활을 가리킨다. 바울에게 남아있는 목표는 오직 하나뿐이 었다. 이 땅에서 비록 우리가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해도 그렇게 노력하는 자만 성화의 기쁨과 보람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푯대-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경주는 상급이 따른다. 고대 헬라 세계에서 승리자는 월계관을 쓰고 500드라크마의 상급을 받고 국가에서 제공하는 돈으로 식사를 하고 연극 관람 시 맨 앞줄-로얄 석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이 땅에서의 시상은 경주를 마친 후에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고전 9:24). 하지만 영적인 신앙의 세계에서는 경주를 시작할 때부터 시상자를 이미 호명한다.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가 상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딤후 4:8). 상을 보장받고 경주하는 것이 신앙의 경주다.
15-16절:
성숙한 우리는 14절까지 말한 견해를 견지해야 한다. 만일 빌립보교인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사소한 잘못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께서 분명히 밝혀 줄 것이다. 우리가 도달한 것만큼 우리는 그대로 행해야 한다. 문제는 행함이다.
17절:
나를 본받으라. 이 말은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하여 옛 일을 잊어버리고 상을 바라보면서 완전을 향해 경주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말이다. 바울의 인간적인 교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비립보교회에게 헌신에 대한 구체적인 모범-모델이 필요했다. 17절 하반절에 바울은 바울 자신 이외에도 이런삶의 원칙대로 사는 사람들 (디모데, 에바브로디도)을 주목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신앙의 독불장군식의 교만이 없었다.
18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그’ 원수로 행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의 수가 많았고 유럽의 첫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바울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절:
저희의 최후는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위요,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 분과 악의와 훼방과 부끄러운 말; 골 3:2, 5, 8) 을 생각하는 자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탐식과 방종하는 일에 자기 몸을 맡겨버린 자들이다. 그들의 영광은 부끄러운 일을 당하는데 있다.
20절:
하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오직 하늘에 있다. 하늘로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빌립보 교회는 비록 로마의 시민권과 로마의 문화 속에 살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늘의 시민권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다. 위로부터 난 자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살아야만 대적들인 땅의 일만 추구한 자와 구별되게 살 수 있다.
21절:
예수님이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로 우리의 낮은 몸도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몸이 부정하다는 식으로 생각한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몸도 영혼처럼 구원의 대상으로서 영화되어야 할 존재임을 밝힌다. 비록 이 땅에서 우리는 낮은 몸으로 살고 있다. 이 말은 죄와 질병과 약함으로 고통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차 변화될 몸에서는 영광만 있을 것이다. 고통은 사라지게 된다.
빌 4:1-9
1절:
‘그러므로’. 3장까지 논의했던 내용을 숙지한다면 즉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온전한 부활의 몸을 장차 가질 것으로 소망하면서 사는 빌립보 교인들이다. 바로 이들이 바울에게는 사모하는 형제들, 기쁨, 면류관, 사랑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지금 그러하다고 말한다. 물론 앞으로 바울이 석방되어 빌립보교회의 성화를 위한 사역에 헌신한 후에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살전 2:19-20). 이들에게 구체적인 권면을 마지막으로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현능명령형 (steikete)이기에 굳게 서는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특히 대적들을 대항해서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안에 온전히 서야 했다.
2절.
내가 유오디아 (‘순조로운 여행’이란 뜻)를 권하고 순두게 (‘다행스런’이란 뜻)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인들인데 한때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함께 뜻을 모아 동역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의견이 충돌되고 있다. 바울은 이들에게 주님 안에서는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 가능하다고 각각 권면한다 (parakalo를 두 번이나 쓴다).
3절:
“그렇다 (nai).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 (these women; 유오디아와 순두게)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빌립보교회들 곧 자기와 같이 멍에를 같이 한 자들의 도움을 청하고 있다. 글레멘드 이외에는 바울의 동역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잇기 때문이다.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형편과 관계없이 기뻐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다. 왜냐하면 희락-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갈 5:22).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기뻐할 수 있다 (롬 8:28).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은 인내, 자비, 친절, 아량 이 모든 의미의 종합이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면 할수록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기가 쉬울 것이다.
