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받은 자의 헌신(수1:12-18)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을 정복할 때 지도자인 여호수아만 생각합니다. 여호수아 한 사람의 믿음과 용맹으로 가나안땅에 정복되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도자 여호수아 한 사람으로 가나안땅이 정복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뒤에서 여호수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리더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팔로우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시대나 고대에나 지도자 한 사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지도자를 잘 따르고 도와주는 자들이 있어야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지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싸움을 할 때 제일 선봉대에 선 지파들이었습니다. 이 세지파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나안 정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세 지파는 하나님 앞에서 칭찬을 받을 만한 지파가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이 세지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원래 가축이 많은 부자 지파였습니다. 이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 가축을 먹일만한 비옥한 땅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가축이 많으니 이 땅을 우리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힘들게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정복전쟁에 참가하지 않겠다” 고 합니다.
이때 모세가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이 지파들은 부자고 힘이 있는 지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십시오” 라고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들의 말을 들어주면 이스라엘공동체에 큰 위화감이 생깁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현상이 생깁니다.
또한 이 지파들이 싸우지 않으면 다른 지파들도 힘들게 요단강을 건너서 정복전쟁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지파에 대해서 모세가 크게 분노합니다.
민32장 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고 합니다.
/어느 정도 분노하였는가 하면 이 세 지파를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않은 열정탐꾼에 비유합니다. 그 열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 때문에 이스라엘백성들이 40년 동안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이 세지파가 그들만 좋은 땅을 차지하고, 힘든 싸움을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면 열 정탐꾼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처럼 세지파와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민32장: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이렇게 모세가 말을 하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 요단 동편에 우리 유아들과 가축을 위한 집을 짓고 난 다음에 우리는 처자들을 거기에 두고, 남자들만 요단을 건너겠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봉에 서서 가나안땅이 정복될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이 정복되면 우리가 그 땅을 하나도 가지지 않고, 다시 요당동편으로 우리 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과 모세와 모든 백성들 앞에서 맹세를 합니다( 신32:31). 그리고 모세도 그들이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 후 수1:1에 보면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요단을 건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자손에게 약속한 땅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수아가 들어가려는 가나안땅은 이스라엘백성들을 환영하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싸워서 가져야할 땅이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전혀 두려움이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을 초인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도 이런 상황 속에서 전혀 떨지 않고 담대한 모습으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극히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지도자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지도자가 두려움이 없다면 그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도자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 두려움을 맞설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준 것이 하나님만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준 세지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였습니다.
이들은 원래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던 지파들이었는데, 모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백성을 위해 헌신하기로 약속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세 지파에게 약속대로 너희들이 가나안땅의 선봉대가 되라고 합니다.
그때 세지파가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수1:16-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수1:16.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이 세 지파는 여호수아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것을 다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격려를 해줍니다.
-이 세 지파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진 자들, 혹은 기득권층, 또는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요단강 동편에 비옥한 땅에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들이 거할 집도 있었습니다.
민32장 이후에 시간도 흘렀고, 모세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모세가 아닌 새로운 젊은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이 세 지파는 그들이 약속한 것을 무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이들은 힘이 있는 지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이스라엘공동체를 무시하고 힘으로 그들의 기득권을 주장했다면 아무도 말릴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또 가나안땅에서 싸움을 할 때 다른 지파들은 가족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지파들은 가나안땅을 정복하는 7년 동안 가족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힘든 싸움을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 지파들은 항상 전쟁의 선봉에 서 있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다른 지파보다 큰 위험과 두려움을 감수했어야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 지파들은 그들이 한 약속을 끝까지 잘 지켰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보면 가나안땅을 정복사역을 완수한 후 여호수아는 이들 세 지파에게 축복을 합니다. -6).
--이와 같이 가나안땅이 정복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데는 단순히 여호수아라고 하는 지도자 한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배후에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헌신하는데 앞장섰던 세지파가 있었습니다.
이 세지파의 헌신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이 가나안땅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새 해를 시작하면서 이 세지파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우리는 무엇보다 이 세지파의 순종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1,2).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이 끝난 후 세 지파를 불러서 그들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이 말씀에 보면 이 세 지파는 모세가 있을 때도 모세가 명령한 것을 그들이 다 지켜서 행했습니다. 또 이렇게 모세의 말에 잘 순종했던 세 지파는 모세의 말만 아니라 그 뒤에 여호수아의 모든 말도 순종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 돌아가신 고 김석균장로님이 생각이 납니다. 그분은 원로목사님을 모실 때 목사님말씀에 절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사람이 그 뒤를 이었을 때도 성경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 순종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지파의 순종은 전적인 것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은 순종하고 하기 싫은 것은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말씀이라도 순종했습니다. 심지어 모세가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도 잘 받아들여 회개하고 돌이켜 순종했습니다.
-또 누가 말씀하던 하나님의 말씀이면 다 순종했습니다. 모세냐 여호수아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올해 신년을 맞아 이 세지파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세를 배우기를 바랍니다.
/또 이 세 지파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지도자의 말에 순종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제가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면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라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올해는 새롭게 개편될 구역소그룹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교회에 초대교회와 같이 예배만 아니라 소그룹으로 모여서 함께 교제하고, 또 함께 기도하고, 또 함께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말로 듣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어느 해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2. 둘째 세지파의 책임감입니다(3).
먼저 이 세 지파는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책임감을 잘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가나안땅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의 유아들과 가축들과 부녀들이 거할 집들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나갈 때 그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안전한 곳에 거하게 하고 남자들만 전쟁에 나갔습니다.
