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의(합신 김성수 교수)
제 1 장
1절
로마서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책이다. 서두에서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αφωρισμενοs ειs ευαγγελιον 라고 하고 있는데, 곧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한다. αφωρισμενοs는 αφωριζω(απο+οριζω), 즉 분리하다, 절단하다의 뜻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병행되는 섬김을 위한 신적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8절 이하에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새삼스럽게 편지를 쓰게 된 경위를 말하는 가운데 11절을 보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 주어 굳게 세우려(견고케) 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 속에 함축된 바울의 의도는 결국 어떤 결론을 가져오게하느냐 하면, 15절에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함으로써 그의 로마서가 로마에 대한 그의 복음제시의 책임을 수행하려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게한다.
ευαγγελιον ‘복음’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으나 이사야 40장, 유다서 등 성경의 사용 예와 관련하여살펴 보나, 단어적 의미로 살펴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복음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 라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구태여 이 복음이란 말을 정의 내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로마서는 2절이하에서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2절
바울사도는 복음에 대한 설명을 언급하면서, 처음부터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복음의 역사성과 고고성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하루 아침에 시작되어진 무엇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을 정하사, 선지자들을 통해 알리셨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여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신 그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몇 권만을 살펴봐도 알겠지만, 복음의 시작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따라 정해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엡1:4) 우리는 그 안에 숨기운 깊고 신비한 비밀을 하나 하나 다 알 수는 없지만, 다만 창세전에 계획하고 정한 복음에 대한 뜻을 밝혔다고 증거한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과 관련된 내용을 접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된다. 인간은 성경이 말씀하는바 앞에서 묵묵히 설 뿐이지 거기에 숨기운 여러가지 신비와 비밀을 다 헤아려 알수는 없다. 그러한 부분에서 억지로 논리를 동원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고 무슨 논리적이고 창조적인 설명을 해 보려고 한 노력의 하나가 ‘타락전 선택설(Supra Lapsarianism)과 ‘타락후 선택설(Infra Lapsarianism)’이다. 여하튼 대체로 후택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인간이 범죄로 타락함으로 죽음의 심판 아래 있게 된 순간부터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시되었다.(창세기 3:15, 원복음) 그후에도 노아,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등 모든 구약 선지자를 통해 끊임 없이 죄인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미리 계시되어 왔다.προεπηγγειλατο
흔히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전도한다)고 할 때 대개 편의상 신약의 한부분, 몇구절로 복음을 전한다. 그렇게 함으로 이전 역사와 관계없이 갑자기 복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출현한 것처럼 말하기 쉽다. 즉 갑자기 나타난 전혀 새로운 그 무엇으로, 또 그것만으로 복음을 전하기에 충분한 것인양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제일 먼저 복음의 성격에 대하여 느닷없이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약속돼 온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왜 이 사실을 밝혔을까? 16장에 보면 로마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하라고 하는 인사가 나오는데, 여기서 언급된 인물들을 보면 모두가 쟁쟁한 인물들이다. 예를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구약학자요, 구약성경에 능통한 아볼로에게 복음을 가르친 자들이다. 이들이 로마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어떠한지는 분명히 알 수 없어도 한가지 사실은 이들이 로마교회와 관계된 자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면 이러한 자들에게 바울은 어떤 편지를 썼는가 이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에 대하여 썼다고 하는 것은 바울이 제시하고자 하는 복음의 내용이 그저 단순한것, 복음의 개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2장에서도 볼 수 있지만 바울사도가 로마 교회를 부를 때 항상 이방인 교회로 전제하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유대인들이 섞여 있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대체로 로마 교회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대인 문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의 문제를 계속 끌고 나오는 것을 보면 바울사도는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할 어떤 필요를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옛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오심의 이후에 교회와의 관계정립의 필요를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사도는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를 진행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옛 교회(이스라엘)와 연관해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복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전혀 새롭게 시작되는 그 무엇이 아니요, 옛 이스라엘의 역사에 깊이 뿌리박은 그런 무엇이라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우리가 복음에서 반드시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은 복음이라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것이며,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바울사도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지자를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하는 이런 표현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미리 계시하신 복음의 기록이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3-4절
‘복음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기를 결국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누구나가 다 아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앞에서 복음에 대해 예기하면서 오랜 이스라엘 역사에 걸쳐 선지자들을 통하여 미리 약속되어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내용과 결부시킬 때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는 말은 결국 모든 구약성경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기록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작정하신 것을 수 천년 동안 전 인류 역사를 통해 미리 계시하신 복음, 오랜 역사를 통해 마치 손가락으로 지적하시듯이 가리키시는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영원하신 성자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περι του υιου αυτου’라는 말(3절), 즉 ‘그의 아들에 관한 것’ 이라고 할 때 ‘그의 아들’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인가? 영원한 성자로서의 子格 性質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이렇게 구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 하면 영원하신 성자로서의 아들 외에 다른 의미로서의 아들됨을 전제되어 있다.
바꾸어 말해 시편 2편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눌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할 때 여기서 내 아들이라는 불리움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심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분을 가르켜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것인가. 물론 에서 억지를 쓰면
이 “오늘날”를 eternal now라고 해서 예수님의 성자로서의 子格에 대해서 그의 발생에 대해 어느 특정한 날, 역사의 시간 속에서 나셨다고 말하지 않고 eternal generation, 즉 시간의 범주를 초월한 의미로서 永遠前 발생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 ’라고 하는 단어의 용법 자체가 eternal now를 얘기하는데 쓰이지 않고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무엇보다 확정적인 증거는 신약에서 저자들이나 사도들이 시편2편을 인용할 때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시키고 있다. 결국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관계가 된다.
4절에서 ‘υιου Θεου ενδυναμει’(son of God in power)라는 말과 관계 되는데 다시 시편 2편을 보면 전체적 흐름이, 땅의 모든 세력들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여기에 하나님께서 대처하여서 내세우는 자가 곧 메시야시다. 그의 왕으로 세우신 자를 가리켜 ‘내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하는 말은 무엇과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꼐서 그의 왕을 시온산에 세우신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땅 끝까지 이 메시야(아들)에게 통치영역으로 모두 주시는 것이 나온다. 또한 그 통치에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의 상반된 결과를 말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라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메시야)께서 왕으로 세움 받은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하면 왜 이 성경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명료해 진다.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마28장에 나오는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세움 받으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기서 말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존재론적 출생이라기 보다는 어떤 王位에 앉으심과 관계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롬1:4의 ‘υιου θεου εν δυναμει,son of God in power’에서는 만유의 통치 권세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가능해 진다. 전체 내용을 보면 이때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왕으로 세움 받으셔서 땅끝까지 다스리시는 통치권세와 깊이 관계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구별되이 사용됨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본질적, 영원존재론적 성자로서의 아들인 사실과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온세계의 통치권세를 받으신 아들로 구별되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영원 전 성자로서 계실 때는 만물의 통치권세가 없었다는 말인가? 아니다. 부활후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신분에 본질적인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참사람이 되심이다. 여기에 보면 아들에 관하여 하나의 역사를 얘기하고 있는데 다윗의 혈통을 따라 인간의 개체로 사람이 되셨고 그 다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만유의 통치권세를 받으신 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변화가 있다. 땅의 통치권세를 받으신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되는 그것은 영원한 존재론적 발생의 성자와는 다른 의미로 조금 구별되게 사용되어짐을 가능케 한다.
3절에서 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고 나중에 만유의 권세를 받으신 메시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되는 것은 설명이 좀 필요한데, 3절 초두의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아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진다.
복음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영원하신 성자에 관한 것이다. 온 인류역사상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바로 이 성자 하나님을 가르키고 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복된 소식,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된 은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미리 약속하신 모든 축복은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고 잇고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들을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주시고자 하는 뜻은 성자 하나님을 통해 이루시고 계심을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인류를 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 아무래도 그 핵심은 인류의 불행이 초래된 범죄 타락이 관련된다면 그 핵심은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성자 하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시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이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혈통에서) 나시고”(του γενομενου εκ σπερματοs Δαυιδ κατα σαρκα)에서 κατα σαρκα 라는 말은 육신으로 나셨다는 말인데, 결국 영(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다. 즉 incarnation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 부터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 되셔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조직신학에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의미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난 메시야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일으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으시고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다. 이 혈통에서 대대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게 될것이라는 약속, 특히 교회를 다스리는 영원한 왕, 메시야가 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을 따라 출생하셨다는 말이다. 이러한 그저 단순한 사람으로 나셨다는 것이 아니다. 참사람으로 나신 목적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 목적과 또한 사람으로 나시되 어떤 神品과 관련해서 설명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구약 연구를 통해서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1:4) του ορισθεντοs υιοs θεου εν δυναμει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s εξ αναστασεωs νεκρων 에서 ‘εν συναμει(in power)’ ‘능력으로’는 번역이 잘못되었다. 이것은 시편 2편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만물의 통치자로, 권세 받은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in power)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성결의 영으로’(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δυνηs) 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앞에서 κατα σαρκα가 나오기 때문에 κατα πνευμα와 대조해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자가 많으나 여기서는 곤란한 문제가 좀 있다. 왜냐하면 ‘성결의 영’이라 할 때 예수님의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한 사건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부활과 밀착되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말하고 있음으로 잘못하면 본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 올 수 있다.
κατα σαρκα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그 상태를 규정하는 표현이라면 이것과 연계하여서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s는 ‘성결의 영으로’ 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들어가신 어떤 상태(예수님의 영적상태)를 규정하는 표현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들어가신 상태를 πνευματικοσ(신령적인 어떤 상태)라는 짐작을 강하게 할 수 있는 표현들이 여러곳에 있다. 예를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입으신 몸은 지상에 있었을 때와 같은, 땅에 속한 몸과는 너무도 다르다. 예수님의 부활체 자체에 대해서 한마디로 꼬집어 설명할 수 있는지는 잘모르겠으나 나중 신자가 예수님 재림후 부활하여 입게 될 몸은 예수님의 부활체와 유사할 것이다. 그 부활체에 대해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전 15:40에서 σωματα επουρανια(天的 몸)과 σωματα επιγεια(땅에 속한 몸)으로 대조시켜 표현하고 있고 또 고전15:44에 보면 σωμα φυχικον과 σωμα πνευματικον를 대조해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부활체를 σωμα πνευματικον(신령한 몸, 영적인 몸)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간접적으로 나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후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σ 라는 표현 역시 예수님께서 부활후에 들어가신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부활하신 후에 만유의 주로서 권세를 나타내심을 말하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심으로 영원 전부터 만유의 주시요 왕이시나 그의 지위는 육신을 입고 참 사람이 되심으로써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독특하신 신분으로 계시는데, 이러한 분으로서 만유의 왕으로서 세우심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편2편에 예언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세력을 굴복시키시고 만물을 통치케하신 메시야를 왕으로 세우시고 이 왕으로 세우심을 받은 분을 가르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참 하나님이시나 또한 참 사람이신 독특하신 신분으로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왕으로 세움받으신 것을 나타내고 있는것이다. 그래서 마28:18 이하에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 만물을 정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4절 하반부에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렇게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우리 주가 되시고 만유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시고 특히 하나님의 교회,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축복이 궁극적으로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원하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사 만유의 왕되신 예수님에게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참조 엡1:3)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모든 은혜와 복을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5-7절
그리고 5절 이하에서 ‘이처럼 부활하신 주께서는 그의 사도를, 그가 부르시는 자들을 그의 복음사역자로 그리고 그의 교회를 통해 그의 복음을 나타내시고,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하게 하셨다. 이 복음으로써 세계를 정복하심은 혈과육의 힘으로, 물리적 힘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며 그의 복음의 말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정복이며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평강의 수여자(통치자)이시다. 그것은 예수님의 나심과 부활(생애)의 성질과 연관됨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다. 로마서 전체를 살펴보면 이 내용을 반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결국 무얼 말하려 하는가? 그것은 ‘복음에 관하여’라고 서두에 요약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크게 보아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요약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와같은 복음요약은 다목적인데, 복음내용 그 핵심을 요약한 것 뿐만 아니라, 여기서 논의되는 앞으로 나올 내용을 위해 필요한 예비적 지식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15
8절에서 15절까지의 내용은 좀 장황하게 느껴지지만 이런 내용을 이처럼 여기에 삽입한 내용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것이다. 바울과 로마교회가 어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 그것은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이처럼 바울 사도는 굳이 로마교회에 복음을 진술할(그것이 아무리 깊고 심오한 차원의 복음이라 할지라도) 필요를 느꼈을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암시를 주지 않고 있다. 다른 서신들에서는 그 교회의 문제들 때문에 그 필요를 구체적으로 진술한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
11절에 보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기 위함”이라는 표현에서 어느 때라도 교회는 굳게 서야 할 필요가 늘 있으니까 일반적인, 상투적인 인사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이 로마교회의 상황을 의식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당시 로마교회는 바울사도가 복음에 대해 분명히 밝혀야 할 필요를 느낄만한 어떤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어쩌면 바울사도가 그처럼 이방인 교회에 심오하고 깊은 복음을 진슬하면서 유대인과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알력관계가 있었던지 아니면 그와 비슷한 문제가 로마교회 안에 있었음을 암시 받을 수 있다. 소수의 유대인들과 유대인교육에 있어 소외된 이방인과의 알력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완전히 그곳이 이방인교회니까 어떤 구약백성, 구약이스라엘의 역사와의 관계에서 단절하려는 신학적경향이 보여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부분을 매우 확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굳게 세우려 함이라”고 하는 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바울사도의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χαρισμα υμιν πνευματικον(너희에게 신령한 은사) 에서 χαρισμα(은사)라고 되어 있는데 고전14장과 12장을 통해 나타나는 초자연적 능력의 은사적의미로 로마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해서 그런 은사를 나눠주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는 그러한 문맥적 암시가 없고 전체적인 흐름은 복음을 요약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을확실히 제시함으로써 굳게 세우는, 열매를 얻는 것을, 그리스도안에서의 신령한 은사라고 말하고 있다.
16절
15절까지의 서론이 끝나게 되면 16절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이 제시되고 있다.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라고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수신자가 로마에 있는자들이며 로마의 정치적 문화적 제반 위치적 상황때문에 심적부담을 느껴 바울이 수세적인 심정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나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없고 반어적 표현으로 봐야한다.
그것은 ‘극히 자랑스러워 한다’는 역설적 의미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왜 바울도 복음을 그처럼 자랑스러워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나타내신 뜻인 그 복된 은혜의 복음을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 하는가? 그것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다.
“복음은.....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능력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이 친히 역사를 섭리한다, 역사를 일으킨다고 하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이니까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사람이 자기 재능이나 무엇으로 어떻게 무엇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승리케하시는 역사를 말한다.
앞서 말한 내용이 롬1:4에서 말하는 사람이 되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만민의 주로 세우심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사 통치함으로써 성령으로 그의 복음의 말씀으로 다스리시사 모든 민족을 정복하시는 능력을 말한다.
여기서 이 능력은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인가? 사람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일으킨다. 또 어떤 자에게 일어나는 역사인가? 믿는자에게 일어나는 역사이다.
능력(δυναμιs이라고 할 때 바울사도의 염두에 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역사를 능력이라고 했을때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어떤 종류의 능력이었을까? 단순한 지적설득인가? 그것이 배제될 수는 없겠으나 그것만은 아닐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복음을 가리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복음을 전했다고 할 때 과연 이 능력(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했는가?를 깊이 새겨보아야 할것이다.
다음으로 바울 사도는 우리를 다소 당황케하는 표현을 하나 쓰고 있는데 ‘유대인에게 먼저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Ιουδαιω τε πρωτον και ελληνι 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유대인에게 먼저란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유대인과 헬라인에게라 하지 않고 유대인에게 먼저라고 말하고 있을까? 쉽게 간과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나중에 9장 이하를 염두에 둘 때 상당히 함축적이다.
