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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정의"의 백성을 만들어라!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진짜 목적(김근주)

금빛돌 2015. 4. 17. 16:08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부르신 목적
츠다카와 미슈파트
입력 : 2007년 01월 12일 (금) 16:17:32 / 최종편집 : 2007년 01월 18일 (목) 17:10:52 [조회수 : 178] 복음과상황 ( goscon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만큼 교회에서 많이 거론되고 설교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대해 아브라함만큼 오해되는 인물도 역시 드물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하면 창세기 12장 1,2절을 떠올린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셨고 그에게 땅과 큰 민족의 약속을 주셨고 이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삶은 땅, 번성, 복 같은 단어와 연관되어 이해된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따로 있다. 창세기 18장 16∼19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 이하의 성경인용은 모두 개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바, 큰 민족이 되리라는 것과 땅을 주신다는 약속은 하나님이 주신 땅위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과 권속으로 더불어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위한 배경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살 때,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 복을 받게 된다(창 18:18). 결국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은 사실상 자손과 땅, 복이라기보다는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의’와 ‘공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각각 ‘츠다카’와 ‘미슈파트’이다. 츠다카와 미슈파트는 두 단어이지만 사실 한 단어처럼 역할한다(hendiadys). [J.J. Scullion, Righteousness in ABD V: 724-36.] 이 어구는 구약성경에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개역성경에서 여러 단어들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 어구의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고 있다: 의와 공도(창 18:19); 공의와 법도(신 33:21); 의와 공(삼하 8:15 왕상 10:9; 시 99:4); 공의와 심판(욥 37:23); 정의와 공의(시 33:5); 의와 판단(시 36:6); 의와 판단력(시 72:1); 의와 공의(시 106:3); 의와 공평(잠 21:3; 사 1:27; 5:7; 32:16; 56:1; 59:9); 정의와 공평(사 9:7; 렘 4:2; 22:3 23:5); 정직과 공평(렘 9:24); 의리와 공평(렘 22:15); 의와 법(겔 18:5,19,21,27; 33:14,16); 공의와 공평(겔 45:9); 정의와 공법(암 5:7,24; 6:12).

여기에 든 몇 예들에서 이 어구가 구약 전체에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관한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본문 가운데 위치한다. 아브라함에게 명령된 의와 공도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울려지는 부르짖음이 18장 20절(즈아카)과 21절(츠아카)에 거듭 언급되는데, 이러한 대조는 포도원의 노래를 설명하는 이사야 5장 7절에서도 발견된다. M. Weinfeld, Social Justice in Ancient Israel and in the Ancient Near East(Jerusalem: Magnes Press, 1995), 218-19.: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미슈파트)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미스파흐)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츠다카)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츠아카)이었도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원하시는 것은 좋은 포도 즉 ‘공평과 의로움’인데, 유다가 맺은 것은 들포도 즉 ‘포학과 부르짖음’이었다. 이어지는 8절은 "포학과 부르짖음"의 실상을 표현한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있을 찐저.” 이스라엘이 맺은 포학과 부르짖음에 대한 고발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 도다”(사 1:23);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장로들과 방백들을 국문하시되 포도원을 삼킨 자는 너희며 가난한 자에게서 탈취한 물건은 너희 집에 있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 하였느뇨”(사 3:14~15);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찐저”(사 10: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삶의 핵심에는 츠다카와 미슈파트가 놓여있다.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 앉은 보좌의 두 기초는 바로 츠다카와 미슈파트이다(시 97:2).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는 그 백성의 삶은 츠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삶이어야 한다. 이 두 단어의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는 위에 소개하였던 개역 성경의 여러 표현들과 본문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츠다카’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인 개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관계는 하나님, 그리고 이웃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그리고 이웃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연관된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때 그는 의롭다(신 6:2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요구 하시는 바 올바른 믿음의 행위를 보였고, 하나님은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한편 어떤 사람이 이웃에게 대해 ‘츠다카/체데크’를 행한다는 것은 그가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이다(시 15:2). 그래서 그는 이웃을 참소치 않으며, 행악지 않고, 훼방치 않는다(시 15:3~5). 주리고 어려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그들을 도울 때,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사 58:8-9 겔 18:5~9). 그러므로 츠다카는 이웃에 대한 올바른 행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웃에 대한 이러한 진실한 자세는 경제적인 거래에서도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상거래의 기본은 ‘츠다카의 저울’이다(레 19:36; 신 25:15; 겔 45:10).

