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우리가 자랑하고 전해야할 복음(롬1:11-17)

금빛돌 2014. 10. 11. 22:48

이순신 장군과 기독교인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상 속에서 비춰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부끄럽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부끄러운 삶 때문에 복음에 대해서조차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민경설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의 지나친 점검은 복음전파의 장애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복음을 전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비로소 더 좋아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잘 살려고 하지 말고, 더 잘 믿으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변화가 됩니다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 삶을 보면서 부끄러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바울은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인이었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6) 그리고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부끄럽더라도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고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부족해도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해야합니까?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먼저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시면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예전에 금요구제예배시간에 참석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목사님 오늘 이 시간은 마치 내가 온 몸이 목욕을 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기쁨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수건을 가지고 눈물을 닥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금요예배가 모두에게 큰 위로와 은혜와 힘이 되는 줄 아십니까? 금요예배시간에는 절대 윤리적인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어떨 때는 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의 삶을 지적하고 싶은 생각이 너무나 많이 듭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도 하지 마십시오 라고 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곤고하고 지치고 약하신 그분들을 보면 이분들에게 오직 복음밖에 전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년 52주 거의 복음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시기까지 당신을 사랑비니다. 하나님은 절대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에 제일 존귀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에 소망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라는 복음의 말씀을 매주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장로님께서 기도하실 때마다 하나님이여 저들 마음가운데 이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지식이 매주 같은 말을 하면서도 날마다 새로운 말씀으로 듣기겠습니까? 이 세상에 그 어떤 사상이 이 세상에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삶의 용기를 주겠습니까?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은 지 20년이 되는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이 복음을 다시 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1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성도들)에게도 (다시)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을 오래 믿은 사람들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에게도 다시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까? 11절과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복음)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이 복음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무엇보다 그 복음을 받는 자들만 아니라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힘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에도 매주 새 가족 예배를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어떻게 몇 년 동안 매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도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를 매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 복음만이 우리의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이 복음만이 날마다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와 큰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설교자인 스펄전이 어떻게 해서 세계적인 설교자가 된 줄 아십니까? 어느 날 주일 아침 스펄전은 눈보라 때문에 옆길로 빠져 어떤 작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아무 보잘 것이 없는 설교자를 통해서 이런 설교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신 속에는 어떤 위안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라, 나는 큰 핏방울들을 흘리고 있다. 나를 보라, 나는 십자가에 달려 있다.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라, 하늘로 올라간 나를 보라, 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가련한 죄인들아, 나를 보라! 나를 보라!”는 복음의 메시지가 스펄전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하루 24시간 예수님 십자가를 생각하기를 하고 있습니다. 잠을 잘 때만 아니라 시간이 나면 하루 종일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는 온 교인들이 하루 종일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생각하면서 영성일기를 쓰게 한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해야합니까? 이 복음만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고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복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돈이 많으냐 적으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을 따지지 않습니다. 인종을 따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나름대로 다 어떤 조건을 요구합니다. 또 어떤 윤리적인 기준을 제시합니다. 적어도 이런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지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심어지 그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님 앞에 나와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를 믿기만 하면 그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십니다. 구원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자유인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어주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하고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복음에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직 복음에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는 의는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자 동시에 하나님은 무한한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만 되시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인 무한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높은 차원에서 의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몸으로 사람을 죽여야 살인죄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조차 살인죄로 보십니다. 우리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조차 간음죄로 보십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죄를 품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도무지 우리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는 절대 하나님의 높으신 의에 절대 미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못 미치는 의를 성경에서는 죄, 또는 불의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 지금도 하늘에서부터 진노하고 계십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지금도 이 세상가운데서 이런 하나님이 진노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그 높으신 의의 경지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그 어떤 인간의 의로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평생을 도를 딱아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떤 율법이나 도덕법을 가지고 지키려고 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또 내가 그 어떤 양심을 가지고 양심대로 살아가보려고 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의의 경지에 오르는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32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을 지킴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이것은 절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완전한 사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믿어주는 것이 자체가 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내 안에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또 내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온 몸이 시꺼먼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목욕을 해도 씻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희게 될 수 있습니까? 흰옷을 입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천국에 가 있는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흰 옷을 입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의로우신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절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정하시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의지해서 이제 높고 의로우신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만이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의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10:19)”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의로서는 절대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 의를 의지해서 날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의 삶이 부끄럽다 할지라도 절대 예수님의 복음만은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자랑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과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51절에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그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알지 못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떤 부모가 세상의 것에 중독이 된 아이를 두고 어떤 목사님께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왜 우리가 아이가 이렇게 세상의 쾌락에 중독이 된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타이르고 겁을 주어도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목사님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 안에 있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기쁨 때문에 세상의 쾌락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 때문에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4)또 십자가의 복음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미치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박영돈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자는 복음의 놀라운 사실에 미쳐야 제대로 산다. 이 복음의 진리에 미치지 않으니 세상에 미친 목사와 교인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제가 안식월 때 제일 많이 묵상했던 말씀이 고린도후서 513절과 14절의 말씀입니다.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지금 사도바울은 어디에 누구를 위하여 미쳤다고 합니까? 세상의 명예가 아닙니다. 세상의 쾌락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향하여 미쳤다고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향하여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사도바울을 완전히 강권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권이란 압도하다 사로잡다 통제하다 꼼짝 못하게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미치는 것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미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에게 미치지 않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미치지 않고 자신의 종교생활, 교회생활에 미쳐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광신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광신도는 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온전히 미쳐야합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미쳐야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람을 온전한 정신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 미치고 교회 생활에 미친 사람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온전히 하나님에게 미친 사람들은 절대 그 사람들을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이라고 한다면 절대 성도들을 단순히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에게 미친 사람은 교회 가운데 미미하게 보이는 한 성도라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미친 사람은 약하게 보이는 한 성도라도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미쳐서 사람들을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나를 사로잡으시고 꼼작 못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을 날마다 맛보시고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복음만이 나를 하나님에게 미치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자랑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또 이 복음만 우리의 모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능한 길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우리 속에 있으면, 그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면, 우리가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도 다 사랑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8:4).

--그래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자랑하는 성도님들이 되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바울은 단순히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적극적으로 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복음을 전해야할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복음을 전해야할 자들)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 말은 하나님께 빚진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복음을 전해야할 자들에게 빚진 자라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왜 그가 복음을 전해야할 자들에게 빚진자라고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위해서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아니었으면 그의 구원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해야하는 이방인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은 것은 이방인들 너희들 때문이다--이방인인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은 것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해야하는 이방인들에게 빚진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나만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 아무리 열심히 잘 살았다 해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온전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도 보면 모든 사람이 복음을 전했지만 특별히 훈련된 복음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요즘 교회들을 보면 아무리 큰 교회라도 실제적으로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여러분 절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치 링 위에 세워놓고, 밑에서 말로만 당신만이 복음을 전하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 보면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고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몇 사람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서로 같이 복음전도를 위해서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위해서 협력할 수 있습니까?

1)태신자를 작정하셔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함으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2)기도로 협력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은 절대 혼자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협력자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것도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물질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17절에 빌립보교인들이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았지만 물질로 협력한 것에 대해서 그들이 다 바울과 함께 복음전하는 일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4)또 봉사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교구별로 동네 청소봉사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서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