17절
복음이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어떻게 복음이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가? 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그 대답이 17절에 나타나는데 (‘γαρ’로 시작됨) 그것은 복음 안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복음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에서 믿음으로’(εκ πιστεωs ειs πιστιν)라는 말은 단순히 표현자체에 주의해서 살펴보면, 고후2:16에 ‘εκ θανατον ειs θανατον εκ ζωηs ειs ζωην’(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여기서 εκ????ειs의 결합은 철저한 강조 이상의 의미는 아니다. 즉 그러므로 ‘εκ πιστεωs ειs πιστιν’은 오직 ‘믿음으로만’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은 어떤 객관적인 제시보다는 현재형으로 쓰였고 그 믿음이 위에 언급되는 만큼 여기서 ‘나타난다’는 말은 인격적 화해(personal propitication), 각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은혜)를 받아누리는 의미를 의식한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말이 없으면 그저 객관적 제시라고도 말할 수 있겠으나 믿음이란 말이 있는 만큼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는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와같은 원리가 전혀 새로운 원리가 아니라 옛부터 있어온 원리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누리는 이 원리가 새삼스러운 원리가 아니라 예언된 원리라는 것을 말하면서 하박국 2:4(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실제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여기에서 의인과 믿음이 어떤 관계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ο δε δικαιοs εκ πιστεωs ζησεται‘ 그렇다면 이 구절이 이신칭의의 proof text가 될 수 있겠는가? 이 본문 어디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박국서를 보면 하바국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부패에 크게 상심해서 바벨론을 통한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승복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반해 하나님은 외견상 비취는 모든 문제의 현상들에 대한 해답을 주시는데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구원을 참고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자세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하박국 2:4를 인용 사용한 의도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을 때 의인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의인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자, 곧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구원을 기다리며 믿으며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바울사도가 의도하고 있다면 이 본문에서 이신칭의의 원리를 추론해 내는 것이 가능한가?
또 이 본문을 인용한 것은 ‘σικαιοσυνη Θεου’(하나님의 의)라고 말한 내용의 구체성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 어떻게 설명하는가? ‘인간의 의’와 대조시켜 말하고 있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이뤄내는 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대조시켜 말하고 있다. 이와같은 이해는 정당하다. 이와같은 대조는 롬 10:5에 보면 ‘하나님의 의’와 ‘자기의 의’를 대조하는데서도 볼 수 있다.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 율법의 의를 주장하는 사람을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복종치 않는 자를 말하고 있다.
정상적인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그런 대조를 갖는 것이 사실인데, 그렇게 막 뛰어 넘어가기 보다 구약과의 연결이 가능케 하는 것이 하박국서의 인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은혜로운 일을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고 있다. 하박국서 자체가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할 때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베푸신 일(은혜), 하나님의 의를 전제하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17절 초두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라고 할 때 단순히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칭의의 의’로 바로 넘어가기 보다는 한 단계 전에 구약과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서 이처럼 얘기해 온 구원의 의, 하나님께서 그 범죄한 백성에게, 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행동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박국서의 인용은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말이 가리키는 의미를 확대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런 면을 갖는다. 자기의 의와 반대되는,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의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그 의미에 국한되어 버린다. 구약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행하신 은혜의 일(행위) 임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복음이 구체적으로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이 하나님의 능력 곧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 18 - 3 : 20
18절
다음으로 1:18-3:20의 상당한 부분에서는 왜 이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계시됨으로써만 구원이 이루어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18절에 ‘απο καλυπτεται’ 즉 무엇이 계시되기 때문에 ,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 즉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대상,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는 원인에 대해 말씀하기를,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고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모든 옳지 아니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말하면서 이와같은 불경건과 불의를 생겨나게(야기시키는) 하는 원인에 대해 그 다음에 ‘진리를 불의로 억누르는 자’라고 말한다. 여기 ‘εν αδικια’란 말은 ‘불의로’라고 번역이 되어 있으나 ‘악의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악한 마음에서 진리를 억누르는 자들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및 원인인 불경건과 불의가 진리를 억누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8 이하의 1장 내용은 인간의 타락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을 크게 세부분으로 나눠 말하고 있는데 지적, 정적, 의지적 타락이다.
*지적 타락
우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인간의 죄를 무엇과 깊은 관계가 있는가 하면 진리를 악의로 억누르는 것과 깊은 연계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진리란 무엇을 말하는가? 포괄적 의미로 모든 참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으나 특별히 모든 진리의 전제요, 출발점이요, 요약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말한다. 1:25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꿨다.
‘μετηλλαξαν την αληθειαν του Θεου’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 앞에서는 그저 아무 설명없이 ‘αληθειαν’이라고 나오기 때문에 포괄적 진리로 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 뒤에 나오는 논의와 연결해서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의미한다. 포괄적 진리, 모든 참된 것이 모두 어디로 귀결되느냐 하면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귀결되고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종류의 참된 지식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앙과 학문이 별개의 것이요 각각 독자적인 영역을 갖는다고 하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이든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에 터를 두지 않으면 진리에서 얼마만큼 떨어지느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전제하지 못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 거짓된 지식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죄가 진리를 억누르는 인간의 지적 잘못, 왜곡, 타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을 깊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서 ‘εν αδικια’(악의로, 악한 마음으로)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라는 것이 그 자체의 왜곡에 끝나지 않고 악의적이며 어떤 감정적인 의미가 추가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에 있어 지,정,의가 함께 결합되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정서적, 의지적, 지적 이 모든 신적능력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우선하는 것이 지적능력, 지식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 능력은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죄를 논하면서 모든 죄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느냐? 지적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깊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의 모든 죄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진리)을 악의로 억누른다’고 되어 있는데, 19절은 어떤 의미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진리를 억누르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9절
왜냐하면 ‘το γνωστον του θεου’(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에게 분명히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 ‘το γνωστον’(알만한 것)은 어미를 취한 꼴이 수동태형으로서 ‘알려진 것’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왜 번역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알려진 것’으로 말하지 않고 ‘알만한 것’으로 표현하는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저들에게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나타내보여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저들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한 모종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이 되고, 성령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았더라도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가능하다. 이것은 교의학에서 말하는바 인간의 전적부패, 전적무능력 교리와 상충되는 내용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학적 민감성 때문에 ‘알려진’으로 번역치 않고 ‘알만한’것으로 번역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으로 번역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하는가?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 할 때, 여기서 알려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참된 지식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붙어질 때 별문제가 될것이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어떤 제한된 의미, 참된 지식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어떤 지식을 말하는 실례를 어디서 볼 수 있느냐 하면 21절에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γνοντεs τον θεοs) 여기서 분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지만 우리 번역대로 “하나님을 알되”라고(알면서도---)할 때, 안다는 의미가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안다는 참된 지식이 아니라 제한된 의미에서의 잘못된 요소가 들어 있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앎을 말한다. 이처럼 사용된 것을 보면 앞에서 ‘το γνωστον το θεοs’도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으로 해석해도 문제가 될것이 없다.
19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이 그들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보인다고 되어 있다.이것은 그 지식의 종류와 성격이 어떠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에게는 일종의 신지식(신의식)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지식의 성격에 대해서는 21절 이하에서 계속 얘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못하는 지식이요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는 그런 형태의 왜곡되어진 지식으로 이라는 것, 이런 제한조건이 붙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여기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표현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
20절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모종의 지식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종의 지식을 어떻게 나타내 보여 주셨는가? 어떤 종류의 지식을 어떻게 나타내 보여 주셨는가? 그 구체적인 계시형식, 내용에 대해 20절에 말하고 있다. 여기에 보면 어떠한 것을 계시해 주셨는가?를 말하고 있다. ‘τα αορατα αυτου’(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보여 주신 것은, 그 내용은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본질을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영이시니까 그분에 관해 뭔가 계시된다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에 대해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과 같은 것이라고한다. 즉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내용들이라고 말한다.
흥미있는 것은 ‘τα αορατα αυτου’(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동사가 ‘καθοραται’이다 이를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이 ‘καθορατα’의 뜻은 앞에서 계시의 내용인 ‘αορατα’(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반대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οραω’가 그 뿌리이다. 그래서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라는 말인데, 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καθορατα’로 되어 있다. 여기서 ‘κατα’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으나 같은 ‘οραω’가 그 뿌리이다. 그렇다면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어떠한 형태, 과정을 거쳐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καθοραται’는 파악된다, 보여진다라는 뜻이다. 그러면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하나님의 속성들, 영적인 속성들이 어떻게 해서 보여지는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진다는 것은 중간에 뭔가 들어가야 된다.
그 중간에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만드신 만물에 의해서 알게 된다.‘ποιημασιν νοουμενα’에서 ποιημα’????‘ποιεω’ 여기에 대칭되는 히브리어 ‘ ’, 즉 ‘ ’(만들다, 행하다)이다. 즉 그가 만드신 물건, 결과를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어떻게 보여지는가? 파악되는가? 하는 것은 그가 만드신 무엇을 통해, 수단으로, 매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ποιημασιν’의 꼴이 대격으로 수단을 나타내는 Dative로 쓰였다. 그리고 ‘νοεω’는파악하다;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능력이라는 뜻이있다. 이러한 헬라어 자체의 뉘앙스가 여기에 개입되었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흔히 ‘λεγω’(말하다)와 관계된 단어가 ‘λογοs’(이성)인데, 이 ‘λογοs’와 ‘νουs’(정신,이해)의 차이를 철학적으로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λογοσ’는 어떤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그런 지적 능력, 어떤 것을 정연하게 표현하는 그러한 지적 능력을 말하고, ‘νουσ’는 어떤 대상을 파악하는, 이해하는 그런 지적 능력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νοεω’라는 말을 그런 distinction(특성)으로 본다면, 하여튼 인간의 파악능력, 이해하는 작업이 게재되어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일반계시(Revetia Gereratis)라고 하는데, 이 계시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어떤 것(천지만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말한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라고 말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만드신 무엇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지고 또 하나 여기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νοεω’의 인간의 지적작업, 어떤 기능이다. 인간의 이해능력, 과정을 거쳐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예를들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되심의 속성들, 이런 것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렇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αορατα) 어떻게 보여 지는가(καθορατα) 어떻게 파악이 되고 보여지는가 그것은 그가 만드신 모든 것, 인간의 경험할 수 있는, 감촉할 수 있는 이런 만드신 것들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매개로 해서 거기에 인간의 지적작업이 가미되어서(νοεω) 파악이 된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지고 파악이 되는가 1차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무엇을 통해 되어지는데, 예를 들어 미미한 존재인 인간의 스케일에 비해 광활한 우주를 생각해 볼 때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니까 저러한 하나님이 만드신 무엇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알려지고 파악되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시다고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우주라는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우리에게 파악이 될려면 무엇이 첨가되야 하는가? 인간의 지적능력, 이해하는 능력이 첨가되어야 한다. ‘왜 저것이 생겨 났을까?’ ‘저것을 존재케 하신 분은 어떤 분이실까?’ 라는 물음에 대해 생겨나는 대답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알려진다, 보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계시의 특징, 여러가지 형식상의, 내용상의 특징을 여기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ποιημα라고 할 때 흔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우주나 물건들, 물체를 연상하기 쉬운데 사실은 히브리어 ‘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어떤 물건, 물체만의 의미를 갖지 않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도 거기에 포함이 된다. 히브리어 ‘ ’라는 말자체가 ‘만들다’라는 의미도 되지만 ‘행한다’라는 뜻도 된다. 헬라어 ‘ποιεμα’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ποιεμα’는 무엇까지 포함될 가능성이 있는가? 역사도 포함될 수 있다. 만드신 것들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파악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백히 보여 주심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모종의 신지식, 신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신지식(신의식)의 내용과 성격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님에 대해 알려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계시, 간접적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계시지만 무엇하기에 충분한가 하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변명할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한 계시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과 연결해서 21절 이하에서는 한편으로 앞에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그런 신지식(신의식)에 대한 구체적 성격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왜 이러한 종류의 계시가 우리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고 변명할 수 없는 충분한 계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추가적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당연히 그를 만드신 분을 바로 알고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사는 것이 온당한 태도인데 그렇게 못한다고 하는 지적과 동시에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알면서도’라고 표현한 그 신지식의 불완전성의 성격을 암시하기도 한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앎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못하는 부족한 어떤 신지식이다. 온전한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21절
그러면 왜 이런 지식이 되고 말았는가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분명히 간접적 방식으로 계시하셔서 알려주심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못하는 결과가 빚어졌는가 그 이유에 대해 21절 하반절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달리 표현하면 왜 하나님께서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보여 주신 그 계시가 이처럼 불완전한 지식,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영화롭게 하며 감사케하는 참된 지식에로 인도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좀 더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일반계시, 그가 행하시고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 주신 그 계시가 실제로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수용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εματαιωθησαν εν τοιs διαλογισμοιs’ 즉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우리말로 단순히 ‘생각’이라고 되어 있지만, ‘διαλογισμοιs’라는 말, 영어로는 argument(논쟁, 논의 논증)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런 의미로 어떤 의미에까지 가능한가 하면 ‘추론’이라는 의미까지 가능하다.
무엇에서 무엇을 증명해 내는, 논증해 내는, 추론해 내는 그런 일에 있어서 사람들은 전혀 쓸모가 없어졌다. 말하자면 본래 일반계시를 정당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정하신 만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계시하시는 일반계시를 바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적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바른 일반계시 수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온전한 지적 이해능력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지적 추론작업, 그 추론 기능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 기능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를 ‘그의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지적능력이 손상됐음을, 제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22절
그래서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가 하면 22절에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미련하다’고 한다.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일반계시를 바로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미련해져 버렸는데 그래서 어떤 결과가 초래됐느냐 하면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을 인간과 짐승과 버러지 형상으로 바꿨다라고 말한다. 본래는 하나님께서 계시한 일반계시에서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 바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 이해능력, 지적능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보여주신 일반계시가 여기에 수용되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가 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의해서 왜곡되어 버린다.
23절
어떤 식으로 왜곡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썩지 아니하는 영광,(썩는다, 썩지 않는다 하는 것은 결국 땅의 것과 하늘의 것 영원한 것과 잠정적인 것의 차이다)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파악해 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나름대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이다’고 생각하고 얘기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썩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꿔버리는 일을 항상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우상이다. 신을 큰나무와 어떤 것으로 일치하는 저급한 미신적 우상숭배도 있지만 좀 더 고급화되면 어떤 피조물의 특정적 성격이 신의 성품을 반영하는, 상징하느 것으로 이해해서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드는데 거기에 금이나 보석등으로 입혀서 인간적 성품의 어떤 최상의 것으로 표현한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특정성품을 신격화시켜 그것을 신이라고 하고 싶은데 실상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피조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의 참된 영광을 적당히 손질해서 신격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은 흔히 우리가 잘 아는 형태의 우상숭배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포괄적인 적용이 가능한데 어디까지 적용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만드신 만물을 요즘 말로 우주, 자연계라고 표현하는데 그 안에 있는 모든 현상, 역사를 포함한다. 이것을 깊이 들여다 보면서(사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하는 것이니까 이 역사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 섭리하신 분,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 창조해 가시는 분, 그래서 그 모습을 계속 드러내고 있지만)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생각해 내는 것이다. 자연의 여러 현상, 법칙등을 보고 어떻게 해서 이런 것이 생겨났을까?. 순전히 기계적으로, 물리적으로 이해해 버려서 무신론으로 흘러버린 사람들도 있지만 범신론적 사람도 있을 것이고, 조금 뭣하면 일반적 여러 신을 인정하는 다신론적 종교도 있을 것이고 또 철학적 초월 존재를 인정하는 그런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광의의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왜곡이라는 것은 사실 인간의 모든 지식분야에 다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과학, 철학, 종교 등 모두에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역사나 자연계 그 안에 나타난 현상을 보고 그것의 궁극적인 원인자를 규명하려는 궁극자나 원인이나 그것이 초월적이든 기계적이든 하나의 법칙이든 어떤 물질이든 간에, 그런 것들을 규명하려는 모든 노력이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보아야한다.