8절:
(무엇에든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할 만한 것, 칭찬할 만한 것, 덕과 칭찬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신중한 숙고와 검토가 필요하다.
9절: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 즉 실천이 그 다음에 필요하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6절:
신중한 검토와 실천에 앞서서 기도가 필요하다. 염려에 대한 치료와 해결책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털어 놓는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벧전 5:7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마음을 쏟아 놓는 방법이 기도와 간구다. 그것도 감사함으로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알고 겸손히 순종하겠다는 마음 자세로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감사없는 간구는 날개없는 새와 같기에 응답받을 수 없다.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가? 우리 구할 것 (중복대격: 그 요구들을) 즉 명확하고 특별한 사항을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 피상적으로 기도하면 피상적인 응답이 온다. 하나님께 (앞에) 기도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는 아무리 작은 기도라도 물리치시지 않고 아무리 큰 기도라도 이루시기에 불가능하지 않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평강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평강은 성도 안에 비친 하나님의 미소다. 이 평강은 모든 지각-이해를 초월한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평강을 주신다.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 기도의 사람은 난공 불락의 요새 안에 거하면서 평강을 누리는 사람이다.
빌 4:10-23
빌 4:10절:
빌립보교회가 다시 바울을 도와주게 된 것을 인해 바울은 크게 기뻐한다. 마치 겨우내내 나무가 죽었던 것처럼 있다가 움이 다시 돋는 것처럼 빌립보교회의 바울을 향한 섬김은 이제 더욱 분명한 표시로 재개된다.
11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울의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모든 형편 가운데서라도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로부터 받은 그 무엇 때문에 기뻐한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기쁨의 이유는 아니다. 설령 그런 선물이 없었다해도 바울은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만족을 이미 체험으로 훈련된 바울이었기 때문이다.
12절:
비천과 풍부에 처할 줄을 알고 풍부와 궁핍에 관한 일체의 비결 (신비)을 배웠다. 사실 비천에 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서 그 절정을 볼 수 있다 (빌 2:8). 풍부에 처하는 비결은 교만치 않고 심지를 곧게 하여 그 풍부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 (panta)을 할 수 있느니라.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특히 비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알게 된다.
14절:
바울과 빌립보교회 사이에는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적 관계의 교제가 있었다. 이것에 대해 바울은 감사한다.
15절:
바울은 과거의 일을 회상한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포함하는 마게도니아를 떠나서 다른 지역의 전도 활동을 하려고 할 때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빌립보 교회 밖에 없었다.
16절: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에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도움을 받았다.
17절:
바울에게 있어서 선물은 최종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 선물을 보내준 빌립보 교회가 관심이었다. 바울은 그 선물로 인해 하나님께서 큰 보상으로 함께 하실 것을 소망한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해 진다 (잠 11:25).
18절:
바울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더욱이 풍부하도록 가지고 있다.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보내어준 선물은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향기로운 제물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연상케 한다.
19절: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교회의 모든 필요를 풍성히 채우실 것을 확신한다. 이런 하나님의 큰 은혜의 기초는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이다. 따라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은혜의 풍성함은 놀라운 것이다.
20절:
이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땅하다. 바울은 단순히 무미건조한 교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송영하는 사람이다. 그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천송하고자 하는 들끓는 소망이 있다.
21절: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빌립보교회에게 문안한다. 디모데를 포함한 몇몇은 바울의 에베소 감옥의 투옥 기간에도 동고동락했다.
22절: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 사람이 빌립보교회에 문안한다. 가이사 황제의 궁중 관리인은 로마를 포함한 주요 도시에 퍼져 있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대신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즉 높은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 복음이 이미 전파된 것을 알 수 있다.
2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립보교회 심령에 있기를 축원한다. 성자 안에 있는 은혜는 성부에게서 그 기원을 성령에게서 그 현재적인 적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가 함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