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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본 칭의의 믿음이란 무엇인가?(마25:31-46)

금빛돌 2016. 10. 12. 22:07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는 어떤 집사님이 주일에 성가대를 설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 있는 기분으로 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차분히 까라 앉고 더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가대를 봉사하는 분만 이렇게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주일 예배는 종말에 저 천국에서 드릴 예배를 앞당겨서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 예배를 나올 때마다 항상 종말을 의식하면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또 우리가 정상적으로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아가야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모두 주님의 재림과 종말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예수님의 재림이 더디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예수님의 재림이 장차 올 것이지만, 이미 왔다고 생각하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이라면 우리는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지만--오늘 주님이 오실 것이라 생각하고,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살아가야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매주일 예배 때 마다, 또는 매일 삶속에서 종말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면, 또한 우리는 매 순간 최후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오늘 밤이라도 내가 주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

를 항상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지막 심판의 모습이 역사적 사실과 비유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32절과 33절을 빼고는 모두 심판 때 있을 역사적 사실에 관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종말 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할 임금으로 오신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31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1절입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말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가지고 모든 천사와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심판대 앞에 모으십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니엘서에서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할 임금으로 오신다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비유가 나옵니다.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목축을 할 때 낮에는 양과 염소를 같이 방목하여 기릅니다. 왜냐하면 양은 풀을 먹으면 풀이 없어져도 그 자리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염소는 풀이 없어지면 다른 곳으로 옮기기 때문에 양들이 염소를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낮에는 양과 염소가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염두 해 두시고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양과 염소처럼 분리시키십니다.

그래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둡니다.

그리고 임금이신 예수님은 양과 같이 오른 편에 속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오른 편에 속한 의인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반대로 염소 편에 속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땅에 있을 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또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언제 예수님이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습니까?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않았습니까 나그네 되엇을 때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벗엇을 때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까 병들었을 때 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았습니까?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염소 편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섬겼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들이 전혀 자신을 섬기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장차 심판 때에 있을 모습을 예언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잘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양과 염소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염소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양과 염소는 모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25장의 비유를 보면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는 사람들입니다.

또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양과 염소도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양과 염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불신자를 가리키지 않고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염소 편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더 섬겼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너희가 왜 나를 돌아보지 않았느냐 했을 때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는 누구보다 더 주님을 잘 섬겼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심판 때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분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지옥의 형벌을 내릴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런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천국 가는 것이 아니구나--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약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선행을 행해야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구나”-----만일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안식교와 같은 이단이 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우리의 선행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그 어떤 선행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다 하심으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몸만 다니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습관적 믿음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입술만의 믿음).

성경의 높은 지식을 가지고, 말만 잘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지식적 믿음-마귀도).

심지어 우리가 무슨 병을 고치는 것과 같은 큰 능력을 행하는 것이 참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이적적 믿음).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아주 신령한 은사와 능력을 가지신 목사님이 장래 일을 말해주고, 또 사람을 꿰뚤어 보는 신령한 능력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목사님이 돈을 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이다.

또 단순히 형식적인 예배 의식만 잘하면 된다는 형식적인 믿음도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포도나무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가지인 우리가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와 예수님이 생명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어서,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면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내 마음가운데 진정으로 모심으로 나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삶의 열매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옛날 같았으면 내가 미워하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을 끝까지 보지 않을 사람처럼 대했습니다. 지금도 내게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이 괴로워집니다.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겨자씨 같지만, 예수님처럼 원수라도 사랑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그동안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의 선을 확실히 긋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고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 옛날 같았으면 주위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있으면 전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겨자씨같이 작지만 내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긍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산상설교가 성경책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날마다 내 안에서 심령이 가난하라 하십니다. 애통하라 하십니다. 화평하라 하십니다. 용서하라 하십니다. 기도하라하십니다. 은밀히 구제하라하십니다.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내가 양편에 속하기 위해서 내가 억지로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병든 자를 돌아보면서---또 그러면서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가진 자의 세력을 전복시키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고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생명이 그 안에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들입니다.

왜 우리에게 종말의 심판이 필요합니까? 당연히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도 심판하기 위함인지만, 예수 믿는 우리의 믿음을 심판하기 위함도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는 무엇이 참된 믿음인지 잘 구분이 안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만 믿고, 머리로만 믿고, 또 어떤 큰 능력을 행해야 잘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심판대에서 판결나게 됩니다.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가 우리에게 이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나만 성공하고, 나만 복 받고, 나만 잘 되고, 또 어떤 직분을 차지하는 그런 것들이 먼저 우리 눈 먼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예수님처럼 오늘도 내 옆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영혼들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하고 눈만 감아도 그런 사람들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간을 종말의 시간, 심판의 시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심판 때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된 믿음인 경우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잘 믿은 줄 알았는데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심판의 예행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 있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매일을 종말의 날로 살아간다면 매 순간마다 내 믿음이 종말의 주님 앞에서 참된 믿음인지 점검하시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에 낮 금식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시작했는데, 화요일 병원심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보니 내려가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님만 보냈습니다. 그때 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과연 무엇 때문에 금식하는가? 금식을 위한 금식이 아닌가? 참된 금식이 아니었습니다. 금식기도 한다고 약한 자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참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심판대에 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이 양의 믿음인지, 염소의 믿음인지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우리 믿음이 참된 믿음으로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된 믿음은 소자를 돌아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소자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소자를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가난하고 소외된 모든 자들이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소자는 소자입니다.

오늘말씀에 보면 내 형제중 소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자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 중에서 약한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8장에서 내 믿음의 형제 중에서 약한 소자를 실족케 하면 차리라 연자 멧돌을 목에 메고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약한 소자를 예수님처럼 섬기고 대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약한 형제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이 예수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저 공중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의 재림만을 기다라면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섬긴다는 말은 바로 내 옆에 약하고 어렵고 힘든 지체들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우리는 내가 무언가 확신하면 형제들이 상처입고 다치더라도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내가 확신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계명으로 밝히신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더라도 따라야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경우에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지금 내 곁에 주신 믿음의 형제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내 주위 믿음의 공동체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님과 하나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형제들을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고, 또 그들을 돌아보는 것이 예수님을 돌아보는 것이고, 또 그들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믿음의 형제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이 예수님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사울이 스테반을 죽였을 때 예수님은 왜 스테반을 핍박했느냐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님은 믿음의 형제들을 자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나름대로 예수님을 잘 섬긴다 해도 믿음의 형제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예수님의 가슴에 다시 대못을 박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혹 오늘도 예수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분들이 아닙니까?

믿음의 형제들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예수를 믿지 않는 이 세상가운데서 약한 자들은 우리가 돌아보지 말아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돌아보셨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병든 자, 배고픈 자. 목마른 모든 자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주위에 약한 소자들을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섬겨야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연약한 소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믿음이 될 때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시더라도 기쁘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주 예수여 정말 어서 오시옵소서--오늘 주님 뵙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