그에 비해,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올바른 사회 질서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이 단어는 '법, 재판, 규례 혹은 심판'까지 넓은 의미 영역을 지니게 된다. 츠다카와 미슈파트 혹은 정의(righteousness)와 공평(justice)이 다루어지는 주된 현장은 구약에서 ‘성문(城門)’이다. 성문은 이스라엘의 공동체생활의 중심지로서, 누군가의 덕행에 대한 공개적인 칭찬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잠 31:23),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며(왕하 7:1), 때로 우물이 존재하기도 했다(삼하 23:15). 그러나 성문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재판'이었다(룻 4:1이하 신 21:18~21; 22:13~21; 25:7). 성문에서 올바른 판결이 내려지지 않으면 사회 전체에 죄가 만연케 된다. 가령, 누군가가 자신의 가난한 처지로 인해 억울한 일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성문으로 나아가 성읍의 장로들이 앉은 곳에서 호소한다. 그의 이웃들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를 위해 옳고 그른 것을 증언해준다. 이렇게 행하는 것을 가리켜 츠다카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읍의 장로들은 이 호소를 듣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결하되, 이 가난한 사람을 억울케 한 사람들의 '외모'-그들의 권세, 부귀 혹은 인맥-나 그들이 몰래 가져다주는 뇌물에 현혹되지 않은 채 곧게 판결해야 한다. 이러한 판결이야말로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그 가난한 자의 억울함이 풀려질 때(伸寃), 그 사회는 미슈파트가 살아있는 사회, 츠다카와 미슈파트가 실행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뇌물과 불의로 인해 그 억울함이 풀려지지 않을 때, 억울한 사람들은 이제 그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외에는 달리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친히 그 부르짖음을 듣고 친히 미슈파트를 세우시며 불의를 징벌하고 책망하며 나아가 때로 그 성읍 전체를 진멸하신다. 소돔과 고모라가 겪은 일은 바로 그러한 부르짖음의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미슈파트와 츠다카의 준수 여부는 그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정면으로 드러난다.

구약의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표현은 고아, 과부, 이방인이다. 이들은 하나님 외에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은 이들의 보호자이시다(시 68:5; 140:12).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케 하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공의(미슈파트)가 세워지지 못한다(암 5:12,15). 이렇게 궁핍한 자가 억울케 되는 주된 원인은 뇌물이다(암 5:12). 성문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명히 밝히는 사람들-증인이든, 재판장이든, 혹은 억울함을 호소한 사람이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사 29:21; 암 5:10). 그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기를 애쓰는데(사 29:21), 이들은 ‘강포한 자’ 혹은 ‘경만한 자’로 불리며, 이들이 사라지게 될 때 ‘겸손한 자’와 ‘빈핍한 자’가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한다(사 29:19~20). 그래서 구약의 많은 본문들에서 미슈파트는 ‘자비’를 뜻하는 ‘헤세드’와 함께 쓰이곤 한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헤세드)와 공의(미슈파트)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호 12:6); "…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슥 7:9~10).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한 긍휼에 기반한 츠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단순히 구제사업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가난한 자들을 재물로 도와야할 때가 있지만(charity), 구약의 본문들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그들을 억압과 압박 속에서 건져내는 것,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다(시 146:6~9 사 1:16~17). 그런 점에서 츠다카와 미슈파트의 실행은 그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연관되어있음이 분명하다.

