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성의 경계와 극복(눅17:26-30)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하다가 멸망했다” 고 말씀하십니다. 또 롯의 시대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하다가 멸망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노아시대 보다 사고 파는 것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잘못된 일입니까?
그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면서 살아 가야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제일 경계해야할 삶은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위한 말씀도 되지만 믿는 우리를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 이스라엘백성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지서를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출애굽의 사건을 잊어버립니다.
둘째는 세상 속에서의 일상적인 일들에 빠집니다.
셋째는 일상적인 일 중에서의 하나가 그들의 삶의 우상이 됩니다.
넷째는 경고가 주어집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심판 중에서 제일 큰 심판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이스라엘백성의 타락이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들의 삶이 일성성에 빠지는 데서부터 타락하게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의 삶에서도 보게 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정말 뜨거운 구원의 감격을 경험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만일 몇 십년의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이나, 감격을 가지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신앙생활을 점검해 봐야합니다(이것을 영적 출생이라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또 기도에 배고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을 보고 공부하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이 자랍니다. 이것을 영적 성장이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삶입니다(정상적 그리스도인의 삶-날마다 더욱을 경험해야한다).
그런데 이렇게 한때는 구원의 감격과 말씀의 감격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이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에 메여 주일을 한 두번 빠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 주만 빠져도 죽을 것같다가 그 생활에 적응이 됩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의 자신의 삶에 합리화가 이루어집니다.
야 굳이 뭐 교회에 나가는 것만이 신앙인가? 열심히 세상 속에서 잘 살아가는 것도 신앙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잘 나오는 것만이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백성으로 살아가는 것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주장하는 것은 좋은데, 세상 속에서 일상적인 일들에만 빠져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일상적인 삶-우상-완전히 잊어버림
/오늘 이 시간에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의 일상적인 삶을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일상성에 빠지는 삶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무엇이 일상성에 빠지는 삶인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일성성의 정의)
그 다음 그러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되 그 일상적인 일들에 빠지지 않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첫째로 일성성에 빠지는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일성성에 빠지는 삶이란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오는 역사적인 종말입니다. 또 하나는 개인의 죽음이 종말입니다. 이번에 아버님 장례식을 치르고 왔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10년 정도는 더 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올지 정말 몰랐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사회는 무덤이 일상적인 삶을 하는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는 무덤이 일상적인 삶에서 먼 곳에 있습니다. 이번에 아버님도 시외 외곽에 공원묘원에 안장을 했습니다.
왜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 무덤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곳에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인 사는 곳에서 항상 개인의 죽음과 종말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종말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가 그러했고, 소돔의 때가 그러했습니다. 또 지금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종말이 닥친다는 말씀을 들음에도 불구하고,,또 지식적으로 앎에도 불구하고 전혀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의 삶이 한 순간 순간 종말을 의식하고 있지 않고 살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일상성에 빠져있는 삶입니다.
두 번째로,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란 일상적인 일들에 빠져서 그리스도인들의 아주 기본적인 경건의 생활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너무 바빠서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볼 시간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잠시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못살던 사람이 이제는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고 말씀을 보는 것이 어색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성경만 보면 잠이 온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일상성에 빠진 사람입니다.
세 번째, 일상성에 빠진 삶이란 물질적인 부요함에 빠져서 우리 영혼의 피페함을 보지 못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삶입니다. 저는 몇 년 전에 터키에 있는 라오디게아를 가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안내자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금이 나오는 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육신적으로 부요했고, 자부심이 강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관심은 오직 육신적인 부요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보았을 때는 완전히 피폐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영적인 피폐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부자라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다, 우리는 부자다라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7교회가운데 다른 교회들은 그래도 교회 터라도 남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도시도 그렇고, 그 도시 속에 교회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대가 이러한 라오디게아의 길을 걷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시기바랍니다.
혹 우리도 육신적인 부요함에 빠져서 우리의 영적인 가난함을 못 보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오직 잘 먹고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고, 영적인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우리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 일상성에 빠지는 삶이란 우리의 교회생활에도 나타납니다.
교회에 잘나온다고 해서 일성성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잘나오고도 일상성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배를 매주 드리지만 그 예배의 감격을 상실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찬양을 해도 그 찬양이 나의 진정한 삶의 신앙고백이 되지 않고, 단순한 노래와 곡조로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빨리 집에 가서 딴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암 ).--어떤 사람은 월요일에 월드컵 경기가 있으면, 토요일에 월요일만 생각하고 빨리 주일 지나갔으면 하고 교회를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제단에는 오지만 제단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만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성전의 마당만 밟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성에 빠진 신앙생활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러다가 ///이제 하나님의 자리에 내 직장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자리에 돈이 들어가고//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2.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삶들을 살되 이러한 일상성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매순간 순간 종말을 의식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삶입니다.