/예전에는 무조건 우선권이 가정이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저희 부모님들도 가정과 자녀보다는 교회를 더 우선시했습니다. 교회만큼 가정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정도 작은 교회고, 교회는 큰 가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지파들처럼 먼저 가정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다해야합니다. 더욱이 자녀들이 어릴 때는 자녀에 대한 돌봄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어린 자녀를 잘 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지파가 단순히 자녀들에 대한 책임만 다하고, 이스라엘교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이것도 잘못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가정에 대한 핑계로 더 이상 가나안의 정복전쟁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였을 때 모세는 그들을 열 정탐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모세의 말을 들으면 아주 불쾌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 지파는 즉각적으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먼저 가정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을 다하고 난 다음에 이제는 이스라엘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헌신의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수22장 3“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정복전쟁 7년동안) 너희가 너희 (이스라엘 공동체)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이스라엘공동체에 대한)책임을 지키도다”
여기서 오늘까지 오래도록이란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질 때 까지 7년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가족들과 완전히 떨어졌습니다. 대신에 7년 동안 이스라엘 형제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가정만 아니라 이스라엘교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한 세 지파에게 여호수아는 이렇게 축복을 합니다.
“수22:7--여호수아가 그들을(세지파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8.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하나님백성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내 가정, 직업에 관한 일을 끝까지 책임을 지는데, 하나님백성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은 소홀한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이 한해 동안 내 가정만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여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셋째는 이 세 지파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란 고귀한 이들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하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노블리스-고귀한 자/오블리제-책임과 의무).
이 말의 유래는 귀족사회인 유럽에서 귀족계급이 평민들로부터 존경받고 명예를 유지하려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먼저 나가 싸우고 사회에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정신입니다.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했을 때는 귀족들이 평민보다 더 헌신하고 희생했을 때라고 합니다. 그러했던 로마가 귀족들이 그들이 감당해야할 헌신과 책임보다 누려야 될 권리만을 주장하게 되었을 때 멸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이 아직까지 세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 많이 가진 부자들이 더 많이 기부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 제일 필요한 정신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입니다.
더 고귀한 신분에 있는 자들이 더 헌신하고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세지파가 보여준 모습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누가 과연 고귀한 자(즉 노블리스)인가 라고 할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희생하고 헌신해야할 고귀한 자들이 대통령이고, 사회지도층이고, 또 부자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고귀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오늘날의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고귀한 자(노블리스)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이 세상에서 고귀하고 존귀한 자들(노블리스)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존귀한 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고귀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고귀한 자들인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까? 잘못된 비판도 있지만 우리가 들어야할 소리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왜 우리를 비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고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누려야할 권리만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손해 보지 않는 자들, 희생하지 않는 자들, 자기 것만 주장하고 챙기는 자들이라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칼럼을 본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살길은 “예수 믿고 손해보기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자신들이 누려야할 권리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제일 이기적 집단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살 길은 예수 믿고 손해 보기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제일 필요하다고 봅니다.
만일 우리가 민수기32장에 나오는 세 지파들처럼 우리가 누려야할 안락한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지파들처럼 앞선 자들이 먼저 헌신하고 희생해야합니다. 만일 앞선 자들이 교회 안에서 누려야할 권리들만 생각한다면 이 교회는 결코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또 아무도 앞장서서 헌신하려 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모든 것을 다 감당하라고 하면 결코 이 교회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또 지도자가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따라주고 순종해주는 사람들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이 세지파의 헌신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만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100년 전쟁을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영국군이 프랑스를 침공하여 함락시키려 할 때 칼레의 시민들이 완강하게 11개월간 저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립과 물자차단이라는 방법을 써서 칼레시가 함락을 당합니다.
그때 영국의 왕이 칼레 시민의 저항에 대한 죄 값을 묻고자 칼레 시민가운데 6명을 뽑아 교수형을 시키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칼레 시민 전체를 학살하겠다고 포고령을 내립니다. 이때 그 소식을 들었던 칼레 시민들은 대체 누가 죽으려고 자처 하겠는가? 혹 자신이나 가족들이 그 6명의 희생자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때 “내가 그 6명 중의 한 사람이 되겠소”라고 조용히 일어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칼레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이었습니다. 굳이 희생하러 나오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음 날 아침 교수대로 향합니다. 그러나 처형되려는 순간 영국의 왕비가 간청을 해서 영국왕은 이들을 살펴줍니다.
그 후 500년이 흐른 후 이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조작가를 선정합니다.
그 조작가가 생각하는 사람들을 조각한 로댕이라는 사람입니다.
6개월이 지난 후 로댕은 칼레의 6명의 시민상 모형을 만듭니다.
그때 그 모형을 본 사람들은 “우리의 영웅들은 이렇게 죄인처럼 초라하고 나약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며 비탄에 빠진 모습이 아니다”라고 비판을 합니다(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로댕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살아 있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림이 아닌 조각을 만들라고 내게 의뢰한 것이 아닙니까? 진정한 영웅이란 죽음 앞에서 고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절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절대 이 작품을 높은 곳에 두어 이들을 영웅시 하거나 우상화키시지 말 것을 로댕은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칼레의 시민상은 칼레의 거리 한 복판에 시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 있습니다. 저는 이 칼레의 시민상을 보면서 여호수아를 생각했습니다. 또 가나안 전쟁에서 제일 선봉에 섰던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들을 영웅으로 보지 말아야합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도 두려웠습니다. 또 세지파들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이들도 희생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고 자신들의 안락한 보금자리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서서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을 때,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헌신할고” 라고 했을 때, 칼레의 시민들처럼 “내가 그 6인 중의 한명이 되겠소” 라고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한 해 동안 내게 주신 가정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더 나아가 교회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올 한해 우리 앞에 놓인 두려움의 가나안 땅이 축복의 가나안 땅이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