역으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에 결국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이 말은 뒤집어 얘기하면, 모든 대상에 대한 궁극적 이해는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되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지식이 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모든 참된 것, 진리는 결국 하나님에게까지 소급하는 것이다. 모든 포괄적 진리, 모든 참된 것의 출발점, 토대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자연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들도 그것이 그 정도에 그치고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도에 그치고만 불완전한 지식이요 그것이 하나님과 결열될 때 뭔가 바른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면 그 부분에서는 잘못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면서 이런 인간의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진리를 억누르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해 놓고서, 이와같이 인간의 죄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타락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서 쭉 설명하면서 제일 먼저 인간의 지적타락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대개 요즘 와서는 지적타락이라 할 때 대개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지적작업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이요 어떻게라도 사용될 수 있고 기능할 수 있으나 그것이 어떤 비윤리적인 것과 결합할 때 지적타락, 지식의 타락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어떤 과학자나 예술가가 지적 산물로서 무엇을 만들어 냈을 때 그것이 윤리적으로 악한 것일 때 그런 것을 가리켜 지적 타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지적타락이라는 것이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다. 제 기능을 상실한 것,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지적무능 자체가 타락의 일부라고 하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된 중요한 근본원인들 중에 그 첫째는 인간이 지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는 지적 무능, 진리의 왜곡, 이것에서 인간의죄는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에서도 잘 얘기하지 않는것 같다. 특히 입시생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그것 자체를 부추기고 있다. 지적부분에 있어서는 교회가 손을 댈곳이 못된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학교공부도 그 나름대로 충분한, 신앙과는 관계없이 독자적 영역을 형성하는 만큼 잘 하도록 버려두라는 식이다. 비판적 시각으로 보게 할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려하고 부추기고 그렇게 해야된다고 많이 생각하고 있다. 특히 얼마 전까지 있어 온 신앙과 학문의 분리라고 하는 논쟁들의 후유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하여튼 인간의 지식이 믿음, 성경을 떠나서는 무력하고 타락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가르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보면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이 지적타락이다. 사람의 죄를 논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이 지적타락이다.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 수 있는 능력을 철저히 상실하였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앞으로 가면서 이 부분에 대해 철저히 하지 않으면 많이 defencive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유전공학 분야에서는 수정란을 cloning해서 복제하려고 하는 시도까지 이뤄지고 DNA 조작으로 種의 거리를 뛰어 넘으려고 하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여기서 지적 타락에 대해 분명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아주 말하기가 힘들것 같고, 특히 그런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생들은 상당한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 과학도 그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다고 추겨 줄것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이나 한계에 대해 분명히 얘기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되물리게 된다.
* 주:cloning이란? 수정란을 둘러싼 막을 벗겨내어 두개 이상의 수정란을 하나의 막안에 결합하는 발생공학적 기법을 말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슈퍼 수정란이 분할 할 때 다시 그 분할체를 분리하여서 각각의 생명체가 되게하는 방법으로 복제가 가능하다.
*정서적 타락
24-27절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거짓 것으로 바꿔버렸다. 그래서 조물주를 제쳐 놓고 오히려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기는데 이르렀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면 진리의 왜곡 하나님에 대한 참된 바른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으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한편으로는 진리를 거짓 것으로 대체한 결과가 되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조물주를 제쳐놓고 피조물을 섬기고 경배하는 일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떤 상태에 버려 두셨는가 하면 그 마음이 원하는대로, 욕망대로 더러움에 버려두셔서 각자의 몸을 더럽게 추악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몸을 부끄럽게 다룬다, 취급한다는 것은 그의 생활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모든 삶이 몸을 통해 몸과 관련하여서 이뤄지는 만큼, 몸을 더럽힌다는 것은 단순히 때를 묻힌다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이뤄지는 삶을 더럽힌다는것, 더러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26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꼐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라는 말이 24절 말씀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데 마음의 정욕대로, 원하는대로 내버려두셔서 온갖 더러운 일을 하게 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 ‘επιθυμια’ 라는 말은 나쁜 의미로 ‘정욕’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그저 중립적 의미로 어떤 바램, 원망, 원하는것(desire)의 뜻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하는대로 내버려 두셨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자기 몸을 더럽게 하는 더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말이 된다.
결국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의 원하는 바가 인간의 느낌(feeling), 정서와 같은 것인데, 대개 feeling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feeling자체는 주관적인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객관적 의미의 feeling을 제쳐놓더라도 주관적 의미, 인간이 뭔가를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자신을 더럽게 하는 것들을 원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정서적으로, 情的으로 타락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정서적 타락의 구체적 예를 말하면서, 우선 그것의 본질을 얘기하기를 이처럼 말한다. 26절에 보면 “순리대로 쓸것을 바꿔 역리로 쓴다”고 되어 있다. ‘φυσιs’라고 되어 있는데 ‘nature'로 흔히 번역되는데, ‘타고난대로’, ‘본래대로’ ‘순리대로’의 것을 버리고 그것에 어긋나게 행하는 것이 정서적 타락의 본질이라고 정의된다고 할 수 잇다. 인간의 욕망이, 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되게 정하신 그런 모든것에 역행하도록 변질되었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정서적 타락이라고 한다.
이것의 한 극단적이고 구체적인 예로 호모섹스를 들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 본래대로의 질서를 따른다고 하면 남녀끼리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정상인데 그것이 여자가 여자와 더불어,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성관계를 갖는다고 하는것은 본래의 정한 질서에 역행하는 것이요 이런 것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역한것, 더러운것으로 느낀다.
이를 보다 일반화시키면 우리가 흔히 역하다, 더럽다, 추악하다고 느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 본질을 따지자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래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들에 대하여 더럽고 추악한 구역질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의지적인 타락
28절
28절에 보면 “이들은 또한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 한다”고 되어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란 분을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길 가치가 있는가? 라는 태도를 갖는다는 뜻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의무가 있는가? 라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인 거스림, 교만한 태도를 갖는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어떤 처지에 버려 두셨는가 하면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사” 라고 되어 있다. 우리말로 ‘상실한 마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은 ‘αδοκιμαζω νουν’ 이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가치가 있는가? 라고 할 때 사용된 말이 ‘αδοκιμαζω’??????δοκιμαζ(판단, 증거하다, 시험하다) 라는 동사이다. 하나님을 인정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즉 ‘δοκιμαζω’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떤 마음의 상태로 버려 두셨나 하면, ‘αδοκιμον νουν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엔 play on words(언어적인 유희)가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그런 태도를 갖는데 대해 하나님은 그것을 뒤바꿔 사람들에게 그대로 갚으시는 것이다. 실재에 있어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αδοκιμον νουν’(상실한 마음)이다. 인간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아주 굉장한 위치에 두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자체가 상실한 마음, 말하자면 그런 생각은 인간을 가치있게 하는 생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생각할 바의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생각이다.
그런 마음에 계속 내버려 두시는것, 그래서 어떤 일을 행하게 되느냐 하면, 그 생각 자체가 결국 인간으로서의 합당한, 인간의 수준에 걸맞는 생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앞에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실제는 미련한 것이라 했듯이 마찬가지로 자기는 자신을 높이는 생각이라고 하나, 실제는 자신을 degrade하는, 즉 자신의 지위를 추락시키는 태도이다. 그래서 결국 어떤 일을 행하게 되느냐 하면, 인간으로서 합당치 않은 일을 하게 된다. 여기서 무엇에 합당한 일이냐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합당한 일,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으로서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29-31
그것이 어떤 행동인가 하면 29-31절에 나열된 행동들이다. 위와 같은 다양한 행동들은 인간이 인간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하는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서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요, 인간의 고귀한 위치와 본질을 저락시키는 행위들이라는 것이다.
32절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을 행하면서도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 하는데 있다. 32절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합당치 않는 일들을 행하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면서도(대개 사람들은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을 안다. 그래서 좀 생각이 들때는 ‘죽일 놈, 벼락맞아 죽을 놈’ 등으로 말한다. 즉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태도를 암시하는 것일까? 앞에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할 가치가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정하심에 대해 공공연한 반기이다. 알면서도 나도 행하고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것을 잘한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잇다.
여기서는 뚜렷하게 갈라서 얘기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대체적으로 여기서 논의된 인간의 심적기능의 종류를 대개 나눠보면,
첫째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아는 일에 실패한것, 다시말해서 지적타락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우리가 원하는것, 이것이 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역행하는, 우리를 더럽게 하는 그런 것이다. 곧 정서적 타락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공공연히 반기를 드는 악의적인 악독한 의지, 곧 의지적 타락이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흔히 보듯 제목설교 하듯이 첫째 지적타락, 둘째 정서적 타락, 셋째 의지적 타락, 이렇게 하지 않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가지만 그러나 인간의 모든 심적기능에 있어서의 타락이 골고루 망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사도는 이와같이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되는 인간의 죄, 또 그런 죄를 유발하는 어떤 더 깊은 죄의 뿌리를 얘기 하면서 인간의 여러 심적기능에 골고루 퍼진 죄악의 요소들, 타락의 요소들을 쭉 언급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가? 인간은 그 영혼전부에서 단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골고루 썩었으며 전적부패라는 말이다. 인간영혼의 어느 한 기능도, 어느 한 부분도 제대로 된 곳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교회에서 罪論을 가르칠때 조심해야 할것은,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우리 감정에 가장 밀착된 사례들을 꺼집어 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뉘우치게 한다. 그것이 일부분의 죄를 깨닫게 하는데 효과적일 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데 까지는 너무 부족하다. 실상은 사람의 타락정도는 더욱 심각한 것이다.
바울사도는 왜 여기서 이처럼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가? 왜 모든 인간의 심적 기능에서 타락한 사실을 얘기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타락의 깊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의 어느 일부분이 타락한 것이 아니다. 어떤 구체적인 사례를들어서 그 죄만 자꾸 지적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부분에서의 죄의식 이상으로 넘어가기가 힘들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처음 죄론을 시작하면서 인간은 속속들이 썩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 광범위하고 좀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왜 바울사도가 이렇게 얘기 했는가? 그 의도를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다. 당신은 어느 일부분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썩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할것이다. 예컨데 ‘당신은 꽤 좋은 사람인데 그 부분만 고치면 괜찮겠다’는 식으로 얘기를 해놓으면 얼마 가지 않아서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그것은 마치 한가지 병을 고치고 열가지의 병을 덮어 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인간은 철저히 썩어서 돌아볼 가치도 없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가르쳐야 한다.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음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사실을 알 때부터 시작된다. 자기에게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참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참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엇인지, 죄사함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제2장
1절
2장에서는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라는 말로 시작하여 ‘판단하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2절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τουs τα τοιαυτα πρασσονταs)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보면 연결이 매우 쉽게 되어 있다. 1:32절에 보면 “οι τα τοιαυτα πρασσοντεs”라고 하여 동일한 어떤 말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32절과 2:2절에서 말하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하면 앞서 1:28절이하에서 언급이 되었던 여러가지 인간으로서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판단하는 사람’이란 앞서 언급한 그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을 의식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사람으로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라는 시각에서 볼 때 한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1:32절에 언급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인가 하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행하고 남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이런 것을 배경으로 본다면 ‘판단하는 자들’은 어떤 사람인가? 그런 일들을 행하는 것에 대해 정죄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는 1:32절의 사람과 대조가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일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하고, 나쁜 일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전제되어 있느냐 하면, 적어도 ‘그런 것은 잘못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고 하는 어떤 모종의 규범을 가지고 있고 그 규범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이 내용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느냐 하면, 뒤에 보면 유대인들에 관한 얘기가 나오기 때문에 유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특별히 여기서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 아느냐”,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로 회개케 하시기 위함인 것을 알 지 못하느냐”라는 등의 표현을 보아서, 유대인에 대한 얘기가 아닌가 라고 볼 수 있는 여지를 강하게 암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 힘들다.
적어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확연히 나타나는 것은 2:10절 이하에서 “첫째는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니라”는 말씀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언급이 되고 2:12절 이하에서는 그것을 발판으로 결국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판단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을 의식하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드시 유대인만으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단순히 앞서 언급된 사람들, 즉 그와같은 일을 행하고도 남이 행하는 일도 옳다고 하는 이런 부류와 또한 이런 자들을 정죄하는 사람, 말하자면 의의 규범을 알고 그것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는 정도로 알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의 규범을 알고 그것의 정당성을 인정해서 앞서 말한 그러한 규범에 어긋나는 행위들, 그것들을 정죄하는 사람들아! 너도 변명하지 못할지니 네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그것으로 네 자신을 정죄함이라 왜냐하면 판단하는 네가 동일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부분에서 문제삼아야 할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고 그것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행할때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면서도 자기자신이 바로 정죄한 그 일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 판단하는 기준이 바른 기준이냐 아니냐를 일단 보류해두고 생각할때 그들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은 무엇이 바른것인가를 그 자신이 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자신도 같은 일을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가 판단하여 아는 그 바른 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임을 대개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나중 마지막 부분에 가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2절
우선 이런 사람, 즉 옳은 것이 이런 것이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한다, 이것이 정당한 것이다고 하면서 남의 행위에 대하여 정죄하고, 그러면서 자기도 같은 일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 역시 그대로 무사히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쭉 얘기한다. 단순히 옳은 것이 무엇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만으로는 일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진리를 따라서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앞서 언급된 하나님의 의의 규범에 어긋나는, 율법에 어긋나는 모든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하고 있다.
3절
이어서 반문하기를 같은 일을 행하면서도 그런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아!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즉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느냐는 말이다. 잘못되었다고 정죄하면서도 오히려 자기도 같은 일을 행하면서 가만히 있는 사람에 대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일깨우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임할 것이다. 그렇게 이것이 옳은 것이다하고 앉아있는다고 해서, 그 지식 때문에 피할 길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왜 심각한 문제성을 느끼지 못하느냐고 질책하고 있다.
4절
아니면 너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능멸하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너희를 즉각 멸하지 않으시고 참으시는 것은 너로 회개케 하기 위함인데 그 선하심을 네가 능멸하는 것이냐,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런 것은 벌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죄까지도 모두 관용하신다, 문제가 안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즉각 즉각 벌하지 않으시느냐 하면, 그것은 너희로 회게케 하기 위해서 인내하시고 참으시는 것인데, 그런 하나님의 선하심을 네가 능멸하고 있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5절
이처럼 분명히 뭔가 분명히 잘못되어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완악하고 회개치 않는 자들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이런 것은 마지막 날에 받을 진노를 쌓는 일에 불과한 것이지 그렇게 앉아서 해결될 길은 없다고 얘기한다.
6절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그가 행한대로 갚으신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의 원리와 율법주의는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율법의 원리란, 하나님께서 행하신대로 갚으시는 원리로, 그 원리는 불변이며 그것은 항상 정당하고 옳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그러한 율법의 요구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 볼려고 하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한다. 그래서 이 둘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7-8절
하나님께서 행하시는대로 갚으시는 그 원리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인내하여 선을 행하면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선행의 인내, 선한 행위의 인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우리말로는 참고 선을 행한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헬라어는 ‘υπομονην εργου αγαθου’이다. 직역을 하면 ‘선행의 인내’가 된다. 왜 하필 참음, 인내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일까? 이것은 선행에 있어서의 지속성이 요구된다는 뜻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선을 행하되 한두번 행하고 말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선을 행하되 끝까지 행해야한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단 한가지에 걸리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지속적 선행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δοξαν και τιμην και αφθαρσιαν ζητουσιν ζωην αιωνιον’,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다시 말하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질 것이요, 8절에 대신 야망(우리 말에는 ’분쟁‘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말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ambition의 의미가 적합하다.)에 차있는 자, 그리고 진리에 불순종하는자, 이런 자들에게는 분과 노로 갚으시리라고 되어 있다.
9-11절
이와같은 율법의 원리에 있어서도 그 적용 대상이 포괄적이고 보편적이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헬라인에게도 꼭같이 적용된다는것이다. 동시에 ‘πρωτον’ 이라는 말이 들어가서 뭔가 유대인에게 πρωτον(우선적)적인 의미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원리의 적용의 보편성, 일반성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 결론을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본래의 뜻은 ‘προσωπολημφια’(하나님께서는 얼굴을 봐주는 법이 없다), 즉 이 원리는 partiality(불공평, 치우침)가 없다는 말이다. 공평무사하게 적용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율법없이 죄를 범하는 자는 율법없이 망하고, 율법안에서 죄를 범하는 자는 율법을 통하여 정죄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원리에 따른 정죄와 심판이 이방인이나 유대인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적용됨을 우선 말하고 있다.