이스라엘의 왕의 기본적인 임무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츠다카와 미슈파트를 실행하는 것이었다(시 72:1~3). 왕이 츠다카와 미슈파트를 실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꺽”는 것이다(시 72:4,12~14; 그리고, 잠 31:8~9; 단4:27).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공(미슈파트)과 의(츠다카)로 다스렸다(삼하 8:15).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다윗의 후손에 대한 기대는 다름 아닌 츠다카와 미슈파트에 의한 통치에 대한 기대이다(사32:1; 9:7; 16:5; 렘 22:15-16; 23:5; 33:15). 그러므로 미슈파트와 츠다카가 행해지지 않는다면 다윗 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의미하다(렘 22:30).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과 육정에 관한 것이 아니며,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찾아와 오실 메시야가 당신인지를 물어보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참으로 적절하다(마 11:2~5). 그는 자신이 다윗의 후손임을 내세우시지 않고, 메시야가 오시면 일어나는 일을 실제로 보여주신다. 이것은 사 35:5~6의 성취이며,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사 11장에서 이새의 뿌리에서 난 자가 이룰 세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예수의 메시야되심은 그로 말미암은 평화의 세상이 증거 하는데,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의와 공평의 통치에서 비롯된다(사 9:6~7; 11:1~5). 즉, "다윗의 가지"가 지니는 실질적인 의미는 ‘츠다카와 미슈파트’에 기반한 평화의 세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착각을 고발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츠다카와 미슈파트’이지만, 이스라엘은 예배와 제사를 응답의 열매로 여겼고, 예언자들에게 그러한 제사는 헛것이었으며 백성을 미혹하는 우상숭배와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예레미야는 우상숭배가 무익하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렘 2:11), 이웃들 사이에 공의(미슈파트)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삶이 없는 채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동일하게 무익하다고 선언하면서(7:5~6), 성전에 예배하러 온 이들을 향해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는 “무익한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선포한다(렘 7:4,8). 주의 거룩한 산에 거할 자는 공의를 행하는 자이다(시 15:2). 이러한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은 채 드려진 모든 예배는 하나님 보시기에 역겨운 것이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이요…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1~15). 아모스의 선포는 여호와를 찾는 것이 성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암 5:4~5) 성문으로 나가서 그 곳에서 공의를 세우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암5:14~15; 그리고 미 6:6~8).

그러므로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의 존재의 의미는 제사하는 백성이 아니라 츠다카와 미슈파트,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삶을 살 때,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만민이 하나님께로 나아오며 그 복을 함께 누리게 된다. 이 어구가 특히 이사야서에서 "신실한"(hnman) 혹은 이 단어의 변화형과 함께 나타난다는 점은(사 1:21,26-27; 11:4-5; 16:5; 28:16-17; 33:5-6) 이 어구가 단순한 사회정의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H.G.M. Williamson, Isaiah 1-5 (ICC; London: T & T Clark, 2006), 135.]

사실 사회정의 혹은 사회윤리라는 말은 츠다카와 미슈파트가 하나님백성의 삶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명령이라는 점을 흐리게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적 삶이 있고, 마치 츠다카와 미슈파트는 그것에 별도로 부가되는 또 다른 윤리처럼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 관한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전부는 예배나 제사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츠다카와 미슈파트이다. 이것이 단순히 자선사업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구조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선교부 혹은 봉사부 혹은 구제 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자선사업은 츠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삶의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주위에서 츠다카와 미슈파트가 행해져서 억울한 사람이 없고 억울한 눈물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사방에 가득한데도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아마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자선과 구제의 부족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단적으로 가난 때문에 전세값을 감당할 수 없어 수도 없이 변두리로 변두리로 이사해야 하고 그 자녀들은 먼 곳에서 통학하든지 전학해야 하며, 가난 때문에 사교육을 시킬 수 없어, 좋은 대학에 못 가서 가난이 대물림되고 가난한 이웃들의 고달픈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하고 눈물나게 하는 사회는 츠다카 미슈파트와는 거리가 먼 세상이다. 가난을 대물림하게 하고 부모의 가난이 자식 세대의 앞날까지 어둡게 만드는 현실에서 그들을 향한 자선사업은 츠다카와 미슈파트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채,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불의한 체제를 더욱 공고하게 하지는 않을까? 구약의 정신을 따라 츠다카와 미슈파트를 행하는 삶은 그런 점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 안에서 사교육에 대한 거부로, 부동산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풍조에 대한 결연한 거부로 이어져야하지 않을까?

츠다카와 미슈파트, 정의와 공평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 백성의 사회윤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백성을 부르신 목적이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암 5:24).

김근주 교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