정말 오늘이 마지막이다. 곧 주님이 오신다. 라고 하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 언제든지 오늘이라도 주님이 나를 부르실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신다고 우리가 장사하는 것, 공부하는 것, 시집 장가가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를 하되 언제나 주님 오실 준비를 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또 매일 매일 종말을 기억하면서 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주일만이라도 우리는 종말적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저는 예배를 참석하고, 또는 예배를 인도할 때 이 예배의 시간이 바로 종말의 주님 앞에--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기분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있고, 또 그 다음 예배가 있겠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예배의 시간이 최후의 심판의 시간이다, 라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절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졸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하루가 주님이 오시는 날이다 오늘 밤이라도 주님이 나를 부르실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 종말의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제일 중요한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
2.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녹의 삶을 보십시오. 히브리서에 보면 에녹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창세기에 에녹은 삼백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런세상일을 하지 않고, 산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에녹은 자녀를 낳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녀를 낳으면서 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녀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그 속에 많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하고, 낳은 후에 기르기 위해 돈을 벌어야합니다. 그런데 에녹은 이런 삶을 살면서 단순히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할 삶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직장생활하고 우리의 생업에 충실해야합니다. 열심히 자녀를 양육하고 길러야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세상 속에서 우리가 맡겨준 일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우리의 삶이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혹 지금 여러분의 삶이 일상적인 일만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선교한국대회-대회진행==하면서 밖에서 일하는 학생들--청소하고 경비하고/////그러면서 계속해서 그의 관심은 안에서 들려지는 말씀이었습니다.(기웃거리면서 말씀을 들으려했다).
_저는 정말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남자 집사님을 보내 거의 한달동안 집에 9시30, 12시에 들어오시고, 또 못들어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짜 시간상으로 보았을 때 기도하고 성경볼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아무리 그렇게 바쁘더라도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몸이 전혀 기도할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힘들지만,,,,,,,,그의 마음은 세상속에 빠지지 않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사모하고, 살아간다면 바로 그것은 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3.일상적인 삶속에서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은 바벨론에 바벨론의 학문을 최고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그는 거기에 더하여 “이상과 몽조”를 깨달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과 몽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정치인으로서 환상을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정치에 있어서의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살았다.
--일상성에 빠지지 말라는 것은 일상적인 일을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있는 세상속에서의 일상적인 일에 대한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선지자적 관점이 무엇입니까?--우리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삶속에 우리의 신앙이 드러나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것을 두고 책망합니다.
역사에 관한 관심
정치에 관한 관심
세상사..통일과 민족의 장래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할 것인가에 관한 영적인 통찰력--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지연이나 아닌 정말 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아이만 관심-집안만 관심--하나님의 선교역사에 관심(세계를 품는 그리스도인에서 두 개의 엉덩이)..
다니엘-정치인으로서 영적 통찰력--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영적 통찰력 가짐--하나님이
마찬가지-장사하는 사람--돈벌이는 통찰력뿐 아니라,,,장사하는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시각-????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그 일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왜 결혼해야하는가? 결혼과 가정속에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보실 때 내게 맞는 배우자는 어떤 자여야하는가?
/예수님--자연을 보더라도 영적 통차력과의미ㅏ를 생각하고 살았다. 단순히 자연속에 빠지 않고, 그 자연현상속에나타난 영적 생활의 의미들을 생각하시면서 살았다-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비유에서 잘나타난다--
/예수님 직업-목수-집의 기초가 튼튼치 못하면 무너지고만다-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해서 말씀하심.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곡식이자라는 것-영적 성장-마음밭의비유--
아 무화과 나무가 지구나-그러면 곧 여름이 오겠구나-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끝이 올 징조에 대해서 생각하셨다ㅓ.
**선지자적 관점에서
역사에 관한 관심
정치에 관한 관심
세상사..통일과 민족의 장래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할 것인가에 관한 영적인 통찰력--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지연이나 아닌 정말 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아이만 관심-집안만 관심--하나님의 선교역사에 관심(세계를 품는 그리스도인에서 두 개의 엉덩이)..
다니엘-정치인으로서 영적 통찰력--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영적 통찰력 가짐--하나님이
마찬가지-장사하는 사람--돈벌이는 통찰력뿐 아니라,,,장사하는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시각-????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그 일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왜 결혼해야하는가? 결혼과 가정속에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보실 때 내게 맞는 배우자는 어떤 자여야하는가?
중요한 것은 이러것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는 삶
다니엘--세상의 모든 학문을 함과 동시에 그는 몽조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