12절
12절 이하에 나오는 ‘ανομωs’는 무슨 뜻인가? 원래 ‘ανομια’라고 하면 무규범성, 즉 법이 없다는 뜻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허락된 독특한 율법이 없는 부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법없이 범죄하는 자는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특별한 율법과는 상관없는 자로서 범죄한 경우, 즉 이방인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ανομωs’가 이런 뜻으로 사용된 실례를 찾아보면 고린도전서 9:21이다. 여기보면 ‘τοισ ανομοιs ωs ανομοs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τοιs υπο νομον ωs υπο νομον’ 즉 ‘율법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처럼’이라고 해서 ‘율법아래 있는 자’와 ‘율법없는 자’가 대조가 되기 때문에 특히 유대인에 관한 말이 나올 때 ‘ανομωs’란 말은 계시된 율법을 가진 이스라엘(유대인)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율법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을 대조시켜 표현하는 말로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다.
12절 이하에서도 모세율법 테두리 밖에 있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명백한 율법계시와 상관없는 형편에 있으면서 그런 죄를 범한 자는 그냥 율법없이도 망하고 그리고 율법 안에 (εν νομω) 있으면서 하나님의 언약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 율법을 어긴 자는 율법을 통해서 정죄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13절
그러면 왜 율법 안에 있는 자도 정죄되는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율법을 듣는 자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칭하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율법의 원리 율법의 의는 반드시 그 율법의 행함을 필요로 한다. 행함이 있어야 의가 성립이 된다는 말이다. 율법적 의는 행함이 없이는 결코 성립이 안된다. 그래서 율법을 듣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율법을 매일 듣고 내용을 안다고 해서 의로 인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듣는 율법에 따라 의인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된다. 따라서 그 율법안에 있으면서도 율법을 거스린 자는 바로 그 율법에 의해서 정죄된다.
14절
그런데 14절에서는 조금 전에는 유대인에 관해 언급했다면 이제는 이방인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이방인의 경우는 율법을 갖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방인에게서 발견되는 한가지 이상한 현상에 대해 우선 언급하고 있다. ‘τα του νομου ποιωσιν이라고 해서 율법에 속한 어떤 것들, 여기서는 율법자체를 지킨다기 보다 율법에 속한 무엇이라고 해석을 할 수 있는데, 표현이 매우 애매하다.
이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쉬울 것이다. 예컨데 성경을 한번도 읽지 않는 사람도 율법이 명한 부분적인 일들을 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효를 행해야 하는 것이 옳은 줄 알고 있다. 그러한 율법의 부분적인 것들을 알고 행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경우가 나타날 때 이것을 어떻게 행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φυσει(by nature)’ 즉 타고난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본성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은 율법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법이 된다고 표현하면서, 이 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그사람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일을 나타낸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는데 , 모세 율법외에도 율법의 어떤 조목이나 내용들이 사람의 본성속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하야 할 것은 그것이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런 율법의 규범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가? 그것은 양심기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양심을 어떻게 가능한가? 예컨대 어떤 생각이나 의견이나 행동에 대해 마음 속에서 서로 변론을 한다. 즉 이것은 옳다고 변론하기도 하고 이것은 나쁘다고 정죄하기도 한다. 이렇게 변론한다는 것은 이런 판단을 가능케하는 규범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15절
사람이 그 마음 속에 기록된 본성의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양심기능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심도 그렇게 증거할 뿐 아니라 율법이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율법을 전혀 알 지 못하는 이방인이 율법의 부분적인 일들을 행함으로 나타내 준다. 사람마다 제각기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다. 성경을 한번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다. 옳고 그른 판단의 척도가 있다.
보통 일반사회에서의 규범의 근원은 여러가지 설이 있겠는데 후천적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의 공동체의 구성원의 약속에 의해서 그 사회 나름대로의 규범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특정한 행동에 대해서 나쁘다고 얘기를 하고 어떤 것은 옳다고 얘기를 하는가? 그것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것은 옳다고 하고 해를 끼치는 것은 나쁘다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규범이라는 것은 사회관습처럼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설명을 하는데 그러나 그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 이익이 되는 것은 옳다고 느꼈는가? 옳고 그름의 의식에 대한 설명은 주지 못한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역으로 오히려 흔히 모든 사회의 인간 집단 속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규범의 근원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국 모든 규범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가?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놓은 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인 조목으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이 여러가지 환경, 구체적인 사례와 부딫칠 때 보다 구체화된 것이 국가 법이요, 사회 윤리 등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이는 인간의 양심, 규범이라는 것을 지구 위도 상의 문제라고 말하였는데, 즉 한 쪽에는 노부모를 죽을 때까지 극진히 공양하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3년동안 관직도 버리고 묘지기를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미국의 인디안 중에 어떤 한 부족처럼 부모가 늙으면 높은 나무에 얹어 놓고 아들이 밑에서 나무를 흔들어서 떨어지면 도끼로 쳐죽이고 나무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으면 아직 일할 힘이 있으니까 놔둔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에스키모족들은 늙으면 자기 혼자 걸어나가 죽는다. 그리고 그것을 자식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런 현상을 보고 어떤 의문이 가능한가? 하나님의 법이 여기서 다르고 저기서 또 다른가? 예컨데 몇 사람을 모아 놓아도 양심의 기준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조금 잘못하고서도 양심이 불타듯 하지만 어떤 이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동일한 하나님의 법이 어찌 이렇게 다른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타락의 정도와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 여러가지 형태의 국가법이나 사회의 윤리등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원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법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보아야할 것이다.
16절
16절은 까다로운 문맥이다. 문장이 길어서 어디에 연결하여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꼭 해석하지 않아도 전체를 이해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법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법에 따른 정죄와 심판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율법을 행하였느냐, 행하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예외없이 정죄하여 심판하여도 공평무사한 것이 될 수 있다.
17-20절
17절
17절 이하에서는 앞서 제기했던 문제, 하나님의 의의 율법을 알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자신이 그 법을 범하는 이해하지 못할 일, 이것을 유대인이라고 하는 특별한 경우를 예를 들어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앞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해서 얘기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율법을 알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장 뚜렷히 나타낼 수 있는 부류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다. 스스로 유대인이라 불리우면서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앞서 대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어기는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막연히 의식하면서도 자기도 행하고 남이 행하는 것도 옳다고 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것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규범을 옳다고 인정하고 그것에 어긋난 행위를 정죄하는 사람들을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나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여기서 마지막에 유대인을 예로 든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단순히 하나님의 율법을 계시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가지 의미에 있어서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은 인류 중에 매우 독특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이라고 불리운다는 것이 결국 무슨 뜻인가? 언약 백성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방인을 가르켜 본래 너희들은 약속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자라고 했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말 그대로 인간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최대의 구별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아닌가 생각된다.
혈통적(육적)인 차원이지만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 즉 모든 인류 중에서 선택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친 백성으로 삼으신 매우 독특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계시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이 살아야 할 바른 도리인 규범인 율법을 계시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는 율법을 받은 백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는 그의 백성이라고 하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와같은 하나님에 대한 자랑의 허위성, 위선성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셨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10:5절에 보면 바울 자신이 스스로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18절
즉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대단한 열심을 가졌던 백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율법에서 배워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δοκιμαζ ειs τα διαφεροντα κατηχουμενοs εκ του νομου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τα διαφεροντα’ 직역하면 ‘중요한 것들을 안다’인데, 즉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인간에게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지만 유대인은 하나님이 가장 중한 줄 알고, 의와 영생이 가장 중한 줄 알았기 때문에 바리새인 중의 한 청년은 예수님께 달려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간절하게 묻기도 했다. 이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 있었다.
19-20절
이들은 율법 안에 있는 진리와 지식의 형태를 소유한 자로서 스스로 소경의 인도자, 즉 영적으로 무지한 자를 진리에로 인도하는 자라고 자처했다. 율법에서 배워서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무엇이 옳고 중요한지도 모르는 저들에게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자처했다. 즉 ‘어리석은 자를 가르치는 자요 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스스로 확신하였다.
21-24절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일을 21절에서 지적하고 있다. 성경에 있는 진리와 지식의 모습을 가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다. 혈통적으로 획득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독특한 지위나 율법을 소유하고 자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배워서 하나님의 뜻을 알며 참으로 중요한 것을 알고 인정하며 진리와 지식의 형식을 소유한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영적 무능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여 행할 수 있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것의 실제적인 증거를 보게되는데 그것을 바울사도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남들을 가르치는 네가 네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네가 도적질을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신사의 물건을 도적질하지 말라는 네가 신사의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그 율법을 범함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말하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얘기하고 있다. 율법으로부터 배워서 참으로 이것이 중요하며 이렇게 살아야 될 것임을 알면서 그리고 스스로 자부하기를 ‘내가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남을 진리에로 인도할 수 있다’고 열심히 가르치면서 왜 자기들은 남에게 가르치는대로 행하지 못하느냐 라는 반문은 유대인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25절
그러나 유대인이 이처럼 이방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리는 행동한다는 사실은 이방인들이야 본래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니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유대인 자신에게는 치명적인 일이다.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구약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언약과 깊은 관계가 있어서 율법과 언약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둘은 서고 넘어지는 것은 함께 한다. 즉 율법을 준수하면 언약도 유효한 것이요, 율법을 범하면 언약도 깨어지게 되어 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원하신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이를 근거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는 것은 곧 언약파기를 의미하였다.
그래서 말씀하기를 율법을 지키면 너희 할례가 유익하겠으나 율법을 범한즉 너희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다고 얘기를 하고 있다. 이 말씀은 바로 위에 언급한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주지하다시피 할례는 언약의 표징이다. 언약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평생 지울 수 없도록 살갗을 베어서 육체에 새겨 놓은 징표가 할례이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나타내는 고로 언약의 징표인 할례는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임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이 율법을 범함으로서 그들의 할례는 무할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언약이 파기됨으로서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 언약백성(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됨이 무효화 되었다는 뜻이다. 이처럼 언약(하나님 백성됨)에 있어서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의해서 언약이 유효하기도 하고 파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언약은 온전히 율법을 지켜지는 하에서만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26-27절
이처럼 언약의 유무효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좌우 된다고 하는 것은 이런 주장이 가능하리라고 말한다. 즉 만일 무할례(육적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인)가 모든 규례를 지킨다고 하면 그의 육적 무할례가 실질적인 할례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왜냐하면 그는 언약을 유효하게 하는 율법을 실질적으로 지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성적으로 육적으로 무할례인 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하면 의문과 육적할례에 의해서 하나님 백성이라고 칭하여 지지만 언약을 실질적으로 유효하게 하는 율법을 범함으로서 언약이 파기된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상실한 너희 유대인을 오히려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완성(마침)이 되는 그리스도께 의지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백성된 이방인의 경우를 내다보고 암시적으로 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28-29절
그러면 하나님백성 진정한 할례란 무엇인가? 앞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이 의지한 외부적인 조건 즉 혈통적으로 확보된 하나님 백성의 지위, 하나님 백성됨을 확인하는 육적 차원의 징표인 할례등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증명된 바와 같이, 실질적으로 그 자체는 아무 능력이 없음을 말씀한 뒤에, 그리고 그 사실이 율법을 범함으로서 스스로의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상실한, 언약이 파기된 이스라엘 역사에 의해 증명되었음을 말씀한 뒤에, 그러면 진정한 하나님백성, 진정한 할례가 무엇인지 그 본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외면적 유대인(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혈통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면적인 할례, 육체를 베어 내어 행한 할례가 진정한 할례,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증거하는 진정한 징표가 아니라고 언급한다. 이면적 유대인 은밀한 유대인 눈으로는 숨기워 보이지 않는 유대인 내면적인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요 은밀한 중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 즉 심령에서 하나님 백성된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글씨로 바깥에 새긴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 그 심령에 행해진 할례가 진정한 할례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징표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런 논의는 8장까지 내다보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율법을 알고 그것을 좋다고 인정을 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결이 되겠는가? 이미 이스라엘 역사에 의해 증명이 되었듯이 외부적으로 할례를 헹하는 것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 가능한가? 성령님에 의해 행하여 지는 심령의 할례, 그 진정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성령님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된 존재, 중생하여 새 사람되는 이것이 참 하나님 백성됨의 증표인 것이다. 성령님에 의해서 중생하여 새 사람 된자, 그리고 항상 그에 의하여 새롭게 거듭 변화되어 가는자 만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참된 의미에서 순종하여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능력은 성령님으로 비롯된다는 것을 여기서 간략하게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 이미 답까지 나와 있지만 그러나 결국 인간의 죄론, 타락과 관련해서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무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성도들에게 달콤한 얘기를 자꾸 해선 안되고 이 사실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 앞서 언급한 인간의 죄, 이것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한 두가지 죄악된 행동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어느 한 구석도 제외된 것이 없이 완전히 타락되어 있는 죄 덩어리인 것이다. 바로 이것에 대해 철저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법앞에서 무력하다고 하는 무능함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죄된 것에 대해 실컷 가르쳐서 회개하라고 가르쳐 놓고 그 다음에 또 그것을 하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반만 고쳐 놓고 다시 불구자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행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님 안에서 거듭나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그 성령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실제로 이러한 은혜가 역사하는 것이 드러날 때 비로소 교회가 제 모습을 찾게 되고 힘과 능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오늘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무능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적당히 죄된 것을 가르치고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여기에 큰 병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철저히 절망하는 것, 자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너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그것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믿음이 아니다. 적당히 믿는 척 하는 것이다. 믿는 척 하다가 급한 일이 닥치면 하나님은 필요 없고 과거에 자기가 쓰던 방법을 쓰는 것이다. 자기를 믿고 사람을 찾는 것이다. 이런 모습의 원인이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철저히 절망해야 할 만큼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기를 붙들고 인간에게 무슨 가능성이 있다고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어려운 형편을 당할때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2:17절 이하에서 유대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유대인들이라는 특수한 집단에 대해서 그들의 독특한 관례들, 즉 할례등을 별 의미없이 언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그것은 단순한 언급이 아니고 그러한 언급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의식하고 그것과 관련해서 복음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에 대해 말씀하기 위해서 구약 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은 것이다. 이것은 소위 구약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조차도 그 법앞에서 무력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동시에 구약 언약 체계(모자익 시스템)자체가 지니고 있는 잠정성, 미완성적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마음의 할례와 육적인 할례의 비교 그리고 성령께서 마음에 행하시는 할례와 율법준수와 관련하여 얘기하는 것은 결국 구약의 예레미아서 31장에서 언급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관한 논의에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만들고 그것은 자연히 구약과 신약관계에 대한 고려에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이 주 구성원인 로마교회에 복음을 제시하면서 왜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가? 그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 우리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군데군데에서 유대인에 관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이 되었지만 결국 구약 이스라엘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에 전혀 무력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법을 지키는데 실패함으로 언약이 파기되었다. 이것은 구약의 언약(시내산 언약의 한계를 암시하는 것이고 그것은 예레미아서 31장에서 분명히 얘기하고 있듯이 새 언약과 옛 언약에 관해 대조하면서 새언약은 그들이 파기해 버린 그 언약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든 독특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의 역사가 실패로 끝났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상당히 충격적일 수 밖에 없다.
제 3 장
1절
3장은 이런 반문으로 시작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인가? 구약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나은 것이 무엇인가? 이방인과 꼭 같다는 얘기 아닌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실패해 버렸고 다 정죄아래 들게 되었다면 도대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인가 이 말이다.
2절
이에 관한 대답으로 모든 방면(in every way)에 많은 유익이 있다고 말한다. 유대인은 구약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누리는 유익이 모든 면에서 많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이스라엘의 언약파기, 그로 인한 멸망, 실패의 역사를 얘기할 때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어떤 제동이고 경계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앞의 결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육적, 혈통적으로 확보됐던 독특한 지위, 곧 할례, 율법받은 것 등 그 모든 것들이 진정한 하나님 백성되기에 충분조건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거시적인 면에서 볼 때 분명히 실패의 역사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한 실패, 완전한 무로 돌려진 무엇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 하느냐 하면 , 그러면 유대인 되었다는게 아무 의미가 없고 유익이 없었는가? 아니다고 말한다. 모든 방면에서 유익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런 긍정적인 대답을 예상케하는 암시적 표현이 앞서 여러번 있었는데 ‘Ιουδαιω πρωτον’(먼저는 유대인 에게요--)라는 표현이다. 유대인에게 항상 ‘πρωτον’(먼저)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이런 수식어의 내용이 이제 점차 베일을 벗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의 나음, 유대인의 누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민으로서 누린 독특한 유익이 무엇인가? ‘πρωτον’(먼저) 누린 유익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유익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위탁받은것이다), 말씀을 위탁받았다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이 누렸던 가장 큰 특권이고 유익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 ‘τα λογια του θεου’에서 혹자는 ‘λογοs’라고 하지 않고 ‘λογια’라고 썼다는 용어 상의 차이 때문에 구약말씀 전체를 뜻하기 보다는 ‘λογια’를 하나의 oracle, 구약의 약속, 예언들을 말한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행 7:38절에 보면, 모세의 계시 중보자적 역할에 대해 말하면서 ‘그는 생명의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전하여 준 자라’고 하는데, ‘새 영의 말씀’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λογια ζωντα’라고 쓰고 있다. 이는 모세가 우리에게 전해준 계시를 여기서 총칭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를 ‘λογια’라고 쓰고 있다. 때문에 여기 ‘로기아’를 어떤 oracle을 뜻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저 일반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총칭하는 말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여기서도 약속이나 oracle로 보아야 할 특별한 제시가 없는 한 유대인에게 주어진 계시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옳으며 약속이나 oracle 등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유대인의 특권중에 최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특권이라고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한 독특한 민족이라는 그 자부심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는데 거기에서 그들이 실패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지닌 중요성은 그들의 실패를 인해서도 조금도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았다고 할 때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어떤 민족이라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율법이라고 하는 말씀계시가 그들에게 주어지고 성경으로 기록되었다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율법이라고 하는 말씀계시가 그들에게 주어진 그면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와같이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선포되었고 그들 역사속에 선포되어서 그들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셨고 그가 말씀하신 약속, 예언들이 성취되었다고하는 이면도 매우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셨을때 단순히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복음의 역사, 구원의 역사 자체가 유대인 역사를 장으로 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선포되고 그 역사 속으로 복음의 역사가 이뤄져 왔다고 하는 그런 면들을 의식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의 최우선적 특권을 말하면서 이것을 보다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혹자는 세련된 말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 배후에 깔린 전제가 애매하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켜 ‘끊임없이 그들의 역사속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순례의 길을 행한 역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끊임없이 그들의 역사속에 떨어져 들어왔고(계시되었고) 그 말씀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役事하며 실현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 역사가 실패로 끝나고만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3절
이에 대해 답하면서 ‘만일 ηπιστησαν τινεs’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그들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느뇨? 여기서 ‘παs’나 ‘παντεs’(모든 사람)란 말을 쓰지 않고 ‘τινεσ(어떤 사람들)’ 라는 말을 썼다고 하는 것, ‘어떤 사람(some)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왜 바울사도는 여기서 ‘τινεσ’란 말을 썼을까?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불신앙하고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역사, 구약적역사 전체로서는 실패의 역사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구원의 역사가 있었고 신앙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불신앙한 사람들을 가리켜 some, τινεσ라고 한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가 외견적으로 거시적으로 나타내 보이듯이 완전한 실패가 아니다는 것이다. 이같은 불신앙과 그로인한 심판, 멸망 그러한 운명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부분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4-8절
그래서 이런 역사가 초래되었는데 이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겠는가? ‘내가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을 이루겠다.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고 그들을 통하여 세계 만민이 참여하는 위대한 구원을 그들 역사속에 이루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허위로 끝나고 말았느냐? 하나님이 거짓말 한 것이냐?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하는 것이냐? 하나님이 위약하신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정하는 성구들을 시편등 두어군데 인용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결국 이 내용은 어디하고 매우 유사하다 할 수 있느냐 하면 9장이하의 내용과 같다. 9장 이하의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의 내용을 확대한 것이다. 거기서도 이스라엘의 전부가 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택한 자를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τινεσ’, 즉 어떤 자들 그 중의 일부가 꺾이어 졌다는 표현들, 다 이미 여기서 예시되고 있다.
바울사도는 앞장에서 구약체계 그 자체로는 어떤 구원을 이루는 능이 없으며 구약역사는 외견상, 거시적으로 볼 때 실패의 역사로 끝났다는 것을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이것을 너무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완전한 실패라는 성급한 결론을 예방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제동을 걸고 있다.
여기서는 이런 내용들을 잠깐 이렇게 언급해 놓고 이것을 나중에 9장 이하에서 fully develop, 완전히 충분히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아래 나오는 몇가지 반문들,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확정하는데, 그에 대한 책임을 말하겠는가? ‘나의 거짓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풍성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었다고 하면 왜 내가 죄인처럼 정죄되어야 하는가? 등의 반문을 하면서 그것을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해 버리고 마는데, 이런 것들도 결국 나중 9장 이하에서 다시 반복된다. 다른 형태로 유대인들이 순전히 논리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반문들을 일일이 반박하는 것이 9장 이하에서 나온다. 여기서는 미리 몇가지를 제기해 놓고 이런 것들은 잘못됐다고 못박아 놓은 것이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 답변도 9장 이하에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간략하게 얘기한다. 왜냐하면 전체적 흐름이 이것을 취급할 문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바울사도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것, 그것을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것 없이 하나님의 율법의 원리 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그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그 사실을 증언키 위한 것이니 만큼, 이런 유대인편에서 나옴직한 반박적인 질문들은 간략하게 취급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예수그리스도 이후의 역사와 그 이전의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와의 관계를 항상 의식하고 말하는 이런 발언들을 통해서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가, 그 역사적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미리 여러 기회를 통해 계속 암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9절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에서 ‘우리는 나으뇨? ‘προεχομεθα’ 라는 말이 여러가지로 번역이 가능한 까다로운 말이다. 하여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는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결국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외없이 모든 인간은 율법 앞에서 죄인이요, 무력하다는 그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있다.
10절
그리고 다시 이 사실을 구약계시를 통해 재 확인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여기서 시편인용을 잘 살펴보면 여기서 이때까지 논한 모든 인간의 타락의 양상, 무능함에 대한 얘기들, 그 결론들이 여기서 거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1절
‘ουκ εστιν ο συγιων’(11절) ‘ο συγιων’ 이란 무슨 말인가? ‘깨닫는 자가 없다’는 말인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의 지적타락, 무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성향, 의지를 역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다시말하면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감, 그를 싫어하고 배척하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2절
‘모두가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라고 되어있는데, ‘치우쳐’란 말은 ‘turn away’ ‘돌아서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배역, 배척이란 뜻으로 오히려 그 의미가 두드러진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부패하고 말았다.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 비춰 볼 때 전혀 무익한 그 뜻에 부합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것‘ 앞에서 바울사도가 한 얘기는 한 개인에 있어 전적인 타락을, 전인적 타락을 얘기하고 난 후, 여기서는 다른 방향으로 확대시키고 있는데, 인간의 보편적 타락을 ’선을 행하는 자 하나도 없다‘는 말로 얘기하고 있다.즉 모든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이다.
13-14절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치 무덤에서 시체의 악취가 나듯이 부패한 마음 속에서 온갖 부패하고 악하고 독한 더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기서 ‘목구멍은 열린 무덤’ 이라고 할 때 이것이 말과 관련된 methaphon 라고 하는것 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이것과 댓구를 이루는 그 다음의 절(이것을 시에서 콜론이라고 한다) 이 콜론이 무엇이라 되어 있느냐 하면 ‘그들의 혀로는 속임을 베푼다’고 되어 있다. 목구멍은 결국 그들의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런 어떤 표현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혀는 매끄러워서 겉으로는 달고 아름답고 흠잡을데 없으나 그 속은 시체와 같이 더러운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런데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내면의 표현형식중 하나이면서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말 그자체에 국한된다기 보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모든 형식의 외부적 표현을 다 총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15절
그 다음으로는 별다른 연결없이 악독한 성품들이 드러나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15절) 그들이 행하는 곳마다 유혈이 낭자하다, 폭력이 난무하다고 자연스레 넘어간다. 그들이 타락한 내적 본질을 따라 겉으로 내놓은 것들은 독사의 독같이 악독하고 거짓되며 남을 해치는 폭력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을 얘기한다.
16-18절
‘파괴와 고생이 그 길에 있다’ 그들의 행동이 초래하는 것은 파괴적이요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 저들의 모든 행위에는 평강의 요소라는 것은 없다. 파멸과 고통만을 초래할 뿐이다.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느니라’
그런데 여기에 인용된 구약의 시편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롬 1:18-32까지의 내용을 압축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역으로 어떻게 얘기 할 수 있을까? 바울 사도는 롬 1:18 이하의 논의는 물론 이전 구약계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전혀 새로운 계시라 할 수 있겠으나 그 자신이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사실에서 자연스레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은 그가 받은 계시는 옛 구약계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다. 사실 롬 1:18절 이하의 내용은 특히 사 40장 이하의 몇부분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인상을 주고 있다.
19절
이처럼 철저히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구약의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율법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해서 19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알기로 율법이 말하는 바 모든 것은 율법 안에 있는 자에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율법의 적용대상, 율법이 말한 그 모든 내용은 결국 누구에 대한, 누구를 향해 발언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니까 율법 안에 있는 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면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으로 하여금 심판 아래있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다.
얼핏보기에 율법이 율법 안에 있는 자에게 적용된다는 이 말만 보고 율법의 적용대상은 율법 안에 있는 자니까 율법은 이스라엘에만 그 적용대상이 국한된다는 말로 이해하기 쉽다.
20절
그런데 결론 자체는 온 세상으로, 모든 사람으로, 20절같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로 되어 있다. 20절에 ‘πασα σαρξ’(모든육체)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정죄의 대상이 모든 인류에 확대되고 있는 만큼 ‘τοισ εν τω νομω’(율법 안에 있는 자들)를 유대인으로 국한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19절 상반절은 19절 하반절 이하 20절의 어떤 결론의 근거가 되고 있는데그 근거가 유대인에게 국한되는 것이라면 어떤 보편적인 적용대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20절 이하의 내용과는 맏지 않는다. 조건 부분은 어떤 특정 부류에 국한되고 결론 부분은 보편적으로 모든 인류에 적용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안에 있는 자에게 말하는 것’이라 할 때 여기서 율법 안에 있는 자라는 뒤엣 말이 의미있게 되기 위해서는 결국 전 인류를 그 적용대상으로 확대할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이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율법을 근거로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그 율법의 적용대상이라는 것은, 그 율법의 틀에 의해 얽매여 지는 그런 대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 안에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실 이방인도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앞서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쓰여진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모세에게 계시된 율법은 본성적으로 명문화되지 않고 막연한 어떤 것,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본성의 법보다 훨씬 더 명료하며 말로 표현되어 명문화 되었다. 또 본성적으로 기록되지 아니한 부분까지도 더 많이 추가적으로 기록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적어도 같이 말하고 있는 어떤 내용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막연한 본성의 법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는 인간의 타락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다양한 모습으로 법 자체가 왜곡되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겨 놓으신 본래의 근원적인 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나중 율법을 통해 계시하신 그것과 동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율법의 의미를 넓힌다고 하면, 모세를 통해 주신 특정 율법계시보다 좀 넓게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율법 안에 있는자, 율법의 적용대상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사실을 2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관련해서 충분히 강조하고 있다. 이방인도 결국 법없는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혹시 율법없는 자는 율법없이 망한다고 되어 있으니까, 율법없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니까 율법하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거기에는 율법없는 자로 표현한 것은 모세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 밖에 있는 자란 뜻이지, 참으로 하나님의 법 밖에 있는자, 법 적용의 범위에서 벗어난 자를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법 적용이 밖에 있는 자라 한다면 어떤 얘기가 될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자가 되어 버린다. 그와같은 결론을 막기 위해 얘기하는 것이 모든 이방인도 마음에 새기는 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따라서 율법의 일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율법이 갖는 의미라고 하는 것, 율법의 실제적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정죄되어 심판을 받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의 기능이 이러하기 때문에 모든 육체는 하나님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고 얘기한다. 율법을 행하는 것으로는, 율법을 그 스스로가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로 따진다고 한다면 한 사람도 의로울 자가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율법의 실제적 기능이 무엇인가? 무엇이 옳은 가를 분명히 밝혀주는 이 율법의 기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철저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어 줄 뿐이다. 그 사실을 인식케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나중에 7장 이하에서 재론되는 것이다마는, 그것은 율법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원리 자체가 잘못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간의 타락, 죄됨에 있다. 인간의 이와같은 타락 사실은 결국 우리를 어떤 위치에 서게 하는가 하면 율법 앞에서, 옳은 것 앞에서 완전히 절망하게 만든다.
이것 또한 오늘의 교회가 철저히 가르치지 않는 부분이다. 흔히 ‘앞문으로 내보내고 뒷문으로 끌어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한 쪽을 비판하면서 한 쪽으로는 비판한 동일한 이론을 끌어 들일 때 이런 얘기를 한다. 오늘 교회는 한편으로 율법을 부정하며 복음을 주장하면서 실상은 율법적인 요소를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다. 율법의 원리, 율법을 지켜 행하여 의에 이르는 원리, 이 율법의 원리 앞에서 우리 인간은 절망할 수 밖에 없고 또 절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리새인들은 보통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진지하고 훌륭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라고 부르니까 우리와 같은 저급한 형태의 위선자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기도하기를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만큼 자기의 경건을 사람앞에 내어 놓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보다 더 쓰레기같은 세리와 창기를 제쳐놓고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비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혹독하게 위선자, 독사의 새끼, 마귀새끼라고 정죄하고 그 실상을 뒤집어 엎은 것은 그들이 제일 위험하고, 그들이 참된 복음의 길을 오도할 위험성이 가장 높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활이 형편없다면 괜찮을 것이다. 누가 그런 그들을 따르겠느가? 문제는 그들의 생활의 외부를 볼 때 실제로 의롭고 경건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사람에게는 뭔가 있을 것이다, 저 사람 정도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 받을만한 사람이다’라고 오해를 줄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더 위험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기새인들의 잘못은 단 한가지, 율법의 원리를 따라 스스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한가지다. 열심히 그 길을 따라 노력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 의에 이르고 영생에 이를 수 있고 이 길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따라 사력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그러한 혹독한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어떤 말씀을 들었는가 하면 “너희는 바다와 육지를 두루 행하며 교인 하나를 얻으면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한다, 너희는 천국문을 닫아 걸어서 너희도 안들어가고 들어가는 사람도 막아 못들어가게 한다”는 책망을 들었다. 그들의 잘못은 바로 ‘자기의’, 자기 스스로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의와 영생에 이르고자 한것이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거부한 그 한가지 잘못이 그들에게 있었다. 행동만을 따진다면 그 어떤 사람들보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은 우리가 이 율법, 율법의 원리 앞에서, 자기의 의앞에서 얼마나 철저히 절망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신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믿으시오, 죄사함 받고 구원 얻으시오’ 해놓고 ‘신자로 살아라, 의롭게 살자’고 권면하지만 예수 믿고 구원 얻으시오 라고 할 때 율법의 의앞에서 철저히 절망하는 것 없이 ‘신자로 사시오’ 라고 자꾸 얘기하게 되면 잘못하면 율법주의를 앞문으로 쫓아 내고 뒷문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 ‘은혜의 의’,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은혜의 의’를 깨달았던 사람들에게도 ‘거룩하게 살아라, 살아라’ 하게 되니까 자기도 모르게 처음에 받았던 그 은혜의 의미는 잊어버리고 율법주의에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교인들을 지도할 때, 그들의 자라는 과정, 어떤 성향들을 가지고 있는가를 매우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율법의 원리 앞에서 철저히 절망해야 한다는 이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양쪽을 왔다 갔다 한다. 오늘은 은혜주의가 되었다가 내일은 율법주의가 되었다가, 오늘은 어거스틴주의가 되었다가 내일은 바리새인주의가 된다. 그들의 생각의 흐름, 영적인 흐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살펴야 할것이다.
21절
2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바 되었는데 이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를 받은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때까지 취급해 온 것은 율법 앞에서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가? 완전한 죄인으로, 철저히 무력한 자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 배후에는 어떤 의가 전제되어 있느냐 하면 율법적인 의이다. 그러나 사실 나중에 보겠지만 여기 ‘하나님의 의’도 ‘율법적 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항상 나오는 말이 ‘εργον νομου’, 율법을 행하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가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사람을 심판하시는 그 기준이 뭐냐하면 그들의 행위인데 그것은 결국 법을 그들 자신이 어떻게 행했느냐에 따라 판단하신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의’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율법의 요구를 각자 스스로 행하여 만족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의, 율법적 의라고는 하지만 하나 더 조건이 붙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얻는 율법적 의이다. 그런 의를 전제할 때, 율법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정죄되고 따라서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의의 길’의 소망이 없어지고 따라서 ‘영생에의 길’의 소망도 없어지고 완전한 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1절에서 ‘하나님의 의는 계시 되었다.’ 여기에 ‘πεφανερωται’ 라는 말은 사람들이 받아 누릴 수 있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 받은 것이라고 함으로써 이 의조차 구약에 있어 낯선, 구약의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 아니라 구약도 잘 알고 있었던, 구약자체가 증거하고 있는 그런 무엇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 신 구약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여기서 나타난다. 쉽사리 구약을 율법이다, mosaic system이다, 그렇게 취급해서 순전히 율법이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약율법 자체가 이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의는 구약에서도 유용하였다.(available) 그렇지 않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을 4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구약에서도 이러한 의가 존재했었고 받아 누려졌다는 사실을 4장에서 얘기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신구약의관계를 염두에 두고 이런 것들을 논의하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복잡한 것인가에 대해 매우 조심스런 접촉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22절
두번째로 이 의의 성격을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 δια πιστεωs’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라고 되어 있다. 지금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믿음을 통한’이란 ‘δια πιστεωs’가 왜 붙었는가? 이 하나님의 의가 각자에게 appropriate(獨, Aneignung??Aneignen, -을 제 것으로 하다. 내 것으로 받아들이다.) 나와 상관없는 그것을 내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δια πιστεωs’는 하나님의 의를 내가 받아 누리는 형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의 특징은 그것이 어떻게 각자에게 그 은혜가 임하는가? 주어지는가? 받아들여 지는가? 그것은 믿음의 형식을 통해서,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사실 믿음이라고 하는 말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계속 믿음이라고 하는 형식이 갖는 은혜적 성격, 그래서 ‘δωρον’, 즉 선물이다. ‘값없이’, ‘은혜로’라는 말이 많이 얘기 되지만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요소만 갖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신실함,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 등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는 인격적인 독특한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에 가장 기본적이고, 정당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외부적으로 십일조하고 정결규례를 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는 굉장히 화려하고 철저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율법의 참 뜻이 아니다. 그것은 계명의 수준을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행한 위선적 율법 이행에 불과했다. 이런 외부적 차원의 율법준수가 무엇과 결부되는가 하면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는 세속적인 욕망과 결부되게 된다.
“ 믿음”이란 복음에만 관계된 의미의 단어가 아니다. 피조물로서 소유하는 것 모든 것은 창조주 앞에서는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너희가 가진 것 중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이 믿음을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형성과 그에 따르는 자세와 관련해서 복음과 연결시켜 생각하기 때문에 많이 제한적으로만 생각되어졌다. 그러나 이 믿음의 의미는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반대되는 의미는 곧 ‘자기의’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스스로 당당하게 내세우려는 것과 타락은 항상 맞물려 있다. 그래서 바리새인에게서 찾아지는 것이 교만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정당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한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마22장에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는 시편 110편을 인용하셔서 대답하시고 마 2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폭로한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율법을 가르치는 자, 율법의 선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행위는 본받지 말라’ 이 말씀은 그들은 행하지 않는다 흔히 실천이 없다, 삶이 없다 라고 이해하기 쉬우나,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행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열심히 실행했던 자들이다. 누구보다 삶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 말씀의 뜻은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말하는 바는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말하는 바 계시자체, 말씀의 권위는 인정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계시를 바리새인들이 자기나름대로 이해하고 행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얽어매서 남에게 얹어놓고 자기는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무거운 짐은 바리새인들의 율법 이해와 가르치는 내용의 성격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율법의 짐, 그것은 사람이 도저히 질 수없는 것이다. 이것을 얽어매어 짊어지웠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계시의 이해와 내용의 성격를 잘 말해준다. 즉 사람이 도저히 질 수 없는 것을 행함으로써 의를 이루라고 요구하는 것이다.이는 윱법에 대한 이해의 무지에서 비롯된 가르침이였다..
“그러나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율법 교사로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가르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짐은 오직 은혜로만 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데도 그들 자신의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은혜의 길을 몰랐기 때문에 위선적이고 외부적인 차원에서 율법을 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은혜없는 율법의 행위의 어쩔수 없는 한계인 것이다.
율법을 행하려 해 보았자 도저히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 계명를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라는 말씀과 같이 내적으로부터 시작하지않으면 외부적인 모양만으로는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의 수준을 낮추어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의 경우인데, 청년은 “무슨 선한 일를 행해야” 영생를 얻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켜라”라고 말씀하셨다. 청년은 그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신다. 이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한 형태이다. 이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되어있다. 여기서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과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하는 둘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이해할까? 청년은 그 사랑의 계명의 엄중성을 알지못했다. 그의 행위는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율법수준을 끌어내려 행한 것이다.
자기로서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 자기의 철저한 무능을 인식했을때, 자신이 전적부패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매어달려야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않고 자기수준으로 율법을 끌어내려 “자기의”를 이루려고 하였다. 이것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거룩하게 나타나겠지만 위선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바라는 세속적인 욕망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그저 십일조를 열심히하고 채소의 십분의 일까지 따질 정도로 철저하며, 정결의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온갖 가정 집기를 씻고 닦고 할 정도로 행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겉으로는 굉장히 화려하고 철저하며 엄밀하며,경건하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율법의 참 뜻이 아니다. 계명의 수준을 자기가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려 행하는 위선적인 율법행위에 지나지않는다. 이런 외부적 차원의 율법준수가 무엇과 결부되느냐하면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는 세속적 욕망과 결부되었다.
그리고 마 23 : 8 이하에 보면 이렇게 얘기한다. “너희는 선생,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오직 한 분이시다. 땅에 있는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 이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은 육적차원에서 맺어지는 모든 질서, 인간관계를 부정하는 의미가 있다.(부정이라는 말은 적합치 않다. 하나님께서 불효를 가르키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육적차원의 모든 인간관계, 질서를 철저히 상대화 하는 것이다. 왜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이스라엘 선생으로서의 자기들의 위치를 거의 절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지적하고자 바리새인들의 구별의식, 의인의식 등의 경향을 경계, 일깨우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어 질것이요,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시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이와같은 바리새인들의 구별의식은 결국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 자기 의에 대한 집착, 이런 태도와 관련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복잡하게 여러가지 것들과 관련되어 있는가에 대해 여기서 잘보여 주고 있다. 말씀의 참 뜻에 대한 오해, 무지, 세속적 욕망, 위선, 자기교만 이런 것들이 모두 들어 있음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3:22절 ‘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 δια πιστεωs’ ‘오직 믿음으로 내가 받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의가 지금 나타났다.’고 할 때, 이 하나님의 의의 은혜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자기 의와 관련된 여러가지 요소들을 의식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과 대조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믿음으로 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말하기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라고 해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함으로써 이 은혜의 보편성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다.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παντεσ γαρ ημαρτον και υστερουντα τησ δοξησ του θεου)
24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한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는 형식인 믿음이 중요한 것인데, 그 믿음의 내용, 대상, 그리고 객관적인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여기서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언급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격과의 관계라는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단순한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믿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과의 관계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인격적인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분명히 알아야 할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대한 막연한 신적 자세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을 통해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좀 더 설명하기를 25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그를 세우셨다”고 되어 있다. 여기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의 인격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무엇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가 행하신 구체적인 일들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서구에서는 믿음의 객관적인 내용에 치중하고 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좀 더 중시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 쪽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이 둘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다. 객관적인 내용만을 강조하게 되면 흔히 우리가 역사적 믿음(historical faith) 이라고 하는 사실 확인의 믿음이상의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고 대신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만을 강조하고, 믿음의 내용에 대해 무지하게 되면 온갖 악한 다른 영들이 역사할 여지가 마련되고 온갖 이단이 발호하게 될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가지 요소를 함께 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도 결여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25절
그의 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라는 말은 나중에 5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최고의 사랑, 지극한 사랑의 완성으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의 행위, 은혜와 관련해서 또 다른 한 면의 성격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이시는 방식으로 사랑을 이루신 목적에 대해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너무 익숙해서 그냥 지나쳐 버리지만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죄 없으신 분이 가장 비참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방식이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흔히 grotesque(괴이한)하다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나타내셨는가? 그 자체는 사랑이란 말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방식의 사랑의 행위다. 이와같은 지극한 사랑의 표현으로 이 이상한 행동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또다른 한 면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의로움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사랑의 행위가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행위였다고 하는 것은 사랑과 의로움이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강력한 천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말하면 의롭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또 사랑없는 의로움은 진정한 의로움이 아니다.
의의 규범을 율법이라고 하는데 구약의 율법을 보면 그 율법 속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정신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의라고 흔히 생각하는 그런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얘기해 주는 것이다. 냉철하고 냉혹하게 끊어내는, 그런 흔히 생각하는 의로움이라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더 포괄적이고 우리가 흔히 의와는 상관시키기 힘든 그런 면들을 그 자체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의라고 하는 것이 사랑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사랑도 의와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얘기하기를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랑의 특성 중의 하나가 상대방을 유익하게 세우는 것이라고 하는데 불의가 섞여들면 그 사랑은 상대방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불의가 섞여들면, 그것이 동기에서든 방법에서든 불의가 섞여들면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을 단순한 어떤 정서적인, 감정적인 애착과는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이다. 물론 그런것도 포함하고 있다. 애틋한 정, 그를 향해 마음이 열리는 것, 따뜻한 것, 이런 것들이 사랑 안에 분명히 포함되고 있지만 그것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란 말이다.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 또한 반드시 의로움을 포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이처럼 나타내 보여야 할 이유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δια την παρεσιν των προγεγονοτων αμαρτηματων ’ 이미 이전에 있었던 죄들을 간과하신 것을 인해서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실 필요가 있었다고 얘기한다.
여기서 전에 이미 존재했던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것을 개인적인 차원에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이때까지 내가 행한 모든 죄를 간과해 오신 것 때문에 이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가 손상 받지 아니하도록 마련하신 어떤 조처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을 반드시 개인적 차원에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고 셍각된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해서 인류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이해한다고 하면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죄사함의 실제적인 은혜는 예수님 오신 다음부터 그 누림이 가능한가, 아니면 그 이전에도 있었는가? 이전부터 계속해서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전에 존재했던 그 모든 죄들을 간과해 오신 것 때문에 의를 나타낼 필요가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한편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정당한 죄 값이 이런 방법, 즉 피흘림으로 치러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확인하는 말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 값이 치뤄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모든 죄들이 간과되어 온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유일 독특한 속죄의 제사임을 암시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길이 참으시는 중에’ 라는 말씀도 결국 그와 연관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26절
이제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그 자신이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기 위해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선언하시며 자신의 의로우심을 유지하시기 위한 방도로 피의 화목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율법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그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고 극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의 원리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면 어떤 방식의 죄사함이 가능할까? 예수님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냥 죄사함을 선언해 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27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우리에게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의 성격을 설명하기를 ‘자랑할 데가 어디뇨’ 이와같은 의를 받아 누림에 있어서는 자랑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을 가져야 가능한 것이다.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결국 무슨 말인가? 전적 은혜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자기 것이 전혀 배제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법을 통해서, 여기서 ‘νομοs’ 라는 말은 principle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즉 어떠한 원리를 따라되는 것이냐, 행위의 원리로냐? 어떤 율법을 지킴으로써 즉 자기의, 내가 스스로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얻어진 의냐, 아니면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인가? 은혜로 값없이 주어짐을 통해서 받아누리는 의인가?
28절
믿음의 법으로 값없이 은혜로, 선물로 주어진 의임을 얘기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율법을 행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믿음으로 사람은 의로워 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저히 가르쳐야 할것이다.
우리가 의로워 지는 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했을때 초래될 지도 모르는 부작용, 흔히 반법주의라고 하는데(6장에서 언급되고 있다.), 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 지니까, 그러면 행동이야 아무 의미가 없지 아니한가, 이런 반법주의에 대한 우려 때문에 항상 이렇게 가르쳐 놓고 발목을 잡는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은혜에 속하게 된 다음 성도에게서 아루어지는 성화의 삶, 이것이 인간의 어떤 자유와 책임 형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것을 잘못 오해하고 항상 앞문으로 율법주의를 차내고 뒷문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이 자꾸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원칙적으로 얘기하면 믿음 후에 나타나는 모든 성화의 삶도 원칙적으로는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의 열매인 것이다. 여기서 초래되는 내적 본질의 변화에 수반하는 열매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 책임형식 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캐톨릭에서 주장하듯이 우리가 의로와지는 것에는 믿음(은혜) 뿐 아니라 선행이 필요하다는 이런 식의 함정에 자꾸 끌려 들어간다.
아마 교단이 표방하고 있는 어떤 교리를 제쳐놓고 개교회에서 설교되는 내용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로만캐톨릭에 속할 교회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놓으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항상 자기의 구원에 대해 불안할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구원이 달려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른다.
그런 것 뿐 아니라 자기 의가 내포하고 있는 여러가지 독소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자기 교만 말씀에 대한 오해, 자기를 높이는 과신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세속적인 욕망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는 것들, 이러한 악독한 요소들이 있는데 이처럼 철저하게 율법의 행함과 관계없이 우리가 의로워 지다는 것을 가르쳐 놓지 않으면 자기 의와 관련된 독소들이 개인에게서나 교회에서 항상 나타나게 되어 있다.
행함과는 전혀 관계없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와 지는 것은 율법의 행합과는 전혀 상관 없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볼때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교회의 분열(예컨데 동 서방교회의 분열, 도나투스파의 분열, 네스토리안등)이 있었지만 그들의 기독교세계에서 차지한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개 변방으로 사라져 없어져 버려 기독교내의 갈등 요소로는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까지도 그 분열의 상처가 생생하고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로만 캐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한 불행을 초래한 이러한 분열이 생겨나게 되었는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이 한가지 때문이다. 즉 율법을 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달리 표현하면 내가 무엇을 행하였느냐, 어떤 죄를 범하였는냐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은혜로만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 되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이 교리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이 교리의 중요성이 어떠한가 확인 할 수 있다. 사실 마틴 루터도 구원의 확신 문제 때문에 거기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내 구원을 확신 할수 있는가 그것이 그의 신학적 갈등이었고 그것이 그의 신앙 갈등의 시작 이었고 그에 대한 해결이 결국 이신칭의로 나타난 것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다른 뜻이 아니다. 우리가 행한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의로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28에는 동그라미를 10개 쯤 쳐놓고 교인들에게 주지 시켜야 하지 않으냐 생각한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의 부정적인 삶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고 이런 것들이 정리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이 강했었는데, 갈수록 결국 이런 초보적인 것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지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미로는 단순해 졌다고 할 수 있고 달리 표현하면( 지금 세계가 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오늘날 교회문제는 그 뿌리가 피상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근본적인데 까지 문제의 뿌리가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근본적인(초보적안) 교리에서부터 어떤 변질이 초래되고 있지않은가 하는 우려가 있다.
그래서 갈수록 자꾸 설교의 중심이, 말하는 것의 내용의 핵심이 노방전도하는 사람의 설교내용과 비슷해진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의와 영생에 이른다는 것을 자꾸 강조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처해있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매우 우려된다.
29절
율법을 행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은혜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씀한 다음에 29절에 보면 조금 뜻밖의 내용이 나타난다. 부속 같은 내용인데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시뇨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신가,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왜 이렇게 뜻밖의 얘기를 할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의 하나님 되심을 왜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 그 다음 절을 읽어 보면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30절
“할례자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 하나님이나 무할례자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 하나님은 단 한분이시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하나님 되심을 얘기한 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 은혜의 보편성을 얘기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31절
그러나 동시에 이런 믿음을 통해서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냐? 아니다. 오히려 율법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율법이라는 말이 복잡하고 넓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율법을 세운다고 할 때, 좁은 의미에서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의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뜻해 왔다. 그렇다면 믿음이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을 부정하느냐라고 하는 말에 대하여 위에서 얘기했듯이 율법적 의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율법을 세운다는 말로 31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율법의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만족시킴으로 오히려 극복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만큼 얘기는 통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진행되는 내용을 볼 때 여기서 “율법”이라고 하는 말은 조금 넓은 의미를 가짐을 알 수 있다. 구약역사, 구약체계(모자익 시스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특별히 31절 이하에서는 율법을 그런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말이 안되게 되어 있다. 이것은 그 다음 4장 1절 이하에서 나오는 내용의 도입을 예상케 하는 말이다. 4:1이하에 나오는 내용이 믿음의 의가 신약에 와서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무엇이 아니고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라고 하는 것인 만큼, 3:31절의 반문의 의도와 잘 맞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9-31절에서는 믿음의 원리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증명할 것인가가 이 반문에 의해서 분명해 진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도 이런 믿음의 의가 존재했다고 밝혀가는 것이다. 그런데 논의의 진행을 보면 단순히 믿음의 원리의 보편성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보편성을 얘기하면서 추가적인 여러가지 무엇들을 함께 말하려 하고 있다.
제 4 장
1절
“우리의 육적으로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우선 여기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스라엘역사의 시작,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을 거론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뿌리, 구약적 체계의 근원을 건드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보이는 유대인 그리고 역사적으로 쭉 이어져 온 이스라엘의 전역사는 결국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물로 소급되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물에 의해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관계된 어떤 문제를 처리하고자 하는 바울 사도의 의도를 우리가 읽을 수 있다.
2절
아브라함을 예로 든 이유를 쭉 설명하기를“ 아브라함이 만일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로와졌다고 한다면 그는 자랑할 것이 있으리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다 행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만한 의가 있어서 의로와진 것이라고 하면 자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향해서 그는 전혀 자랑할 것이 없었다.
3절
어째서 아브라함 역시 그이 의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전혀 자랑할 것이 없었는가에 대해 설명하기를 성경이 말하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4절
그리고 하나의 비유을 들어서 말하기를, 일하는 자에게는 그 ‘μισθοs’즉 일에 대한 품삯이 은혜로 계산되지 아니하고 ‘οφειλημα’ 당연히 받을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하고 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구원관, 특히 율법과 관련한 구원관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일을 해서 그 댓가로 의와 영생을 얻겠다는 태도이다. 이를 품삯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에 비겨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 즉 일을 해서 품삯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에게 주어지는 품삯은 결코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 당연히 일을 한 댓가로 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5절
“그러나 일하지 아니하고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기만 하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의의 성격을 설명한다. 아브라함의 의는 그를 의인으로 세울 만한 어떤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고, 불경건한자 죄인을 의롭다고 해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에 대한 그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 믿음 자체가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이런 오해를 할지 모르겠는데,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믿음 자체가 대단한 무엇인 것처럼 생각하여 믿음이 우리의 의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 없다. 그것이 유일한 토대이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그와같은 은혜의 의를 받아누리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다. 믿음을 미화하는 그런 잘못에도 빠져서는 않된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누리는 정당한 자세, 형식일 뿐이지 그것이 은혜를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일 수 없다.
이와같은 은혜의 의는 일한 댓가로 주어지는 그런 의미에서 의가 아니고 전혀 무가치한 자, 이미 죄인인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해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에 대한 믿음 을 의로 여겨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유일한 종류의 의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얻은 의의 성격이다.
6절
이런 의는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을 아브라함으로 잡는다고 하면, 그 다음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은 다윗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1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소급해 갈 때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거스러 가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추적인 두 인물이 다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이 은혜를 그들이 받아 누렸으며,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이들이 의로운 자로 인정되었던 것은 그들이 무슨 가상한 행동을 해서가 아니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저 은혜로 받은 의라고 하는 것이다.
7,8절
다윗도 이와같은 은혜의 의를 받은 자이다. 이러한 은혜의 의를 시편 31편을 인용하면서,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의 본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행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의를 인정해주시는 그런 사람의 복됨에 대해서 말하며 7절에서 시편 31편을 인용하며, 그 불법이 사하심을 받은 자는 복되다, 그 죄가 죄로 여김을 받지 않는 자가 복되다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의 의가 어떠한 성격의 의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믿음의 의는 무엇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말인가?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이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죄를 다 용서해주심으로 주어지는 의라는 것이다.
죄인이 어떻게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앞에서 이미 그 의의 특징을 가리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는데,여기서는 그 죄인이 어떻게 의로와 질수 있는가에 대한 근거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 의는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 주심으로, 죄를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인정되는 그러한 성질의 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믿음의 의는 예수님과 더불어 전혀 새롭게 시작되는 낯선 무엇이 아니다. 이미 앞서 얘기한 것처럼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서 증거를 받은, 그래서 이 믿음의 의는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는 사실을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의 실례를 들어서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인물에게서 발견되듯이 믿음의 의라고 하는 것은 구약과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원리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이스라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약 교회의 메시아로 삼으신 다윗 조차도 이러한 은혜의 의의 수혜자였다고 하는 것이 드러낸 것이다.
특별히 이 두 인물을 예로 든 것은 결국 어떤 효과를 나타내었는가?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한다고 할때, 이스라엘 백성이 참된 이스라엘에 속한다고 하면 결국 이와같은 은혜를 받는 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 속에 함축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근원에 흐르는 맥을 살펴보면, 믿음의 의, 은혜의 의의 역사와 다른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무엇이 아니고 동일한 원리가 그 역사속에서 작용하고 있었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아브라함 경우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났듯이 이 믿음의 의가 아니면 참 이스라엘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다른 시각를 첨가하면 논의가 상당히 복잡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신구약의 관계와 관련해서 얘기하면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닌 것으로 얘기하다가 또 여기서는 신약과 구약은 똑 같다고 얘기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런지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이런 것은 서로 상충되는 무엇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의 관계가 단순치 않고 복합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시각에서 보면 신구약은 동일한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역사요,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9,10절
우선 여기까지는 믿음의 의, 하나님의 의, 은혜의 의가 구약시대에도 존재했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의 존재와 역사와 무관한 이질적인 어떤 원리가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존재의 토대를 이루는 그들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원리라는 것을 암시해 놓고, 그리고 9절이하에서는 이 원리의 보편성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즉 이 원리가 이스라엘에만 국한 된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언약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할례다. 그것은 언약백성 됨의 표징이다. 이와같은 축복이 말하자면 죄 사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이런 은혜의 의의 축복이 할례자에게 국한된 것이냐 아니면 무할례자에게도냐, 즉 할례상태에서인가 아니면 무할례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인가?를 묻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 할례상태에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무할례상태에서 그렇게 된 것인가?
10절의 ‘εν’(in)을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무할례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에게냐 아니면 할례 상태에 있는 아브라함에게냐 라고 볼 수 있고 시간적으로 해석을 하면 할례시냐 아니면 무할례시냐 인데 결국 같은 말이다.
11절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할례라는 것은 무할례시에 되어진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인치는 표로서 그가 할례의 징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미 창15장에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고 되어 있고 할례는 17장에 나온다. 할례를 명하신 것은 17장에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이미 할례 제도는 무할례상태에서 믿음으로만 의롭다 여김을 받는 인치는, 확증하는 표징이지 할례가 전제가 되어서 이런 죄 사함을 인한 무엇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처럼 육적인 언약 백성됨의 표를 받기 전에, 할례의 어떤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만 의로워졌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할례가 그에 대한 인치는, 확증하는 표로서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함축성(implication)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는 무할례상태에서 믿는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된다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상태에서 의로워진 것이 아니고 할례 이전 상태에서 믿음으로만 의로워졌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가 할례든 무할례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의롭다함을 받는 자들의 조상이 된다는 것을암시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그와같은 사실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의로와질 수 있다는 원리를 제시하는 하나의 전형으로서 되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12절
물론 이것은 이러한 원리에서 할례자를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외될 수가 없는 것이 할례라고 하는 것은 이 믿음의 의라는 근본적인 사실의 증표였으니까 이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자라고 해서 이 원리에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할례자나 그렇지 않은 자 간에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원리는 다 적용이 되고 아브라함은 이와같은 원리의 하나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말과 더불어 믿음의 의의 원리의 보편성을 얘기하면서 참으로 이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그 백성으로 받아진 바 되어 영생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혈통적 육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어떤 그 이상의 차원이라는 것이 동시에 부각이 된다. 뭔가하면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을 어떻게 얘기하고 있는가? 무할례시에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얻었던 그 은혜의 의에 참여할 수 있느냐를 결정적인 조건은 육적 할례를 받았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과 동질의 믿음을 소유했느냐가 결정적 조건이라는 얘기다. 여기에 오면 하나님의 백성의 은혜에 참여하느냐 아니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 육적차원, 외부적인 무엇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영적 차원(믿음의 차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13절
13절 이하는 상당히 까다로운 내용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νομοs’라는 말이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어진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주어진 약속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 세상의 후사가 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왜 하필 여기서 ‘κοσμοs라고 얘기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이것은 구약적 배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의 상속자가 되게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또한 구약에서 확인 했듯이 아브라함의 씨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했는가? 아브라함의 상속자의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혈통에 의한 자손의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약속을 동일하게 상속받는 상속자의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이 아브라함의 씨(σπερμα)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육적 자손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과 관련한 특별한 뜻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 주는 것이 9장7절이다. 거기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가 다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됨과 그의 씨(σπερμα)가 된다는 말을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런 것은 구약적 배경이 없으면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이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이 주어진 것은 율법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믿음의 의로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14절
여기서 율법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잘 보면 여기까지만 보면 이렇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가 무슨 선을 행해서, 의로운 일을 행해서 의를 얻는 것이라는 율법을 하나의 규범의 의미로 해석해도 뜻이 통하게 되어 있다. 분명히 그런 뜻도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여기서는 그렇게 해석해도 뜻이 통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만 해석했을 때 그 다음 내용들에서 이 ‘νομοs’ 율법의 의미가 제대로 문맥에 적합한가 살펴보기로 한다.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가 상속자라고 하면 믿음은 공허하게 되고 약속은 폐하여 졌다고 말한다.
15절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기 때문이다. 율법이 없이는 범죄함도 없다고 얘기하는데, 율법이 왜 진노를 이루느냐 그것은 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이 안되기 때문이며, 법이 없으면 범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이 있어야 죄가 성립이 되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것은 모든 타락한 인간의 행위를 나타내어, 죄로 정죄하게 되어서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임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얘기 한다.
16절
그런데 주의할 것은 16절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 여기서 ‘율법에 속한 자’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만약 율법을 앞서 얘기한 대로 규범의 의미로 국한 시킨다면 16절의 “율법에 속한 자 또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자”라는 말은 율법을 행해서 자기 의로 의에 이를려고 하는 자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의미로 해석하면 말이 되질 않는다. 여기서 두 대상 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로 전제가 되고 있는데 만일 이것이 자기 의를 추구하는 자를 뜻한다고 하면 그것은 원칙적으로 은혜에서 배제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16절에서 율법에 속한 자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육적 이스라엘에 속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여기서 동일한 한 문맥에서 이 ‘νομοs’가 하나님의 의의 규범을 뜻하는 의미로도 사용이 되고, 때로는 언약 법에 속한 자 즉 구약 이스라엘에 속한 자라는 모자익 시스템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앞의 용례와 구별해서 16절에 사용된 ‘νομοs’의 특별용법을 구별하면 어려움을 쉽게 피할 수 있다. 앞에서도 νομοs라는 말을 한 문장에서 다른 의미로 사용된 예를 보았다. 3장 27절에서 믿음의 (율)법으로냐라고 했을 때의 그 법은 principle의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여기서 바울사도가 이 ‘νομοs’란 말을 일관성있게 사용했다고 하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율법이라는 말 속에는 구약체계란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규범의 의미를 가질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로마서의 ‘νομοs’의 용법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고 로마서를 전문적으로 논문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취급해 보고 싶어하는,그러나 아직도 뾰족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이다.
그런데 이렇게 νομοσ의 사용을 의의 규범이라는 의미에서만 일관성을 주장하게 되면 매우 위험한 함정에 빠질 수가 있다. 모자익 시스템으로서의 율법(νομοs)을 규범으로서의 율법과 동일시하게 되면 어떤 오류에 빠지게 되는가? 구약시대는 율법시대였다고 하는 세대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16절이 그런 뜻으로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은 4장 초두에서 모자익 시스템내에 속한 다윗도 은혜의 의를 알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의를 얘기하는 3장 21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얘기 하면서 이 의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증거를 받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νομοσ의 용법의 일관성을 얘기할 경우,13,14절 이하의 “ 약속이 주어진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만일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믿음은 공허하게 되었고 약속은 폐하여 졌다”는 말을 단순히 규범으로서의 율법과 관련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라는 의미에서의 율법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게된다.
분명히 구약의 율법이 은혜의 의를 증거하고 있고,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때, 구약시대(모자익 시스템)라고 하면 규범으로서의 율법이 연상되고, 그것이 전면에 부각되는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이해가 전제되어야 가능할까? 구약적 체계가 은혜의 의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연상하게 된다는 이 양쪽 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이해가 전제되어아 할까? 이러한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해결은 해야한다. 동일한 어려움을 갈라디아서에서도 만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을 해야 할 문제이다.
17절
그 다음에 아브라함의 믿음, 말하자면 은혜의 의에 의해 받아누리는 형식으로서의 믿음, 달리 표현하면 믿음의 원리의 보편성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사실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내가 너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은 아브라함의 조상됨, 즉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표하는 그것의 시작과 근원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의미, 그 조상됨이 육적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많은 민족에게 확대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육적 혈통이 아닌 자들의 조상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가?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씨, 그의 약속의 상속자, 동참자가 되게 하는 결정적인 조건이 혈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앞서 얘기 하기를 믿음의 동질성이라는 것이다.
18-25절
그 이하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제 5 장
1절
여기서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는 말하자면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 초래되는 결과라고 할까, 달리 얘기하면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들어가는 삶의 상태에 대해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얘기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린다고 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은가? 화목이라고 하니까 대개 원수관계를 생각하기 쉽다. 우리가 이전에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고 8장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원수관계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1차적으로 원수관계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까지 쭉 진행되어온 흐름에서 칭의 다음에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상태를 화목으로 얘기할 수 있다면 그 화목의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진노하시는 그 진노를 연상시킨다. 화목이라는 것은 이 진노의 해소이다. 그러면 은혜의 의를 입음으로 인간 편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상태의 인간의 모습에 어떤 변화가 일어 났는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여 더러운 것을 좋아하며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며 그를 거스리는 그런 상태에 반전이 일어났다.조직신학에서 중생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새 생명의 심어들임과 주관적 성향의 변화라고 정의한다.
칭의 이후에 들어가는 상태를 가리켜 하나님과의 화목이라고 하는 것은 1:18절 이하에서 얘기했던 그러한 상태,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는 상태, 인간의 타락한 모습 그것의 반전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반전시키면 어떻게 되나? 하나님을 참되게 알며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의 화목의 의미가 좀 더 구체적이고 분명해 진다. 대개 우리는 화목의 막연한 감정적인 무엇을 떠올리게 되는데, 예컨데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평안함 같은 것, 물론 이러한 정서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을 낳게 한 배경, 즉 1장의 내용을 의식하게 되면 화목의 내용의 의미가 매우 구체적이 된다.
2절
둘째로 칭의 상태를 특징짓는 것을 무엇이라고 언급하고 있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되어있다. 본래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기뻐한다, 자랑한다이다. 어떤 모종의 소망으로 기뻐하는 상태가 된다. 그 소망의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돕는 단서를 디도서 2:13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말씀하기를 우리가 복된 소망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그 복된 소망에 대해 달리 표현 하기를 크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의 ‘επιφανεs’ 나타남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로마서 5장의 짤막한 표현을 확대해서 풀이해 놓은 것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소망을 얘기하는 것이다. 재림과 더불어 우리에게 약속되어진 그 무엇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또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기서 얘기하는 칭의 이후에 신자가 처한 상태라고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어느 시기에 국한된 상태를 뜻하는 것인가? 현 세상에 사는 동안에 삶의 시기에 국한된 상태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재림에 대한 소망이란 없는 것이다.
3절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삶의 기간 동안에 있어서 칭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들어가게 되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 얘기할 수있게 되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게 될 때 그 다음 말씀의 흐름이 더 분명해진다. “그뿐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즐거워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환난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있어서의 신자의 삶의 한 부분이다. 재림 이후에 환난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신자에게 임한 환난 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의 삷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8장에서 얘기하듯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의 신자의 삶에 있어서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필수적인 한 부분이라는 뜻도 그 속에 함축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째서 환난 가운데서도 환란 자체를 기뻐할 수 있는가? 그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환란이라고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이다. 소망을 버리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신자에게 있어서는 환란이 오히려 인내를 통해 연단을 이루게 하고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그“소망”이 확실해 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자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의 의미, 성격을 규정하는 말이다. 신자가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환란 그것은 연단을 위한 것이다.
4절
여기에는 인내가 수반이 되지만 결국 그것은 연단을 위한 것이요, 그 연단을 통해 환난을 당하는 세상 속에서 기쁨을 잃지 않게 하는 근거가 되는 소망, 재림날에 대한 소망이 꺽기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굳게 세워지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환난이라는 것은 오히려 인내를 통하여 더욱 연단 받게 하시며 그 연단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소망하게 하는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5-11절
5절에서는 결국 신자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데 그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소망의 확실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다른 면에서 확인하고 있다.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말뜻이 무엇인가 분명해 진다. 소망이 우리를 어떻게 부끄럽게 하는가? 그 소망이 거짓 소망으로 드러날 때, 그 소망이 이루어 지지 않을 때, 내가 품었던 그 희망이 헛된 소망임이 드러날 때 부끄러워 진다. 그렇다고 하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우리가 품은 이 소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반드시 실현된다는 소망의 확실성을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망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의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부어 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에서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소망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가 된다 보증이 된다는 말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는 그것이 그 마음 속에 쏟아 부어져 있는 사람만이 내세에 대한 소망을 확신할 수 있다. 내세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결국 연약할 때에 우리에게 사랑을 받을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주를 받을 상태에 있는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죽게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 미래의 재림 소망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근거가 될 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희생시키면서 나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면, 만일 역으로 생각해서 지금 의롭게 하셨다가 마지막에 가서 의롭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소망이 헛된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게하신 그 일 자체가 무의미하고 하나의 희극이 되고 말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셨다는 그 사실이 이미 우리에게 시작하신 이 구원을 반드시 완성에 까지 이르게 하실 보증이 된다는 객관적인 근거이고,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체험이 있는 자 만이 주관적으로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내세에 대한 소망 속에서 재림 날에 영광을 바라보면서 소망하는 가운데서 환란 가운데서 기쁨으로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현 세상 속에서 성도로 하여금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 속에 쏟아부어져 있다는 그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확실한 체험이 없으면, 아무리 그가 믿는다고 해도, 내세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내세에 어떤 존재를 믿는 믿음이야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내세의 존재를 부정하는 종교가 거의 없을 정도다. 불교도 변형된 형태로 나마 윤회를 통해서 반복된다고 하면서 다른 세계, 곧 사후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내세의 소망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금 현재의 피조계와는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 이후의 세계를 기쁨으로 바라보는 소망이다. 이런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바 되고 성령께서 우리 심령속에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체험한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안다고 하는, 그의 목숨으로 내 죄를 대신하사 나를 의롭다 하셨다라고 하는 것, 그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신자의 삶에 항상 기본 토대가 된다.
지금까지 인간의 믿기 전의 상태,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고 타락한 상태에서 시작해서, 그리고 율법의 의, 자기의 의 불가능성에 대해 얘기한 다음에 결국 전혀 다른 새로운 은혜의 의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그 다음 이 은혜의 의가 우리에게 초래된 근본적인 변화 하나님과의 화목과 내세의 소망 가운데서 살게된 것 등의 근본적으로 변화된 어떤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12절
그리고 그 다음에 5:12절부터 왜 갑자기 화제를 바꾸는가 싶을 정도로 엉뚱한 얘기가 나온다. 어떻게 보면 여기서 원죄를 얘기하고 있고 대표의 원리등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이미 앞서 얘기한 어떻게 우리가 믿음으로 이와같은 은혜의 의에 이를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좀 더 심오한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도 볼 수 있게 해 준다. 지금까지 내용은 아까도 얘기를 했지만 사람이 그 범죄와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일과, 의롭게 된 자로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과 내세의 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을 얘기했다. 그런데 우선 결론부터 얘기를 하면 이 모든 것을 5:12절이하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역사적 관점에서 재언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 부분에서 돌출하기 때문에 흔히 생략하기 쉬운데 매우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아담과 모세와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역사적 관점에서 이것을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고 있으니까 논의를 두 인물에게로국한시키기 쉬운데, 바웅사도는 좀 더 포괄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는 전 인류의 역사과정을 포괄적 시각에서 깊이 있게 근본적으로 정리,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서 1:18절이하에서 서술하고 있는 인류의 일반적 영적상태, 즉 인간의 죄됨과 타락한 상태 이런 것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어떤 상태라고 할 수 있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죽음이라고 하면 육적 죽음을 연상하는데, 실제에 있어서 죽음은 상당히 포괄적인 것이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모든 악의 결과가 다 죽음에 포괄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육신의 죽음만을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질 않다. 거기서 표현하기를 흙에서부터 지었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범죄한 이후 인간에게 초래된 모든 악의 결과가 모두 포괄적으로 죽음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로마서 1:18절 이하의 모든 영적 상태를 죽음이라고 얘기해도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 로마서 5:12절 이하에서는 이 죽음이라는 상태가 어떻게 초래되었는지 그 역사적 근원부터 시작해서 밝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5:12절 구조와 그 전의 구조와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육간의 포괄적인 죽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죽음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바로 그 죄를 인하여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ωσπερ ---ουτωs’라는 상관접속사에 의해서, ωσπερ라는 접속사를 통해서 무엇을 얘기하는가 하면 아담이라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오고 그 결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얘기하고 있다. ‘ουτωs’이하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오게 되었다고, 즉 사망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 두 사실을 ‘ωσπερ ουτωs’ 즉 ‘무엇무엇 한 것처럼 무엇무엇 하였다’고 말함으로서 죄의 결과로 죽음이 임하게 된 이 일은, 이 원리는 아담한 사람에게서 그치지 않고 동일한 원리를 따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εφ ω παντεs ημαρτον‘ 에서 ‘επι’라는 말은 숙어적인 표현으로 ‘on the condition that' ‘무엇무엇 이라는 조건하에서’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모두가 죄를 범했다고 하는 조건하에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임했다는 얘기가 되니까 이것은 앞서 아담에게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임하게 된 것과 동일한 원리를 따라서 되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에게서 죽음이 임하게 된 과정이 어떤 것인가? 먼저 죄를 범했고 그 죄의 결과로 죽임이 임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어떻게 임했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조건하에서 죽음이 임했다. 그러니까 아담의 경우와 모든 사람의 경우가 그 원리에 있어서 동일하다. 둘 다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13절
13절에 보면 논의가 조금 복잡하지만 이해하는데는 어렵지 않다.“율법 때까지도 죄가 세상에 존재했었다.” ‘율법 때까지’라는 말은, 그 다음에 아담부터 모세까지란 말에서 확인 되듯이 모세를 통해 율법이 계시된 때를 말한다.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지기 그 이전에도 죄라고 하는 것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 없으면 죄라고 하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 두개를 결합시키면 어떤 말이 되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존재했었다. 그런데 죄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뒤에서 말하는 ‘νομοs’와 앞서 말한 ‘νομοs’와는 뜻이 다르다. 앞서 말한 것은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율법을 말하는 것이고 뒤에서 말한 것은 일반적인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규범이 없으면 죄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가 존재했다, 죄가 성립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 때도 모종의 규범적인 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14절
아담부터 모세때까지(앞에서 말한 율법때까지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즉 아담부터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 질 때까지) 이 기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는데 아담의 범죄와 같은 그런 형태의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사망이 왕노릇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이것은 아담의 범죄의 성격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주신 계명을 고의적으로 범한 것이다. 여기서 아담의 범죄와 같지 않는 형태의 범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명백히 범함으로서 죄를 짓지 않은 자에게도 사망이 임했다는 얘기다.
이것을 다 종합을 해 보면, 우선 앞서 13절에서 한 얘기가 무엇인가?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율법이 존재했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엇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인가? 어떤 법이 있었으니까 그 법을 어겨서 범죄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런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결국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나 이후에나 항상 인간의 자범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 죄를 범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사망이 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맨 처음에 확인한 원리는 무엇인가? 사망이라는 것은 반드시 죄의 결과로 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초로 죄와 사망이 들어오게 한 아담에게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꼭같이 적용이 되는 보편적인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사망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만 오는 것인데 죄가 없으면 사망이라는 것은 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현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계명(법)을어겨서 범죄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사망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는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은 한 예로 영아의 죽음, 이런 경우에는 자범죄의 기회가 없지 않았느냐 이런 것이 바울 사도가 상정하고 있는 자기 스스로 계명을 어겨서 범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한 예가 될 수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것이 설득력이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바울 사도는 여기서 계명을 어겨서 범되하지 않는 자에게도 사망이 임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죄의 결과로 오게 된 것이었다라고 먼저 제 1 원리로 제시했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임한 죽음은 어떠한 죄 때문에 오는 것인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 범하는 죄와는 성격이 다른 어떤 특별한 죄때문에 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바울사도께서는 한가지 특수한 형태의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범죄가 아닌,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해서 성립되는 죄가 아니고 특별한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께서는 이와같은 죄의 존재를 하나님의 계명을 범해서 짓는 죄가 없는 사람에게도 죽음이 임한다고 하는 하나의 현상, 사실에서부터 추론해 내지만 사실 이러한 특수한 죄의 존재가, 자범죄가 아닌 특수한 죄가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특히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밧세바와의 죄를 지적받고 회개하는 시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죄에 대한 의식이 아주 깊어 진다. 물론 다윗이 범한 죄가 천인공노할 간교하고 악랄하고 가장 저질의 악한 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다윗은 자기자기가 저질런 그 죄의 뿌리라고 하는 것이 지금 나타난 흉악한 형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 죄의 뿌리가 어디까지 나아가느냐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죄 중에서 출생하였으며 모친이 나를 죄 중에서 잉태하였도다. 이 말은 무엇인가 하며 내가 잉태될 때 나는 이미 죄된 상태에 있었다는 얘기다. 나의 죄라고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서 내가 스스로 행해서 짓는 죄가 아니라 이미 잉태될 때부터 나로 하여금 죄된 상태에 있게 하는 그런 죄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다고 하니까 성관계와 관련된 모친의 죄된 그 무엇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여기서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고 하는 말은 잉태될 때 이미 나는 죄된 상태에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의 죄라는 것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다. 내가 스스로 범한 죄가 없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인간의 전적부패, 타락 이것의 뿌리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가? 이미 죄된 요소를 타고 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원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원죄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이 여러가지로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로마서 5:12절이하의 내용과 시편 51편을 결합시켜서 함께 이해하면 원죄의 교리가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특수한 죄의 존재, 즉 내가 죄를 범하지 않아도 이미 태어나는 것 자체에 의해서 성립되는 특수한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에서 역으로 추론할 수 있는데 결국 아담이 범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책임을 져야한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립되는 죄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아담이 범죄할 때 존재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그 행동에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가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까지 미친다고 하는 것은 무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흔히 이를 대표원리라고 얘기를 하는데, 오히려 연합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우리는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혼자 행한 행동이지만 그가 행동한 결과와 영향이 그와 연결된 나에게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과 비슷한 형태로 흔히 표현하기를 연대책임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연대책임이라는 말자체가 무엇을 전제하는가? 그 연대책임을 지는 사람들끼리는 모종의 연결관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왜 바울사도께서는 이 시점에서 이런 특수한 죄를 언급하는가? 그것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류가 지게 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밝힘으로서 우리의 죄의 근원이얼마나 뿌리가 깊은 것인가, 우리는 생득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이 죄의 굴레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날 희망은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그 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더 중요한 목적은 이러한 죄의 성립이 아담과 우리간의 연합을 전제로 하는 것이요 연합을 전제로 한 어떤 공동책임,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 원리가 아담에게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영적으로 그와 연합된 신자간에도 성립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래서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은 결국 아담에게 적용된 이 원리가 오실 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말이다. 아담과 그 후손사이에 적용된 이 원리가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신자간에도 적용이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다. 한 사람은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으로 죄인을 만들고 죽게 만들었으나, 또 한 사람은 그가 행하신 의의 행동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고 의인이 되게 하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얘기하고 있다. 이것이 로마서 5:12이하의 중요한 내용이다.
15-19절
그러나 롬 5:12이하에서는 이보다 좀 더 풍부한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고 위에서 언급한 바가 있었다. 12절이하에서 지금까지 논의 되어온 이야기들을 전 인류역사의 시각에서 특히 아담 모세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역사의 관점에서 정리 제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 이런 역사적 관점에서 한번 살펴보자. 첫 사람 아담은 어떻게 하였는가? 그가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로서 역사적으로 타락과 심판과 저주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다. 이것이 로마서 1:18절이하에 언급된 인류의 상태에 대한 역사적 근원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구속, 하나님의 의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아담의 경우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었으나 결과는 정반대가 나타났다. 죄와 저주와 심판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반전되게 된다. 이제부터 의와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어떤이는 제국의 흥망과 관련해서 여러가지 역사와 시대를 나누는데,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결국 아담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로 나눌 수 있다. 아담과 더불어 죄와 사망과 심판과 저주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그리스도로 더불어 전혀 새로운 의와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말하는가? 둘째 아담이란 무슨 말인가? 새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로운 인류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혈통으로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혈통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더불어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창조되는 새 인류, 그런 의미의 역사인 것이다.
20절
20절에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과 아담에 관한 얘기를 서로 대비시키면서 쭉 진행이 되다가 갑자기 느닷없이 20절에서“νομοs παρεισηλθεν ”라는 말로 시작이 된다. 그런데 갑자기 ‘율법에 가입 했다’는 말은 무엇 때문에 나오는가? 이 말씀은이 전후문맥과 관계없이 그저 불쑥 언급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것을 13절과 14절과 관련해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율법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뜻하며 이것은 모세시대란 말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 율법이 가입했다는 것은 말하자면 구약적 체계가 주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시대를 역사적으로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존재를 ‘παρεισηλθεν’ 즉 사이에 끼어든 시대라고 얘기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크게 두 개로 대별되는 인류의 역사, 즉 첫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죽음과 죄와 심판의 역사와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새 인류의 역사 의와 영생의 역사로 대별되는데 여기서 이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구약시대라고 하신다.
이런 구약시대를 끼워 놓은 목적이 무엇인가에 말씀하시되 죄가 더욱 풍성해지기 위해서라고 되어있다. 말하자면 율법시대를 허락하신 것은 그 율법체계 자체를 통해서 참 생명을 도래케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통해서 죄의 실상, 정체가 분병히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왜 구약시대가 규범으로서의 율법에 의해 거의 특징지워지는가 그리고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왜 죄를 죄로 정죄하는 기능으로 얘기하고 있는가하는 것이 좀 더 이해될 것이다.
21절
그러나 동시에 아담과 그리스도사이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허락하신 것은 이처럼 죄의 정체를 드러낼려고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추가적인 목적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고 있나? 21절에서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의와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졌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개인적 차원에서 얘기를 하면,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의 실상이 드러나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에 대해 절망하게 된다. 자기에 대한 소망을 버리게 된다. 자기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은 결국 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나? 다른 사람을 찾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가리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얘기한다.
이것을 조금 넓혀서 역사적으로 보면, 이 구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끌어 내는, 도입하는 예비적 역사가 되었다. 로마서가 단순하게 평면적인 복음을 제시하는 책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군데군데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얘기하고 있다.
이 이후에 대해서 대체로 이런 시각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8장까지 진행되어 오던 내용이 갑자기 9장부터 11장까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서 왜 그렇게 복잡하게 얘기를 하는가, 즉 9장- 11장의 출현을 이해하기 힘들어 진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울 사도께서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항상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왜 9장-11장까지 상당한 분량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였는가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